며칠 몸살을 앓고 나니 입맛이 까칠하다. 입맛 없는 데는 병아리 궁둥이만 따라다녀도 낫다 하여 명절에 시골에서 가져온 주먹만 한 동치미 무를 한 개 꺼냈다. 절반 뚝 잘라 나박나박 썰어 말간 유리그릇에 담고 칼칼한 동치미 국물을 한 국자 떠 담았더니 갑자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며 식욕이 돌았다. 깔깔한 입안에 동치미 국물 한 수저를 떠 넣었으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맛이 아니다. 이상스레 항아리를 떠나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겨우내 층층이 쌓인 두꺼운 얼음 아래 삭여낸 슴슴한 깊은 맛이 플라스틱 통에 옮겨 담으면 본래의 맛이 감해진다. 어디 동치미 맛뿐이랴.
질박한 옹기 항아리는 돌담 아래 있어도 정겹고, 아파트 베란다 구성진 곳으로 밀려나 있어도 초라하지 않다. 이 땅 어느 곳에 뿌리를 내려도 그곳이 제 집인 양 그 주변과 어울러더울러 살아가는 들꽃처럼, 날렵하지 않은 평퍼짐한 곡선이 여덟 폭 넉넉한 한복의 치마 선을 닮은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하늘을 향해 헤벌심 입을 벌리고 있는 그 큰 품, 플라스틱 뚜껑처럼 꼭 맞지 않아도 되는 헐렁한 틈, 시골집 담 너머로 도란도란 피어나는 이웃의 인심마냥 뚜껑 하나를 가지고도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끌어안은 너그러움이 항아리의 미(美)다.
엄마의 장독대에는 아름드리 항아리가 가득했다. 고대인이 태양을 온 마음으로 숭배하듯 엄마는 하늘보다 가까이 있는 장독 신을 섬겼는지 가장 큰 옹기 위에는 가지런하게 잘린 마른 짚과 정갈한 정화수 한 사발이 아침마다 놓여 있었다. 정화수는 별빛이 잠시 들러 갔는지, 아침이슬을 똑똑 따서 담았는지 지상의 물이 아닌 것인 양 맑았다. 엄마는 바람도 한숨 쉬었다 가는 높다란 돌담 아래 장독대에서 새벽마다 무엇을 빌었을까. 인디언 추장처럼 하늘과 바람과 빛의 정녕들이 이 신성한 공간에 잘 스며들기를 기원했을까. 어쩌면 자식에게 내뱉을 말들을 삼켜 모았다가 새벽녘 기도로 뱉어냈는지 모른다. 지금은, 우르르 끊어 넘치는 냄비처럼 솟구치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뾰족한 말들을 토해내고 마는 부족한 딸을 위해 아직도 장독대에서 정화수 그릇을 치우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자식농사만큼이나 장독 농사에 집착했다. 어쩌면 옹기에서 매미의 허물과같은 자신의 허망한 인생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헛헛한 자신의 마음을 채우듯 빈 항아리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헛헛한 자신의 마음을 채우듯 빈 항아리를 보면 그 안을 채우는 일에 그렇듯 갈급했으리라. 옹기가 숨을 쉬며 부패를 발효로 승화시키듯 엄마도 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일이 자신의 아픔을 나눠 담아 숨통을 틔우게 하는 자신만의 방편이었는지 모른다.
장독대 안의 갖가지 장은 엄마 인생의 맛이기도 했다. 육 남매를 키워낸 쪼그라든 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야들야들한 청포묵처럼 팽팽하게 젊건만, 수분이 빠져나간 주름진 거죽은 소금에 절여진 쭈글한 짠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철없는 자식들이 쏘아붙인 아픈 말들이 농익은 선홍색 고추장이 되어 매운맛을 단맛으로 삭혀내고 있기도 하고, 엇나간 자식의 귀갓길을 마중하느라 담벼락 아래를 서성이며 눈에 함빡 가두어 둔 눈물이 흘러 독 안의 검푸른 간장이 되기도 했다. 속으로 삭여낸 수많은 사연이 곰삭아 꼬랑한 된장으로 몇 계절을 장독대에서 보냈다. 된장에선 사철 바람의 냄새가 흩날렸다. 봄날의 비릿한 흙냄새와 여름날 엄마의 송진 같은 땀내와 어느 가을 뒤꼍에서 익어가는 반시의 떫은 단내, 아궁이에서 몰캉하게 물러지는 겨울밤의 고구마 냄새가 오롯이 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엄마의 장 담그는 일은 내가 결혼을 한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시골에 갈 때마다 그동안 쌓인 묵은 얘기 대신 플라스틱 통에 된장을 다독거리며 가득 담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된장이 제 그릇을 떠나면 맛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된장을 거부하는 일이 마치 엄마의 하소연을 매몰차게 잘라내는 일 같아 주는 대로 덥석 받아오곤 했다.
어릴 적, 빈 항아리에 밴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 찰랑거리는 말간 물을 가득 담아 놓는 날이면 나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았다. 항아리에 턱을 괴고 그 안의 작은 하늘을 보았다. 그 안은 필름 없는 영사기였다. 고요한 수면을 후, 불면 잔잔한 물결이 일고 그 위로 구름이 출렁이며 흘러가다 잠시 항아리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는지 멈춰 서기도 하고 입김을 둥그렇게 불면 물결이 한 바퀴 빙 돌기도 했다. 나는 구름이 만드는 영화를 눈이 아른아른할 때까지 보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물 가운데를 건드리면 점점 커져가는 동심원은 나에게 아련한 꿈을 꾸게 했다. 구름에 싫증이 나면 장독대 평 화단에서 꽃잎이나 그 이파리를 따다가 배를 띄웠다. 물속에 비친 내 얼굴 위로 동동 떠가는 배를 한참 쳐다보노라면 내가 배를 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럴 때 말간 하늘 한 번 쳐다보면 속이 더부룩한 날 동치미 국물 한 사발에 속이 착 가라앉는 것처럼 울렁증이 가라앉았다.
항아리의 텅 빈 울림은 내 안의 울림이었다. 텅 빈 집의 고요함이 싫은 날, 벽돌 몇 장을 쌓고 그 위에 올라서서 빨려들 듯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 항아리는 내 몸에 딱 맞는 요람이었다. 그 안에서 내다보는 하늘은 내가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 있는 하늘이었다. 간간이 떠가는 구름과 하늘을 맴도는 솔개 한 마리, 키 큰 감나무의 한쪽 가지, 항아리 입구로 들어 온 세상은 작았다. 또 다른 하늘을 보기 위해 나는 자리를 바꿔가며 앉아야만 했다.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 동안 백 미터 달리기를 한 후처럼 맥박이 빨라졌다. 혹시나 아이들을 항아리 안에 가둬 키운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스쳤기 때문이다. 항아리 안에 가둬두고 아이들이 원하는 하늘이 아니라 방향까지 바꿔가며 내가 원하는 하늘을 아이들이 함께 보기를 무심결에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덮쳐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항아리만 한 엄마 이기라도 한 걸까. 항아리는 그 큰 입을 벌리고 내가 내지르는 소리를 그대로 다 받아먹고서 더 좋은 울림으로 답해주는데.
빈 항아리에 고개를 박고 소리를 지르면 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보다 울림이 좋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 목소리가 궁금하면 항아리 속에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항아리는 내 작은 목소리보다 큰 소리를 들려주었다. 메아리를 만들지 못했던 내 아픔을 항아리는 그 넓은 품으로 보듬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답했을까.
최근 아이를 외국으로 떠나보냈다는 지인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내 아이를 보낼 수 있을까 자문자답해 보면 ‘글세'다. 능력의 부족도 이유겠지만 아이가 탱자가 될까 봐 우선 내가 겁이 났다. 아이도 넌지시 물어온다.
“엄마, 엄마는 내가 외국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면 보내줄 거야?”
나는 귤화위지(橘化爲枳)란 고사 성어를 들려주며,
“네가 탱자가 될까 봐 못 보낼 것 같아.”
“내가 한라봉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잖아.”
그래. 왜 한라봉이 되기란 상상은 못해봤을까. 더덕은 자리를 옮겨 심어야 뿌리가 여물어지고, 화분 안의 나무도 뿌리의 성장에 맞추어 분갈이를 해야 나무를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법인데 나는 단지 안에 아이를 가둬 키우려는 시대에 뒤떨어진 엄마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토기에 빗살무늬를 새겨 넣는 원시인에 지나지 않나 보다. 신석기인이 토기에 빗살무늬를 새겼던 것은 열처리의 미숙함으로 인한 그릇의 깨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나 역시 홀로는 맨몸으로 설 자신이 없어 아들을 옆에 두고 내 삶의 무늬를 넣어 나를 지탱해 주는 빗살무늬로 살게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의 중력에 갇혀 궤적을 맴도는 달로 언제까지나 내 주위를 맴돌기를 바라면서.
내가 나의 생각 안에 갇혀 있을 때, 앎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 못하고 머물러 있을 때, 옹기 안의 재래 된장에 집착하고 있을 때, 아이는 나보다 훨씬 너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아이의 세대 차이인가 보다. 내가 옹기를 쓰다듬으면서 갇힌 세상 속의 먼 기억과 소통하고 있는 동안 아이는 내 시선 너머의 세상을 깜빡이는 커서를 따라 넘나들고 있었다. 새로운 것이 부담이 되어 옛것을 통해 새것을 찾고자 하는 나와 늘 새로운 것 속에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중학생 아이 세대의 가치관 차이가 옹기와 컴퓨터만큼이나 크다. 어쩌면 옹기에 대한 나의 집착이 이유 있는 애착이라면 아이의 컴퓨터에 대한 유애(有愛)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허이영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