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종덩굴
대동문화201201[한송주의 산사에서 띄우는 엽서]
새해 덕담 공양합니다
저도 이맘 때가 되면 연하장을 준비한답니다. 정든 벗님네 몇 분에게 새해 덕담을 건네지요.
올해는 무슨 말로 인사할까 궁리하다가 마침 불서를 뒤적이던 중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아냈네요.
근대 일본의 선승인 소오엔(宗演 1859~1919)스님은 신년이 다가오면 ‘나는 묵은 해를 보내리니 그대는 새해를 맞이하소서’ 하고 지인들에게 축원을 했답니다. 참 멋지죠?
그래서 저도 그 스님을 본 따 임진년(壬辰年) 새해에는 ‘가는 토끼는 제가 배웅할 테니 님은 오는 용을 마중하소서’ 라고 신년덕담을 하기로 했어요. 저는 양력 연말연시는 좀 성급한 듯해서 간지(干支)가 갈리는 음력 연말에 맞춰 인사를 해왔으니 이제부터 연하장을 준비하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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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도 새해를 맞아 풍성한 덕담이 오고 갑니다. 신년법문을 베풀고 통알(通謁)이라는 세배의식을 치르며 떡국도 나눠먹지요.
불가에서 신년덕담으로 많이 쓰이는 게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선방에서 공부할 때 드는 공안(公案)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연이 얽혀 있지요.
어느 보름날 운문선사(雲門文偃)가 대중에게 말했답니다.
“여러분에게 지난 보름간의 일은 묻지 않을 테니 다가올 보름간의 일을 한마디씩 일러 보세요.”
사람들이 아무 말이 없자 스님은 “연년시호년(年年是好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랍니다” 하고 스스로 답하고는 쪼르르 조실 방으로 들어가 버렸대요.
괴짜 스님네들 하는 짓이라 도통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고, 여하튼 해마다 좋고 날마다 좋으라 했으니 덕담치고는 그보다 더한 게 없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이 ‘日日是好日’ 화두가 그저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하고 기원하는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고 하네요. 더 깊은 뜻이 있대나 봐요. 날마다 좋은 일만 있으면 누구나 좋겠지요. 그러나 인생사 어디 그리 되던가요. 하루에도 열 두 번 개었다 흐렸다 하지요. 그러니까 이 화두는 갠 날도 좋은 날이고 흐린 날도 좋은 날이니, 순경계 역경계에 흔들리지 말고 늘 평상심을 지키며 안심입명(安心立命)해라 하는 가르침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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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라고 호들갑 떨지 말고 평상심을 지키라는 경책은 근세 선지식 학명선사(鶴鳴啓宗 1867~1929)가 앙칼지게 했어요. 해 바뀌는 핑계로 어엿븐 중생들이 없는 새 마음도 내보며 좀 놀아보겠다는데 그 꼴을 못 보고 심술을 부린 고약한 노장이지요.
妄道始終分兩頭 冬經春到似年流
試看長天何二相 浮生自作夢中遊
묵은 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 속에 사네
<선문염송(禪門拈頌)>이나 <벽암록(碧巖錄)> 등 선서에 보면 ‘경청신년(鏡淸新年)’이란 공안이 나옵니다. 이 또한 새해와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법담이지요.
경청선사(鏡淸道怤 864-917)께 어떤 스님이 물었다.
"새해에 불법이 있어요, 없어요?(新年頭還有佛法也無)"
"있답니다(有)."
"무엇이 새해의 불법인데요(如何是新年頭佛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元正啓祚)."
"가르쳐 주셔서 고맙수다(謝師答話)."
"어머, 내가 오늘 실수했구나(鏡淸今日失利).“
또 명교선사(明敎師觀 1143-1217)께 어떤 스님이 물었다.
"새해 불법이 있나, 없나?"
"없대요(無)."
"해마다 좋은 해이고 날마다 좋은 날인데(年年是好年 日日是好日) 왜 없어?"
"장서방이 술 마시고 이서방이 취하네(張公喫酒 李公醉)."
"노장이 용두사미로군(老老大大 龍頭蛇尾)."
"아하, 내가 오늘 실수했구나(明敎今日失利)."
이에 대해 심문선사(心聞曇賁)가 읊었어요.
칠보 보배잔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금화지에 청평사(이태백의 시)를 쓴다
봄바람만 잔잔히 부는 정자에서
임금은 한가하게 옥피리 부네
七寶盃酌葡萄酒 金華紙寫淸平詞
春風靜院無人見 閑把君王玉笛吹
이에 대해 또 우리나라 성철선사(退翁性澈 1912~1993)가 이렇게 말을 붙였답니다.
‘부자는 천 명 식구도 적다고 싫어하고 가난한 사람은 한 몸도 많다고 한탄하느니라(富嫌千口少 貧恨一身多).’
스님네들 말 장난 참 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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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충동에 대만 스님들이 모여 사는 불광산사(佛光山寺)가 있어요.
이 절에서는 연초에 대만의 큰스님 성운대사(星雲大師)의 신년법어를 액자로 만들어 나누어 줘요.
지난해 법어는 이랬어요.
咸德福海 (복덕이 충만하세요)
心懷善念, 日日是好日 (착한 마음을 가지면 나날이 좋은 날이요)
里隣和睦, 處處是淨土 (이웃과 화목하면 곳곳이 정토이리라)
송광사 2세 법주인 진각(眞覺國師) 혜심(慧諶)스님의 원단(元旦) 법어도 들을만 해요.
‘오늘 아침에는 여러분을 위해 시절인연을 들어 말하겠다. 젊은이는 한 살을 늘고 늙은이는 한 살이 줄며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이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늘거나 줄거나 늘지도 줄지도 않는 인연들은 죄다 한 쪽에 치워라. 그리고 말해보라, 세월을 잡아놓은 뒤는 어떠한가.
누가 이 세상에 신선이 없다고 하던가. 부디 항아리 속에 딴 천지가 있음을 믿으라.
미래는 오지 않고 과거는 가지 않으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으니 삼세(三世)가 아예 없다.
새해에 여러분께 불법을 전하노니, 온 누리에 풍류가 호연하다. 묵은 재액은 끓는 물에 눈 녹듯 사라지고 하늘에 오르는 해처럼 신령한 광명이 두루 비추시라.
부디 동이를 엎지 마라.’
효봉선사(曉峰禪師)의 새해덕담을 들으며 이달 넘어가기로 할게요.
본사 석가모니불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이를 보이셨고 가섭존자는 미소로써 이에 화답하셨다.
대중 여러분! 오늘 새해 첫날 영산(靈山)의 세존염화(世尊拈花)를 어느 곳에 보는가.
또한 보조(普照)스님은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이나 범부에게 있어서 조금도 감하지 않는지라, 불조(佛祖)가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으니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길을 가르침이라.
중생을 외면하고 어찌 성불을 바라리오.
대중아, 금년은 중생을 사는 해로 하는 것이 어떠한고.
오늘 새해 첫날에 고곡일편(古曲一片)으로 대중을
하축(賀祝)한다.
한송주 <「월간 송광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