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하면 바뀌게 되고 바뀌면 통하게 되고 통하면 오래갈 수 있다(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주역 계사전 >
"궁하면 아플 것이고, 바뀌면 아플 것이고, 아프면 오래갈 수 있다. (궁즉통·窮則痛, 변즉통·變則痛, 통즉구·痛則久)
<정온 개사전>
신이시여 나를 죽이시려거든 기꺼이 데려가시고 살리시려거든 모든 기억을 지워주소서! 이 차갑고 끈적이는핏빛기억으로 부터 나를 끌어내 주소서!
폭우가 오기 전 밤이다. 고승께서 인생 똑바로 살라고 죽비로 때리는듯한 비가 내린다. 빗물이 땅을 후벼 파는 거친 밤이다. 그 어느 누구도 처음 맞는 기이한 아침이 올 것 같다. 돌아보면 마흔세 살의 해가 죽음의 계곡이었다. 고고학자가 헤매던 해골로 가득 쌓인 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삶의 모든 값을 다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내 인생은 그때부터 불행이 샴쌍둥이처럼 따라다녔다. 심장만은 안된다고 빌었는데 신이 집달리를 시켜 심장부터 딱지를 붙였다.
그 후 10년, 내리막길을 달렸다. 지하 갱도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열심히 살면 될 것처럼 말했는데 다 사기였다. 기억의 고통을 다 지우고 싶다. 누군가가 기억을 지워주기만 한다면 전재산을 다 주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빈 몸으로 벤치 위에서 길고양이랑 자면서도 다시 일어날 자신이 있다. 한때 사랑했던 모든 기억들이 부잣집 담 위에 꽂은 유리조각처럼 혈관을 타고 돌아다닌다.
과거만 다 사라지면 화성에 혼자 버려져도 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날마다 새싹처럼 돋아나는 기억이 싫다. 기억은 뇌를 돌려 깎기 한다. 피 같은 땀을 흘리고 악몽 속을 헤매다 일어난다. 눈을 뜨는 순간 살아있음이 저주의 출발선이다. 머물러야 하는가? 떠나야 하는가?
공갈젖꼭지처럼 두려움을 입에 물고 있다. 오래전 폐업한 외딴섬 찾는 이 없는 찻집처럼 기이하고 썸뜩한 느낌의 건물처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피하는듯한 삶을 살고 있다. 잊고 싶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인 에프람, 알프람, 로라 이 아름다운 이름의 정신과약을 남편에게 매일 하사 받는다. 하루에 제정신으로 사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았다.
난 운이 나빠 살았다. 당신들은 운이 좋았다. 천천히 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누굴 위해 그토록 빠르게 달린 걸까? 지나온 지옥의 삼 년은 황태를 말리는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때렸다. 아무도 모른다. 불행의 각각 다
른이름이 얼마나 집요하고도 강렬한 것인지를 겪은 자만이 안다. 탁월한 재능과 혹독한 수련을 쌓은 자도 이 길을 넘지 못한다. 인류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고통의 고개를 눈물 없이 넘지 못했다.
이탈리아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성삼위 일체> 속으로 들어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싶다. 내 기억은 원거리 근거리를 무시한다. 제단아래 해골엔 "나도 한때 당신과 같았다. 당신도 지금의 내가 될 것이요"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어제와 오늘 십 년 전 28년 전이 헷갈린다. 오늘과 오늘도 구별 못한다. 그냥 시간을 초월해 토끼굴 속으로 빨려가는 <불행한 나라의 앨리스 >같다.
눈사람도 아닌데 자꾸 녹아내린다. 내가 자꾸만 무너져. 모래성도 아닌데 자꾸자꾸 흘러내려. 아이스크림도 아닌데 녹아내려. 자꾸자꾸 흘러내린다.
신이 있다면 멱살을 잡고 싶어. 왜 내 인생 이모양이냐고 세상의 모든 진리는 다 틀리고 이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미라를 만들기 전 쇠꼬챙이로 뇌를 빼듯이 꺼내서 주름주름사이 기억을 세탁하고 싶다. 삶은 하나의 허구의 사랑이었을까? 정말 존재했을까?
모든 걸 다 잃어도 나 자신을 잃지 말자가 내 신조인데 나부터 잃어버렸다. 사랑, 증오, 미움 모든 감정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싶다. 졸업하고 싶다. 고생했다고 감사패 받고 싶다.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날아다니고 싶다. 인생에서 제일 편한 요즘이 가장 힘들다. 삶의 아이러니이다. 책임질 부모도 자식도 다 잃고 슬플 일도 기쁠 일도 힘들일도 없다.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기를!! 제발 확인사살 그만하기를!! 무릎 꿇고 빌고 싶다. 당신들의 호기심이 날마다 나를 죽인다. 나만 잘살면 된다 그게 어렵다. 내 인생 최고의 난제이다. 죽음도 삶도 의미가 없다. 난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하나! 가시 투성이 복어 같은 남편과는 종이 다르다. 아마도 그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난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네안데르탈인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너무 다른 남편과 수십 년을 살았다. 불행은 거기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오늘 별을 보았어"란 말이 "U.F.O를 보았어"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별들이 빛을 잃었다. 별들이 사라지자 새들도 길을 잃고 빌딩에 부딪쳐 은혜 갚은 까치처럼 머리통이 깨져 죽었다. 거북도 바다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람도 별처럼 도시의 네온사인아래 희미하게 힘을 잃어간다. 난 내 별을 잃었다. 태양이 별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그렇게 난 태양을 잃어버렸다. 나만의 태양, 나만의 별이 사라졌다.
오래전 <노망>이라는 촌스럽고 민망한 이름으로 불렸던 단어가 세련된 <알츠하이머>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다시 나타났다. 여전히 밉상인 질병에 걸리신듯하다. 치매오기직전인 어르신께서는 주식이라는 제로썸게임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게 전부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문맹이 많았던 그 시절에 금수저 집안에 명문학교를 나왔다. 상상 초월의 돈을 벌고도 모자라 점심 햄버거를 수십억에 기부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경매에 올렸다. 분명 치매( Dementia) 신의 내림받으셨다.
제정신으론 그런 짓 절대 못한다. "나처럼 해봐. 너도 그럼 부자 될 거야"라는 낯 뜨거운 말을 어찌 감히 생각이나 했을까? 어린 시절 도덕이란 과목을 배운 나로선 부끄러워서 말 못 한다. 부가 미덕처럼 변절된 세상에서 신념과 배려 겸손은 사라졌다. 악령의 힘을 빌어서라도 부자가 되고 나 기부할게 하는 순간 영웅이 된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한다. 점심값 47만 원에 술까지 얻어드신 유명한 그분께서도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돈을 받은 자는 반드시 돈 값을 해야 한다.
모든 걸 다 잃어도 나 자신을 잃지 말자가 내 신조인데 나부터 잃어버렸다. 사랑, 증오, 미움 모든 감정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싶다. 졸업하고 싶다. 고생했다고 감사패 받고 싶다.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날아다니고 싶다.
이제는 죽고 사라진 전두환의 손자가 마약으로 퍼포먼스를 한다. 이상한 체험을 한다. 유체이탈을 했다. 온갖 마약을 마구 삼키는 그의 심경을 난 100프로 공감한다. 영혼이 들락날락 거린다. 여기가 어딜까?라고 자꾸만 물어본다. 난 누구일까? 그리고 내가 여기온 이유는 뭘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내 억울함을 나도 그러면 마약을 삼키며 쇼라도 하고 싶다.
시뮬라크르, 시뮬라르 옹, 빨간약, 파란 약, 전생의 난 무엇을 골랐을까? 뒷간에 나타난다는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의 귀신 이야기 때문에 결정장애에 걸릴뻔했다. 그냥 살았다. 무조건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 적도 있다. 수없이 많은 날들을 맨밥에 물 말아서 마시면서 난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일명 식혜밥을 먹으면서 일만 했다. 매일 수십 번씩 성공할 거라 외쳤고 세상의 성공이 뭔지 모르지만 고점에서 끝없이 추락했다. 신이 준 잔악한 선물이었다. 다시는 받고 싶지 않은 저주의 램프가 켜졌다. 세상의 모든 기쁨은 나를 버린 자들의 전설일 뿐이다.
겨울바람에 눈알의 실핏줄이 터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 난 그냥 나도 그렇게 살면 된다고 믿고 살았을 뿐이다. 취미도 관심도 먹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성실하고 묵묵한 아버지의 광신도인 딸로 수십 년을 살았다. 아버지는 성실은 했지만 영리하거나 영악하지 않아서 언제나 느리고 답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사기를 당했다. 그 몫은 고스란히 가족들의 희생이었다.
어느 날 알았다. 난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내 글을 보아도 내 꼬락서니를 보아도 난 나다. 언제나 난 나다. 익다 못해 쪼그라든 마른 대추 같은 난 나다. 내 안에 단단하고 날카로운 씨를 품고 달달 한척하는 난 언제나 나다. 내가 변해 다른 세계로 가더라도 난 여전히 나일 것이다. 착한 척, 약은 척해도 어리숙하고 센 척, 강한척해도 약한 언제나 난 나다. 나일수밖에 없는 난 나다. 제발 그만 나이길 바라는 난 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난 오늘도 공부를 한다.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