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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토요토미 양자->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처조카
이장희 추천 0 조회 135 16.01.06 22: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군 사령관 겸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21세

 

                               => 행주대첩에서 패배

     토요토미의 양자   =>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참가 후 유폐됨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Ukita Hideie.jpg
오카야마 성에 소장되어 있는 초상화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 겐키 3년(1572년)
사망 메이레키 원년(1655년)
개명 하치로(八?), 이에우지(家氏), 히데이에(秀家), 규후쿠(久福)
별명 하시바 히데이에(羽柴秀家), 도요토미 히데이에(豊臣秀家), 비젠사이쇼(備前宰相)
시호 규후쿠(休復)
관위 종3위 지쥬(侍從), 산기(參議), 사콘에이곤쥬죠(左近衛權中將), 곤쥬나곤(權中納言)
주군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아내 마에다 고우(豪姬)
자녀 히데다카(秀高), 히데쓰구(秀繼) 등

 

우키타 히데이에 또는 우기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2년 ~ 1655년 12월 17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 석의 다이묘이다.

 -기비(吉備=빈고,빗추,비젠, 오카야마 현) 지역의 동쪽으로 57만 석빈고빗추비젠

 

1572년에 오카야마 성에서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1년에 나오이에가 병으로 죽자, 당시 우키타 씨가 종속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의 뜻에 의해

이듬해인 1582년에 영지를 보장받고 가독(家督)을 물려받게 된다.

 

가독을 물려받은 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주고쿠 원정을 맡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에 편입되어 빗츄다카마쓰 성 공략을 돕게 된다. 다만 아직 소년이었던 탓에 숙부인 우키타 타다이에(宇喜多忠家)가 대신하여 부대를 지휘했다.

 

노부나가 사후에도 도요토미의 총애를 받아 유시(猶子)의 연을 맺고,

1586년에는 히데요시의 양녀 고우히메(豪?,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를 정실로 맡는다.

 

어린 나이임에도 히데요시의 신임이 지극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등과 함께 고다이로에도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21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대장으로 참전하여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권율에 맞서 싸워 대패하였다.

더군다나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양자인만큼,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위하여 서군에 속하였으며, 전투초기 후쿠시마 마사노리등을 격파하며,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서군 내부의 배신으로 급속히 전세가 기울면서 패배하였고,

 

패배 후 달아나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에 숨는다.

그러나 시마즈 씨가 우키타 히데이에를 숨겨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인 다다쓰네에 의해 1603년이에야스에게 넘겨진다.

 

이후 시마즈 다다쓰네, 처남인 마에다 도시나가의 탄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구노산토죠구유폐되었다가 1606년하치조 섬으로 유배된다.

 

하치죠 섬에서는 처가인 마에다 씨 등의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높은 신분 출신에 맞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풍랑으로 인해 하치죠 섬에 잠시 상륙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마셨다는 일화나 하치조 섬의 대관(代官)에게 주먹밥을 얻어 먹었다는 일화 등, 궁핍하게 살았다는 설도 있다.

1655년 11월 20일83세로 죽었다.


[편집] 세키가하라 관련 일화

세키가하라 전투와 관련한 통설로는 미쓰나리나오에 가네쓰구와 밀약을 맺고 거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우키타 히데이에미쓰나리에 앞서 이에야스 타도를 기치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이 있다.

  • 음력 7월 1일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정식을 가졌던 점
  • 미쓰나리와 친밀했던 쓰가루 다메노부사다케 요시노부등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점
  •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문서가 전해지고 있는 점
  • 미쓰나리의 친우인 요시쓰구 역시 미쓰나리의 계획을 모른채 도쿠가와를 도우러 가는 도중 서군에 편입되었다는 점
  • 세키가하라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함께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믿을 수 없다며 창을 잡았다는 설등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인물됨

 

*우키타 나오이에(일본어: 宇喜多直家 (うきたなおいえ), 1529년 ~ 1582년 2월 1일)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비젠센고쿠 다이묘이다. 통칭은 사부로우에몬노조(右衛門尉)·이즈미노카미(和泉守)이고,

고다이로의 한 사람인 우키타 히데이에의 아버지이다.

 

 

생애[편집]

우라가미 가문 가신 시대[편집]

교로쿠 2년(1529년), 우키타 오키이에(宇喜多興家)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비젠 국 오쿠 군도이시 성(砥石城)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사료적 근거는 없다.

 

덴분 3년(1534년), 조부 우키타 요시이에(宇喜多能家)가 시마무라 모리자네(島村盛?)에게 암살당하자, 나오이에는 겨우 여섯 살의 나이로 부친 오키이에와 함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덴진 산성(天神山城) 성주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宗景)를 섬기며, 우라가미 가문 가신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오이에는 책모에 뛰어나, 조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마무라 모리자네를 암살한 것을 시작으로,

장인 나카야마 노부마사(中山信正)와 다쓰노구치 성(龍口城) 성주 모토쓰네(?所元常)를 살해하는 등, 우라가미 가문의 세력 확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극상[편집]

에이로쿠 9년(1566년) 2월에는 미마사카로 진출한 빗추미무라 이에치카(三村家親)아와 호소카와 가문로닌 엔도 마타지로(遠藤又次?), 기자부로(喜三?) 형제를 기용하여 철포로 암살하고, 다음해 7월에는 묘젠지 전투(善寺合?)로 그때까지 비젠 국 서부에 진출해 있던 빗추 군세를 몰아내는데 거의 성공하였다.

 

 그 뒤에도, 인척관계였던 가나가와 성(金川城) 성주 마쓰다 모토테루(松田元輝)·모토카타(元賢) 부자와 오카야마 성(岡山城) 성주 가나미쓰 무네타카(金光宗高)등을 몰락시키고, 그 영지를 자신의 지행으로 삼는 등 세력을 확대하여, 우라가미 가문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오다 노부나가와 서 하리마아카마쓰 마사히데(赤松政秀)와 손을 잡고 주군 우라가미 무네카게에게 반기를 든다.

 

그러나 아카마쓰 마사히데구로다 모토타카(?田職隆)·요시타카(孝高, 후의 간베에) 부자에게 패배하고, 노부나가가 파견한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벳쇼 야스하루(別所安治)등도 오다 군의 에치젠 침공 때문에 돌아가는 등 악재가 겹쳐,

 

 

역으로 무네카게가 약해진 아카마쓰 마사히데의 다쓰노 성(龍野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우군을 모두 잃게 된 나오이에는 완전히 고립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항전이 불가하다고 판단하여 무네카게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는 특별히 용서 받아 목숨을 구하고 귀순을 허락받았다.

 

덴쇼 2년(1574년)에 다시 무네카게에게서 독립을 획책하여 우선 고데라 씨(小寺氏)가 맡아 기르고 있던 무네카게의 형 우라가미 마사무네(浦上政宗)의 손자 히사마쓰마루(久松丸)의 존재를 깨닫고, 그를 옹립하여 무네카게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히사마쓰마루의 옹립과 나오이에의 사전 책략에 의하여 미마사카와 비젠 국내의 무네카게 휘하 장수들이 이반이 연이어, 더욱이 무네카게견원지간이었던 아키모리 가문과 손을 잡아 군사적인 면에서도 불리함을 극복하였다.

 

덴쇼 3년(1575년)에는 모리 가문의 미우라 씨 공격에도 가세하여 협조 관계를 굳건히 하였다. 같은해 9월, 무네카게의 심복인 아카시 가게치카(明石景親) 등의 중신들마저 내응시키는데 성공하여 무네카게는 하리마 국으로 도주하고, 나오이에는 비젠뿐만 아니라 빗추 국 일부와 미마사카 국 일부까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무네카게 추방 뒤에도 여전히 비젠에는 구 우라가미 가신 세력이 남아있었고, 이들과 하리마로 도망친 무네카게와 일문 우라가미 히데무네 등이 은밀히 연락을 취하여, 비젠에 잠복한 구 우라가미 가신이 선동한 소규모 봉기로 골치를 썩이게 되었다. 이 상황은 덴쇼 6년(1578년) 12월에 우라가미 잔당이 일제히 봉기하여 고지마(幸島)를 점령하는 사건까지 이어지게 된다. 우라가미 무네카게·히데무네 등이 주도한 이 무장봉기는 일시적으로 덴진 산성까지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려 우키타 가문은 상당히 애를 먹어 진압하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비젠과 하리마에 숨어 있던 구 우라가미 세력을 영내에서 몰아내고 무네카게의 영주 복귀 야망을 분쇄하는데 성공하고, 우키타 가문은 영내의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만년[편집]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주고쿠 방면으로 진군해오자, 이에 저항하여 덴쇼 7년(1579년) 5월에는 노부나가와 내응한 혐의를 받은 동 미마사카의 고토 가쓰모토(後藤勝基) 등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같은해 10월에는 나오이에 자신이 모리 가문과 손을 끊고 노부나가에게 신종한다. 이후 미마사카·비젠 각지를 전전하며 모리 가문과 끊임없는 전투를 계속하다가, 덴쇼 9년(1581년) 말 경에 오카야마 성에서 병사하였다. 사인은 출혈을 동반한 엉덩이의 악성 종양이라고 한다. 나오이에의 죽음은 잠시동안 비밀로 부쳐졌다가, 다음해인 덴쇼 10년(1582년) 1월 9일을 공식적인 기일로 삼았다.

후계자는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평가[편집]

에도 시대 초기에 저술된 《다이코키》에는 사이토 도산마쓰나가 히사히데에 버금가는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이즈모아마고 쓰네히사아키모리 모토나리과 함께 주고쿠 삼대 모장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제 2차 세계 대전 전에는 황실 소유였던 비젠 돗토리 장원(備前鳥取庄)을 회복한 것에서 근황가적인 측면이 평가받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가네미쓰 무네타카를 비롯하여 마쓰다 모토카타, 고토 가쓰모토 등 상대하기 벅찬 상대에게는 자신의 딸이나 누이, 혹은 친척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성립시키고 친의의 정을 내보여 방심하게 만든 뒤, 때를 보아 독살하거나 암살하는 등의 행위가 많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다지 인기가 없다.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토요토미의 처(네네)조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こはやがわ ひであき))
출생 1582년
사망 1602년
별명 하시바 히데토시(羽柴秀俊 (はしば ひでとし))
지쿠젠 쥬나곤
코바야카와 긴고(小早川金吾)
긴고 쥬나곤(金吾中納言)
묘소 오카야마 현 오카야마 시의 즈이운지 절(瑞雲寺)
형제 기노시타 가쓰토시
기노시타 도시후사
기노시타 노부토시
기노시타 도시사다
기노시타 히데노리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こはやがわ ひであき)) 또는 하시바 히데토시(羽柴秀俊 (はしば ひでとし))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기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의 아들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정실, 네네조카이다.

정실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양녀(친부는 시시도 모토히데, 할머니는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장녀)를 두었다. 관위는 쥬산미(?三位) 곤쥬나곤(?中納言). 지쿠젠을 영유했기 때문에 지쿠젠 쥬나곤, 사에몬후(左衛門督)를 겸했기 때문에 코바야카와 긴고(小早川金吾), 긴고 쥬나곤(金吾中納言)이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편집]

기노시타 이에사다[1]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하라 이에쓰구의 딸이다. 어릴때 이름은 다츠노스케(辰之助)였다. 겐푸쿠(元服)때 첫 이름을 기노시타 히데토시(木下秀俊)로 지었다.

 

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하시바 히데토시로 이름을 올렸다. 1589년 병사한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옛 영지인 단바 가메야마 10만 석을 받았다. 1592년 쥬산미?곤쥬나곤에 서임되었다.

 

1594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양자가 되어 고바야카와가에 들어가 히데아키로 개명했다. 관직은 쥬나곤이었지만, 겐푸쿠 때 받은 관위인 「사에몬후」(左衛門督)의 중국 명칭 「집금오」(執金吾)와 합쳐 「긴고 쥬나곤」(金吾中納言)이라 불렸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사건에 연좌되어 단바 가메야마를 몰수당했다. 같은 해 양부?다카카게가 은거함에 따라 그 영지인 지쿠젠지쿠고?히젠의 일부를 합친 30만7천 석을 계승해 지쿠젠 나지마 성(名島城) 성주가 되었다.

정유재란[편집]

정유재란때는 원수를 역임했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명나라의 대군에게 포위된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섰다. 우이진(初陣)에서 스스로 야리(槍)를 손에 들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활약했지만, 본래 원수인 히데아키는 부산성을 수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선 것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비판받는다. 그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해 에치젠 기타노슈 15만 석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비판 받은 것은 구원에 나선 점이 아니라 히데아키 자신이 다수의 목을 취할 정도로 분투한 점이란 설[2]이 있고, 조선 병사가 아닌 일반인을 공격한 점이란 설도 있다).

 

이 처분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참언의 의한 것이란 이야기도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중재를 해주었다고 하지만, 다이코 히데요시의 사후 히데아키가 영지를 회복한 데에 한마디 거든 것뿐이며 실제로 중재를 한 적은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편집]

1600년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후시미 성 공격 후 이에야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낸 점과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동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와 서간을 주고받은 점에서, 이미 동군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후시미 성 공략전에 참가해 전공을 올렸지만, 이 전공을 미쓰나리가 인정해주지 않아 배신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이설도 있다. 현재에 남아있는 문서로는, 미쓰나리가 간파쿠(?白)의 지위를 약속하며 서군에의 동참을 촉구하는 것과, 구로다 나가마사(?田長政)와 아사노 요시나가(?野幸長)의 연명으로 「우리들은 기타노만도코로(네네)님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쓰여있는 것 2통이 있다.

 

히데아키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낀 이시다 미쓰나리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들은, 서군이 승리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가 성인이 되는 날 까지의 간파쿠직 취임과 기나이의 구니(?) 두 곳을 가증해주는 것을 약속하는 등 서군에의 잔류 공작을 행했다. 결전 당일 히데아키는 마쓰오 산에 1만5천의 대군을 이끌고 포진했다. 이때 마쓰오 산에는 이미 서군의 일부 장병이 들어와 있었지만, 히데아키는 군세의 수를 듣고 이들을 내쫓은 후 마쓰오 산에 진을 깔았다(이 시점에서 이미 동군에 가담했다고도 여겨진다).

 

히데아키의 마음은 동군에 있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부대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를 격파하고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도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부대를 패주시키는 등, 전황이 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감에 따라 동군 참가를 주저했다는 설과,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가 3만8천의 대군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를 향했는데 통 나타나지 않는 것에 수상함을 느껴 참전을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사자를 보내 공격명령을 내렸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은 히데아키를 기다리다 지친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진에 위협사격을 하게 되고, 이에 놀란 히데아키가 마침내 동군측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오타니 부대를 공격했다. 느닷없는 배반이었지만 코바야카와측의 배반을 예측하고 있던 오타니 부대는 이것을 받아쳐 일시적으로 고바야카와 부대는 퇴각한다.

 

하지만 고바야카와 부대의 움직임에 동조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아카자 나오야스 등 서군의 여러 장수들이 차례차례 배반함에 따라 오타니군은 괴멸하고 오타니 요시쓰구는 자살하게 된다. 다만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을 실제로 받았는지는 위치 관계로 보았을 때 의문이 있다.

 

이 참전에 의해 대세는 결정되었고 저녁 무렵에 서군은 괴멸되어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사카를 향해 이부키야마 산중으로 달아났다.

오카야마 번주[편집]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단락 된 후 병사를 이시다 마사쓰구(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버지)가 지키는 사와야마 성에 보내, 격전 끝에 이 곳을 낙성시켜 전공을 올린다. 전후의 논공행상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영지인 비젠미마사카로 이봉되어 오카야마 번 55만 석으로 가증된다(50만 석 포함).

이로써 큰 영토를 얻은 히데아키는 오카야마 성를 개축해 이전의 2배나 되는 바깥 해자(外堀 소토보리[*])를 불과 20일만에 완성한다. 그리고 켄치(?地)의 실시, 절과 신사의 부흥, 농지의 정비 등 급속히 근대화를 진행한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602년에 사망했다. 향년 21세(부정설 있음).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고바야카와 가문은 단절된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 초기, 자손이 끊길 경우 가이에키(改易)를 당한 케이스이다. 히데아키 사후 고바아카와 가문의 옛 신하들은 세키가하라에서의 배반을 책잡혀 사관할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3].

 

히데아키에게 하시바 히데유키란 아들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의하면 히데아키의 사후 측실로부터 히데유키가 태어나 히데아키의 형 기노시타 가쓰토시에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자손들은 빗츄 아시모리 번 기노시타가의 가신이 되어 고바야카와 씨의 옛 성인 도히 씨(土肥氏)를 칭했다고 한다.

사인[편집]

21세로 요절한 사인으로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형제 두 명(기노시타 도시사다, 기노시타 아무개)도 함께 사망했다는 기술이 「본?닛키(梵舜日記)」에 적혀있다. 아무개를 히데노리로 보는 설이 있지만 히데노리는 오사카 전투 때 오사카 성에 들어가 히데요리에 순사했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르다.

암살설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세간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때 자살로 몰아넣은 오타니 요시쓰구의 저주에 의한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덧붙여 고바야카와가는 단절되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재흥의 칙명의 내려옴에 따라, 모리 본가에서 모리 사부로(毛利三?)가 고바야카와가에 들어가 재흥시켰다.

인물[편집]

일반적으로 히데아키는 우유부단하고 암우한 무장이라고 평가받고 있으나, 이것은 세키가하라의 배반에 대한 인상이 강한데 따른 것이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도요토미가 가문을 위해 결사항전을 치른 것에 비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과거 히데요시의 양자였음에도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가문에 칼을 들이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혹평이 많으며, 배신했다는 것 만으로 오다 노부카쓰같은 암군이란 결론을 내린 문헌도 있다. 하지만 마쓰오 산을 점거해 유리한 위치에서 움직여 승리를 결정지은 점과 결국 세키가하라의 승리측에 든 것은 선악과 관계없이 공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세키가하라는 거대한 전투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라는 암우한 인물의 배신에 의해서 결정지어졌다는 혹평도 있다.

 

히데아키는 첫 출전인 정유재란울산성 전투에서 적에게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구출하는 등 무공을 올렸는데, 이에 대해서도 용맹함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첫출진의 공명심으로 인한 대장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형제를 제치고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사실이나 정치능력도 비젠 오카야마에서의 통치로 발휘한 점을 미루어, 단순히 암우한 인물이었다고만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견해가 있다.

 

세키가하라에서의 배반에 관해서도 위협사격에 놀라 배반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지만, 지리적인 면에서 볼 때 실제로 위협사격이 어렵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배신 직후, 오타니 요시쓰구의 20배가 넘는 병력으로도 일시적으로 패퇴당하였는데다, 더욱이 세키가하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함으로 인해 나쁜 평판이 굳어지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배신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듯한 이미지가 굳어져버리게 된 것이었다

.

게다가 지쿠젠 태수일 때 행적은 품행불량으로, 가신으로부터 여러번 간언을 받으면 발끈하여 베어버리거나 해서 실제로 히데아키의 암우함에 포기하고 고바야카와가를 떠나는 중신도 있었다. 히데아키에 대해선 당시의 공통된 인식이었던 「수상쩍고 제멋대로인 사람」(胡?の人)이란 것이 실제 모습이었던 듯하다.

주요 가신[편집]

형제[편집]

주석[편집]

  1. 이동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의 오빠
  2. 이동 만에 하나 상대에게 역습당해 대장인 히데아키가 목을 떨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니까
  3. 이동 실제로는 가가의 마에다가를 경유해 기이 도쿠가와가에 사관한 인물도 있다.
전 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가 당주
1606년 - 1611년
후 임
고바야카와 요시히사?
전 임
-
고바야카와가 오카야마 번 번주
1600년 - 1602년
후 임
이케다 다다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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