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분과 예수님께서는 하나이시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신다(복음).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토록 완벽하게 순명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진리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역사 안에는 실패한 영적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
들의 공통된 잘못은 자신의 목소리를 진리로 착각한 점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야 함에도 자신의 목소리에 매달려 있었기에
은총이 함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쿼바디스』는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장편 소설입니다.
끝 부분에는 제목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지요.
자신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권유 때문에 억지로 달아납니다.
로마를 벗어나는 도로 위에서 그는 스승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놀라며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쿼바디스 도미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짧게 답하십니다.
“네가 내 백성들을 버리기에 한 번 더 죽으러 간다.”
그 말에 베드로는 깨달음을 얻고 로마로 다시 돌아옵니다.
왜 그는 내키지 않는 탈출을 실행했겠습니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존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달랐지요.
죽어 거름이 되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을
그는 순간적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
진정 사람을 살리는 말은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옛날 두 양반이 백정에게 고기를 사러 갔다.
한 양반은 "만덕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했고
또 다른 양반은 "김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말했다.
그런데 두 양반이 받은 고기 양은 누가 봐도 달랐다.
이를 두고 만덕이라 부른 양반이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고 따져 물었더니,
"이것은 만덕이가 자른 것이고
저것은 김서방이 잘랐기 땐문이지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말은 기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