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미첨(매튜 역)과 마릴린 먼로(선술집 여가수 케이 역)가 출연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에서 로버트 미첨의 아홉 살 난 아들 마크(토미 레티그 역)와 케이가 강가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마크 : “왜 결혼하셨어요?”
케이 : ”사랑에 빠졌거든”
마크 : ”그런 걸 어떻게 알죠?”
케이 : ”나도 몰라. 못 먹고 못 자게 되지”
마크 : ”배가 아플 때처럼요?”
케이 : “비슷하지만 마음이 아픈 거란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단순화시켜서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이 대사를 하면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 ~ 1962)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세상에 와 서른여섯 해를 살다간 마릴린 먼로. 1952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와 1954년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그녀는 스타로 등극했고, 1959년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인기는 절정에 오른다.
자신을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열등감 속의 먼로는 남성의 영혼을 사로잡을 자신 있는 육체를 과시함으로써 얼굴이 안겨주는 불안을 극복하고 스타가 되었다.
먼로는 출생부터 매우 불행한 여자였다. 어머니는 심한 신경쇠약 때문에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고,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먼로였기에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어린 나이에도 남의 집이나 기관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과 무관심의 어둑발 속에서 자랐다. 먼로는 뒷날 “어린 소녀들은 설사 못 생겼더라도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게 마련인데 어렸을 때 내게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고 냉대와 무관심을 고백했다. (참고: ‘씨네 21’ NO365호.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먼로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마릴린 먼로의 첫 남편은 열여섯 살에 ‘아빠’라고 부르던 스물한 살의 비행기 공장 노동자 '제임스 도허티'였다. 그는 가정주부로서 별 역할도 하지 못하는 먼로와 5년여를 살다가 이혼했다.
두 번째는 ‘조니 하이드’로 모리스 에이전시의 부사장. 먼로가 아직 무명이던 때 만나 그녀가 광고와 영화 일을 맡도록 주선했다. 서른한 살이나 많았던 유부남으로서 먼로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세 번째 남자인 조 디마지오는 스타급의 야구선수였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그는 먼로의 연기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9개월 만에 이혼했다.
네 번째 남자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아서 밀러. 먼로는 밀러로부터 자신의 지적인 이미지를 보완하려 했고 또 밀러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받고 싶어했지만 결혼 초부터 별거하는 등 파란을 겪다가 4년 만에 이혼했다. (자료: ‘씨네 21’ NO365호.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그녀는 늘 불안한 심리의 여자였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자신감 부족은 늘 수면제와 알코올에 빠져들게 했다.
연기는 내면을 조절하지 않으면 표출되지 않는다. 먼로는 대사가 조금만 복잡해도 NG를 많이 내는 배우였다. 또한, 그녀는 섹스심볼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감당 못할 비밀을 엿 든 여인네처럼 사람들에게 겁먹고 수줍어했던 여자였다.
먼로를 따라다녔던 것은 어렸을 때는 가난과 무관심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우렛소리와
술과 수면제였다. 영혼과 육체의 배반 속에서 먼로의 영혼은 늘 칼바람을 맞고 비틀거렸다.
고등학교 시절, 내 친구 하나가 자살했다. 모친과 이혼을 하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계모 때문에 자신의 모친이 쫓겨나게 되었다고 늘 그녀를 원망했다. 친모의 귀가가 있기 전까지 화해란 있을 수 없었다. 충돌은 점점 더 잦아졌다. 친구는 술을 마시고 계모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사실이 알려져 부친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어느 날 계모가 아들의 방문을 열었을 때, 계모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연필 깎는 ‘커터 칼’로 자신의 배를 갈기갈기 긋고는, 피가 흥건히 고인 방바닥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계모를 향해 죽어가면서 말했다.
“보기 좋지?”
험하게 싸우기는 했어도 꼬박꼬박 존대는 했었다고 한다. 밉다고는 하나 계모도 엄마라고 여겼던 예의 바른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그가 계모에게 최초로 반말을 했다. 그의 마지막 반말이기도 했지만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기도 했다.
술과 수면제를 차곡차곡 쌓았던 마릴린 먼로의 몸뚱이였다. 사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인기를 치솟게 한 몸뚱이가 거꾸로 그를 나락으로 인도했다. 1962년 8월 5일, 먼로는 근육질의 사내가 막무가내로 달려들 듯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하얀 달빛을 더는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먼로는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술병과 수면제가 나뒹구는 침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게 상업언론의 속셈 말고는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랑은 삭제되고 단지 배설의 대상이 되었던 먼로. 그녀가 전화를 통해 세상 뭇따래기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혹 이 말이 아니었을까.
“보기 좋지?”
나는 가끔 먼로의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곤 했다. 너무나 가여워서.
P.S
이 글은 '함께 만드는 숲'이라는 수필집(한경이라이프 刊)
제2부 <만남>의 소제목 '사랑을 찾아서'에 나오는 글입니다.
서점에서는 2월 중순 경에 만날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정말 아픈 과거가 있었네요.미모는 타고났는데 모든 복이 지질이도 없었네요.
미인 박명 이라 했던가?... 아까운 미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지금까지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 역사? 가 바뀌었을 수 도...암튼... 영화계의 큰 손실 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