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freedom)” 고문과 쉴 사이 없이 가해지는 고통 속에서 ‘자비(mercy)’라는 말만 하면 빨리 죽여 주겠다고 하자 주인공은 자비 대신 혼신의 힘을 다해 ‘자유(freedom)’를 외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나오는 장면으로 왜 자유가 모든 것을 희생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던 영화다. 영화에서 잔인한 잉글랜드의 왕으로 나왔던 롱생크 왕은 역사에서는 에드워드 1세다. 그는 웨일즈를 정복한 후 북부 산악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키기 위해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엄격한 잉글랜드 법과 질서를 적용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거친 날씨와 험악한 산지를 배경으로 살아온 호전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을 지닌 민족이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의 점령에 승복할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 배경에는 그들의 이런 기질 외에 날씨가 있었다. 온화한 기후가 지배했던 1200년대 초반까지는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던 켈트족들의 삶이 풍족하지는 않아도 굶주리거나 힘든 생활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기후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1215년 동유럽의 혹한으로 대흉작이 발생했고, 산악지역의 빙하는 저지대로 밀고 들어오면서 농지들을 잠식했다. 영국 북부지역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는 산악지역이었으므로 소빙하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1200년대 말부터 1300년대 초반에 추위와 많은 비로 유럽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수많은 농민이 굶어 죽었고, 집을 버리고 떠돌았다. 기록에 의하면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즈 강이 겨울 내내 얼어붙었고, 극심한 한파와 함께 발생하는 특성을 가진 폭풍과 돌풍이 영국해협과 북해를 강타했다고 한다. 많은 농토가 날씨로 인해 소실됐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할 정도로 재난은 꼬리를 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근은 체력을 약화시키면서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이 당시 생활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당시 왕이었던 에드워드 2세조차 궁정에 빵이 떨어지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기근은 스코틀랜드가 더욱 심했음에도 잉글랜드의 왕은 막중한 세금을 부과해 기아에 허덕이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자극했다. 만일 기후가 온화해 식량이 풍부했다면 윌리엄 월레스가 분연히 떨쳐 일어났을 때 전폭적인 합류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여인을 잉글랜드 군에게 잃은 윌리엄 월레스는 영국 주둔군 부대를 순식간에 궤멸시킴으로써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그동안 기근과 압제에 시달려 온 스코틀랜드 민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월레스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297년 대부대를 스코틀랜드로 진군시켰다. 양쪽 군대가 마주친 곳이 스털링이었으며 영화에서 월레스가 잉글랜드 군에게 대승을 거두는 전투가 여기에서 벌어졌다. 전쟁사를 보면 보병과 기병의 전쟁에서는 기병이 항상 승리했다. 그래서 많은 지휘관은 ‘100명의 보병보다 1명의 기병이 더 낫다’라는 말까지 했다. 잉글랜드도 전통적인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사용했다. 잉글랜드는 대규모 전투에서 먼저 화살을 이용해 일제 사격을 한 후 기병들의 돌격으로 보병들의 방어진을 무력화시킨 후 보병을 돌격시켜 승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적할 기병이 없던 월레스가 사용한 전술이 장창전법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장창병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나무 창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든 다음 공격해 들어오는 잉글랜드의 기병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스털링에서 대승을 거둔 월레스의 스코틀랜드 반군은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토착귀족들에게 당근을 주어 월레스를 배신하게 한다. 그런 다음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월레스의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폴커크에서 패한 뒤 프랑스로 탈출한 월레스는 세를 규합해 저항을 계속하다가 1305년 다시 패배해 체포된 뒤 사형당했다. 월레스를 처형하는 잔혹한 조치는 오히려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크게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월레스의 영웅적인 싸움과 죽음에 고무됐고, 잉글랜드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준히 투쟁을 계속했다. 이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다. 그는 월레스의 죽음 이후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왕위에 올랐다. 1314년 월레스가 대승을 거뒀던 장소인 스털링으로부터 3.2㎞ 정도 남쪽에 위치한 배녹번(Bannockburn)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결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며 독립을 쟁취한다. 그리고 브루스는 로버트 1세로 불리며 스코틀랜드의 왕이 됐다. TIP-비정형전쟁의 승리잇단 기습으로 적군 사기 떨어뜨려 스코틀랜드의 왕 브루스는 정형적인 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형과 날씨를 활용하는 비정형전쟁을 계획했다. 잉글랜드군이 사용할 수 있는 집과 작물은 철저히 불에 태웠다. 험악한 스코틀랜드의 산지를 이용해 전투를 했고, 밤에는 계속적인 기습을 가했다. 야영을 할 때도 잉글랜드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백파이프와 뿔피리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치고 끊임없이 시달렸다. 여기에다 브루스는 거꾸로 소수의 병력밖에 없는 잉글랜드의 북부 성들을 공격해 집과 작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는 등 잉글랜드 북부지방을 황폐화시켰다. 계속적인 기습과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식량 부족, 그리고 이질로 수많은 병사가 쓰러져 가자 잉글랜드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온 잉글랜드군 앞에는 스코틀랜드 군에게 황폐화된 불모지밖에 없었다.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는 그 누구도 스코틀랜드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성들이 하나씩 하나씩 스코틀랜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비정형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브루스는 1314년 배녹번 전투에서 잉글랜드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 승리하면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