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가 21,34-36)
Be vigilant at all times and pray that you have the strength to escape the tribulations that are imminent and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말씀의 초대
주님의 천사가 주 하느님의 빛 속에서 구원된 이들이 영원무궁토록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곧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도 전해 준다. “보라, 내가 곧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쳐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스스로 조심하며 심판의 시련을 견디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톨릭 시인 김남조 씨가 오랜만에 내놓은 시집을 반가운 마음으로 펴 들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먼 데서 오는 손님’이라는 시에 대한 여운이 길고 그윽합니다. “먼 데서 손님이 오신다/ 어디서 떠났고 언제 도착할는진 모르나/ 나의 주소를 향해/ 순조롭게 다가오신다./ (중략)/ 달빛 으스름인가 안개인가로/ 지나온 풍경을 순하게 지우시며/ 쉬지 않고 걸어오신다/ 아아 그분과 내가/ 부디 서로 잘 이해하는 사이로 만나게 되기를.” 이 시를 감상하며 오래전에 선종하신, 신학생 때 저희 본당 신부님이셨던 할아버지 신부님이 들려주신 짧은 얘기가 기억납니다. 신부님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운명을 눈앞에 둔 절친한 동기 신부님을 보려고 병원을 찾으셨답니다. 두 분 다 지상에서는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는 신부님 뒤에서 또렷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또 봐!” 누워 계신 친구 신부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두 노사제가 그 순간 체험한 것은 인간적 안타까움과 슬픔을 넘어, 더욱 뜨거워진 신앙의 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줄곧 들었습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생생한 심상과 상징들이 가득 찬 요한 묵시록의 근본정신은 오늘 독서에 나오는 “보라, 내가 곧 간다.”라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확고한 믿음 속에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외칩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22,20)


어제는 시골 어느 본당의 부부가 저를 방문해주셨습니다. 힘들게 농사를 지으신 고구마와 바닷가에서 직접 채취하신 굴, 여기에 맛있는 도토리묵까지 해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소후원회비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으신데 모든 것을 나눠주시려는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형제님 손에 감겨있는 보호대가 보였습니다. 저는 형제님께 “손을 다치셨나 봐요.”라고 여쭈었지요. 형제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별 것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런데 옆에 계시던 자매님께서 “손목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형제님께서는 “여기 왼손은 멀쩡하거든요. 왼손이 있는데 뭐 어때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6.25 전쟁 때 피난 나와서 무척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가톨릭을 알게 되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성당에 가야 밀가루도 주고 옷도 주었으니까, 성당이라도 잘 나가는 신자가 되어야 면목이 설 것 같아서 그때부터 성당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감사함을 지금도 기억하면서 이제 자신이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것 같다면서 성소후원회비도 주시고 교구청의 주교님과 신부님들 드시라고 음식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전혀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씀만 하시더군요. 걱정 없이 사시는 분, 정말로 천사 같이 사시는 부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탕과 만취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특별히 여기에 한 가지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바로 일상의 근심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사실 일상의 삶 안에서 단 한 가지의 근심도 없는 분이 계실까요? 순간적으로는 근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삶 전체에서 근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근심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물러져서 주님께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만난 부부의 모습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것을 다짐해 봅니다. 기쁨과 감사를 통해 우리의 근심은 사라질 것이며,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정신은 행동을 지배한다(호아킴 데 포사다, ‘바보 빅터’ 중에서)
산을 오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남자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남자는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넓은 개울이 보였다. 남자는 주저 없이 개울로 달려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천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물은 꿀맛이었다. 목마름이 사라지자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개울가에 세워진 표지판에 ‘Poison’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등산로로 뛰어갔다.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나왔다. 급기야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등산객들에게 발견된 남자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등산객들에게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의사는 고열에 신음하던 남자에게 말했다.
“지난주에도 개울물을 마신 등산객이 실려 왔죠.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등산객은 지금 아주 건강하니까요. 그는 ‘낚시 poisson’라고 써진 표지판은 ‘독약 poison’으로 착각했을 뿐이었거든요. 당신도 혹시 표지판을 봤나요?”
그러자 불덩이 같던 남자의 체온은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정신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정신은 정신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은 행동을 지배한다. 표지판을 잘못 본 등산객의 경우처럼 정신은 심지어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당신의 현실이 결정된다.

깨어 있어라
-반영억신부-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를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는 깨어 있는 삶이 무엇이지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만남, 하는 일’이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지금 누구와의 만남을 이루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 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과 시간을 모르니 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사랑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김대열신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녀라!’...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분께서 내리실 마지막 결정을 앞에 두고 가져야 할 기분 좋고 확신에 찬 예감을 뜻합니다.
삶의 결과에 두렵지 않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올 그 시간을 맞이할 준비를 우리는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말은 적극적인 말입니다. 적극적이 되라는 말은 ‘나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에 강조점을 놓는 삶입니다.
분명 죄는 최선을 다해 피해야 할 아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은 힘을 다해 행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한계나 조건 안에서도 선한 마음으로 선한 과정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마음과 행동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이 노력을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러한 삶이 고달플 수 있습니다.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아플 수도 있습니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배고파하는 사람들
-열정과 비전-
-이수철신부-
요셉수도원에서처럼 여기 미국의 뉴튼수도원에서도 가장 많이 바라보는 것이 하늘입니다.
하느님이 그립고 마음이 막막할 때 눈 들어 바라보는 하늘입니다.
“이모님,
제가 여자를 만나면 의식도 있고 늘 깨어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데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없어 늘 사람이 고파요.”
어제 읽은 '전순란'님의 글 중 한 대목입니다.
'늘 사람이 고파요.'라는 말마디의 느낌이 참 각별합니다.
'사람을 배고파하는 사람' 역시 사람의 정의입니다.
이분 역시 깨어 무엇인가 끊임없이 찾는, 열정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이, 배고파하는 사람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수도자입니다.
하느님이 목말라, 배고파, 그리워, '한 밤 중에 잠깨어' 기도하는 수도자입니다.
어찌 수도승뿐이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내면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배고파하는, 그리워하는 수도자입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42,3).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없이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63,2).
아, 이게 사람입니다.
사람의 정의입니다.
이 진리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며 사는 이가 수도자입니다.
물기없이 메마른 땅, 인생 사막에서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배고파하는,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목말라함이, 배고파함이, 그리워함이 '열정의 샘'입니다.
이런 열정의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선사되는 천상 비전의 오아시스입니다.
사막 같은 파토모스 유배지에서 오늘 요한에게 계시된 천상 비전이 참 아름답고 놀랍고 반갑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비전으로 삼아도 좋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록22,1-5).
한 마디도 생략할 수 없는 요한에게 선사된 비전이요, 우리의 미래입니다.
비전이 없으면 열정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비전이 없다면 사막같은 인생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힘으로 살아 가겠습니까?
열정에서 계시되는 비전이요 비전에서 샘솟는 열정입니다.
열정과 비전은 함께 갑니다.
그대로 실낙원(창세기2,5-3,24)의 복원으로 복락원의 실현입니다.
창세기의 실낙원에서 묵시록의 복낙원의 해피엔드로 끝나는 하느님의 구원사입니다.
이런 비전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열정이 오늘 지금 여기서 복락원을 살게 합니다.
매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사의 강'이 바로 '생명수의 강'이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를 상징하는 성전 제단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성체와 말씀을 모심으로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이, 목마름이, 그리움이 해소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답은 1독서 묵시록이 줍니다.
바로 열정과 비전이 늘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며, 권태와 나태, 속화와 타락을 막아줍니다.
'오늘'을 바로 '그날'처럼 살게 하기에 구원과 심판의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는 일도 없게 합니다.
늘 깨어 기도함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열정과 비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생명수의 강', 미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당신의 열정과 비전을 선사하십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묵시22,20ㄷ).
아멘.

< 어린양은 없고 어좌만 있는 이유 >
-전삼용신부-
인터넷 뉴스를 뒤지다보니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보코하람에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18세 소녀의 고백’이란 기사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보코하람이 갑자가 학교에 들이닥쳐 276명의 아이들을 납치해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중에 목숨을 걸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극적으로 탈출한 몇 명의 아이들 중 하나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그렇게 테러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테러는 자신의 힘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종교라면 그들이 믿는 신의 모습이라면 그 신에게 누가 가고 싶겠습니까? 나를 이용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노예로 만드는 그런 무서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이 아무리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드록바가 신으로 불리는 이유’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축구선수로서 2008년 첼시에서 뛸 때 축구선수로서의 가장 큰 영예인 발롱도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축구를 잘 하기 때문에 신으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서 남북 간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코트디부아르가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승리를 거둔 후 드록바는 “1주일만 전쟁을 멈추자”는 이야기를 무릎 꿇고 TV 생중계에서 합니다. 이때 2002년부터 남부 가톨릭과 북부 이슬람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코트디부아르는 실제로 드록바의 이 발언을 계기로 잠시 전쟁을 멈췄다가 재개합니다.
이후 드록바는 2008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자 그 상을 들고 코트디부아르로 갑니다. 이때 남부(베트) 지역 대통령이 축하만찬을 열어주며 생중계를 하는데 이때 드록바가 폭탄발언을 합니다.
“이 상은 코트디부아르 전체의 영광이니 이 상을 북부 이슬람에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이 나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이건 6.25 전쟁 시절에 이승만에게 “나와 같이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고 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의 발언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면 잘못하면 즉결 총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였지만, 당시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의 스타가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의 스타였고, 또 생중계 중이었으니 대통령도 못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진짜로 북부 반군 거점 도시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북부(부아케) 이슬람 도시도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이 계기로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졌고 또 그렇게 내전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드록바가 코트디부아르에 산 것은 겨우 5살 때까지고 그 이후엔 쭉 프랑스에서 살았던, 사실상의 프랑스인입니다. 그런데도 가난하고 전쟁으로 고통 받던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죠. 이후에 어떤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저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축구에 대해 문외한이던 자신의 조국을 2006년부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것도 드록바이고, 내전을 멈추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며, 이후 조국 국민들의 교육/의료 및 복지 개선에 자신이 번 돈을 많이 기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데 드록바가 경기장에 입장할 때 땅에 손을 대고 성호를 긋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저런 위대한 선수가 가톨릭신자라는 것에 큰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이용해 자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죽이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신이라면 하늘나라에서조차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모습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 자체이신 분의 모습이라야 우리가 안심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오늘 독서에서 보면 하늘나라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다고 나옵니다. 어린양의 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온 도성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생명수의 강 옆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뭇잎은 민족을 치료하는데 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을 이해해야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만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목이 잘려 피가 나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어린양은 죽은 것입니다. 그 죽어서 흘러내리는 피가 곧 생명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수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 혹은 성체와 성혈, 혹은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신랑으로서 신부인 교회에 당신 생명을 계속 나누어주시는 분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양이 어좌에 앉아 군림하지 않고 그 백성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그런 곳이라면 안심하고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조재형신부-
러닝머신으로 운동을 하면서 드라마를 즐겨봅니다. 그냥 걸을 때는 지루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재미있게 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비야 씨가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보람 있고 보수도 좋은 일, 재미없지만 보수는 좋은 일, 보람 있지만 보수는 적은 일, 재미도 없고 보수도 적은 일’ 여러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보람 있으면서 보수도 충분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러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보수는 적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지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재미는 없는데 급여도 적은 일을 하면서 지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비야 씨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셨고 그 일을 통해서 꿈을 이루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수원교구 가톨릭 문화 회관에 강의가 있었습니다. 10시 20분 강의였는데 8시 5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근처에 라자로 마을이 있어서 한 시간 정도 산보를 하였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보았고, 빨간 감이 달린 나무를 보았습니다. 라자로 마을에는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는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기에 나환자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사제마을’이 있습니다. 사제마을의 숙소는 성인들의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강완숙, 주문모, 김대건, 이승훈’ 성인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마치 꽃잎처럼 날렸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하니 주님께서 아직 머물고 있는 가을 풍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눈을 뜨게 됩니다. 다리가 아파 걷지 못했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온 몸이 썩어가던 나병환자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깨끗해집니다. 중풍병자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성서는 고통과 죄 중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유를 얻고, 해방을 얻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그 믿음의 세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신앙인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결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사람이려면 언제나 정신도 있어야지요.
-이기정신부-
‘정신 차려!’‘너 정신 나갔니?’‘정신없네.’라는 말을 아주 잘 합니다.
정신의 신은 귀신 신(神)자입니다. 영(靈)이며 혼(魂)이며 ‘자기’입니다.
사람에게 혼이 없다고 하면 신(神)이 없는 육신(肉身)뿐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은 고기뿐인 몸이라는 것이므로 사람이려면 언제나 정신도 있어야지요.
정신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정신은 육체와 달리 혼의 원리를 따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이라면 언제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코 13,37)”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
-기경호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주간의 마지막 날이다. 우리 인생은 시간의 끝, 만남의 끝, 일의 끝, 생의 끝, 기억의 끝 등 수많은 ‘끝’들로 가득하다. 끝은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에서 출발하여 시작을 향해가는 전환점이다. 그래서 시작을 품은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끝’은 영원을 향해가는 경유역이요 희망이다. 더구나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끝’은 늘 코끝 시린 겨울 한복판에서도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느님의 선과 의미와 희망을 찾아가는 기도의 자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21,35)라고 하시면서 세상 끝날을 위해 ‘모든 사람’이 준비해야 함을 상기시켜주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종말의 날을 준비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21,34) 하고 말씀하신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끝날은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고 심판의 날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끝날을 맞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신다. 조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하느님 뜻 안에 머물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피는 것을 말한다. 곧 삶의 매순간 무엇을 하든 하느님 앞에 있다는 이른바 ‘하느님 현존의식’을 갖고 그분의 눈으로 스스로를 살피는 것이다.
하느님을 의식한 자신의 살핌을 이어갈 때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마음이 물러진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의 끈이 약해져 자신 안으로 물러나는 대신 자기 뜻이 강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의식이 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세상 끝날을 위한 평상시의 삶의 태도란 모든 것을 그분을 의식하여 하고 ‘거룩한 절제’를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절제를 산다는 것은 현재를 즐겨 나쁜 행실에 빠지는 방탕이나 만취를 피하고, 과거를 하느님께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 섭리에 맡기며 근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한다. “여러분이 지고 있는 이 세상 근심과 걱정 때문에 주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지도자 편지 3)
예수님께서는 이어 모든 이에게 닥칠 끝날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21,36)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각자가 종말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보속과 극기의 길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향해 ‘오소서, 주 예수님!’ 이라고 부를 때 사랑을 부르는 것이고, 그래서 마음에 불타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이다. 기도란 사랑이요 사랑의 들음이요 사랑의 깨어있음이다. 기도란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과 일치하며 사랑을 갈망하면서 멈추어 한없이 자기 시간과 자기 전부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영원한 기다림이요 기다림 가운데 이루어지는 사랑의 호흡이다.
사랑하면 모든 소리가 사랑하는 임의 발자국 소리가 되고 숨결이 될 것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갑자기 들이닥칠 끝날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힘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사랑 안에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며 깨어있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아름다움의 극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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