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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 밑에 있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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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5 03:58
- 밑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어제 겸손한 마음을 지니라고 한 바오로가
오늘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하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오늘 독서는 이어서 얘기합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도 얘기하지만 주님도 몸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지녀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마음’ 하면 불교가 더 많이 얘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불교도 하심(下心)이라는 표현으로 겸손을 가르치지만
주님과 바오로 사도는 밑에 있는 마음뿐 아니라
더 나아가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지는 마음까지 얘기합니다.
사실 밑에 있으면 견뎌야 합니다.
밑에 있다는 것은 위에 뭐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밑에 있는 것은 기둥이 위에 있는 천장을 견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밑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 밑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왕 밑에 있겠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자고 오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 밑에 있고 그 사람은 위에서 나를 짓누릅니다.
그런데 위에서 나를 누르고 있고 그래서 무척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그저 힘들게 하는 사람 또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사람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때 기껍게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억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고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높이 올리신 하느님께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이 있는 사람은 도무지 알지 못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이 깨끗하고 뇌물 받지 않는 이라고 시편은 얘기하지만
오늘 저는 주님처럼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이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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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수성가해서 큰 재산을 모은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성공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하겠냐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가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몇 번의 수술을 했지만, 결국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이분의 자녀들 사이에 재산 상속 문제로 법적 분쟁이 생겼고, 이제 명절이 되어도 자녀들은 서로 만나지도 않습니다. 이 고인을 과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분이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오히려 불행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세상 삶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각자의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재벌 회장에게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를 더 좋은 인생, 즉 행복한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의 인생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에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지요. 돈이 없어도, 세상의 지위가 높지 않아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가 선택하는 많은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밭에 가려고, 겨릿소를 부려 보려고, 장가를 들어서….’ 이런 이유로 응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를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이 차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그분의 주도권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 초대에 우리는 무조건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응답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세상 것을 위한 삶이 진정한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이 좋다면서 이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 초대해 주신 주님께 어떤 이유나 양해 따위로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앞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곧바로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는 행복의 삶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영원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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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고통은 그 아픔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라. 그것이 너를 삼키지 못하도록(데오 그라시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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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찾아다니는데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TV에서도, 인터넷 주요 검색 창에서도 “맛 집”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 집”에 차려진 음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혀의 유쾌함을 넘어서는 “참된 맛 집”을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대체 최상의 “맛 집과 음식”을 어디에서 맛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라는 “맛 집”에서 먹는 “하늘나라의 음식”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곧 “구원의 천상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초대되어, 바리사이 지도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아사상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큰 잔치’를 베풀 것인데, 그 잔치에는 유대인들만이 초대받았기에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라면, 잔치에 사람들을 부르러 나간 “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종”이 잔치에 초대된 이들에게 잔치가 다 준비되었음을 전하지만, 그들은 초대를 거절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밭이나 가축을 샀고, 막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초대 약속 지키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은 세속의 헛된 망상에 쏠려 이 귀한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미 잔치 준비가 다 되었으나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본다면, 이들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사이들이요, 유대교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일을 핑계로 복음 사명을 도외시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초대에 일방적으로 불참을 선언하고 마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초대된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연되거나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주인은 또 다시 “종”을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보냅니다. “고을의 한길”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골목”은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나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 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밭이나 소를 사지도 장가를 가지도 못했지만, 주인의 배려와 사랑에 응답하여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은 또 다시 “종”을 “큰길”과 “울타리 쪽”, 곧 성 밖으로 보내어 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애타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성 밖의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고 잔치에 들어갑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이 존귀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몸소 따르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루카 14,17)
주님!
당신은 잔치 상을 차리시고, 저희를 부르십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셨지만, 저희는 마음이 딴 데 가 있습니다.
지금 베풀어지는 당신의 사랑, 당신의 호의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을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차린 음식으로 제 영혼이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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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리로 데려오너라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 보는 것이, 당연하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을 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가야 할 잔치집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더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결국,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가정사라는 핑계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입니다. 그런데 헛배가 불러서 스스로 배부르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스스로 배부른 착각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데려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초대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면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는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돌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으로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이나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매 순간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 잔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계산하지 말고 하느님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모여야 할 자리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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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식장에 목사님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묘지에서 하관 예절에도 목사님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 예식에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가족 중에 교회 다니는 분이 있어서 그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목사님이 정성껏 기도해 주니, 고인께서도 기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33년 사제 생활하면서 아직 법당이나, 교회의 장례 예절을 다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분의 가족 중에 교회나 법당에서 장례 예절을 지키는 분이 없었을 수 있고, 그런 분이 있었다고 해도 제게 고인을 위해서 장례 예절에 함께 하도록 부탁하신 분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제게도 교회의 장례 예절에 함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본당 사목 위원의 형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독실한 교회 신자였습니다. 사목 위원도 몇 년 전까지 교회에서 큰 직책을 맡아서 봉사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성당에서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제게 고인이 된 형을 위한 장례 예절에 함께 해 주기를 청하였고, 저는 기꺼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인지 물어보았는데 고인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형제님이 다니던 교회는 일반 신자는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리지만, 일반 신자는 장례식장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문화와 전통의 차이가 있겠지만 장례 예절은 가톨릭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다.”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로 있다가 보좌 신부의 직책을 받아들이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오랜 사목 경험이 있기에 본당 신부를 도와서 기쁘게 사목하였습니다. 교우들도 신부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잘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책은 보좌 신부이지만 인격이 보좌 신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모두 직책과 관계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목자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책과 직위로 인격과 인품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교구 사제들도 훨씬 풍요로운 사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사제들에게 더 많은 사목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자존심과 선입견을 버릴 수 있다면, 교만과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상황에 반응하며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예측하고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선입견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황에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끌 수 있다면, 순종과 겸손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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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얼마 전 한 부부와 이곳 성지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두 분은 드시며 연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성지 밥이 참 맛있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저는 농담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럼, 요즘 시대에 맞춰 배달을 시작해 볼까요?’
그랬더니 두 분은 동시에 말했습니다. ‘아니요! 함께 먹어야 이 맛이 납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는 것이 음식을 더욱 맛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주님의 제자 중 한 명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였을까요?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모든 미사는 주님과 함께하는 식탁입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지상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하늘의 식탁을 미리 맛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미사가 즐거우신가요? 행복하신가요?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즐거움인가요?
미사가 우리에게 즐거움이자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안이 되고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미사가 이런 기쁨이 되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와 우울과 상처가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주님이 아닌 유혹에 빠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가 앉은 식탁은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식탁이 우리에게 늘 기쁨과 위로와 행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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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들야들 부드러운 진미채 무침
제게는 만만한 반찬이 있습니다.
뚝뚝! 딱딱! 만들어 낼 수 있는 반찬.
건강에도 좋고 식감도 좋은 ‘양파볶음’, 모든 음식에 잘 어울리는 ‘계란탕’, 남녀노소 호불호 없는 ‘참치마요’, 예전에는 식당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진미채 무침’
(지금은 오징어 자체가 비싸서 식당 밑반찬으로 만나기 힘듦)
어제는 진미채 무침이 생각나서 100g짜리 한 봉지 사다가 무쳤습니다. 제일 중요한 과정은 진미채를 먹기 좋게 자른 후 마요네즈 목욕을 시키고 잠시 마요네즈가 속까지 들어가 ‘야들탱글’ 해질 때까지 놔두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넣고 싶은 대로 넣어서 무치면 됩니다. 저는 고추장과 설탕, 올리고당과 다진 마늘, 그리고 매실액을 조금 넣습니다. 새콤 달콤을 좋아하거든요.
우리 마음도 언제나 ‘야들탱글’하길 바랍니다. 가끔 세상 매서운 바람에 굳어버리고 외로움 때문에 갈라져 버리지만 늘 다시 ‘야들탱글’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주님 말씀 담아내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야들탱글’ 진미채와 함께 맛있게 식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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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비움의 여정
"온갖 어려움을 비움의 계기로 삼읍시다"
우리 말의 섬세하고 깊고 아름다움에 감동합니다. 비움, 섬김, 배움이 제가 참 좋아하는 그런 말입니다. 비우다, 배우다, 섬기다, 영성생활에 꼭 필요한 말마디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비움의 여정, 일상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비움의 계기로 삼읍시다”입니다. 비움대신 배움을, 섬김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2024,11,21-2025.10.28.”팜프렛의 “평화를 향한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말마디가 좋습니다. 비움의 여정을 따르는 이들은 “평화의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이들이 평화의 여정, 비움의 여정중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제가 10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시 최고의 수확은 삶의 여정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30일전후로 끝나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우리의 전 삶의 여정을 압축하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순례여정중 참 많이 강조해온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의 네 요소로 전 삶의 여정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어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느냐의 확인입니다.
10여년 동안 강론에서나 강의에서 참 많이 강조해온 내용들은 제 남은 생애동안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시점(時點)에 대한 확인이 깨어 거품이나 환상없이 본질적 깊이의 참삶의 선물 인생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피정오는 대부분 사람들이 인생 오후 3-4시, 인생 가을에 걸쳐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움이란, 비움의 여정이란 말마디도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비움의 겸손, 비움의 믿음, 비움의 사랑, 비움의 순종, 비움의 침묵등 비움 예찬에는 끝이 없습니다. 비움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그대로 놓아두면 짐이 되고 상처가 되겠지만 비움이나 겸손을 통한 치유와 더불어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는 다면 참 지혜롭고 풍요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의 대가와 달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평생 비움의 여정에, 겸손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성인다운 참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영성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이런 주님의 비움과 겸손, 순종을 집약한 오늘 제1독서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 비움(kenosis;케노시스) 찬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성무일도때 마다 이 비움 찬가(필리2,6-11)를 바칩니다. 참 하느님이자 참 사람인 예수님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우리 영성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아마 신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가에 속할 것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품위의 우리 인간인지 깨닫게 하는 참 고마운 복음입니다. 인간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보다 비움의 대가이자 달인인 그리스도 예수님께 정통해 있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을 닮아 비움의 여정에 시종여일 한결같았던 비움의 대가요 달인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성화의 여정 강론 주제도 오늘의 비움의 여정과 그대로 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권고에 이어지는 전반부 말씀이 예수님의 생애는 물론 우리가 따를 비움의 여정에 대한 참 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주님의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비움의 여정이 있기에 파스카의 영광스런 부활과 더불어 영적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찬가 전반부입니다. 겸손과 비움, 순종의 사랑을 통해 참 사람이자 참 하느님이 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참사람의 원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초대를 사양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그대로 세상 탐욕에 가득한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 큰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을 비울 절호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대로 오늘날 비워야 할 비움의 여정 대신 채움에 중독된 채움의 여정을 사는 현대인들을 닮았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빈자리는 여전히 남아있고 결국은 텅빈충만이 아닌 텅빈허무의 인생이 될 사람들입니다. 세상사에 채움에 중독된 사람들의 치유와 구원에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는 길 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면에서 하늘 나라 잔치의 예표인 날마다의 미사잔치 초대에의 참여는 비움의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 지요!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을 비우고 천상 미사잔치에 참여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참으로 내면이 비워져 있을 이런 불우한 이들을 하늘나라 잔치에 입장시키라는 것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하는 하느님의 갈망에서 그분의 한량없는 구원의 사랑을 배웁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 역시 욕심에 중독되어 초대를 사양한 현대인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냉담을 풀고 미사잔치의 초대에 응하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세상 탐욕을 비우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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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은 잔치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 14,23)
삶은 잔치다
내 곁에 너
네 곁에 나
그래야
삶은 잔치다
내 곁에 너
네 곁에 나
그래서
삶은 잔치다
내 곁에 너
네 곁에 나
삶은 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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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루카 14,15-17)
하늘 음식인 예수님 말씀
거룩한 ‘사랑’이야말로 숭고하며 구원의 힘을 지닌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
아가페,곧 ‘사랑’은 실제로 하늘 음식이며 ‘말씀’께서 베푸시는 잔칫상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7-8).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도(1코린 13,8 참조) 사랑은 이 모든 맛 좋은 양념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한결같이 내려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제가 없어지고 말 양식(1코린 6,13 참조)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량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모든 법과 말씀이 사랑에달려 있습니다(마태 22,40 참조). 여러분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마르 12,30-31 참조) 하늘에 마련된 잔칫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잔치는, 성경에 나와 있듯이, 저녁 식사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도 사랑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사랑은 아니며 다만 서로 나누는 착한 마음의 표현일 따름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하느님은 위대하고 우리의 언어는 보잘것없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입을 디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까지 제시된 열두 개의 설교 가운데, 엑카르트가 본 설교에서 죄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하느님과의 그러한 관계는 하느님을 억누르게 마련이다. 모든 투사의 행위는 하느님을 억누르는 일에 종사한다. 남에게, 특히 신적인 타자에게 무언가를 투사하는 행위는 죄스러운 의식에서 비롯된 행위다. 그것은 남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다. 하느님에 대하여 마구 떠들어 대는 자들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하느님 아닌 분으로 전락시키는 둘째 경우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 때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우리의 몸피로 축소시키는 짓이다. 그러한 하느님은 예배할 가치도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나는 그를 하느님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을 넘어선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지식보다 크다. 하느님이 ‘숨어 있는 하느님으로 머무는 것은 이 때문이다. (273)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으로 존재하신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모든 시간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알파요 오메가이고,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당신은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제가 당신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영원한 사랑으로 보여주시니 당신을 흠숭하며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그와 같은 사랑으로 저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시나이다. 오 예수님! 저는 흘러가는 시간을 관상하면서 성 바오로가 저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을 깨닫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띠라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7)
0 예수님, 천지창조 이전부터 당신을 위하여 저를 뽑으셨으니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찬양받으소서.(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77)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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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4,15)라고 질문 아닌 이루어질 기대와 희망을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들의 선조 대대로 이어져 오는 선민사상을 근거로 이를 확정적인 사실처럼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도 구체적인 사례와 더불어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 그 사람에게 당혹스럽고 지극히 부정적인 뉴앙스가 짙게 풍기는 비유를 들려줍니다. 물론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 는 이 표현 자체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이고 모든 사람의 희망 사항이라고 봅니다. 누군들 이런 특별한 초대를 받지 않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런 영광스럽고 축복받은 자리에 앉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자 행복이라고 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자신의 표현으로 괜스레 벌집을 쑤셔 놓은 듯싶어서 당황스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비유는 즉 어떤 사람(=하느님을 암시)이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14,17)하고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보냈는데,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이 초대를 받고 각자 다른 이유를 대고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는 평소 예수님께서 당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들려준 구체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거절 이유는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의 한결같은 핑계이며 변명 사유와 같습니다. 첫째,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14,18)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은 썩어 없어질 것에 더 관심을 두는 현세적인 사람이라고 봅니다. 즉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않고(마태6,20), 땅에 쌓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렇게 물질적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12,20~21)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둘째,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14,19) 이렇게 말한 사람은 씨 뿌리는 비유(루8,7)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8,14) 사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늘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익, 곧 자나 깨나 물질적인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14,20) 솔직히 말해서, 장가를 든 것이 나쁜 일이나 나쁜 짓은 아니고, 막 장가를 든 사람의 관심이 당연히 사랑스런 아내와 함께 있고 싶지, 다른 것에 관심이 생길 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1코7,33)라고 사도 바오로께서 언급했듯이, 방금 장가를 든 사람은 “성적인 쾌락에 숨이 막혀”(8,14참조) 다른 것에 관심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와 사정으로 잔치에 초대받지 못함을 말했지만, 이 말을 전해들은 주인은 노하여 종에게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14,21)하고 주인의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 보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더니만 꼭 이 말처럼 처음에는 초대받지 못한,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초대받게 되었으니 오히려 초대받은 부류와 이 복음을 읽는 저희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지금도 이러한 반전이 필요한 세상이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스스로 쪽박을 차게 된 이들은 누구인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만 저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한 게 아니라, 이 비유에서 초대하시는 분이 바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라는 점과 그분의 종들에게 향한 당부에 드러난 마음입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14,23)하고 하신 말씀 가운데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더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는 당부에 드러난 하느님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으신 안타까우심과 함께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싶은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마음이 미어집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저희와 함께하시고 싶은 마음, 사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의 식사 습성이 잘 드러나 있는데, 첫째로 예수님은 혼자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둘째로 예수님은 누구하고라도 함께 드셨지만, 특별히 온갖 밑바닥 인생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드시기를 좋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사람 냄새가 나고, 가장 삶의 위로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과 자리는 다름 아닌 잔치 곧 식사 시간과 식사 자리라고 봅니다. 저희를 향한 마음을 한시라도 늦추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각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빼놓지 않으시고 모두를 다 초대해서 함께 기쁨과 행복을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거절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이내 즉시 초대에 응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준비되어 있고, 우리 모두 초대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식탁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저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가를 잊지 말고 즉시 초대에 감사하며 서둘러 응답하고 나아가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 모두도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성찬의 식탁에 초대받았고, 그 성찬의 식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둘러 미사에 나아가길 바랍니다. “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는 당신 신실한 당부 말씀이 제 마음을 미어지게 합니다. 당신 집에 머무는 이는 행복할 것이기에 저 또한 당신 집에 머물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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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잔치에 참여해 기쁨 나누는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41104. 19:48 ㅣNo.177326
어떤 이가 잔치에 정말 많은 이를 초대한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어떤 핑계를 대며서 그 잔치 참석을 거절한다. 그렇지만 그 양해가 어찌 궁색하며 어색하다. “밭을 샀는데 그것을 봐야 하오.” 보지도 않고 밭을 살 수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보려고 가는 길이오.” 소를 열 마리나 사면서 꼼꼼히 살피지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모두다 핑계이다. 초대한 이를 다들 우습게 여긴 게다.
초대받은 이들이 둘러댄 그 핑계들은 이처럼 정말 다양하다. 밭과 소를 샀고, 방금 장가들어서 갈 수가 없다나. 밭은 소유물이요, 소는 생활 꾸리는 기술이나 직장일 게다. 장가든다는 건 가정 중심의 생활일 테다. 물론 이 세 가지 다 어쩌면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하다. 세례 받은 우리도 ‘하느님 잔치’에 이미 초대받았다고 봐야한다. 그러니 막상 잔치에 참석하여 기쁨을 나누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는 정말 안 된다.
사실 유다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이란다. 그러나 정작 주님 초대에는 그 어떤 핑계로 응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와는 전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 역시 그들처럼 그럴싸한 핑계를 둘러가며 살기에. 교회 일을 부탁받으면 피하려만 든다. 할 수 있는 봉사도 바쁘다는 핑계뿐이다. 할 수 없는 게 아닌 그저 피하고 싶은 거다. 우리도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이다. 그 자격을 이미 얻었다.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저 받아들여야 할게다. 그게 구원으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하늘나라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누구나 다 들어간다. 유다인 그들만이 초대받았다 주장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다 개방되어 있단다. 그게 우리 예수님의 지상 순례의 목적이셨다. 처음에 초대받은 이들은 모두 다 하찮은 이유로 거절했다. 그들은 현실의 삶을 핑계 대면서 불참한 거다. 잔치 베푼 이의 초대를 무시한 거다. 이렇듯 구원의 장애는 핑계일 게다.
예수님 당대에도 여차하면 반대할 구실만을 정말 찾았나보다. 예수님 능력과 기적을 순간순간 보면서도 엉뚱하게 뒤틀며 대들었다. 어쩌면 안 보아도 될 한쪽만 본 편견이었다. 그래서 구원의 잔치를 거절했다. 우리 역시 핑계 만들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성당 일 부탁받으면 그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피하려만 하고, 기도하면서도 꼭 난처한 표정들을 짓는 것이 아닌지?
암튼 우리도 언젠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세례로 이미 그 자격을 얻었다. 그것은 순전히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라는 주님 그 사랑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격에 어울리는 이답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하리라. 불공평도 받아들이고 억울함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사용하여 주님섬기고, 오만한 생각 버리고는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자. 궁핍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며, 형제애로 서로 아끼고 서로 존경하자. 그리고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자. 이런 우리 모두는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 잔칫상의 음식을 맛보게 될 게다. 그렇게 산다면 ‘구원의 힘’은 반드시 우리 삶을 격상시키리라. 이러게 세상 삶이 다 중요해도 하느님 따르는 것보다는 결코 앞설 수 없다. 하느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 나누는 것을, 우리 삶에서 가장 우선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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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는 이들의 준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 준비되어 있더라도 그 초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하느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맞으실 잔치를 다 준비하셨지만, 정작 초대받은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유에서,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별 관심이 없으며, 세상살이에서 중요하다는 일들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이들은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들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 이유들은 합당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잔치보다 더 앞세운 일들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필수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당하고 중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초대를 외면하게 한다면 악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시선을 두고, 그들을 돌보도록 부름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는 한 형태입니다.
그 초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 부름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 그들을 도우려는 선의는 있지만, 중요하고 합당한 여러 이유로 그 초대를 미루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들을 제쳐 두고 초대에 응한다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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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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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잔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즉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나에게 중요한가?
예수님께 말한 사람은
왜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을까?
오늘 복음을 듣다보면
어제 복음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자
주인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순서는 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어제 우리가 잔치를 베풀 때
초대하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잔치에 보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보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고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습니다.
돈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잔치에 참석할 의지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배고픔, 나의 목마름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행복한 이유는
나의 필요를 거저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중해서
그 잔치에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중요하게 보지 않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스스로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열쇠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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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사이클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측의 거부, 하느님의 진노, 이스라엘의 회개,
그러나 또 다른 배신과 타락, 그리고 우상 숭배,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 또 다시 이어지는 하느님의 초대, 그러나 은혜로운 초대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하느님 나라의 큰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또 다시 그 중요한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몇 평 되지도 않는 밭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땅이 하늘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원한 생명을 몇 푼 안 되는 부동산과 바꿔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근에 산 겨릿소 다섯쌍을 부려봐야 된답니다.
보아하니 일 중독에 빠진 사람입니다.
일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나 영혼의 양식, 영원한 생명마저도 뒷전입니다.
과도한 일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막 결혼한 새신랑이었습니다.
그의 온 정신과 마음은 오로지 인간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본능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가장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가장 밑바닥 인생들로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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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하늘의 음식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증거된다. 그 사랑은 실제로 하늘 음식이며 말씀이 베푸시는 잔칫상이다. 사랑은 모든 맛 좋은 양념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한결같이 내려오고 있다. 모든 법과 말씀이 사랑에 달려있다(마태 22,40).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마르 12,30-31) 하늘에 마련된 잔칫상을 받을 것이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이들의 기쁨과 평화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먹으면 몸 밖으로 나오고 마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다. 누가 여기 앉을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5절) 그 사람은 누구일까?
잔치를 차리고 우리를 초대하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람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아드님은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17절) 하고 손님들을 부르신다.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선물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셨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18절) 그들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때문에 핑계를 댔다. 사람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일은 보지 못하고 있다. 집주인은 건방진 부자들에게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돌아선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초대를 가볍게 여겨 거절하였고, 그 초대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서 갔고, 이어서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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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본당 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는 가장 완전한 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이 누구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돈에, 어떤 사람들은 명예에,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 집착하여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미사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라고 하십니다. 이전에는 집사람들과 친척들을 불렀다면, 이제는 ‘한길과 골목’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한길과 골목은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이번에는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라고 명령합니다.
점점 더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집 안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런데 큰길로 나아가 그들을 데려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가난한 이들이야 부족한 게 많아서 잔칫상에 쉽게 나오겠지만,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냉담자 회두, 가난한 이들을 향한 선교, 그다음은 길거리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가두선교의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께서 그 본당에 충만히 활동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이 가두선교입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자에게 그만큼 성령님을 부어주십니다.
모세에게는 엄청난 성령의 힘을 지팡이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지팡이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바다도 갈랐습니다.
그 힘을 통해 한 것은 무엇일까요? 서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갈라질 수 없었습니다.
모세를 따르지 않으면 만나도 먹지 못하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불만도 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과 계약을 이루어 계약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밖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런 의도를 가져야 합니다.
매일 강론하는 이에게 성령을 더 주실까요, 아니면 평일 강론은 안 하고 주일 강론도 그냥 자기 생각만 말하는 사제에게 성령을 더 주실까요?
우리 의도가 중요합니다.
본당이 결국엔 밖으로 나아가 선교하겠다는 열정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명에 맞는 성령은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러한 본당에 어떤 일을 이루실까요? 대구교구 이판석 신부님은 지산성당에 있을 때 가두선교를 통해 7년간(1995~2002) 3,2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당이 하나 분가될 수 있었습니다.
2007년엔 서울 성내동 성당에서는 60일간 가두선교를 하여 5,000명에게 안내 책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1,600명에게 자기소개서를 받았고 그중에서 400명이 입교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중 30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그만큼 큰 희생과 용기가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이 성당에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본당의 일치입니다.
일치된 본당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 집을 어떻게 해서든 가득 차게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성령으로 본당이 일치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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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먹기 싫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먹이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하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16ㄴ-24).”
1) ‘혼인 잔치의 비유’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비교이기도 하고, ‘영원한 것’과 ‘허무한 것’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들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구원이냐? 멸망이냐? 사느냐?
죽느냐?’ 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런 일만 신경 쓰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의 가르침도 같습니다.
‘잔치’ 라는 말 때문에 긴박감을 못 느낄 수도 있는데, 그 잔치가 시작되는 날은, 사실은 재림과 심판 날입니다.
곧 닥칠 심판을 대비하지는 않고, 밭을 보러 가거나 소를 부려 보려고 가는 것 등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장가를 드는 것’ 자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혼의 행복감에 빠져서, 다가오는 심판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2) 그런데 종말, 재림, 심판 같은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 승천 후에 너무 긴 세월이 흘러서 그런 것인지, 긴박감을 느끼거나 긴장하기는커녕 ‘늘 듣는 상투적인 말’ 정도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허무한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신앙생활은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영원한 것’을 잊어버리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신경 쓰면서 산다면, 허무한 것들이 정말로 허무하게 사라질 때 그것들과 함께 허망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 생명을 얻기만을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게 됩니다.
3) 이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 나중에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면,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나중에 초대받아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에 신앙생활을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4)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참석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서 강제로 참석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성체를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성체를 먹이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붙잡혀서 끌려가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원하고 노력해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잔치는 스스로 희망하고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참석하는 잔치이고, 그 잔치의 음식은 먹고 싶어 하는 사람만 먹게 되는 음식입니다.
따라서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먹기 싫다면서 안 먹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내 잔치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일은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 음식을 못 먹는 것은 주님께서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안 먹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이, “먹기 싫으면 먹지 마라.” 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그 심정과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쪽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고 절망하는 것도 전적으로 인간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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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던 어떤 사람이 기쁨에 겨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술 한잔 기울이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 하나도 이렇게나 행복한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에 초대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마도 그런 생각으로 내뱉은 말일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 비유는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에 먼저 초대되었던 이들이 다른 일에 눈이 멀어 참석을 거부하자, 결국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빗댄 비유이지요.
그 비유를 보면 초대를 거절하는 이들의 답변이 각양각색입니다. 여기서 밭은 재산, 겨릿소는 일, 장가는 사랑과 가족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보다 당장 재물을 더 얻는데에, 더 많은 일을 하여 실적을 올리는데에, 자기 가족과 욕망을 챙기는데에 더 열을 올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지요. 각각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첫째 사람은 밭을 둘러보겠다고 합니다. 밭은 재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는 ‘땅’입니다. 즉, 밭을 샀다는 건 자기가 마음 편히 머무를 땅이 생겼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맨 끝에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삶이 안정되자, 이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야훼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잊어버리고 풍요로운 소출을 얻게 해주는 이교신 바알에게 눈을 돌리지요. ‘배부르고 등 따수우니’ 첫 마음을 잃어버린 겁니다. 주인에게 처음 초대받았던 순간의 기쁨과 설렘을 잊어버린 모습입니다.
둘째 사람은 겨릿소 다섯쌍을 부려보러 가겠다고 합니다. 겨릿소 다섯 쌍이면 크고 힘 센 소 열 마리입니다. 성경에서 ‘열’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지요. 농사와 건축 등 삶의 기반을 닦는데에 큰 도움을 줄 훌륭한 도구를 든든하게 갖추고 나니 두려울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제 힘과 능력을 믿고 삶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 여기며 잔뜩 교만해져버리니, 자기를 귀한 잔치에 불러준 임금에게 감사하던 마음은 먼지처럼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셋째 사람은 장가를 들어서 잔치에 못간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가리키지요. 즉 그는 하느님과 맺은 믿음과 순명의 계약을 파기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을 기준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은 겁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내 삶에 관여할 수 없으며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에 빠진 모습입니다.
이 세 사람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에 참여함을 행복과 영광으로 여긴다는 그 사람에게 그 마음이 진정 간절한지, 세상의 여러 유혹과 욕심 앞에서도 그 마음이 변치 않을 수 있겠는지를 물으시는 듯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그분의 뜻이 아닌 나의 뜻을 먼저 추구하려 드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할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번번히 거절당하시고 나중으로 밀려나시면서도 다시 또 다시 우리에게 구원의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꺼뜨리지 않도록 쓸 데 없는 욕망을 자제하며 하느님의 뜻에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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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초대받은 사람들”
우리는 살면서 흔히 경험하지만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서로 등을 돌릴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먼저 손을
내밀며 ‘내가 심했어.’ 아니면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서먹한 관계에서 먼저 전화로 ‘언제 시간 나면 식사라도 할까?’라고 말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제안하거나 초대했다가 거절당하는 수모를 당할까 두려운 것이지요.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 때, 싸늘한 시선이나 아니면 그 보다 더 큰 말로 상처를 입을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데?’ 아니면 ‘내가 굳이 먼저 사과해야 되?’라는
심정에 닿으면 손을 내미는 것은 당분간 물 건너 간 일입니다.
한 부부가 도시에 있다가 시골에 멋진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 정답게 보이는 동네에 떡을 배달할까 하다가 부부가 손수 음식을 마련해서
동네 분들을 초대하며 인사하기로 했습니다. 컴퓨터로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발휘해서 초대장을
만들어 신나게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저녁에 한 집인가 오고는 다 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부부가 가졌던
서운함과 함께 ‘이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하는 난감함에 갇히는 심정을 세월이 가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 사람들의 텃세가 그 모양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몇몇 악따구리 같은
사람들이 선동을 해서 ‘지까짓 것들이 도시에서 잘 살았나봐!’라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온 그 동네 사람들을 선동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화해이든 초대이든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상대로부터 거절 당하면 섭섭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심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잔치 초대의 비유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람의 심리를 볼 수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를 했는데 사람마다 제각기 핑계를 대고 이유를 붙여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의 비유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루카 14,18-20)
그것이 합당하고 이해 할 만 하다해도 초대한 사람의 심리는 서운한 것은 공통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내며 종들을 동네의 한길과 골목으로 까지 보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가난한 이들, 장애인,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까지 다 데리고 오라고 시킵니다.
구약의 정서로는 구원에서 빗겨간 소외된 가난한 이들이지요. 그래도 잔치 자리가 남자 주인은
다시 종들을 큰 길과 울타리 쪽까지 보내며 사람들을 더 초대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에서 주인의 말을 인용하시며 당신의 뜻을 전해주십니다.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24절)
물론 주님께서 처음 초대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직접적인 말씀을 않으시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사람들에게 보내듯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자들을 백성에게 보내셨지만 사람들은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갇혀 있거나 배타적이던 당신
구원을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쁜 메시지를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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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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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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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모든 성도가 지도자처럼 사는 삶
<2024.11.5> 아침을 여는 묵상 (딤전 3:1~7절)
❝모든 성도가 지도자처럼 사는 삶❞
❚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성품을 갖춘 지도자답게 건강한 교회를 향해 힘써야 합니다.
✔ 어떤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1절).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인 ‘감독’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만약 누군가가 감독의 직분을 얻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감독이 된다는 것은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얻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즉, 감독이 세상적인 지도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직분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따라 살아간다면, 그들 역시 지도자와 같은 삶을 사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선한 일을 사모하고, 선한 일을 삶으로 실천해 내야 합니다. ‘선한 일’은 도덕적으로 탁월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합당한 일들을 말합니다. 나아가 육에 속한 일이 아니요, 영에 속한 일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을 말합니다(롬 8:5). 이처럼 공동체의 지도자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기를 지속적으로 열망해야 합니다. 혹, 이전에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이제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사모하는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임을 깨달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지체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2~5절).
감독이 교회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감독’은 문자적으로 ‘위에서 바라보는 자’라는 뜻으로, 지역의 여러 가정 교회를 섬기는 지역 교회의 지도자요 대표자입니다.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격 요건들을 갖추어야 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합니다(2절). 즉,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안된다(쉬운성경)는 것입니다. 감독은 돌보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잘 다스려야 하며, 나그네를 대접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잘해야 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균형을 위해 절제나 신중함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술이나 돈을 의지하거나 폭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3~4절). 감독의 직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신중히 돌보아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교회를 돌볼 자격이 없다는 것(5절)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하지 못하는 법입니다(마 25:23).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의 대표로서 예수님을 닮은 면모를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철저히 우리 자신의 삶을 절제하고 매사에 신중하며 세상의 부요함이나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관용과 섬김으로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뜻을 붙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먼저 진리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 예수님을 닮은 면모가 나타나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그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내 자신의 만족과 이익과 욕망을 위한 삶이 아니라 또한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지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 위에 굳건한 믿음을 세우도록 돕는 역할을 잘 감당하는 지도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세상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6~7절).
바울은 감독이 갖춰어야 할 자격을 말한 후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는 감독으로 세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즉,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교만을 언급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감독으로 세워질 경우, 그가 교만해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6절). 또한 감독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마귀의 꾀임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7절).
감독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아무리 선하고,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믿음에 굳게 서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세울 때에는 열정이나 수고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지식과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한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데 지도자가 본을 보일 수 없다면 진정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으며, 참된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어떠한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신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주님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라고, 어둡고 썩어져 가는 세상을 바꾸라고 우리를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로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세상이 주님의 밝은 빛으로 가득 넘쳐나도록 세상을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답게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선한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어둡고 썩어져 가는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딤전 3: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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