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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사기, 2천 년의 비밀』
《사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원전 104년경에 시작해 기원전 90년까지 14년 동안 ‘사마천’이라는 사람이 기록한 중국 고대 역사서라는 것을 말이다. 《사기》에는 담긴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22대 정조는 《사기》를 해석하고 『사기영선』이라는 책을 썼는데, 너무 두껍고 난해한 것 같아서 집었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언제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2022년에 이덕일 선생이 쓰고 「만권당 출판사」가 출간한 이 책은《사기》를 해석하면서도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는다고 한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흥미가 생겨 이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사기》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책을 읽으며 알게 되겠지만, 그보다 먼저 《사기》가 어떤 책인지부터 알아보자. 《사기》이전에 이미 중국에는 《춘추》,《국어》등 여러 역사책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왕조실록을 기록한 것으로 ‘편년체’로 써졌으나, 《사기》는 ‘기년체’로 썼다. 편년체 기록 중에 가장 방대한 책은 『조선왕조실록』으로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장구하고 방대할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무려 1,893권, 888책으로 기록했다. 실록 편찬에 관한한 조선이 최고다.
사마천은 역사를 연·월·일 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 대신에 「본기」「표」「서」「세가」「열전」등 다섯 항목으로 나눠 서술하는 기전체로 썼는데, 「본기」는 황제의 사적, 「표」는 연표, 「서」는 천문(天文)과 경제 등을, 「세가」는 제후들의 사적, 「열전」은 신하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기전체로 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상고 때부터 사마천 자신이 살던 한대(漢代)까지 역사를 모두 기록한다는 것이 너무 방대하고 어려웠을 수도 있고, 편년체로 국체별(國體別)로 적는다면 자신이 나타내고자 한 뜻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사기》「본기」에는 처음에 「진시황본기」가 있다. 여기에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운 진왕(秦王) 영정(瀛政)이 자신에게 붙일 호칭에 대해 의논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승상 왕관, 어사대부 풍집, 정위 이사 등이 “지금 폐하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잔적을 처벌하고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군현과 법령을 통일하셨으니, 일찍이 삼황오제께서도 미치지 못했던 일입니다. 왕은 태황(泰皇)이라 하고, 명(命)은 제(制)라고 하고, 영(令)은 조(詔)라고 하고, 천자께서 자신을 칭함은 짐(朕)이라고 하소서.”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왕관·풍겁·이사 등이 삼황에 대해 언급하였다고 한다. 이들도 삼황에 대해 알았는데, 사마천이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 ‘비밀’이라면 비밀이다. 중국 상고사를 기록한 《사기》에 중국의 시작을 삼황부터가 아니라, 오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기》「오제본기」에는 오제 중 첫 번째인 황제 이전에 이미 신농씨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도 ‘비밀’이라면 비밀인 것이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오제 이전에 삼황(三皇)이 있다고 보았다. 사마천은 황제(黃帝)를 시조 왕이라고 보았는데, 물론 이 황제는 진시황 같은 황제(皇帝)가 아니다. 황제 앞에는 신농씨가 있고, 신농씨 앞에는 복희씨가 있다고도 믿어 왔다. 사마천이 중국 태초, 고대 역사 계보에서 삼황을 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성이 강(姜)인 강태공은 씨는 여(呂)이고, 이름은 상(尙)이며, 자는 자아(子牙), 호는 비웅(飛雄)이다. 이 강태공에 대해 현재 중국의 백과사전인 「백도백과(百度百科」는 “장자아는 본명이 강상인데, 곧 동해 바닷가 동이족 출신이다. 상나라 사람들과 같은 혈통 연원을 갖고 있다.”라고 짧게 기술하고 있다.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이 말은 첫째 강태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으로 추론하면 시조인 신농씨 역시 동이족일 수밖에 없고, 둘째 상나라 곧 은나라 사람들 역시 동이족이라는 것이다.
강자아(강태공)는 주나라 개국 원훈(공신)으로 병법에 능했지만, 상나라가 그를 쓰지 않자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며 세월을 낚다가 서백후 희창(姬昌)을 만났는데, 희창이 주(周)나라 문왕으로 추존된 무왕의 아버지이다. 문왕의 성은 희씨로 강씨와 같이 계집녀(女)가 들어 있다. 모계사회였던 동이족이었다는 것이다. 희창은 강자아가 병법에 능한 것을 알고, 군사를 관장하는 태사(太師)에 등용했다. 《사기》「제태공세가」는 강자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태공망 여상은 동해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벼슬)이 되어서 우임금이 홍수와 토지를 평정하는데 보좌해 많은 공로가 있었다. 우나라와 하나라 시대에 여(呂)로 봉해졌다고 하며 성은 강씨였다.”
‘동해 사람’강자아, 즉 태공망이 나중에 제나라 제후로 봉해짐으로써 여기를 동해라고 한 것으로 지금의 산동성, 임치 또는 태산이 있는 곳을 말한다. 공자도 여기 사람이다. 사마천은 오제 이전에 신농씨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를 빼버리고, 이후인 황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동이족을 중국 최초의 시조로 삼는 것을 꺼려한 때문인 것이다. 신농씨보다 앞서는 삼황의 첫 번째는 태호(太昊) 복희(伏羲)씨로 많은 사료들이 이들을 꼽는다. 「백도백과」에는 태호 복희씨에 대해 “복희는 삼황 중의 한 명인데 여와와 함께 사직의 복을 비는 정신(正神)이다. 초백서에는 세상을 창조한 창세신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문헌에 기록된 창세신이다. 성은 풍(風)이고, 이름은 복희 또는 희황, 황희 등으로 칭했고 《사기》에는 복희라고 했다. 후세 조정과 관방에서 ‘태호 복희씨’라고 불렀는데 ‘청제 태호복희’[즉 동방상제] 라는 일설이 있다.”고 했다.
산동성 임기시에는 「동이문화박물관」이 있다. 여기에는 삼황오제에 맞추어 고고유적을 설명하고 있는데, 동이족 유적이 후리문화(기원전 6500∼5500)에서 비롯되어, 북신문화(기원전 5500∼4300)을 거쳐 대문구문화(기원전 4300∼2300)을 거쳐, 용산문화(기원전 2600∼2000)로 이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역사의 흐름이 후리문화→복신문화→앙소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상문화로 이어진다고 한 것이다. 중국문화의 원류라고 하는 황하문화는 여기에는 없다. 복신문화와 대문구문화 후리문화·용산문화 시기에 치우·전욱·제곡·우순 시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은 과거 동이문화를 애써 감추었지만, 이제는 동이문화도 중국중심 하화문화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용해 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것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말이다. 동이족의 민족귀속성이 중국인이 아니라 현재의 한국인에게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국인 선조들이 쓴 『후한서』나 『삼국지』「동이열전」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삼한, 왜는 이른바 하화족과는 다른 동이족 국가라고 설정했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봉건정권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재의 일본인을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만큼 억지 주장으로 설득력이 전혀 없다.
삼황을 빼고 오제(五帝)로부터 시작한 중국 역사에서 오제부터 하·상·주에 이르는 과정은 계보가 조금 복잡하지만, 황제에 이어 소호-교곡-제곡-설(상나라 시조)·기(주나라 시조)·우(하나라 시조)가 뒤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오제본기」에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전욱이 아들을 낳았는데 궁선이다.”고 하고는 “궁선은 전욱의 뒤를 잇지 못하고 조카인 제곡이 뒤를 이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다시 “제곡 고신씨는 황제의 증손이다. 고신의 아버지는 교극이다.”라고 하고는 “교극의 아버지는 현효(소호)이고, 현효의 아버지는 황제이다, 현효부터 교극까지는 모두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교신씨에 이르러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당연히 황제의 아들이 제위를 이어야 하는데도 왜 뒤를 잇지 못한 것일까?
오제 중 첫 번째였던 황제의 증손 제곡에 이르러, 제곡은 왕비를 네 명 두었는데, 첫째 왕비가 강원, 유태의 딸로 주나라 시조 기(후직)를 낳았고, 둘째 왕비 간적은 유용의 딸인데, 은나라 시조 설을 낳았고, 셋째 왕비 경도는 진풍의 딸로 요를 낳았다. 그런데 제곡의 맏아들은 추가씨의 딸인 넷째 부인 상의가 낳은 지(贄-堯)라고 하였다. 당연히 첫째 부인이 낳은, 주나라 시조 기가 뒤를 이어야 함에도 맏아들을 지라고 했으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기와 재위를 이은 요사이에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왕위를 선양하는 것은 유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왕위계승 방식이지만, 이는 후대 유학자들이 윤색한 것이고, 실제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합리화한 경우가 많았다. 기와 지 사이에도 찬탈의 경우가 있었거나, 선양한 경우가 있었을 텐데, 사마천보다 100년 더 전에 살았던 ‘한비’(서기전 280∼233)는 『한비자』에서 “순이 요를 핍박하고 우가 순을 핍박하고, 탕이 걸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紂)를 쳤는데, 이들 네 왕들은 신하로서 왕을 시해하였으나, 천하가 그들을 명예로 받아들였다.”고 해 요·순은 물론 순·우의 교체도 선양이 아니라 폭력에 의한 것이라 했다. 또 당나라 시대 ‘유기지’도 “『서경』요전(堯傳)에는 재위에서 물러나려고 순에게 양보했다고 했지만, 「금총쇄어」에는 순이 요를 추방했다”고 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는데, 이름을 수요(囚堯-요를 가둠)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요가 순에게 양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사마천은 유가의 시조 공자의 맥을 이어 왕위를 선양에 의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또 그것을 찬양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피바람이 불고 왕위 쟁탈이 있었다고 기술한 역사서도 많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공식 견해를 담고 있는 『백도백과』에는 소호 금천씨에 대해 ‘하화의 인문시조’라고 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동이부락의 수령이 되었는데, 호는 김천씨다.”라고 했다. 하화의 시조가 동이부락의 수령이라니, 이는 상호 모순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역사공정에 나선 중국의 고민이 읽히는 부분이다. 이런 고민은 사마천도 했던 것으로, 재위에 오른 동이족 소호를 삭제하고, 하화족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당서』「재상세계(宰相世系)」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씨는 희성(姬性)에서 나왔다. 황제의 아들 소호 청양씨의 다섯 번째 아들 휘(揮)는 궁정인데, 처음 궁시(활과 화살)를 만들어서 그 자손에게 장씨(張氏)성을 하사했다. 주(周)나라 선왕 때의 경사 장중이 있고, 그 후예들이 대부로서 진나라를 섬겼다.”고 하고, 또 “소호의 어머니 누조는 서릉씨로 유교씨의 후예라고 하고, 유교씨의 어머니는 여와씨”라고 했다. 여와씨의 출생지가 현재 하남성 상구시로 상구시는 동이족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당연히 소호 김천씨는 동이족인 것이다.
소호 김천씨가 신라 김씨 조상이라는 것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김유신 열전」에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 김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다’라고 했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전하지 않는 김유신 비문은 신라 국자박사 설인설이 지은 것으로, 박거물이 짓고, 요극일이 글씨를 쓴 삼랑사비문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설인설 등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두 신라인들이다. 이런 비문에 김수로와 김유신에 대해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라고 했다면, 이것을 거짓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 『사기』에는 진시황의 진나라도 소호의 후손이라고 했다. 소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진·조 등이고, 가야도 신라도 소호씨 후손들이 세운 것이 된다. 다만 신라와 가야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연구가 필요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동이족 오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주서』「백제열전」에는 “백제왕이 매 계절의 중월(음력2,5,8,11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오제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 지낸다.”고 했는데, 백제가 오제의 신에게 제사 지냈다는 것은 오제의 후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원을 떠나 만주와 한반도, 일본 열도로 이주하면서, 직접적인 조상인 시조만을 높이고 나라의 시조 오제를 잊어갔던 것이다.
중국에서 ‘중국’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사기』는 순이 제위에 오르는 광경을 「오제본기」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정월 초하룻날 순은 마침내 문조에서 재위를 물려받았다. 문조는 요임금의 대조이다.”고 하여 종묘에서 요임금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요가 제위에 오른지 70년 만에 순을 얻었고, 20년 후에 늙게 되자 순에게 정사를 대신하게 하고 하늘에 추천했다. 제위에서 물러난 지 28년 후에 붕어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요임금은 얼마를 살았다는 것이고, 왜 아들에게 양위하지 않고 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일까?
「오제본기」는 요임금이 세상을 떠난 후에 순이 즉위하지 않고, 요의 아들 단주에게 제위를 양보하고 하남 남쪽으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는 단주에게 사양하고 남쪽으로 갔으나, 제후들이 모두 순을 추종하여 부득이 ‘중국’으로 가서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사기』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중국 용례다. 그것은 제왕이 도읍한 곳이 중심(中)이 된다는 것으로 ‘중국은 제왕이 도읍한 곳’이라는 뜻이다고 했지만 이것은 후대의 주장이고, 사마천이 중국이라 한 것은 하화족의 통사로서 나라의 시작을 중국이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즉 황제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황제 때는 중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다가, 순이 제위에 오를 때 비로소 중국이라는 표현을 썼다.
순임금의 계보는 아주 복잡한데, 공자나 사마천이 선양설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아마도 요에서 순까지 이어지는 혈통 계보가 너무 길고, 복잡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황제의 제위를 둘째 아들 창의의 아들인 전욱이 이었고, 다시 황제의 큰아들 소호의 손자 제곡이 이었다고 했다. 제곡의 제위는 막내아들 요가 이었고, 다음은 전욱의 7세손 순이 이었다고 했는데, 1대 황제로부터 4대 요까지는 그나마 아들 손자가 이었지만, 요와 순 사이는 같은 혈통이라고 하기도 너무 먼 사이였다. 게다가 전욱의 7세손이 바로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가 없다. 전욱은 오제 중 2대 군주인데, 아들 궁선부터는 서인이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어쨌든 오제 순위는 황제-창의-전욱-궁선-경강-구망-교우-고수-순으로 계승되었다.
사마천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한 것을 높이 평가했지만, ‘순이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 구절에 대해서도, 도읍지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사기』는 순임금이 제위에 오르기 전 행적을 상세히 적고 있다. 순 또한 요처럼 제위를 세습하지 않고 선양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순임금의 아들은 상균인데 불초했다. 순임금이 미리 우를 천자로 추천하고 17년 만에 붕어했다. 3년상을 마치고 우가 또한 순임금의 아들에게 제위를 양보했는데, 순임금이 요임금의 아들에게 한 것처럼 했다. 제후들이 우에게 귀의한 연후에 우가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렇게 요과 순에게 선양한 것과 똑같을까?
『사기』는 순이 우에게 제위를 넘겨주었으며, 순의 아들 상균은 제후가 되었다고 했다. 하남성 우성시에 상균사(尙均祠)가 있고 오랫동안 이름이 상균왕묘였다. 불초해서 제위를 물려받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시사한다.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과 공자를 높이 평가한 사마천이 요가 순에게 양위했고, 순이 우에게 양위했다는 선양설을 후대 임금들에게 바람직한 권력 이양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설정일 수가 있다. 사마천은 순이 하화족 기틀을 세운 군주로 사흉이라 일컫던 공공, 환두, 삼묘, 곤을 유배 보내고 어질고 능력 있는 고요를 등용해 오형을 맡겼고, 대우를 등용해 치수를, 후직에게 농사를, 설에게 오교를 맡겼다고 했는데, 이는 이민족을 처벌하고, 기틀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칭송되었는데, 처벌된 이들이 이족이라 하더라도, 동이족인 순이 같은 이족들을 처벌하고 다스린 것에 불과하지 하화족이 이족을 다스린 것은 아니다. 유학자들과 사마천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중국 고대사에서 오제의 맏이인 황제와 치우의 싸움은 매우 중요한데, 둘은 모두 동이족이지만, 중원의 패권을 두고 싸웠다. 이들이 싸운 곳은 탁록으로, 탁록은 현재의 하북성 탁록현으로 보는 견해와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으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이곳에 치우릉이 있고 두 지역은 서로 멀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치우는 포악해서 황제에게 정벌 당했다는 인물인데, 송나라(420∼479)때도 백성들이 매년 10월 치우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후대의 기록은 치우의 목을 벤 후에는 사방 모두가 황제에게 복종했다고 하는데, 사마천은 황제도, 신농도, 치우도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제보다 유명한 동이족은 신농과 치우였고, 특히 치우는 동이족 군주였다. 그는 이들을 물리친 황제를 하화족 시조로 설정해 중국사 계통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사마천이 중국과 만이를 구분한 화이관(華夷觀)에 그대로 나타난다.
제후가 아닌데도 공자를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에 편입하고, 비록 때로 유학의 틀에서 벗어난 「화식열전(貨殖列傳」이나, 「유협열전(游俠列傳)」등도 서술하여 비판도 받지만, 근본적으로 화이관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관념이 주나라에 이어졌고, 주나라 도읍인 낙양과 그 부근 황하를 중심으로 화(華)라고 하고, 주변부를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나누어 불렀다. 그렇지만 전국시대에도 이런 구분은 통용되지 않았다. 전국 7웅 대다수가 이족이었기 때문이다. 주나라도 맹자가 말한 것처럼 서이(西夷)출신이고, 동이족은 제곡의 후손이므로 화와 이를 나누는 화이관이 실재할 수 없었다.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진도 소호의 후손으로 화이관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을 세운 유방은 달랐다. 어머니 유온(劉塭)의 성을 따랐을 정도로 부계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중원의 유씨들은 자신들의 선조로 요임금을 꼽는다. 요임금의 후예라고 하면 동이족이다.
(여기까지 읽고 조금이나마 이해된다면, 중국 역사를 다소나마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줄이다 보니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어렵다면 더 이상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2023.6.12)
앞서도 언급했지만, 왕위를 선양한 것인가, 찬탈한 것인가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국 건국 신화에 따르면 하나라의 건국 시조는 우禹다. 순이 33년간 제위 하다가 우에게 선양했다고 하는데 우는 남쪽을 순행하다가 죽은 순의 3년상을 치른 후, 소읍인 양성으로 피신해 제위를 순의 아들인 상균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제후들이 상균을 따르지 않고 우를 추대하므로 쉰세 살에 즉위하고 지금의 산서성 하현 안읍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하(夏)라고 했다. 《사기》「하본기」에는 “하우의 이름은 문명(文明)이다. 우의 아버지는 곤이고, 곤의 아버지는 전욱이다.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이고, 창의의 아버지가 황제다. 우는 황제의 현손이고, 전욱의 손자이다. 우의 증조부 창의와 아버지 곤은 모두 제왕에 오르지 못하고 남의 신하가 되었다.”고 했다.
창의의 조상이 소호 김천씨로 동이족이다. 후손인 우 역시 동이족일 수밖에 없다. 우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禹라는 글자가 군주라는 뜻 외에 벌레(虫,蟲)라는 뜻을 함께 지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최상위와 최하위의 뜻이 함께한다는 것은 이족임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가 세운 하나라를 근거로 중국 한족들은 자신들이 ‘하화족’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의 출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의 사료들은 한결같이 우가 이족(夷族)이라고 하고, 현대의 학자들도 우가 세운 하와 상나라는 서이 또는 동이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은 하족과 화족을 나누어 둘이 융합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하화족 자체가 이족으로써 사실을 부정하려다 보니 나오는 이론들이 빈약하다.
하나라 왕들의 기록인 「하본기」에는 오제부터 우에 이르는 혈통을 기록하고 이들은 모두 동성이라고 했다. 제왕의 계보는 ‘황제→전욱→곡→요→순→우로써 이들 모두 같은 성이라는 것이다. 이 중 황제의 큰아들 소호와 순이 동이족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없다. 황제의 큰아들이 동이족이면 아버지 역시 동이족이고 손자도 동이족일 수밖에 없다. 요 역시 동이족이다. 황제부터 순·우까지 동이족의 역사로, 당나라 때 배인이 기록한 『사기집해』에는 “외전에 황제는 스물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성씨를 얻은 자는 열네 명이다. 스물다섯 명 아들 중에서 두 명이 동성인 희씨이고, 열한 명은 열한 개의 성씨가 되었다. 유,기,등,침,임,순,이,길,현,의가 그것이다. 나머지 열두 개 성씨는 덕이 박해서 기록되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성은 희성인데, 주나라를 세운 문왕과 왕족의 성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은 오제시대의 편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황제시대는 기원전 4420∼기원전 2900년, 전욱시대는 기원전 2900∼기원전 2550년, 곡·요 시대는 기원전 2550∼기원전 2150년, 순은 기원전 2150∼기원전 2100년, 그리고는 황제시대는 10세 1520년간 존속되고, 전욱은 9세 350년, 곡·요는 10세 400년을, 순은 1세 50년을 존속했다고 한다. 6천 년 전의 역사를 10년 단위까지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특히 황제는 10세 1520년을 존속한데 반해, 전욱은 9세 350년이라니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나라는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요순시대를 거쳐 우가 통치한 하나라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황하 중하류에서 시작한 상족은 우와 동시대 인물인 설(契)이 지방국 제후로 있다가, 상탕(商湯)대에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박을 도읍지로 삼아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이후에 반경이 은으로 천도하면서 은나라 또는 은상(銀商)으로 불리게 되었다. 반경-소신-소을 등 여러 왕을 거쳐 마지막 주왕(紂王)에 이르러 멸망 때까지 273년 동안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8대 12명의 왕이 273년 동안 통치했고 서기전 1046년에 망했다. 그러나 하상(夏商)처럼 은나라도 전설 속 왕국이었다가 20세기초 은허가 발견되면서 역사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은허가 발견된 것은 은나라가 망한 지 3000년 후의 일이다.
은나라 유적인 은허는 1899년 청나라 때 국자감 제주 왕의영이 학질에 걸려 비약을 찾던 중, 약재상들이 당시에 거북과 소 어깨뼈를 ‘용골’로 둔갑시켜 파는 것을 보고 이를 살피다가 글자가 새겨진 갑골문임을 알게 되고, 이것이 한자의 원형인 것을 밝히고 은나라 존재와 역사까지 알게 되면서 은나라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은허(殷墟)에서는 수천 구의 순장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2017년 중국은 은허에서 18좌의 흉노 무덤을 발굴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800여 년 전 후한 말에서 위진(220∼420년) 시기의 무덤으로, 하남성 안양현 지역을 흉노가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은 하나라 강역이 요녕성까지라고 주장하지만, 북경은커녕 하남성 북부도 흉노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은나라 시조는 설이고, 설의 아버지는 제곡이다. 제곡은 소호의 손자로 동이족이다. 설의 어머니는 유융씨의 딸 간적으로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같은 난생사화(卵生史話)이다. 《사기》「진본기」에서 진나라 시조에 대해서도 “진의 선조는 전욱의 후예로 여수라고 한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현조가 떨어뜨린 알을 받아 삼키고 임신해 아들 대업을 낳았다.”고 하여 난생사화다.
전설 속 나라이면서 중국의 시조국 하나라를 세운 우는 직, 설, 도 등신하들을 등용해 치수에 공을 세웠고, 순임금이 설을 사도로 임명하고는 상 땅을 봉지로 주고, 자(子)성을 하사했다. 이후 설의 13세 손 탕이 하조를 무너뜨리고 상조를 세웠다. 자성의 제후들 중에 ‘기자’라고 있는데, 이이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논어』에는 기자를 은나라의 어진 인물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꼽고 있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조선으로 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기자는 은나라 주왕의 정사에 대해 간하다가 옥에 갇혔다가 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릴 때 석방되었으나 주에 복종하지 않고 조선으로 떠났다고 했다. 이는 『상서대전』, 『주서』등의 기록이다. “기자는 은 주왕의 정사에 대해 간하다가 옥에 갇혔는데, 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린 후에 석방시켰다. 기자는 고국을 무너뜨린 주에 복종할 수 없어서 조선으로 도주했다.”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기자가 도주한 곳이 ‘조선’이라는 것이다. 조선은 물론 단군조선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무왕이 그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조선은 주의 제후국처럼 들리지만 선언적인 의미일 뿐 당시 조선은 주나라의 제후국이 아니었다. 《사기》「송미자 세가」에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 평양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고려 후기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만든 ‘기자동래설’에 의한 창작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기자가 실재했던 지역을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으로 보고 있고, 여기는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있던 지역이다. 지금의 하남시 상구시에는 기자 무덤이 있고 또 평양에도 기자 무덤이 있는데, 평양 무덤은 14세기 고려 유학자들이 만든 가짜 무덤이다. 기자가 평양에 간 적이 없으니 거기에 무덤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하북이 아닌 하남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주나라에 멸망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은 주紂다. 주는 공자가 은나라에는 세 명의 인자(仁者)라고 한 미자, 기자, 비간 중 미자의 어머니가 낳은 아들 중 막내로 이름은 신(辛)이다. 무왕이 그를 주라고 불렀다. 주왕은 날이 갈수록 음란해져서 이복형 미자가 여러 번 간했으나 듣지 않자 곁을 떠나버렸고, 비간이 “신하된 자가 죽음으로 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바른길을 간했으나, 주왕이 노해 “내가 들으니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며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게 했다. 이를 지켜본 기자가 두려워하면서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도망하려 했지만, 주왕이 그를 옥에 가두었다.
주왕은 재위 29년(기원전 1047)만에 주(周)무왕이 제후들과 손잡고 나선 이듬해 하남성 맹진 ‘목야전투’에서 무너졌다. 그는 녹대에 올라 보옥으로 만든 옷을 입고 불속으로 뛰어들어 죽었고 이때 애첩 달기도 같이 죽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지만, 춘추시대 역사서 『춘추좌전』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주왕은 동이를 이기려다 자신이 멸망했다. 동이족 국가 은나라 주왕이 동이를 공격하다가 되레 자신이 멸망했다.”고 한 것이다. 주왕이 동이와 등졌다가 나라를 잃었다는 말이다. 《사기》에는 은나라 사람이 주왕 정벌을 학수고대했던 것처럼 묘사했지만, 「백이숙제열전」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백(무왕)이 아버지 문왕의 나무 신주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주를 정벌하러 갔다. 백이와 숙제가 말을 잡아당기며 간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례를 치르지 않고 창과 방패를 이르게 하는 것은 효도라고 이를 수 있는가?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이를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백이 숙제를 죽이려고 했으나, 신농씨의 후예이자 같은 동이족인 강태공이 말려서 죽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은나라는 망했고, 하나라 마지막 걸왕과 은나라의 마지막 주왕을 묶어서 폭군의 대명사로 쓰고 있는 것은 역시 승자의 기록 때문일 것이다.
《사기》「세가」는 제후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제후도 왕이라고 불렀지만, 진왕 영정이 중원을 통일하기 전에는 그냥 작위를 받은 귀족을 뜻했다. 삼황오제와 하은주 군주만이 왕이었고, 나머지 제후들은 왕으로부터 식읍을 하사받은 제후였다. 진시황 이후에는 왕을 황제로 높이면서 제후도 왕으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기》는 「세가」를 설정해 제후들의 독자적 성격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한서』에서는 세가를 인정하지 않고 신하들의 사적을 「열전」으로 처리했다. 제후란 임금의 신하에 불과하다고 본 때문이다.
《사기》에 따르면 은·주나라에서는 다섯 등급 봉작이 있다고 했는데,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이 그것이다. 이는 중세 유럽과도 통한다. 작위를 받은 제후도 등급을 나누었는데, 공작은 무·송·괵·주나라에, 후작은 노·진·제·위·채·연·진·사·설나라에, 백작은 조·정나라에, 자작은 초·주·거·모·월나라에, 남작은 허(許)나라에 각각 봉했다. 사마천은 「세가」를 시작하면서 「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로부터 시작하고, 「열전」은 「백이숙제열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사마천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즉 제후의 자리를 물려받지 않고 사양한 태백을, 그리고 고죽국에서 끝까지 충성한 백이와 숙제 같은 이를 높인다는 의도였다. 「오태백세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나라 태백이다. 태백과 아우 중옹은 모두 주나라 태왕의 아들이며 왕계력의 형이다. 계력이 어진데 성스러운 아들 창을 낳자 태왕은 계력을 세워서 창에게 나라가 이르게 하려 했다. 이에 태백과 중옹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잘라 등용될 수 없음을 보였다. 이는 계력을 위해 피한 것이었다.”
마치 메시아의 도래를 희구하는 선지자의 행위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문제는 ‘형만으로 달아나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잘라’라는 구절이다. 왜 둘은 그랬을까? 그 해답은 『삼국지』「위지」‘왜’전에 있다. “(왜) 남자는 크고 작고 모두 얼굴에 검은색으로 문신을 했다. 예로부터 그 사신이 중국에 이르러 대부라고 자칭했다. 하후 소강의 아들을 회계에 봉했는데, 머리털을 자르고 문신을 새겨 교룡의 해를 피하고자 했다. 왜의 물가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잡기를 좋아한다. 문신 또한 큰물고기와 물짐승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 후 장차, 점차 장식이 되었다. 여러 나라 문신이 각각 다른데, 혹은 왼쪽에 있고 혹은 오른쪽에 있고 혹은 크고 작으며, 존귀하고 비천한 차이가 있다.”라고 했다. 이와 별도로 『삼국지』「위지」‘동이열전’에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한, 왜 일곱 나라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왜는 일본열도로 볼 수는 없고 중국 남쪽 어디를 말한 것이다. 「오태백세가」에는 오나라 뿌리가 주나라 왕실에 있고, 태왕은 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를 말한다. 태왕은 왕이 아니었고,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난 후 추존한 왕호다. 태왕이 제후로 있던 작은 제후국이었는데, 태왕의 아들인 태백과 중옹이 계력의 아들 창에게 왕위가 이르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형만으로 갔으므로 태왕은 셋째아들 계력에게 자리를 물려줄 수 있었고, 다시 창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문왕이다, 문왕은 상을 무너뜨리고, 주나라 천하를 만든 무왕의 아버지다. 태백과 중옹이 간 형만은 지금의 강소성 소주로 여기에서 오나라 역사가 시작된다. 오나라는 무왕이 서기전 12세기에 자작으로 봉하였고, 서기전 473년에는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에게 멸망 당했다. 오국의 성은 희성으로 동이족이다.
《사기》와 비견되는 역사책으로 『여씨춘추』라는 것이 있다. 『여람』이라고도 하는 여기에 태공망 여상은 동해사람이고, 그가 봉해진 곳은 동이 땅이라고 했다. 『여씨춘추』는 진나라 재상 여불위(?∼기원전 235)가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서 편찬한 책으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조선까지 이르렀다.”고 한 구절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서해 위쪽이 동이 땅이고, 동북쪽은 조선이었다는 것이다.
내 할머니가 곡부공씨(曲阜孔氏-孔芳順)로 공자의 후손이다. 몇 세손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게도 공자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겠다. 주 문왕(희창)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주공 단은 넷째 아들로 둘째인 무왕 희발의 동생이다. 문왕의 아버지가 태왕이 살았던 주땅을 단에게 봉지로 주었으므로 주공이 된 것이다. 주는 지명이었다. 봉함을 받은 주는 기산 (岐山)남쪽에 있었는데, 기산은 중화민국의 발상지 중 하나로 꼽고 있으며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에 있다. 『열국지』『삼국지』에도 나오는 관중은 사관, 즉 4개의 관 안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동쪽 동관, 서쪽 산관, 남쪽 무관, 북쪽 소관으로 섬서성 중앙에 있다. 그 안에는 서안, 함양, 위남, 동천, 양릉 등 다섯 개 시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 모두 역사성이 짙은 지역이다. 기산은 염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여, 왕실의 발상지로 문화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주 문왕이 서안(西安)으로 천도하고 기땅 동쪽은 아들 주공 단에게, 서쪽은 아들 소공 석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공 단이 조카인 성왕에 의해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 봉해져 노 주공이 되었는데, 노(魯)땅이 노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곡부는 동이족인 소호의 왕성이자 훗날 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주공은 노나라 곡부에 봉해졌지만, 큰아들 백금을 대신 보내고는 조정에 남아서 정사를 돌보았는데, 무왕이 죽고, 어린 조카인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이 왕위를 빼앗을 것을 염려한 관숙, 채숙, 곽숙 등이 반란을 일으켜 주나라가 흔들리기도 했다.
문왕의 장남은 백읍고, 차남은 무왕인 발이고, 삼남은 관숙 선, 사남이 주공 단, 오남은 채숙 도다. 주공 단에게 반발해 난을 일으킨 이가 바로 삼남과 오남 등 다른 형제들이었다. 그것도 멸망한 주왕의 아들인 무경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기》「주본기」에는 “상나라 주의 아들 녹보를 은의 남은 백성들을 다스리게 봉했다. 무왕은 은나라가 처음에는 안정되게 민심이 모이지 않자, 아우 관숙 선과 채숙 도로 하여금 녹보를 도와 은나라를 다스리게 했다.”고 했는데, 무경의 자성은 무씨(武氏)이고 이름이 경(庚), 자가 녹보다. 상나라를 무너뜨렸지만 상나라 유민들이 주나라를 거부하자 이에 무왕은 투항한 주왕의 아들 무경에게 은나라, 즉 상나라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고는 두 동생을 보내 무경을 도우게 했다고 한다. 도움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감시를 맡긴 것이다.
‘삼감의 난’이라고 하는 이들의 난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은 왕의 동생들이 은나라를 부흥시키려는 은 왕족과 결탁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 때문이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주공 단이 직접 출전했는데 성왕의 명을 받았다고 하나 주공이 섭정할 때니 자신이 직접 결정했을 것이다. 진압에 성공한 주공 단은 관련자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무경뿐 아니라 형인 관숙도 처단하고, 동생 채숙은 추방했다. 또 다른 동생 곽숙도 폐위시켜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삼감이 내세운 명분은 주공 단의 섭정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으나, 형제들이 서로 믿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랴! 부귀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나라 성왕 때 당나라 사람이 난을 일으켜 성왕이 이를 멸망시켰으나, 당나라 자손들은 두로 옮겨가 우두머리를 두백(杜伯)이라고 했는데, 두백은 두씨의 시조다. 『춘추좌전』, 『묵자』등에 “두백은 주의 대부로서 주 선왕의 아홉째 아들의 후예인데, 선왕 재위 43년(기원전 785)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선왕이 애매한 혐의로 두백을 죽이려 하자, 좌유(左儒)가 아홉 번을 말리고 나섰다. 이에 선왕이 ‘너는 군주와 벗을 구분하라.’고 경고했고, 이에 좌유는 ‘군주가 도를 행하고 친구가 도를 거스를 때는 군주를 좇아서 친구를 죽여야 합니다. 친구가 도를 행하고 군주가 도를 거스를 때는 친구를 좇아서 군주에게 반대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선왕이 노해서 ‘네 말을 바꾸면 살 것이고 바꾸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다.’라고 했으나 좌유는 ‘사(士)는 올바름을 굽히지 않고 죽을지언정 말을 바꾸어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고 했다. 선왕이 두백을 죽이자 좌유도 따라서 죽었는데, 나중에 선왕이 사냥 나갔다가 두백이 자기를 활로 쏘는 꿈을 꾸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주었다. 그러나 선왕은 끝내 이 일 때문에 병을 얻어 죽었다.”라고 했다. 두백은 두씨의 시조일뿐 아니라 유씨(劉氏)의 50세 조가 되기도 하는데, 두백이 죽임을 당하자 아들 습숙이 진(晉)으로 도망가 진국의 사사(士師)가 되었는데, 습숙은 범씨(范氏)의 시조기도 하다. 진국의 초기 국명은 당국(唐國)이었다.
‘얽히고 설킨듯’많은 이야기가 《사기》에는 실려있다. 그러나 사마천 개인의 의견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고, 고사성어의 산실이기도 하다. 춘추시대 종말을 고한 항우가 태어난 초楚나라는 주 왕실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의 나라라고 자처했다. 초나라 시조는 미성(羋姓), 그는 미성뿐 아니라 계성, 옹성, 굴성, 경성, 소성이라는 성의 시조이기도 하다. 미성 계련은 황제의 7세손, 창의의 6세손, 전욱의 5세손, 칭(稱)의 현손(4세)이라고 하였으나, 칭이 어떻게 전욱을 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기원전 704년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는데, 호칭을 참칭한다하여 참호(僣號)라고 한 이것에 대해 주 왕실은 정벌할 군사력을 갖고 못했다. 초나라 등이 주나라와 같이 왕이라고 참칭했다. 이로써 제후들이 패권을 위해 싸우는 춘추시대(기원전 770∼서기전 403)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춘추시대 말(기원전 403) 주나라 위 열왕이 진(晉)나라 자리에 있던 조·한·위를 정식 제후로 책봉하면서 수많은 제후국들이 명멸하던 춘추시대가 소수 강국이 다투는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진나라는 사라지고 조·한·위를 위시해 진秦·초·제·연이 포함된 전국 7웅이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월·파·촉·송·중산·노 등 큰 나라도 존속하고 있었고, 작지만 정·위·등·추·비국 등도 있었다. 이들은 전국 7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서북방의 진이 강국이 되면서 나머지 6국과 대결하는 형국이 되었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기원전 221년이지만, 홀로 산동 6국을 상대할 만큼 강력하게 성장한 계기는 40여년 전 서기전 260년 벌어진 ‘장평지전(長平之戰)’이었다. 진국과 조국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지금의 산서성 고평에서였다. 조군이 45만 명, 진군은 60만 명을 동원한 전쟁이었다.
기원전 262년 국력을 키운 진나라가 한국(韓國)을 공격하자, 한 혜왕은 상당군을 바치는 것으로 진의 공격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상당군 백성들은 진의 공격을 막기 위해 17개 성을 조나라에 바치겠다며 진나라 공격을 막아 줄 것을 제안했다. 효성왕이 이를 받아들이자 진 소왕이 불만을 품고 대군을 출병시키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나라 염파장군이 장평에 보루를 쌓고 막고 있었다는데, 빠른 승리에 목말랐던 효성왕이 염파의 지구전에 불만을 품고 병법의 천재라고 한 조괄로 장수를 교체했다. 조괄은 이론에는 능했으나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반면에 진은 백전노장 백기로 장수를 교체했는데, 조괄이 공격하다가 기습을 받아 보급로까지 끊기고 말았다. 결국 장평대전에서 조군은 45만 명 전부를 잃고 패했다. 이때까지는 조가 진과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였으나 조군이 패한 이후 6국 중에서 진군과 1:1로 맞설 나라는 사라졌다. 이후 진나라에 맞서서 합종하거나 사이좋게 지내자는 연횡책이 횡행했다.
춘추전국시대를 돌아보면 이것이 고대 중국 역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주나라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나라 역사는 다양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성씨, 제후와 왕들의 치적, 동주와 서주로 갈라진 배경 등등, 주 왕조 성씨는 희성이었으나 그로부터 갈라져 나온 성씨가 주성, 오성, 왕성, 노성, 조성, 위성 등 411개나 된다고 한다. 사마천은 「월왕구천세가」 다음에는 「정세가」를 기술하였는데,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 그 속에 오자서와 손빈, 서씨 등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졌음으로 생략하고 정나라로 가보자.
“정 환공 우는 주나라 여왕의 막내아들이자 선왕의 서제이다. 주 선왕이 즉위한 지 22년, 우를 정나라에 봉했다. 우는 33년 동안 백성이 편안하게 여기고 그를 사랑했다. 유왕을 사도로 삼았다. 주나라 백성을 화목하게 모아서 주나라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하수와 낙수 사이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각했다.”「정세가」의 기록이다.
정 환공은 희성의 정씨로 이름이 우다. 주 여왕 희호의 막내아들이자 주 선왕 희정과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로 기원전 806년 정(鄭)땅을 봉 받아서 정나라를 건립하고 안정시켰다. 정나라는 현재의 섬서성 화현으로 비정된다. 기원전 774년 왕실의 사도가 되었지만, 이듬해 왕실에 변고가 많은 것을 보고 나라를 옮길 것을 생각했다.
사도가 된 지 1년 유왕이 포후의 일로 인해 왕실을 다스리는데 간사한 것들이 많아서 제후들이 배반하기도 했다. 이때에 정 환공이 태사백에게 물었다.
“왕실에 일이 많은데 나는 어떻게 죽음에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태사백이 대답했다.
“오직 낙의 동쪽 땅이나 하수와 제수의 남쪽이 살 만한 곳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무엇 때문입니까?”
태사백이 대답했다.
“그 지역이 괵나라와 회나라에 가까운데 괵과 회의 군주는 탐욕스럽고 이익을 좋아해서 백성이 따라붙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 사도가 되어 백성이 모두 공을 사랑하는데, 진실로 거처하기를 청하고 괵나라, 회나라 군주를 공이 만나서 일을 하신다면 가볍게 공의 땅을 분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괵나라, 회나라 백성은 모두 공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내가 남쪽의 강수 위로 가면 어떻겠습니까?”
……
환공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마침내 백성을 낙수의 동쪽으로 옮겼다. 괵나라, 회나라에서 과연 10개의 읍을 바쳐서 마침내 국가가 되었다.
주나라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환공은 재위 33년 기내(畿內)에서 괵나라, 회나라 사이로 천도했는데, 이곳이 바로 하남성 신정(新鄭)이다.
‘포후의 일’이란 포사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포사는 지금의 섬서성 한중 출신으로 포국(褒國) 출신의 사성(姒性) 여인이다. 서기전 779년 주 유왕(幽王)이 포국을 공격하자, 포국은 미녀 포사를 바치면서 항복했다. 유왕이 포사를 총애해 그녀와의 사이에서 희백복을 낳았다. 왕비 신후와 태자 희의구를 내쫓고 포사를 왕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니 정국이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신후(申后)의 아버지 신후(申候)가 크게 분개하면서 이족 견융을 끌어들여 유왕을 공격했다. 서기전 771년 이들이 연합해 호경(鎬京-서안 장안구)을 공격해 주나라 왕실은 위기에 빠졌다. 그리고 여산 아래서 유왕을 죽였는데, 이때 정나라 환공도 죽고 말았다. 이를 서주의 멸망으로 보았고, 이후에 신국·노국·허국 등이 주왕실을 재건하여 신후의 아들인 희의구를 옹립했다. 그가 주나라 평왕(平王)이다.
역사나 종교 인물 중에 그래도 행적과 후대의 영향, 기록이 뚜렷하고 존경받는 인물에는 공자가 있다. 공자의 조상은 원래 송나라에 살았는데, 송나라 시조 미자의 동생 미중의 8세손이자, 송국의 5대 군주인 송만공의 5세손으로 자성에 이름은 가(駕), 자字가 공보가가 있었다. 이 공보가가 공자의 선조였다. 송 선공이 죽음을 앞두고 동생 목공에게 양위할 때 공보가는 대사마였다. 목공이 죽고 상공이 즉위했으나, 그는 재위 10년 동안에 열 차례나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곤궁하게 했다. 이 무렵에 태제 화보독이 공보가의 아내가 절세미인인 것을 보고는 공보가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았다. 상공이 노하자 화독은 상공마저 죽이고, 공자(公子) 풍을 정나라에서 불러와 임금 자리에 앉혔다. 그가 송 장공이다. 이 사건으로 공보가의 자손들은 화를 피해 노나라로 달아났고, 이후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공보가의 아들이 목금보, 목금보의 아들이 기보, 기보의 아들이 공숙망, 공숙망의 아들이 백하, 백하의 아들이 숙량홀로, 숙량홀이 바로 공자의 아버지다. 숙량홀은 안징재와 야합해 공자를 낳다고 하는데, 이 야합이 남자의 나이가 많아서 라는 등 여러 해석을 낳고 있으나 ‘합당하지 않다’는 뜻이기는 해서 남자 64세, 여자 49가 되면 음양도가 단절되는데, 이를 지나면 야합이라고 한다고 하기도 하여 숙량홀이 나이가 많아서 공자를 낳았다고 하기도 하지만, 설명이 석연치는 않다. 숙량홀과 안징재의 혼인은 단지 나이 차이가 많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공자는 노나라에서는 신분이 낮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의 핏줄 자체는 낮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공자를 ‘성인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상(은)나라 탕임금의 후예라는 뜻이다. 탕왕은 상나라 개국군주로 자성(子姓)으로 공자 역시 자성이었고, ‘송나라에서 망했다’는 것은 공자의 6대조 공보가가 송나라 화독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한다. 《사기》에는 공자가 제후가 아니었음에도 「공자세가」로 높여 기술했는데, 공자를 성인으로 추켜 세운 때문이다. 「공자세가」마지막에는 공자의 유언 같은 것이 쓰여있는데,
“하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빈소를 차렸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빈소를 차렸고, 은나라 사람은 양쪽의 기둥 사이에 빈소를 차렸다. 지난밤에 나는 꿈에 양쪽의 기둥 사이에 좌전을 했는데, 나는 은나라 사람에서 비롯됐다. (공자는) 7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가 그것이다.
공자는 제자 자공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7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꿈에 양 기둥 사이 좌전(座奠), 즉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고,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라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주나라를 따라야 한다고 천하를 유람하면서 외쳤던 공자였지만, 자신은 동이족의 후예라고 한 것이다. 역사서 『춘추』를 남기고 화이관(華夷觀)을 만들었던 공자였으나, 자신은 夷인 은나라 사람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 사마천이 이를 공자의 유언으로 기록한 것은 의도된 것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기》를 읽거나, 연구하는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고 이덕일 선생은 말했다. 6.17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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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