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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판소금은 빛과 지혜, 생명을 담은 그릇이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치약이 없었으므로 어렸을 적에 소금으로 이빨을 닦았다. 어머니께서는 늘 굵은 소금을 절구에 빻아 양치질용 소금을 미리 마련하여 두셨다.
60년대 말에 가루로 된 치약이 처음 나왔다. 치약은 돌가루를 곱게 가루 내어 만든 것인데 화장품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나서 그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서 쓰지 않았다. 나는 요즘에도 치약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소금으로 이빨을 닦는다.
어머니께서 소금을 절구에 빻아서 보관해 두셨다가 양치용 소금이 떨어지면 새로 소금 그릇에 담아놓곤 하셨다.
소금을 그냥 공기 중에 두면 습기가 많은 날에는 공기 중에 있는 물을 빨아들여 소금이 녹아서 질퍽질퍽하게 되어 버린다.
토판염을 빻으려고 칼등으로 대여섯 번을 다지면 소금에서 물이 튄다.
소금 결정이 분해되면서 그 안의 분자가 미세하게 쪼개져서 공기 중의 수분과 결합하여 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소금을 볶아서 가루 내어 양치용으로 쓸 수 있도록 별도로 작은 그릇 안에 넣어 두곤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양치 소금을 넣어두던 옹기 항아리를 열어보니 양치 소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한테 새로 만들어 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내가 광에 가서 소금 가마니를 열고 한 주먹 꺼내서 우물가에 있는 넓은 돌 위에 놓고 잔돌로 찧으려고 소금 한 주먹을 쥔 채로 뒷짐을 지고 나왔다.
토판소금에서 아침 햇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온다
나는 어려서부터 뒷짐을 지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손이 가는 곳에 기운이 따라가기 마련이므로 뒷짐을 지면 기운이 선골에 모여서 쌓이게 된다.
뒷짐을 지고 걷는 것은 화강수승(火降水昇)을 하게 하는 훌륭한 수련법이다.
소금을 한 주먹 쥔 채로 뒷짐을 지고 안뜰에서 바깥뜰로 나왔다.
그 때 광의 문이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문을 나오자마자 태양이 눈썹만큼 산을 넘어오면서 아침 첫 햇살이 얼굴을 비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에서 산을 넘어오는 태양보다 열 배쯤 더 밝고 강한 빛이 내 등 뒤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얼른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니 등 뒤에서 환한 빛이 느껴졌다.
돌아서니 아무것도 없다. 등 뒤쪽이 환해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고 다시 등 뒤가 환해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이상했다.
그 때의 느낌을 비유하면 저녁에 밤길을 갈 때 강력한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 같은 것이 등 뒤에서 비추는 것 같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뒷짐을 쥔 채로 손에 들고 있던 소금을 아랫배에 대고 걸음을 옮겼더니 등 뒤에서 비치던 빛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소금을 뒤쪽 엉덩이 쪽에 대니 다시 환한 빛이 등 뒤에서 비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아! 소금에서 빛이 나는 것이구나. 소금이 곧 빛이구나. 소금 속에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들어 있구나.”
그 일이 있은 뒤로 소금에 흥미를 느껴서 그 날부터 소금을 볶아 보기도 하고 짓찧어서 여기저기에 써 보기도 하는 등으로 소금에 대해서 실험을 하고 연구를 했다.
스승님께 소금을 쥐고 뒷짐을 지고 있으니 소금에서 환한 빛이 나오더라는 말씀을 드렸더니 대답은 안 하시고 묻기만 하셨다.
“소금에서 왜 빛이 난다고 생각하느냐?”
“햇빛과 달빛, 별빛을 받아들여 그 빛이 소금 속에 응축되어서 빛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금에 대해서 아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소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 옛날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기록을 보면 이러하니라."
"태양유주(太陽流珠)가 입어해(入於海)하여 숙어삼천세(宿於三千歲)하고 연후(然後)에 부어해면(浮於海面)하야 이염위의(而鹽爲依)하고 혹위풍(或爲風)하고 혹위운무우로(或爲雲霧雨露)하여 위초목지명운야(爲草木之命運也)요 자인야(子仁也)로다.”
태양에서 구슬 같은 빛의 입자가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려와 바다로 들어가서 삼천 년 동안 묵은 뒤에 바다 표면으로 떠 올라와서
소금으로 옷을 지어 입고 나들이를 하여 혹은 바람이 되고 혹은 구름과 안개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비와 이슬이 되어 내려와서 산천초목들의 목숨을 자라나게 하고 그 씨앗이 되는 것이다.
소금이 빛이고 생명이고 지혜다
소금이 산천초목(山川草木)의 생명의 근원이다. 소금이 모든 풀 나무의 목숨이 되고 씨가 되는 것이다. 하늘에 삼광(三光)이 있다.
곧 해와 달과 별의 세 가지 빛이 있는데 이 세 가지 빛을 대표하는 것이 햇빛이다.
여기서 태양유주(太陽流珠)라고 한 것은 태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월성수(日月星宿)에서 나오는 모든 빛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문은 제일 중요한 것 하나만 표현하는 것이 많다. 한문은 문장이 짧다.
이것을 한글로 풀이하면 한 줄이 다섯 줄로 늘어난다.
한문으로 응축하여 글을 쓰면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짧게 써 놓고 응축된 글을 자세하게 풀어서 강의를 해야 알아듣는다.
소금의 짠맛이 나는 알갱이는 껍질이고 소금 분자 하나하나에 빛이 들어 있다.
그 빛을 담는 그릇이 소금 알갱이다. 곧 빛을 캡슐에 넣은 것과 같다.
빛이 모든 생명의 근본이고 근원이다. 만물 중에서는 식물이 모든 생명활동의 시작이다.
빛이 소금으로 옷을 지어서 입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릇, 곧 캡슐도 맛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 맛이 바로 짠맛이다.
해와 달과 별의 입자 곧 광자(光子)를 가두는 방법이 소금 결정을 만드는 것이다.
휴대전화기 배터리에 전기가 충전되어 있듯이 소금 알갱이 속에 빛이 충전되어 있다.
소금 알갱이는 빛과 정신, 지혜,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곧 참다운 지식인 진지(眞知)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지상에 있는 온갖 생명의 청명(淸明)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승화하여 다시 빗물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봄철에 작은 씨앗이 새싹이 되어 돋아나듯 누에 애벌레가 자라서 누에고치가 되듯 매미 애벌레인 굼벵이가 자라서 매미가 되듯 물이 승화하여 구름, 안개, 비, 바람이 되는 것이다.
풀과 나무 중에서 오래 사는 것은 모두 염기(鹽氣)가 많은 것들이다. 알칼리를 염기라고 부른다. 알칼리가 곧 염기다. 염기와 비염기로 나누면 미네랄은 대부분이 염기라고 볼 수 있다. 함초, 쑥, 묏도라지, 잔대, 칡, 보리, 민들레, 씀바귀, 냉이 같은 것들이 염기가 많은 것들이다.
봄이 되면 항아리에 들어 있는 간장의 맛이 싱거워진다. 풀나무들이 생장하려면 염기가 필요하여 간장에 들어 있는 염기를 흡수하여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여름철 무더울 때 난 소금은 힘이 없다. 송화가 필 무렵에 만든 소금은 허송(虛鬆)하다. 알이 굵고 가볍다. 빌 허(虛)에 엉성할 송(鬆), 머리칼 헝클어질 송, 또는 까치집 모양으로 헝클어질 송(鬆)이다. 무엇이든지 속이 비어 있는 것일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담을 수 있다.
첫 제자를 만나게 된 사연
나는 젊었을 적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건축 공사장에서 날품팔이 일을 했다. 질통을 지고 벽돌을 쌓고 타일을 붙이고 철근 작업을 하는 등 공사장에서 온갖 잡일을 했다. 어느 날 종로 1가에 있는 집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일이 오전에 조금 일찍 끝났다. 목수가 거푸집을 만들고 나서 큰크리트 타설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은 오후에 하기로 했으므로 목수 일을 다 마치고 나니까 시간이 좀 남았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계사에 구경을 하러 갔다.
조계사에 가서 보니 마침 어느 유명한 승려가 법문을 하는 날이었다. 오후에 다시 공사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조계사 법당 안에서 구경을 하면서 놀고 있었더니 승려들이 나와서 단상에 자리를 잡고 법문(法門)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서 법당 안으로 가득 모여 들었다. 나도 따라서 법당 안에 들어가서 법문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수준이 한참 낮은 데다가 졸음 오는 소리만 하기 때문에 조금 듣다가 말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처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법문을 듣느라고 법당 안에 다 안에 들어가 있고 넓은 조계사 마당에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 들었나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또 ‘처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젊은 중이 뒤에 서 있었다.
“저를 부르셨나요?”
“그렇습니다.”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물어보고 싶습니까?”
“저는 수행을 하고 있는 승려입니다. 먼저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조금 있다가 일을 하러 가야 합니다. 수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으나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들어 보겠습니다.”
“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계사 마당 한켠에 서서 젊은 중은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운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한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다. 사람을 한 번 보기만 하면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엷은 안개 같은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는데 사람마다 그 기운의 양과 색깔이 다르다고 하였다. 흉악한 사람의 몸에서는 고무 타이어 같은 것이 탈 때에 나오는 시커멓고 붉은 연기 같은 기운이 서려 있고, 사기꾼의 몸에서는 짚이나 풀이 탈 때 나오는 회색 연기 같은 기운이 서려 있으며 선량한 사람의 몸에서는 하얀 안개와 같은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흰 빛깔의 안개 같은 밝은 기운이 제일 많이 나오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선량한 기운이 많이 나오는 사람을 찾아서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어떤 승려를 만났는데 그 승려한테서 선량한 기운이 제일 많이 나오므로 그 승려한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승려를 사부님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승려가 아는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는 선한 기운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사부님으로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
젊은 중이 말했다.
“처사님! 저는 오늘 새로운 눈을 떴습니다.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던 스님을 떠나서 처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심을 하고 처사님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모시고 있던 스님은 지위가 제일 높지는 않지만 스님들 중에서는 제일 선량한 분입니다. 그 분이 제일 선하다는 것은 법문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몸에서 나오는 밝은 기운을 보고 압니다. 그러나 처사님의 몸에서는 제가 모시고 있던 사부님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기운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처사님을 일생 동안 스승님으로 모시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처사님께서는 대체 어느 절에 다니십니까?”
나는 말끝마다 처사라고 부르는 말이 듣기 싫었다. 본디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를 처녀(處女)라고 하고 공부를 했지만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고 시골에 묻혀 사는 선비를 처사(處士)라고 하는 법이다. 그런데 절간에서는 마당쇠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사람을 처사라고 부른다. 중들은 중이 아닌 사람을 부를 때에는 아무한테나 남자는 처사라고 부르고 여자는 보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저한테 왜 자꾸 처사라고 부릅니까? 나는 처사가 아닙니다. 건축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는 일꾼입니다. 처사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냥 성씨를 부르든지 이름을 부르면 됩니다.”
“그럼 아저씨! 아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선생님! 어느 절에 다니시는지 저한테 꼭 좀 알려 주십시오. 제가 그 절로 찾아가서 선생님께 배우겠습니다.”
“저는 절에 안 다닙니다.”
“그러시지 말고 제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나에 대해 자꾸 캐묻는 것에 화가 났다.
“나는 사실을 얘기하는데 왜 안 믿습니까? 내가 탁구선수라면 탁구선수라고 할 것이고 장사꾼이면 장사꾼이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간첩입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일꾼이고 절에는 안 다닙니다. 절에 다니니까 안 다닌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남을 해칠 사람인지 아닌지 의심을 한다면 어떻게 낯선 사람하고 밥 한 끼라도 같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대로 말을 하면 그대로 믿어야지요.”
“잘못 했습니다.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절에 다니느냐고 왜 물어 보았습니까?”
“저는 절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수행(修行)이 이처럼 높은 분이 계실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내 몸에서는 밝고 선량한 기운이 밥 지을 때 솥에서 김이 나듯 조금씩 나올 뿐이고 시루에 떡을 찔 때 나오는 김처럼 아주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시고 있던 스님한테서도 밝은 빛 기운이 저보다는 많이 나오지만 아주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동안 저를 올바르게 인도해 줄 스승을 찾기 위해서 신부, 목사, 승려, 도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났습니다. 지리산에는 산속에서 수행을 하는 도인들이 오천 명이 넘고 계룡산에는 1만 명이 넘는데 그 어떤 사람도 선량하고 맑은 기운이 많이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몸에서는 그런 사람들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에너지가 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데 제일 뒷자리 한 군데에서 하얀 안개 같은 것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온 법당을 눈부시게 하얀 빛으로 모두 덮어 버리더군요. 법당 안에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에는 몸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는 사람, 붉은 연기가 나오는 사람, 회색 연기가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부실 정도로 밝고 흰 빛의 기운이 그 어둡고 탁한 기운들을 싸잡아서 한꺼번에 은백색으로 감싸 덮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한테 있는 몸과 마음의 모든 질병이 한꺼번에 나아서 모두 건강해질 것이라는 느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밝은지 법문을 하고 있는 스님의 이목구비가 은백색 빛 안개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빛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쪽만을 보고 있었는데 그 빛이 갑자기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뒤따라 나왔던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도를 닦으셨습니까? 그토록 밝은 빛을 지닌 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 빛을 얻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제자로 삼아서 수행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큰 깨달음과 생명을 살리는 마음은 소금에서 온다
그 승려는 나한테서 5년 동안 공부를 했다. 내 첫 제자인 셈이다. 그러나 내가 산 속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고 있다가 3년 뒤에 나와 보았더니 조계사를 떠나 버렸다. 그 뒤로 지금까지 연락이 끊겼다. 그 때는 휴대전화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서 한 번 연락이 끊기면 다시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 중과의 인연으로 인해 나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기운은 소금한테서 오는 것이다. 소금은 곰팡이를 없애고 발효를 잘 이루어지게 하고 악한 마음을 없애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활인지심(活人之心)을 갖게 하고 자비심을 생기게 하고 대오각성(大悟覺醒)을 이루게 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예수나 석가모니를 나타내는 그림을 보면 둥근 후광(後光)이 있다. 이를 광배(光背)라고도 한다. 성인들한테서 나타나는 광배와 같은 빛은 소금에서 오는 것이다. 소금은 태양의 빛을 저장하는 축전지와 같다. 곧 후레쉬의 배터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빛은 동트는 하늘의 햇빛보다는 엷지만 매우 밝은 기운이다.
첫댓글 빛과 소금 ᆢ 소금에 대한 새로운 지혜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죽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