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진의 「초기화」 감상 / 이설야
초기화 / 한여진 (1990~)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믿는다고 했다 그중 하나를 뽑았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었다 하지만 낮과 밤 없이도 서서히 잠이 쏟아지고 그거 기억나? 나 음악 그만둘 때, 바이올린 없이는 못 살거라 생각했는데…… 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빈집이었다 아는 집이었다 엄마가 말없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섭섭했던가 냄비 속에서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에는 눈이 소복했다 개밥그릇 속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개는 없었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생상스의 협주곡이 들려온다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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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이건 달력이야!라고 말하자 시인은 그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어느 사이 “빈집이었”고, 엄마와 개는 보이지 않았고, 너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마당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뒷문이 열려 있는 빈집에서 시인은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천천히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잠이 쏟아졌다. 꿈속에서 넘쳐나는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열두 겹의 새로운 마음들로 1년을 채우기 위해 쓴다. 쓰면서 지워지는 세계. 시인은 다시 쓰기 위해 그동안 쓴 것들을 지운다. 백지의 영혼이 되어,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을 새롭게 부른다. 텅 빈 몸, 텅 빈 영혼이 되어 겨울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열두 개의 나침반을 들고 폭설이 내린 길 위에 새 발자국을 찍는다. 다시 눈이 내린다. 백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설야 (시인)
챗 GPaT분석
1. 제목의 의미 – 『초기화』*이 시는 삶이란 ㅇㅇ이다.은유를 이어붙인 듯한
‘초기화’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자기기에서 데이터를 삭제하고 공장 초기 설정으로 되돌리는 과정과 비슷하게, 이 시에서는 삶에서의 리셋, 기억의 소멸, 존재의 재구성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는 기억을 되돌리거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이 희미해지고 소멸하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즉, 초기화된다는 것이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점진적인 상실과 소멸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 주제
기억과 존재의 불확실성
→ 화자는 과거의 특정 순간과 감정을 떠올리려 하지만, 그것이 희미해지고 사라집니다. 이는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리고 그 기억이 곧 존재를 구성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자아
→ 열두 장의 흰 종이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지만, 그것에는 숫자나 요일이 없습니다. 즉,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지 않으며, 이는 인생이 단순한 연대기적 흐름이 아니라 경험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기억의 집합체임을 암시합니다.
상실과 부재
→ 개밥그릇 속의 사료는 가득 차 있지만 개는 없습니다. 이처럼 시에는 곳곳에 존재하던 것이 사라진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 바이올린을 그만둔 것, 엄마가 사라진 것, 글로 쓰려 했으나 기억나지 않는 것들. 이 모든 것이 부재를 통한 존재의 확인을 보여줍니다.
→ 이는 단순한 물리적 상실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 사이의 간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3. 상징 분석
(1) 열두 장의 흰 종이 = 시간의 흐름, 인생의 서사
‘달력’이라는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흰 종이는 한 해의 열두 달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종이에는 날짜도 요일도 없습니다. 즉, 화자가 인식하는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흐릿한 기억 속의 시간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기보다 경험과 감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2) 낮과 밤이 없는 세계 = 기억의 붕괴, 감각의 무력화
보통 인간의 삶은 낮과 밤의 반복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구분이 사라집니다.
이는 기억이 희미해지고, 시간의 감각이 흐려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삶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혹은 기억의 단절로 인해 존재의 연속성이 깨지는 상태를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3) 바이올린 = 과거의 열정, 상실된 정체성
화자는 과거에 음악을 그만두면서, 바이올린 없이는 못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한때 중요한 삶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사라진 어떤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것들을 필연적으로 놓아야 하는 순간을 상징하며, 삶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4) 빈집과 엄마의 부재 = 상실, 성장, 혹은 삶의 공허함
화자는 빈집에 들어가지만, 이는 자신이 알고 있던 집(익숙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없습니다.
엄마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부재한 것이 아니라, 화자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사라진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심리적 독립 혹은 존재의 단절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5) 개밥그릇 속의 사료 = 사라진 존재의 흔적
개밥그릇에 사료는 가득하지만, 개는 없습니다.
이는 과거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그 주체는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개는 죽었거나 떠났을 수 있으며, 이는 인생에서 우리가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 혹은 존재하던 것이 사라진 후 남는 공허함을 표현합니다.
(6) 뒷문이 열려 있지만 어디로도 통하지 않음 = 존재의 모순과 부조리
문이 열려 있다면 어딘가로 나갈 수 있어야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생에서의 선택이 항상 명확하지 않으며, 때로는 아무리 문이 열려 있어도 우리는 갈 곳이 없다는 점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 즉 기억과 현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존재의 모순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7) 생상스의 협주곡 = 과거의 기억, 혹은 희미한 정체성
생상스의 협주곡이 어디선가 들려온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음악은 감각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인데, 이는 화자가 과거를 떠올리려 하지만, 그 기억이 완전하게 재구성되지 않고 파편적으로만 남아 있음을 암시합니다.
(8) 꿈 이야기를 쓰려 했으나 기억나지 않음 = 존재의 불확실성
화자는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 하지만, 막상 글로 쓰려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는 기억과 기록 사이의 단절, 존재의 불안정성, 자아 정체성의 모호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우리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붙잡으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점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결론
『초기화』는 단순히 어떤 기억을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상실되는 기억과 변화하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 제목의 의미 – 초기화는 단순한 리셋이 아니라 기억과 존재의 흐릿해지는 과정을 의미함.
✔ 주제 – 기억과 존재의 불확실성,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자아, 상실과 부재.
✔ 상징 분석 – 열두 장의 종이(시간), 낮과 밤이 없는 세계(기억의 붕괴), 바이올린(과거의 열정), 빈집(부재), 개밥그릇(사라진 존재), 뒷문(부조리), 생상스의 협주곡(희미한 기억), 꿈 이야기(기억의 단절).
이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와 달리, 시간과 기억, 존재의 모호성을 표현하는 현대적인 방식의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삶이란
1. '열두 장의 흰 종이'와 '달력'
열두 장의 종이는 12개월을 상징하며, 시간의 흐름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달력에는 날짜, 계절, 요일이 없습니다. 이는 시간 개념이 모호해지고, 인생의 특정한 지점이 희미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존재 자체가 시간과 함께 구성되지만, 동시에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를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2. '낮과 밤 없이도 서서히 잠이 쏟아지고'
시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인생이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존재는 결국 변화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3. '바이올린 없이는 못 살거라 생각했는데……'
과거의 집착과 현재의 거리감이 대비됩니다.
바이올린은 삶의 중요한 요소(혹은 정체성)를 상징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인생에서의 변화와 성장, 혹은 어떤 존재의 소멸을 시사합니다.
4. '빈집이었다 아는 집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지만, 그곳은 비어 있습니다.
존재하던 것들이 점차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느낌이 강조됩니다.
5. '엄마가 말없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이라는 존재의 유대가 희미해지거나, 삶에서의 이탈이 암시됩니다.
이는 죽음 혹은 관계의 소멸을 연상하게 합니다.
6. '개밥그릇 속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개는 없었다'
존재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공백을 강조합니다.
인생의 유한성과 상실, 부재의 감각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7. '뒷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다'
출구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 출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삶의 불확실성과 존재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마치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이 문 또한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8.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적당한 때’라는 개념은 삶에서 끊임없이 유예되는 순간을 암시합니다.
마치 우리가 '이때가 되면 무언가 바뀌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변화는 명확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9.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과 기록 사이의 단절이 발생합니다.
이는 개인의 삶과 존재가 기억 속에서는 명확해 보이지만, 막상 형상화하려 하면 희미해지는 느낌을 반영합니다.
10. '뭔가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
이는 존재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떤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