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재학시절 학감(學監)이었던 은사 L 박사님에 대한 회상이다. 전공이 달라 강의실에서 뵈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석사과정 시절 과분하게 보살펴 줬던 인간미에 푹 빠져 따르며 많이 배웠다. 그런 인연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보따리 장사라고 폄하해 부르던 시간강사를 하던 시절 결혼한 직후에 아내와 함께 서울의 전농동 댁으로 인사를 갔었다. 그날 덕담과 함께 들려주신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3가지 금기사항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고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별 감동 없이 엄벙덤벙 넘어갔던 것 같다. 세월이 꽤나 흐른 뒤에 되새겨보니 그 말씀에는 심오한 철학과 인생관이 담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럴지라도 그 얘기를 들으며 공감하여 꽤 여러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했을 게다.
고향이 마산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분이었다. 학비 문제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가 뜻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방황하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더란다. 그런 모진 세월의 강을 건너다가 모든 게 한두 박자씩 늦어졌던 것 같다. 친구의 자녀들은 모두 중고교생인데 비해 그분의 외동아들은 겨우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던 귀여운 악동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호시탐탐 목마를 타려고 박사님 품으로 파고드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무척 사랑스럽게 투영되기도 했다.
학문의 길은 쉬운 게 아니며 부끄럽지 않은 대접을 받으려면 허접한 유혹이나 욕심을 단호하게 내쳐야 한다면서 조목조목 갈래지어 들려주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금쪽같았을 덕담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몽땅 잊혀졌다. 한데, 웬 일인지 일정한 경지에 다다르기 전에는 절대로 넘보지 말라던 금기사항 세 가지가 또렷이 떠오르는 연유는 왜일까. 그 세 가지 금언(金言)의 되새김이다.
먼저 ‘잡 글’의 유혹을 과감하게 내치라는 얘기였다. 대학에 둥지를 틀고 학문에 생을 걸 생각이라면 연구의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는 이외의 경우는 ‘황금을 돌 같이 보라.’는 말 즉 견금여석(見金如石)의 심정으로 ‘잡 글’의 유혹에서 초연하라는 얘기였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대학에 뿌리 내리면 학문 연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잡지사나 신문사 따위에서 잡다한 글 청탁이 끊임없이 오게 마련인데 거기에 시간과 정신을 팔다보면 나태해져 주된 학문의 정진을 게을리 할 개연성 때문에 경계하라고 했다.
다음으로 기업이나 공공기관을 비롯해서 각종 사회단체로부터 청탁되는 강연이나 특강 따위에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쪽과 담을 쌓고 청교도적인 삶을 주문하진 않았다. 일정한 경지에 이른 후에는 적당히 절제하는 선에서 응하는 정도라면 용인된다는 여지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과도하게 많은 강연이나 특강은 학문 정진에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주의하라셨다. 이를 요즘에 견주면 전공을 빙자하여 각종 매스컴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었을 게다.
끝으로 쓸데없는 직함(職銜)을 위해 구걸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어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그렇다고 학문과 무관한 직함을 얻어 이름을 알린다고 석학이 되거나 인격이 고매해지는 게 아니기에 뜬구름 같은 것에 목을 매지 말라며 누누이 강조하셨다. 이런 이유에서 대학의 보직에 연연하거나 다양한 사회단체에 직함을 얻으려고 안달복달하는 추태를 부리지 말고 모든 성과는 학문적 업적으로 증명하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신신 당부하셨다.
‘잡 글’을 멀리하고, 별 의미도 없는 강연이나 특강을 자제하며, 아무데도 소용없는 직함에 연연하지 말라는 참뜻을 새겨본다. 일생동안 모두걸기를 해야 할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되레 방해되는 독소임을 에둘러 일깨워 주는 화두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천금 같은 진리를 넌지시 쥐어줬음에도 실천해 보려는 의지 보다는 얼렁뚱땅 넘기기 급급했었다. 간단명료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못했다. 늘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행동은 현실과 타협하기 바빴다는 고백이 진솔한 실토일 것 같다.
적지 않은 ‘잡 글’을 썼던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졸저 “여백과 흔적”이라는 칼럼집이다. 한편 이 땅에 컴퓨터공학이 처음 보급되던 시절에 그쪽 공부를 했던 관계로 우리 지역의 공무원연수원과 교원연수원에 적어도 10년 이상 강의를 했었다. 그리고 다양한 곳에서 특강이나 강연을 셀 수 없이 했었다. 게다가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적어도 절반 이상의 기간 동안 말직이지만 보직을 꿰차고 있었다. 아울러 컴퓨터 분야의 전국적인 학회에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자리에 이름을 올렸으니 직함을 탐했던 게 아니었던지 겸허히 성찰할 일이다. 이런 내게 정반대의 길을 안내하셨던 박사님이 여태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그런 대응에 대해 무슨 고언을 다시 해 주셨을까.
학문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걸음마를 떼는 꼴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길길이 날뛰던 내게 덕담과 금기사항을 일깨워 주신 참뜻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어린아이를 물가에 세워 둔 것처럼 미덥지 못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내리사랑이었으리라. 자칫하다가 인격이나 지식을 야무지게 채우거나 여투지도 못해 텅 빈 상태에서 마구 퍼내거나 헤프게 덜어내면 화를 자초하는 꼴이라고 단정하셨을 게다. 그러다가 끝내 모든 게 고갈되는 파국을 맞으면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에 학문의 길에서 실패하지 말라고 설파한 덕담으로 여겨진다. 결국 지난한 학문의 길을 올곧게 걷기 위해서는 내면을 충분히 채운 연후에 신중하게 비우거나 퍼내는 지혜를 정확하게 깨우치며 겸손해지라는 철학이나 신념을 담은 큰 일깨움이 분명하다. 그 가르침을 따를 슬기를 일찍이 터득해 본령에 좀 더 충실했다면 지금쯤은 뇌뢰낙락(磊磊落落)*한 대인의 풍모를 자랑할지도 모를 터인데.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