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편집: 묵은지
'경신대기근'에 관한 글로 반성의 기회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신대기근은 조선의 18대 임금인 현종이 재위한지 11년차에 비롯되었던 너무도 참혹한 대기근의 사태로 바야흐로 1670년인 경술년과 1671년의 신해년 두 해에 걸쳐 일어난 그야말로 지구 종말론이 떠올려질 정도로 엄청난 대기근이었으며 역사는 이 두 해를 합쳐 경신대기근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실록이나 각종 기록의 통계 수치는 다르지만 이때 배고픔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당시 조선 인구의 5분의 1에 가까웠다니 아무리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5명 가운데 한사람이 굶어 죽었다는 말은 나라 전체가 어디를 가도 시체더미에 쌓여 있었다는 것인데 생각만해도 그 광경은 너무나 끔찍한 상황이 아닐수 없습니다.
당시 궁중에는 정치적으로 서인을 주로 등용하던 효종이 10년의 짧은 통치를 끝으로 죽고 다음 보위에 오른 현종의 교체기가 막 지난뒤로 남인과 서인은 정국의 주도권을 사이에 두고 당파싸움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불과 나이 19세인 젊은 현종은 재임초부터 예송시비에 휘말리며 조정에서 벌이고있는 이들의 세력 싸움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파싸움을 하다하다 별 시시콜콜한 이유로까지 다툼을 벌였는데 현종의 즉위해인 1659년과 경신대기근을 거친 1674년에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례 절차인 상복을 입는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간에 두 차례씩이나 정치적 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1659년 첫번째 예송(禮訟)인 '기해예송'은 서로 치열한 난타전 끝에 남인의 윤선도가 귀양가는 것으로 서인의 판정승으로 매듭을 지었었지만 15년 뒤 1674년에 두 번째 일어난 '갑인예송'은 서인의 송시열이 도태되면서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하여튼 임금도 임금이지만 이들 조정의 대신들이 한심스러운 것은 나라가 이처럼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조정이라는 곳은 서로 당파싸움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기아에 허덕이다 원망에찬 눈으로 바라보며 죽어가는 백성들이 그저 애통할 뿐입니다.
경신대기근은 1670년 경술년 새해부터 조짐을 보였는데 정월 초하룻날 대낮부터 태양 주위에 불그스레한 햇무리가 발견되더니 밤에도 뿌연 달무리까지 생기며 이런 현상은 거의 한달을 지속하였습니다. 또한 전라도와 경상도, 경기도 등지에서 땅이 심하게 흔들리는 큰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안케 하였고 곧이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역병이 발생하더니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하였습니다. 기후 역시 우박과 냉해가 계속되면서 파종은 엄두도 못냈고 음력 2월부터 시작된 가뭄은 전국의 논밭을 거북이 등처럼 갈라놓아 농사는 아예 손도 못댔습니다. 우물이 메말라 마을마다 사람이 마실 물이 부족했으며 5월까지 간헐적으로 쏟아진 커다란 우박에 농작물은 물론 이북지방에는 어린아이까지 이 우박 덩어리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기현상은 6월들어 거센 장마와 연이은 태풍으로 더욱 타격을 주었는데 특히 제주도는 엄청난 태풍의 여파로 성한 곳 하나없이 완전 쑥대밭이 되버려 제주 목사가 그중 살아남은 백성들을 이끌고 부두에 나와 육지로 가는 배를 애타게 기다리며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재해는 다음해까지 이어지면서 기근의 정도는 대궐에까지 영향이 미처 왕가의 식구도 굶어죽는 경우까지 있었으며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은 심지어 사람의 시체까지 먹는 카니발리즘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경신대기근은 전 조선을 초토화 시킨 대참사였으며 이러한 비극적인 현상은 비단 조선 뿐이 아닌 세계적인 기상 이상현상으로 이 시기에 일어났던 자연적 재앙이 세계의 기상학계 학자들에 의하면 1300년부터 1850년까지 지구 전체에 장기적으로 불어닥친 '소빙하기'의 영향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경신대기근은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로 앞서 임진왜란 같은 큰 전란을 겪어왔던 사람들 조차 차라리 전쟁 때가 이보다는 더 나았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 그 막대한 피해와 참상은 굳이 설명이 없다해도 미루어 짐작을 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차례의 재난과 기근이 있었지만 특히 현종 때 기상 이변과 재난이 유난히도 집중되어 일어났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당쟁에서 예송논쟁이 치열한 가운데에서도 대동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습니다. 대동법은 그동안 종래의 조세 방법인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대신하여 쌀(대동미)로 환산하여 거두는 조세 제도로 광해군 시절 한때 전면적인 시행을 했다가 폐지되고 현종 때에 본격적인 논의를 하게 되는데 관청과 백성들이 바치고 걷는 편의성도 있었지만 그만큼 쌀의 중요성이 포함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 논의 역시 곧바로 실행이 된 것은 아니며 세력을 쥐고있는 대지주들인 대신들의 반대로 뭉그적거리다 숙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완결에 가까운 조세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도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 기상 이상으로 농업에 커다란 피해가 생겨 곡물가가 급등하게 되었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흑사병이나 열병, 발진티프스, 이질, 홍역, 피부병 등 갖가지 질병들이 퍼졌으며 기근에 시달리던 유럽인들은 이로인한 영양 상태의 악화와 체격의 왜소화 현상까지 겹쳐 당시의 심각했던 식량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상 악화는 심각한 기근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물론 생존의 위협으로 전쟁을 불러오게 하고 모든 것을 파탄으로 몰아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하였으며 배고파 죽어가는 백성들의 원성으로 군주가 바뀌었고 이를 모면하기 위한 사회 구조까지 변화시키는 대단한 위력을 보였습니다. 아무튼 이런 지독한 배고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인내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고 그 어떤 것으로도 우선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이 재앙은 오늘날 아무리 과학이 첨단화하여 발달했다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대자연이 인간들에게 미리 보여준 강력한 공포의 경고였습니다.
지금은 누구라도 기본적인 능력에 마음만 먹으면 먹고싶은 음식을 언제라도 먹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안정된 현실을 언제까지 누리며 살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언제라도 닥칠수 있는 대자연의 변화에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나라에 크나큰 난리가 일어나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자신의 안위만을 꾀하는 한심한 위정자들의 무능력과 수수방관으로 나라가 궁지에 몰려 버린다면 우리의 막막한 현실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생각이 들었으며 매우 한심스럽고 우려스러워 이런 위정자들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만인의 지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원래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때 위정자들을 향한 국민들의 기대치는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러다보면 잘잘못을 따지려는 국민의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잦아지는 것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인데 행여 이를 하찮고 성가신 일로 안이하게 받아 들이며 부끄러운 과거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려는 그런 위정자들의 시대착오적인 행동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반드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첨단 과학의 힘으로도 막지 못하는 천재지변을 사람이 막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국민은 자신의 영달을 위한 부와 권력의 기회만 엿보는 기회주의적인 정치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아픈 상처를 치료하고 감싸주기 위해 지혜롭게 움직이는 그런 정치인을 원할 것입니다. 이런점에서 현종 때 닥친 경신대기근은 위정자들의 올바른 처신과 위기 대처 능력은 물론 국민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인한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대기근이라는 큰 아픔을 겪으며 우리들에게 확실한 교훈으로 전해 주었습니다. 아무튼 대기근을 통해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2019년을 맞이한 묵은지는 오늘도 변함없이 일용할 맛난 음식을 안심하고 먹을수 있게 해 준 세상의 모든 은혜로움들에 새삼스런 얘기 같지만 이 글을 통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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