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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해골 사진 나와서 놀라신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기사 검색하다보니 히틀러 얼굴 부분 엑스레이가 공개되었다고 해서 잠깐 기사를 검색해봤습니다.
그러니 또 한명 엑스레이 사진이 생각이 나더군요..이제부터 이 두 독재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히틀러 이야기는 기사를 발췌했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읽은 책과 자료에서 사진만 퍼왔습니다.
내용은 제가 읽고 생각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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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머리 엑스레이 사진 (사진=책 출간 보도자료) |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히틀러의 남아 있는 엑스레이 머리 사진 중 하나로 2차 대전 중 미군 정보기관이 입수한 의료 기록 가운데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과 함께 의사의 진단 기록, 치아 정보 그리고 심전도 기록 등도 함께 확보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보기관이 히틀러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수집했던 자료로 보인다. (이상 2012년 4월4일 기사)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29일에 평생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을 하고 그날 바로 자살했습니다.
베를린의 벙커말고는 곳곳에 소련군들이 들이닥쳐 있을때였습니다.
자살후 유해를 화장하라 했다는데 그후 소련이 유해에서 두개골을 가져갔다 하나.. 여자의 두개골이다..죽지 않고 살아있다..
사실은 히틀러가 여자였다...등등이 많이 퍼져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여서 가명으로 살다가 1962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사망했다는 설까지..
자살후의 유골 사진인지..아니면 자살전 전성기때 유골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치의 모렐 박사에게서 모르핀 주사를 맞고나서야 몸을 유지했다 할정도로 히틀러는 마지막 말년 3년동안 잠을 충분히 못자서
눈이 심하게 충혈되고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화이트로 변하는등...몸이 말이 아니었다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이제는 죽은것이 확실한 상황입니다. 히틀러가 살아있어도 123세일테니까요.
오늘 이 기사를 보고서 댓글들 보니 충분히 짐작하는 댓글들이 올라왔습니다.12지신중 첫번째 동물인 쥐의
엑스레이는 어떨까?라는 댓글들이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 기사를 보고 또다른 인물의 독재자 엑스레이가 떠올랐습니다.
아래 엑스레이는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켰을때 같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관동군에 초급장교로 몸담고 있던 다카키 마사오라는 일본군 장교의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1979년 10월26일 저녁에 궁정동에서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 (월터 PPK 와 스미스 웰슨 리벌버)에 맞아
쓰러진 당시는 일본이름이 아닌 "박정희 " 석자의 한국 이름을 가진 독재자의 사망후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위에 히틀러 엑스레이는 사망전인지 후인지는 기사로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사망 전 집권기간때 엑스레이로 보입니다.
이미 역사의 화석이 되었지만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행사에 갔다가 청와대에 들어왔던 박정희는 다시 궁정동 만찬으로 갑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함께 중앙정보부 산하에 궁정동 별관에 만찬장으로 향합니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국내정세는 ..
부산 마산지역은 부마사태로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던때였고 분위기도 많이 경색되었던 때였습니다.
현대판 채홍사라 불렸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내자호텔과 프라자호텔에서 심수봉과 신재순을 데려온것도 널리 밝혀진
일이구요.
10.26은 이미 책뿐 아니라 드라마 <제4공화국> <코리아게이트 > <제5공화국> 영화 <그때 그사람>에 많이 나왔으니
굳이 이야기는 길게 안합니다.그래도 조금 압축해 이야기하자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계원 실장에게 " 형님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요." 이야기 후에 "각하 저런 버러지같은놈과 정치를 하니
제대로 되겠습니까? "말한후에 차지철에게 1탄을 쏘고 3~4초쯤 지나서 (재판에서는 1초도 안걸렸다고 김재규가 그랬지만
김계원과 두여인 말에 의하면 잠깐 망설였다고 함)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2탄으로 총을 쏘았고.. 그다음 격발하여도 총알이
안나가고 마침 총소리를 전기합선으로 들은 강무홍이 두꺼비집에서 스위치를 내리자 어둠속에서 밖으로 뒤쳐나가면서
"불켜..불" 하였고 밖에서 같은 해병 동기생 출신인 경호처장 정인형그리고 부처장 안재송을 사살한 박선호의
스미스 웰슨 총을 빼았아 다시 방에 들어가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을 쏜것입니다.
그리고 김계원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는데 얼굴에 피가 많이 묻어서 알아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인 김병수 준장이 대통령 배를 보고 하얀 반점을 보고 박정희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엑스레이를 보면 잘 안보이기는 하나 왼쪽 광대뼈쪽에 탄환이 들어가 있는것을 볼 수 있을것입니다.오른쪽귀 뒤에 들어간 탄환이
왼쪽 광대뼈 근처 표피 안쪽에서 멈춰있고 이 탄환은 꺼내지 않고 그대로 시신과 함께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혔습니다.
오늘날 독재자의 딸은 차기 대선을 노리고 있습니다. 인터넷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가 발달된 요즘에 아버지만큼 독재를 할
처지도 안되지만 어설픈 노인네들과 갈데없는 철새정치인들을 모아 집권 망상에 젖어 있습니다.
그녀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단순히로는 수구세력 재집권을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되었을 경우 수많은 주변 간신들이 모여 마치 조선말기 매관매직을 다시 볼까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79년) 최태민의 전횡은 너무나 잘알려진 사실입니다.
다음은 위키백과에 요약된 최태민 이야기입니다.
박근혜와 최태민
박근혜는 어머니인 육영수가 서거한 다음 해인 1975년에 위로, 격려편지와 전화를 준 최태민이라는 목사를 알게 된다.[6] 한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난 시점은 1975년 3월 6일이라고 한다.[7]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서 기업인을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로부터 1인당 2천만~5천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았다.[8]
이에 대해 박정희가 대통령이었을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은 2005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1977년 9월 12일 밤 박정희가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을 거세하고, 최태민과 관련된 구국봉사단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자신의 비망록을 공개하였다.[6]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는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김재규의 변호인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 보충서'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하였는데, 이 두 서류에 992자 분량으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김재규 측은 10·26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하였고, 김재규 변호인 항소이유서의 밝힌 최태민 관련 전문은 아래와 같다.
피고인(김재규 본인)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9]
그리고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아래와 같이 최태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9]
김재규 측에 이러한 증언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어 최태민을 수사를 하였던 백광현은 김재규가 10.26 후에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한 최태민 사건은 김재규가 억지로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하였을 뿐이라고 증언하였다.[10]
이후 최태민은 활동이 문제 삼아져서 1980년 초 신군부에 의하여 활동을 못하도록 잠시 강원도로 보내졌다.[8]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서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에 따르면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또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었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11]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해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12]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박근혜관련 의혹을 파헤친 '안철수등의 한판승부-박근혜벗기기'(이상윤 저, 높은새 출판사 ISBN 978-89-93989-04-5)의 박근혜 남자문제편에 따르면, 2011년 12월 현재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 관련을 조사했던 중앙정보부 백광현검사와 신모 수사관은 살아있다고 한다[13].
이렇게 권력간에 2인자들을 박치기를 시켜 저울질 했던 그녀의 아비와 달리 (말년에는 차지철에게 거의 힘을 주었지만)
그녀는 한번 믿으면 끝까지 가기에 더 위험한것도 있는것입니다.최태민이 그 예이지요.
이럴경우 딱 마음에 드는 간신들이 명나라황제를 농락하고 세력을 키운 유근이나 위충현같은 환관정치를 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꼭 좋은일이 있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과반수가 넘었음 합니다.
또 가화만사성,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인데.. 집안끼리도 내분이 있으니.. 이는 진정한 국가지도자상 모습이 아닙니다.
엑스레이 보니 여기까지 생각이 나서 답답하여지네요...
첫댓글 맹박이 엑스레이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