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쥐
원제 : King Rat
1965년 미국영화
각본, 감독 : 브라이언 포브스
원작 : 제임스 클라벨
출연 : 조지 시걸, 제임스 폭스, 톰 커트니
제임스 도날드, 존 밀즈, 덴홈 엘리어트
패트릭 오닐, 토드 암스트롱
'왕쥐'는 제가 5번째로 소개하는 브라이언 포브스 감독의 작품입니다. "L자 모양의 방' '스텝포드의 아내들' '우리들만의 비밀' '비 오는 오후의 강령회' 에 이은 소개입니다. 1965년 영국 영화죠.
데이비드 린, 토니 리차드슨, 캐롤 리드, 마이클 파웰과 에메릭 프레스버거 콤비, 루이스 길버트, 불팅 형제 등 영국에서 활동한 여럿 명감독들이 있습니다. 저는 감히 단언컨대 브라이언 포브스는 이 감독들과 견주어 전혀 뒤지지 않은 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데뷔 후 연달아 수작들을 발표한 것은 존 포드나 알프레드 히치콕, 윌리암 와일러 같은 거장들도 하지 못한 업적입니다. 1961년 '우리들만의 비밀'로 데뷔한 브라이언 포브스는 2번째 영화 'L자 모양의 방' 3번째 작품 '비 오는 오후의 강령회'에 이어 4번째 '왕쥐'까지 5년간 4작품을 모두 수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감독이 역사상 몇 명이나 될까요?
'왕쥐'의 배경은 포로수용소 입니다. 2차 대전 시기, 일본군이 점령한 싱가폴의 어느 지역의 포로수용소 입니다. 제법 큰 곳인데 이곳에서는 '사는 게 아니라 존재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열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장교든 사병이든, 덥고 빈곤한 곳에서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한 포로들의 지루하고 빈곤한 삶이 다루어지지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깨끗한 옷을 입고 제법 괜찮은 영양섭취를 하면서 사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미군 포로인 그는 킹 상병(조지 시걸) 입니다. 킹 이라고 불리울 만큼 실제 그 곳을 장악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상병 계급에 불과하지만 더 높은 계급 포로를 마치 조수처럼 부리며 자신의 공간에서 비교적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여기서 편하다는 의미는 상대적이지요. 아무리 포로수용소가 편하다고 해도 민간 사회의 삶과 비할 바가 아니죠)
수많은 포로가 존재하는 곳이므로 이곳도 엄연히 작은 연합군 사령부라 할 수 있고 계급과 질서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헌병 역할을 하는 그레이(톰 커트니)는 그런 킹을 달가워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에게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킹은 그 안에서 불법 밀매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일종의 중개인 입니다. 비슷한 예시로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맨은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감옥내의 공급책 역할이었고,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윌리암 홀덴은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가진 부유한(?) 포로 였습니다. '왕쥐'에서의 킹이 그런 인물이죠. 그는 장교들에게 정기적으로 월급처럼 용돈을 쥐어주며 그의 밀매에 대해서 묵인시키고 있습니다.
어느 날 킹에게 전격 발탁된 인물이 영국군 장교 말로우(제임스 폭스) 입니다. 킹은 그가 원주민과 대화가 가능한 것을 보고 통역을 담당시켜 그들과 밀매를 하기 위해서 포섭을 합니다. 선량한 장교인 말로우는 킹의 갑작스러운 호의에 조금 의심을 하면서도 서서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해지고 킹은 어느 포로가 갖고 있는 가짜 롤렉스 시계를 두 배 이상 값을 쳐서 파는데 성공하지요. 말로우는 이런 거래에서 수수료로 10%를 받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 밀매장면에서 킹의 능청스럽고 수완좋은 거래능력이 그를 이런 위치에 오르게 한 것이죠.
이 영화에서 킹을 제외하고 피폐해져 가는 포로들을 많이 다루는데 장교든 사병이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갑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그레이와 달리 나름 융통성 있는 장교로 영국의 명우 존 밀즈가 등장합니다. 몰래 라디오를 만들어 듣다가 일본군에게 들켜서 곤란한 처지를 당하는 내용, 죽어가는 병사, 닭을 키우며 집착하는 병사 등 1963년 존 스터지스 감독의 '대탈주'와 좀 비슷하지만 좀 더 리얼하고 피폐한 내용이지요.
인상적인 내용은 킹이 자신과 친한 몇 명만 따로 불러(말로우 포함) 그들에게 고기 파티를 열어주는 장면인데 그들은 돼지인줄 알고 기쁘게 받아 먹으려다가 그게 병사가 키우던 개 라는 걸 알고 아연실색합니다. 하지만 결국 맛을 보고 걸신들린 듯 먹게 되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개고기 사육을 안하고 개를 훨씬 많이 키우는 서구영화에서의 장면이라 아마 당시에 논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킹이 벌이는 엉뚱한 행동 중 백미는 누군가 쥐를 잡자 킹은 쥐 암컷 수컷 한쌍을 잡아 교미시켜 번식시킨 후 장교들에게 사슴고기로 속여서 먹이자는 제안이었고 그들은 몰래 지하에 쥐 우리를 만들어 번식시킨 후 그 계획을 실행합니다. 이렇게 킹은 엉뚱하고 기발한 짓을 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엉뚱하고 교활한 줄만 알았던 킹이 말로우의 다친 팔을 고쳐주기 위해서 벌이는 혼신의 노력은 나름 감동적입니다.
브라이언 포브스는 세상속의 또 다른 작은 세계에서의 단절된, 혹은 별도로 구성된 이야기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데뷔작 '우리들만의 비밀'에서는 예수로 오인받은 남자를 숨겨준 '헛간'이라는 공간, 'L자 모양의 방'에서는 소시민들이 모여사는 다가구 주택이랄 수 있는 3층 집, '비 오는 오후의 강령회'에서는 범죄를 공모한 부부가 사는 저택과 그 곳 강령회에 모이는 사람들, '왕쥐'에서는 포로수용소, 그리고 '스텝포드의 아내들'에서는 이상한 부부들의 모여사는 마을이 그 배경입니다. 헛간->주택->저택->포로수용소->마을로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구성되는 공간이 커졌죠. '스텝포드의 아내들'을 제외하면 모두 흑백영화입니다.
폴 뉴만, 스티브 맥퀸, 토니 커티스 등이 출연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고, 브라이언 포브스의 영화에 반한 냇 킹 콜은 이 영화에 출연해보려고 했는데 마땅한 역할이 없어서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원작자 제임스 클라벨은 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의 '언제나 마음은 태양'이 감독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원래 작가로 더 유명합니다. 공포영화 '더 플라이(58)' 원전의 각본을 썼고 '대탈주' '장렬 633 폭격대'의 각본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대탈주'의 속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브라이언 포브스만의 영화라기 보다 제임스 클라벨의 영향력이 좀 더 높은 느낌이 그래서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브라이언 포브스의 앞선 3편보다는 조금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합니다. 브라이언 포브스 역시 연출보다 각본에 더 능한 인물이기에 아무래도 그가 직접 각본과 연출을 겸한 'L자 모양의 방'이나 '비 오는 오후의 강령회' 같은 작품이 더 우수한데 '왕쥐' 역시 원작은 제임스 클라벨인데 브라이언 포브스가 직접 각본을 썼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제임스 클라벨의 원작의존도가 높았을 것입니다. 원작 자체가 제임스 클라벨이 실제로 2차 대전 포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괜히 '대탈주'가 수작인 게 아니지요.
브라이언 포브스의 영화가 단 한 편도 국내 개봉한 적이 없고 특히 이 영화는 유명 스타가 나오지 않으니 더더욱 개봉되기 어려웠던 작품입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의한 일본의 항복으로 영화는 끝나지만 수용소 포로들을 데려가기 위해서 온 연합군 장교가 모두 멍한 사람들처럼 변한 포로 병사들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 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킹을 발견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딱 한 명 있군요. 다들 누더기를 입고 헐벗고 있는데 왜 당신만 깨끗하고 멀쩡한가요?'라는 질문을 하는 장면은 포로수용소의 힘겨운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죠. 너무 많이 유명한 '대탈주'와 달리 제임스 클라벨의 또 한편의 볼만한 '포로수용소' 소재 고전입니다.
ps1 : 의사 역의 제임스 도날드는 '대탈주'에도 출연했지요.
ps2 : 주연급 배우 중 별 매력이나 특징이 없다고 생각되는 인물 중 하나가 조지 시걸 입니다. 벤 가자라, 로버트 프레스톤, 로사노 브라지 등이 그런 느낌입니다.
ps3 : 아카데미 2개 부문 후보에 올랐는데 수상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미국영화 입니다. 조지 시걸이 연기한 킹이 미국 병사죠. 제임스 폭스, 톰 커트니, 존 밀즈 등 여러 캐릭터가 영국인으로 등장했지만.
[출처] 왕쥐 (King Rat, 65년) 포로수용소 소재 고전 수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