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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녀는 아프다고 학교에 가지 않자 친구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정말 많이 아파 보여.”
“많이 아파?”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어.”
“응?”
“난 남자 복이 없나봐.”
친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은아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지려고 하면 다들 도망을 가. 내가 매력이 없나?”
“너 우리 모르게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진우오빠 말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드라마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어. 생각해 보면 진우오빠도 말도 없이 떠난 건 날 안 좋아했다는 뜻이잖아?”
“그걸 이제야 알았어?”
“그래. 이제 현실의 남자를 만나야 할 때야.”
“그런가?”
“기다려. 봄 방학에 우리들이 미팅 잡아 놓을 테니까.”
“봄 방학에 외할머니한테 가야 하는데.”
“미팅이 며칠 하니? 하루면 돼.”
“응. 정말 괜찮은 사람이어야 해.”
“그래.”
은아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가 큰일을 당해서 복잡해서 그럴 거야.”
“그래.. 기운 내.”
“응. 고마워..”
****
B 구역에 간 류와 수호, 그리고 그들과 같은 동족이 헌터들을 붉은 여우 하나가 마치 당할 듯
골목 안으로 데리고 오면 위에서 그들이 내려가 헌터를 에워쌌다. 그가 단검을 꺼낼 시간 따위
주지 않고 그들의 기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그 날 밤에 처리한 헌터의 수가 20명이 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했다. 다음 날이면 다른 구역의 헌터들도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들은 그걸 바라고 있었다.
류가 말라 비틀어진 헌터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에 차고 있던 시계에서 붉은색 빛이 반짝였다.
류가 한 쪽 눈썹을 올렸다. 허리를 숙여 시계를 가볍게 빼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지나가며 구둣발로 밟았다. 불빛을 반짝이던 시계가 천천히 불빛을 멈추었다.
****
아침 식사를 하며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번 주 토요일에 할머니한테 갈 거야.”
“일요일에 가면 안 돼? 나 토요일에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는데..”
엄마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대신 일찍 와. 토요일 저녁이라도 출발 할 거니까.”
“응. 할머니가 안 좋으셔?”
“응..? 응..”
은아가 엄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가 다시 식사를 했다.
****
미팅을 하러 나가기 위해 예쁘게 단장을 한 그녀들은 약속장소로 향했다.
“웬일이니.. 설마 저 남자들은 아니겠지?”
그녀들은 반대편 2층 커피숍에서 그녀들 숫자와 동일한 남학생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수연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야.. 맞아..”
“저것 봐. 전화 받잖아~.”
그녀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수연이한테 말했다.
“주선자 되세요?”
<맞는데요. 왜 안 오시죠?>
수연이 전화를 끊었다.
“나가자.”
그녀들은 커피숍을 나와 밖으로 나오며 웃음을 터트렸다.
“야.. 봤어? 오늘 우리 큰 일 날 뻔했어.”
수연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은아의 어깨 위에 팔을 올렸다.
“미안하다. 다음엔 정말 괜찮은 남자를 소개시켜 줄게. 원래 미팅 말고 소개팅이 괜찮거든.”
“괜찮아. 재미있었어.”
“우리끼리 놀까?”
“그러지 뭐.”
그녀들은 재미있는 영화도 보고, 커피숍에서 수다도 떨고, 저녁엔 아이스링크에 가서 스케이트도 탔다. 잘 못타는 은아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외할머니 댁에 가서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응. 나만 놀아서 미안.”
“됐어. 너라도 청춘을 즐겨.”
“정말이야. 우리 몫까지 즐겨야 해.”
“시골에서?”
“혹시 알아? 다른 멋진 남자를 만날지.”
“골목대장 같은?”
은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내 타입 아니라니까?”
“여하튼.. 잘 다녀와.”
“너희들도 잘 지내고 있어.”
“그래.”
은아는 그녀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이미 짐을 차에 싣고 계셨다.
“즐거웠어?”
“응. 지금 가?”
“그래.”
“짐 챙겨서 나올게.”
“다 챙겼어. 타.”
그녀는 일주일 정도니까 뭐 상관없겠다 싶어 차에 올랐다. 그녀는 가는 내내 친구들과 하루를 얼마나 재미있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조용히 가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
정윤은 현주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선배. 좀 도와줘.>
“무슨 일인데?”
<B구역으로 가야 해. 선배의 도움이 필요해.>
“왜..?”
<헌터들이 그들에게 당했어.>
정윤이 눈을 조금 뜨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 어떻게..”
<덫을 놓은 모양이야. 간밤에 기를 빼앗기고 사망한 헌터 수만 50명이 넘어. 우리도 그리로 가야해.>
“알았다. 내가 그리로 갈게.”
정윤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
외할머니 댁에 도착하자 할머니가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다.
“할머니..”
“앉아 봐.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엄마..”
“잘 들어.”
은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할머니와 엄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 네가 많이 아플 거야.”
“제가요? 저는 하나도 안 아픈데..”
“며칠 아프고 나면 너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 올 거야. 그 이유를.. 먼저 말해줘야겠지.”
“할머니.. 엄마..”
엄마는 조용히 앉아 계셨고, 할머니는 심호흡을 한 번 하시고는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프게 될 이유는.. 네가 구미호와 사냥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네 엄마가 그랬고, 네 할머니가 그랬어.”
그녀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할머니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할머니도 엄마도 구미호와 사냥꾼 사이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씀이세요?”
할머니가 책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구인지화(九人之禍)> 라고 적혀 있는 옛날 책이었다.
“이게 뭐예요?”
“구미호와 사냥꾼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야. 결론은 다르지만 분명 네 조상의 이야기다.”
은아는 책을 손에 들고 한 장을 넘기고 읽기 시작했다.
****
<구인지화> 의 책은 헌터들이 구미호들과 붉은 여우를 해치우는 방법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마
지막에 소정과 무하라는 이들에 대해 적어놓고 있었다. 할머니가 책에는 적혀 있지 않은 옛날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다.
****
시대: 아주, 아주 오래전 옛날..
장소: 깊은 산골.
시간 : 커다란 만월의 한 밤.
“그러니까 잘 들어 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날 밤에 산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있었어. 흰 도포자락과 봇짐하나
짊어지고 신고 있는 신이 오랜 산행으로 헤어질 지경이었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인지 그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사악~ 끼기 시작했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자욱하게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에 맞춰 한 남자가 길을 가다 앞에 안개에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한 발도 떼지 못하고 멈추어 서 있던 남자가 잠시 후에 안개가 걷히자 다시 길을 가려고 했지. 그런데 이상해..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지, 어느 쪽 길이 맞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으려던 남자가 결국 한 길을 마음에 결정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점점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란 말이지.. 주위에서 부엉이는 울지, 소쩍새도 울지.. 뭔가 사사삭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남자는 점점 무서웠어.”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남자가 뭘 그런 걸 갖고 무서워하나?”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헤~. 무슨 소리.. 남자도 사람이야. 야심한 밤에 혼자 산 속을 다니면 얼마나 무서운데.. 더 들어 봐.. 그러다 뭔가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어.”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아픈 발목을 감쌌다.
“아이코.. 발목을 다쳤네.. 옆에 있는 나무로 발목을 양 옆으로 대고 옷고름을 뜯어 칭칭 감았어.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 절뚝.. 절뚝.. 절뚝.. 멀리에서 불빛이 보였어. 그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그 불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어.”
빛이 비추는 곳에 간 남자는 허름한 집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롱불에 비친 방의 모습이 그림자로 창호지문에 비쳤다.
“흠흠.. 계시오~. 여보시오~.”
바느질을 하고 있던 여인이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겠소? 길을 잃어서..”
여인은 조용히 일어나 다소곳한 모습으로 그의 다친 발목을 바라보았다.
“부군은.. 아니 계십니까?”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몸을 돌려 조용히 대답했다.
“상처한지 3년이 되었습니다..”
“아..”
“예가 아닌 줄은 알지만 밤도 깊었고, 이 근처는 산새가 험하여 다치신 분을 그냥 가시라.. 하기도 마음에 걸리니.. 웃방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면 어떠시옵니까?”
“부군도 안 계신 집에 그리하여도..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웃방 문을 열고 짚신을 신었다.
“그럼 들어가 쉬시지요. 발목에 붙일 약초가 있습니다. 간단히 요기하실 것과 함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녀가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가 웃방으로 들어가 호롱불을 켰다. 다친 다리를 쭉 펴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여인이 문을 열고 다과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약초를
으깬 것이 담긴 그릇을 그가 앉은 쪽으로 밀었다.
“남녀가 유별하니 제가 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겠소.”
“그럼.. 쉬십시오.”
“고맙소.”
여인은 고개를 숙여 아니라는 듯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와 문을 닫고 자신이 바느질 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선비는 아픈 다리에서 나뭇가지를 떼어내고 버선을 벗었다. 그리고 약초를 붉어진 부위에 올려놓고
여인이 준비해 준 깨끗한 천을 대고 끈으로 묶었다. 다과상에 올려져 있는 막걸리와 간소한 음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식욕이 돌아 뱃속이 요동치는 듯 했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안 돼!”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코 깜짝이야.. 놀랐잖아, 인마!”
처음부터 말하던 남자가 아이를 나무랬다. 그러자 아이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걸 먹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 그걸 먹은 나그네는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했어. 어느새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들었지.
잠을 자고 있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이상했어. 숨쉬기도 힘들고 누가 올라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눈을 떴지. 그런데 눈앞에 구미호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지. 그가 발버둥쳤지만 이미 늦었어.
이내 사내의 고개가 바닥에 떨어졌어. 구미호는 그의 가슴을 가르고 간을 꺼내 한 입 먹었어.
그리고 미소를 지었지.. 하하하하...”
“아~~~~~악!”
여러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제껏 이야기를 하던 사내가 자신이 마치 구미호인 듯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냈고, 아이들은 바닥에 앉아 몸을 한껏 웅크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냐?”
“밤에 산길을 가면 안 돼요.”
“아니야.. 낯선 여인이 사는 집에 들어가면 안 돼.”
“그보다는 여인이 준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물론 너희들이 말한 것도 대답은 되겠지만.. 명색이 구미호 사냥꾼이 될 자가 할 말은 아니지. 자. 구미호 사냥꾼이 구미호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긴.."
"도망가야지.”
나무에 기대어 있던 아이들보다 조금 나이가 있는 소년이 대답했다.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직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산에 혼자 들어가서도 안 돼요~. 하지만 그 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겠지?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자.”
남자가 아이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각자 처소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나무에 기대어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무하야.. 언제 돌아온 거냐?”
남자가 팔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소년을 품에 안았다.
“방금. 그들은 사람의 가슴을 가르지도 않고 간을 먹지도 않아. 왜 아이들한테 뻥을 쳐.”
남자가 피식 웃었다.
“힘들진 않았고?”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른 손을 들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 한 가운데에 달려 있는 검은 구슬을 보여주자 웃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벌써 시험에 통과 한 거냐?”
“강씨.. 나도 이제 어엿한 구미호 사냥꾼이야.”
강씨가 손을 들어 무하의 어깨에 올렸다.
“아직 어린데.. 조금 더 있다가 하는 편이..”
“강씨.. 난 어려서부터 이 날만은 손꼽아 기다렸다고. 그건 강씨가 더 잘 알잖아.”
“알지.. 하지만 그 길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좋지만은 않아.”
“알아. 하지만.. 난 내가 소원한 일을 꼭 하고 말 거야.”
“무하야..”
심각한 표정의 강씨를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던 무하가 씽긋 웃었다.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우리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지. 어때, 강씨.”
강씨의 눈썹이 일그러지듯 하더니 손을 들어 무하의 뒷통수를 때렸다.
“이 녀석이 까분다~.”
“하하하..”
듣기 좋은 무하의 웃음소리가 산 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무하의 구미호 사냥꾼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처음 구미호를 만났을 때 무하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그들의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의
검은 구슬이 빛을 내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나이가 지긋한 사냥꾼이 무하에게 물었다. 구미호는 포박되어 나무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여우의 형상도
아니었고, 그저 어여쁜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은빛 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것과
송곳니가 조금 더 길어졌다는 것 뿐이었다.
“왜 꼬리가 9개가 아닙니까?”
“하하하.. 너도 헛소문을 믿는 게냐?”
“헛.. 소문 입니까?”
“그래. 구미호는 말대로 꼬리가 9개라 구미호가 아니라 아흔 아홉 번이라도 모습을 변할 수 있는 미물이어서 구미호다. 꼬리 같은 것은 원래부터 없어.”
“그럼 사랑하는 사람과 1000일을 함께 살면 사람이 된다는 말도 헛소문 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이제까지 수 많은 구미호들을 봤지만 사람이 되고자 하는 구미호는 본 적이 없거든.
1000일 동안 들키지 않고, 혹은 들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버티기란 하늘에 별 따기.
말이 안 되잖아. 그저 구미호는 사람을 유혹하고 생기를 빨아들이고 육신은 버리는 요물일 뿐이야.”
“그럼.. 구미호는 다.. 처리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 그 이유는 구미호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처리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지?”
“네.”
“너에게 검은 대나무 뿌리로 만든 단검이 있느냐?”
무하가 소매 속에서 검은 색 단검을 꺼내 들자 구미호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걸로 단번에 심장을 찔러야 한다. 배운대로 하면 돼.”
무하가 걸음을 옮겨 구미호에게 다가가자 구미호가 몸부림을 치다가 모습을 바꾸어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무하가 걸음을 멈추자 사냥꾼이 소리쳤다.
“정신 차려! 절대 틈을 보여서는 안 돼! 네 마음이 약해지게 하려고 구미호는 그 어느 것으로도 변 할 수 있단 말이다.”
“네.”
무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구미호가 몸부림을 치며 30대 여인으로 변했다. 무하가 숨을 멈추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
그의 어머니 모습으로 변한 구미호가 슬픈 눈으로 무하에게 말했다.
“그래.. 무하야.. 어미를 이리 묶어 놓으니 너무 아프구나..”
“어머니..”
무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걸 풀어줘야 너를 품에 안을 수 있지 않겠느냐..”
“진정.. 어머니.. 이십니까..?”
“그래.. 보고도 못 믿겠느냐?”
무하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무하가 고개를 푹 숙이자 눈물이 땅에 떨어져 스며들었다. 다시 눈을 든 무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어머니의 모습을 한 구미호에게 다가갔다.
“그래.. 무하야.. 어미 좀 풀어주렴..”
무하가 마치 끈을 풀어주려는 듯 다가갔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구미호를 향해 단검을 들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구미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원래 모습을 드러내라.”
“어미다.. 무하야.. 어미야..”
“내 어미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산에서 나물을 캐시다 늦게 오시는 바람에 너희들에게 기를 빼앗기고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니 어서 원래 모습을 드러내란 말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구미호가 몸부림을 치자 원래의 은빛 눈과 아름다운 미모의 구미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미안하구나. 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으니.. 부디 다음 생애에는 미물이 아닌 사람으로 환생하거라.”
무하가 한 걸음 더 옮겨 구미호의 심장에 단검을 찔렀다. 구미호의 입에서 유리구슬이 나왔다.
유리구슬이 몸 밖으로 나오자 구미호의 몸 전체에서도 하얀 빛이 나오더니 훅! 사라졌다.
구미호가 묶여 있던 자리에는 하얀 안개같은 것만 남고 끈은 바닥에 떨어졌다. 사냥꾼이 유리구슬을
집어 들고 주머니에 넣으며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했다.”
무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또래에 비해 영특하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구미호 사냥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수많은 구미호들을 처리해도 그의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말 수가 적어지고, 웃는 날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수장이 그를 불렀다.
“오늘도 수고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남쪽으로 나흘 길을 내려가면 있는 작은 마을에 붉은여우가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이번 남자의 기를 먹으면 구미호가 된다. 네가 가서 처리하겠느냐.”
무하가 고개를 들어 수장을 바라보았다. 여우의 종류는 총 3가지. 백여우, 붉은 여우, 구미호. 흔히 백여우는
백년 묵은 여우, 붉은 여우는 500년 묵은 여우, 구미호는 1000년 묵은 여우라고 알고 있지만 아니다.
백여우가 새끼를 낳으면 백여우가 되는 것이고, 붉은 여우가 새끼를 낳으면 붉은 여우가 되는 것이고,
구미호가 새끼를 낳으면 구미호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백여우는 사람을 해치기 보다는 장난을 치는
수준이고 수명도 짧은 편이라 감시대상일 뿐이었다. 문제는 붉은 여우와 구미호였다. 붉은여우는
구미호보다는 못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매력적인 여인으로 바꾸어 남정네를 유혹해 그들의 기를
빨아들인다. 이들도 구미호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선천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의 기를 더 많이 채워 구미호가 되길 바랬다. 개 중에 구미호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전설일 뿐이고 그들 세계에서도 구미호는 왕족처럼 붉은여우에서 구미호가 된 요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구미호는 둔갑술도 뛰어나고 동족인 구미호들을 서로 보호한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처리를 해서
그 수가 붉은여우에 비해 많지는 않았다.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먼 길이니 사냥개와 흑마를 줄 테니 다녀 오거라.”
“감사합니다. 허나 사냥개와 흑마는 제가 사냥꾼일까 의심을 살 수 있으니 걸어서 가겠습니다. 대신, 강씨와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 하겠는가?”
“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왔다. 강씨가 안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 듣고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무하를 바라보았다.
“강씨. 나랑 산보나 가세.”
“산보같은 소리.. 그게 무슨 산보냐?”
무하가 미소를 지으며 걱정스런 표정의 강씨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짐을 챙기러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나흘 길을 걸어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주막에 다다른 그들이 노곤한 피로를 풀며 주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 저기 강 너머에 사는 개똥이 댁 말이구먼.”
강씨가 주모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개똥이 댁?”
“얼마나 착하고 예쁜지 몰라. 그렇게 예쁜 여자가 왜 개똥이 같은 녀석이랑 사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왜.. 개똥이가 이상한가?”
“이상하다마다~. 마침 내일 아침에 개똥이 댁이 담근 술을 갖고 여기로 올 테니 한 번 보구려. 마음에 들면 확 보쌈해 가셔~.”
“에헤~! 이 사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내가 오죽 답답하면 그런 말을 다 하겠수?”
주모가 고개를 돌려 한 쪽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검은 삿갓의 무하를 바라보았다.
“저 이는 왜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 있대?”
“얼굴에 큰 흉이 있거든.”
강씨가 마치 커다란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주모에게 몸을 기울이며 오른 손으로 입가에 대고 조그맣게
말하자 주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라고 말하고는 주모가 방을 나가자 강씨가
무하를 바라보았다. 무하가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삿갓을 벗었다.
“그 여자가 맞는 것 같지?”
“응. 내일 아침이면 볼 수 있다니까 그 때 확인해 보자.”
“응. 피곤할 텐데 강씨는 쉬어.”
“넌 어딜 다녀오게? 같이 가.”
“둘 다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야. 나 혼자 금방 다녀올테니 이거 드시면서 쉬고 있으셔.”
“알았다. 어서 다녀 와. 조심하고..”
무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소리 없이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삿갓대신 목에 두르고 있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며 강 건너 개똥이라는 자의 집으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들의 집 가까이에 다가가자 그의 오른 손에 있던 팔찌에 있는 구슬에서 빛이 났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쪽 손목의 구슬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분명 붉은여우라 했는데 어찌 구미호인가..”
그들의 손목에 있는 검은 구슬은 구미호 심장에 있는 유리구슬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 살아있는
구미호와 만나면 반응을 해서 빛을 내는 신비한 물건이었다. 백여우나 붉은여우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마도 위에서 착각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하는 구미호가 드디어 남자의 기를 빨아들이려나보다 생각하며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의 집 앞에 도착한 무하가 작은 돌담을 넘어 초가집 벽에 붙었다. 남자의 비명소리라도 들리면 어두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구미호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몸싸움이라도 벌이는 듯한 소리가 멈추고
조용해졌다. 무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바라보다가 안에서 사람이 나오려는 듯한 기척을 느끼고는
몸을 빠르게 움직여 담을 다시 너머 벽 뒤편으로 넘어갔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집을 지켜보았다.
방문이 열리고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몸을 뒤로 더욱 숨기며 무하가 눈에 힘을 주었다.
‘죽지 않았다.. 이유가 뭐지?’
남자가 집을 나서며 담벼락에 침을 뱉고는 돈 주머니를 손에서 위로 조금 던졌다가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며 사라지자 잠시 후에 방문이 열리며 구미호인 여자가 나왔다. 남자가
사라지자 무하 손목의 구슬이 빛을 멈추었다. 허름한 차림새의 여자는 머리를 매만지며 밥상을 들고 나왔다.
아마 그릇을 놓친 듯 깨진 그릇이 밥 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 어둠속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하는 지금 구미호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리를 앞으로 한 걸음
떼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그녀의 모습이 구름에게서 벗어난 달빛에 비쳤다. 무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빼어난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껏 그가 처리해 온 구미호들도 미색으로는 천하제일이었다.
몸매 또한 어느 기방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모습의 구미호들이 무하가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유혹하려고 했지만 무하는 절대로 구미호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무하가
지금 눈앞의 구미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구미호라..’
무하는 몸을 돌려 강씨가 기다리고 있는 주막으로 향했다. 언제 나갔냐는 듯 소리없이 방으로 들어온
무하를 강씨가 흠칫 놀라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바라보았다.
“그래.. 처리했어?”
무하가 바닥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첫 날이니까 천천히 해.”
“강씨..”
“응?”
“눈물을 흘리는 구미호를 본 적 있어?”
강씨가 무하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붉은여우라며.. 구미호야?”
“잘 못 알았나봐. 이게 빛을 냈어. 그런데 신기하게 구미호가 아니라 남자한테 반응을 하더라고.”
“그럼 남자가 구미호라는 소리야? 그건 말도 안 되지. 남자구미호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럼 왜 남자한테 반응을 보였지?”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구미호가 울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구미호라..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살고자 할 때.. 울지 않아?”
무하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보아 온 구미호들은 검은 대나무로 만든 이 단검이 심장에 박히기 전까지도 자신들의 매력으로
유혹하려 들지, 거짓으로 우는 척 하기도 하지만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비웃으며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린 구미호는 본 적이 있지.”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구미호를 보기라도 한 거야? 여기 구미호가 그래?”
무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강씨가 손을 들어 무하의 어깨에 털썩 올렸다. 무하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강씨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 구미호가 네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속셈이라니까? 언제 어디서든 긴장을 풀지 않다니.. 역시 구미호야..”
“그런건가?”
“그럼~. 구미호가 왜 울겠어?”
“하긴..”
“내일은 처리해야 할 테니 어서 자자고..”
“응.”
무하는 강씨 옆에 누웠다. 눈을 감자 달빛 아래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훔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강가에 나가 세수를 마친 무하가 주막으로 들어가려는데 막 집을 돌아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옷소매로 팔목의 팔찌를 감추었다. 그녀는 술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고 있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구미호와 주막집 앞에서 딱 마주쳤다.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는
낯선 남자로부터 시선을 피하며 술동이에서 한 손을 내려 저고리 앞을 조심스럽게 여미었다.
무하는 그녀가 먼저 들어가도록 입구에서 조금 비켜나자 그녀가 그를 바라보지 않고 조그맣게 속삭이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며 주모를 불렀다.
“언니.. 저 왔어요.”
부엌에 있던 주모가 밖으로 나왔다.
“왔어?”
“네. 이번 술도 맛있게 된 것 같아요.”
“자네가 만드는 술이야 없어서 못 팔지..”
그녀가 술동이를 내리는 동작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무하가 다가가 술동이를 내려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바라보지 않고 “감사합니다.” 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럼, 값은 다음에 주셔요.”
“아니야. 왔으니 국밥 한 그릇 먹고 가. 응?”
“아니에요. 가봐야 해요.”
“가기는.. 어여 한 술 들고 가. 그러다 쓰러질 것 같아서 그래. 어여~.”
주모가 금세 국밥이 담긴 그릇을 올린 작은 상을 내왔다. 여인은 어쩔 수 없이 평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팔을 들어 올리려던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주모가 인상을 찡그리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뭐야.. 또..”
주모가 말을 하려다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는 무하를 바라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무하가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가자 주모가 작은 목소리로 여인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또 그런 거야? 내 이 놈을 잡아서 손모가지를 부러뜨리던가 해야지 원..”
“괜찮아요..”
“괜찮기는.. 얼마나 아프면 팔이 안 올라가냐고..”
“정말이에요. 괜찮아요..”
결국 여인은 왼손으로 국밥을 힘겹게 한 입 넣고 천천히 씹었다. 강씨가 무하 옆으로 왔다.
“뭐야.. 구미호가 맞고 산다는 거야? 왜?”
“모르지.. 거짓말 일수도 있고. 기를 빨아들이려다 몸싸움을 벌이다가 다친 것일 수도 있고..”
“아하~. 말이 돼냐? 구미호가 사람 힘을 못 이긴다고?”
강씨가 인상을 찡그리며 무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더 큰 사단이 나기 전에 오늘 밤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아.”
“응.”
그날 밤, 무하가 그녀의 집으로 다시 갔다. 밤늦은 시각이었는데도 개똥이라는 자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대감집에서 받아온 바느질감을 손에 들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무하가 조그만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목에 두른 검은 수건을 끌어 올려 코 아래까지 덮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저만치에서 술에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다가오는 개똥이라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목에 있는 구슬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어둠 속에 숨었다.
집으로 들어간 개똥이라는 자가 문을 닫자 호롱불에 비친 그림자가 창호지 문에 비쳤다.
“서방님 오셨다.”
“네. 오셨어요.”
순간 개똥이라는 자가 손을 들어 여인의 얼굴을 때렸다. 여인이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헉.. 소리를 낸 것은 그 여인이 아니라 무하였다. 무하가 눈을 크게 뜨고 그 창호지 문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일어나 앉은 여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가 여인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네 서방이지.. 안 그러냐?”
“....”
“대답해! 대답 하란 말이야!”
하지만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여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손을 다시 들었다. 큰 소리와 함께 여자가
다시 뒤로 넘어갔다. 잠시 후 사내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호롱불이 꺼졌다. 몸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무하는 문이 열리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옷이 찢어진 채 밖으로 나온 여인을 바라보았다.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가 손을 들어 눈물과 피를
훔쳤다. 옷을 여미려다 건너방으로 가서 역시나 허름하지만 그래도 지금 옷보다는 나은 옷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소리 없이 흐느꼈다. 방에서는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하는 자신도 모르게 나무를 세게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턱에 힘을 주고 주먹을 들어
나무를 한 대 주먹으로 치고는 몸을 돌렸다. 주막으로 돌아온 그가 강씨를 흔들어 깨웠다.
“어.. 처리 했어?”
눈을 비비며 일어난 강씨가 눈을 힘겹게 뜨고 무하를 바라보았다.
“강씨. 여기 기방에 가서 개똥이라는 자에 대해 알아봐.”
“응? 왜?”
“알아 봐 줘.”
“인마.. 너 왜 그러는 건데..”
무하가 턱에 힘을 주며 강씨를 바라보았다. 다음 날, 강씨는 그 마을 기방에 갔다. 술을 마시며 기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하는 그 사이 바느질을 마친 여인이 대감집에서 바느질삯과 함께 다른 일거리를 받아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 여인은 어제 맞은 곳이 아픈지 비틀거리며
길에 있는 나무를 잡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힘겹게 내딛었다. 무하는 그 동네
약방을 찾아갔다. 돈을 내놓으며 말했다.
“맞아서 멍들고 아플 때 먹을 수 있는 탕재 좀 주시오.”
잠시 후 주모가 탕약을 달이고 있었다.
“이걸 누구한테 주려고 그러는 거요?”
무하는 그저 탕약만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탕약을 호리병에 담아 입구를 막은 것을 들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개똥이라는 자는 집에 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마루에 탕약과 서찰을 내려놓고
안 보이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루 위에 놓인 탕약이 담긴
호리병 뚜껑을 열어 향기를 맡던 여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서찰을 펼쳐서 바라보았다. 서찰에는 이 약이
어디에 좋은 것이니 마시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없었다.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호리병이 주막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주모가 준 줄 알고 그릇을 꺼내와 탕약을 마셨다.
그날 밤 무하는 강씨와 주막에 있었다.
“개똥이라는 자식은 이름만큼 개더만~.”
무하가 조용히 강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씨가 조금 더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그 여인이 구미호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해. 기녀들한테 여인이 삯바느질에 술만드는 일을 해서 모은
돈을 기방에 다 쓰고 있는데, 사람도 아닌 년을 데리고 사는 것만도 감지덕지 해야지.. 라고 술에 취해서
어느 날 말하는 걸 들었다는 거야.”
무하가 인상을 찡그리며 강씨를 바라보았다.
“맞고 사는 건..”
“아무래도 그 이유이지 않겠어?”
강씨의 말에 무하가 눈을 감으며 한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 날, 그녀가 익은 술을 갖고 주막으로 왔다. 무하가 기다렸다가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술동이를 내려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 뒷덜미에는 전에 생긴 멍이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도 했고, 지난밤에 새로 생긴 듯 보이는 멍이 보였다. 무하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닙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살짝 지었다가 이내 숨겼다. 무하는 애처로운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왔어?”
“네, 언니.”
“국밥 한 그릇 먹고 가. 알았지?”
“언니.. 보내주신 탕약은 잘 먹었어요.”
주모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무하가 조금 고개를 젓자 이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잘 먹었어? 또 해 줄까?”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비싼 재료 같던데..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럼 다행이네~. 잠시만 기둘려..”
주모가 무하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평상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듯 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무하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먼 길을 오셨나봅니다.”
“네.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이라..”
여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하는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녀의 입술이 갈라지며 피가 조금
새어나왔다. 무하가 소매에 묶은 깨끗한 천을 풀어 접은 후에 그녀의 입가에 대 주었다. 여인이 흠칫
놀라며 천을 잡다가 무하의 손가락에 그녀의 손가락이 스쳤다. 여인은 손을 떼었다가 다시 천을 잡자
무하가 손을 놓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얼굴과 목덜미, 귓불이 발그레해졌다. 무하는 심장이
두근.. 거렸다. 무하가 천을 가져가려는 듯 몸을 숙여 여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일 산 중턱에 있는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하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주모가 상을 차려서 나오면서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산 중턱에 있는 호수에서 무하는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참이 지나도 여인은 오지 않았다.
무하가 산을 내려가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부엌에서 나오던 여인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그에게 다가와 조그맣게 말했다.
“저는 임자가 있는 몸입니다. 어찌 이러십니까..”
“호수엔 왜 안 나오셨습니까..”
“제가 왜 가야 합니까.”
무하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는 호리병과 약과가 싸여 있는 종이를 건네었다. 여인은 받지 않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받지 않을 것입니다. 도로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내일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가 그녀의 품에 호리병과 약과종이를 건네고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여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록 그가 탕약이 담긴 호리병과 다과들을
갖고 집으로 오자 여인은 결심을 한 듯 호수로 갔다. 무하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여인 앞으로 갔다.
“앞으로 이러지 마시라 말씀드리려고 온 것 뿐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해하지 않습니다. 잠시나마 쉬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 뿐이니..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가 그녀보고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고는 호숫가에 앉을 수 있는 바위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한약이 담긴 호리병과 갖가지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곳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니오면 어쩌려고.. 이러셨습니까..”
“아니 오시면 산에 사는 들짐승더러 먹으라고 두고 가면 그만인 것을.”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여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여기에 있는 시간은 그대의 시간이니.. 마음 편히 쉬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오.”
여인이 무하를 바라보자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바위 위에 앉아 탕약을 마시고
조금 요기를 하는 동안 그는 조금 내려가 호수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남은 음식들을 보자기에 잘 정리해서
그 옆에 섰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고마웠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다시는 이러지 마십시오.”
무하가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도 있고, 구름도 있고..”
무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이가 있습니다. 그 이가 참.. 마음에 걸립니다.”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내일부터는 오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보셨다시피 저는 임자가 있는 몸입니다. 더는.. 곤란하게 만들지 마셔요.”
“보았습니다. 그대의 임자가 어떤 인사인지.. 그대가 원한다면.. 나와 함께..”
여인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말씀하시 마십시오. 듣지 않겠습니다.”
“어찌.. 떠날 수 없단 말이오..”
그녀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네..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접어주십시오.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몸을 돌려 보따리를 그에게 건네고는 달음박질을 하며 호숫가에서 멀어졌다. 무하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