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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아버지! 아버지~! 이것 좀 보셔요.”
추운 겨울, 소천이 달려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강씨 앞에 서서 자신이 그녀의 작은 손에 양쪽 귀를 잡혀 버둥거리는 토끼를 보여주었다.
“네가 잡았느냐?”
“네. 오늘 저녁은 토끼고기입니다, 아버지.”
미소 짓고 있는 소천을 향해 손을 뻗은 강씨가 그녀의 차가운 볼을 쓰다듬었다. 소천의 오른쪽 눈에는 안대가 채워져 있었다.
“들어가서 아랫목에 쑥 들어가 있거라. 아비가 저녁을 차려 줄 것이다.”
“제가 할 것입니다.”
“살생은 안 된다.. 하였지?”
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비 말을 듣는 것이다.”
“네, 아버지.”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강씨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안대를 푸는 것이 보이자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보여줘선 아니된다..”
“네. 그런데 아버지. 제 눈은 왜 이런 것입니까?”
“네가 이 세상에서 특별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문이 열리고 소천이 미소를 지었다. 안대가 사라진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가 은빛 눈동자에 그 테두리에
푸른색이 감도는 검은 띠가 만들어져 있었다. 묘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천진난만한 소천의 미소에
강씨가 따라 웃었다.
“찬바람 다 들어간다, 이 녀석아. 얼른 닫지 못해?”
“하하하.. 아버지 코가 꼭 딸기 같습니다.”
“이 녀석이..”
“얼른 들어오십시오.”
“그래~. 이불 속에 들어가 있거라.”
“네, 아버지.”
소천이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자 강씨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몇 해 지난 후에 소천은 만 18세 소녀가 되었다. 산 속에서 낯선 자들과 만나자 그녀는 어린 여자아이로 변해 있었다.
“구미호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상한 눈짓을 했다.
“허면.. 이 구슬이 왜 빛을 내고 있단 말인가..”
“둔갑한 것일지 누가 아는가?”
그 중 한 자가 소매에서 검은 단검을 꺼내 소천의 가슴에 댔다. 소천의 왼쪽 눈이 가운데로 몰리며 단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아가야..”
강씨가 다가와 소천을 자신의 뒤로 보내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이가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요.”
“할아버지 아이요?”
“네.”
“구미호요?”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입니다. 제 안 사람이 이 아이를 낳고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요.. 구미호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녀의 가려진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왜 그러느냐?”
“어려서 다쳤습니다. 흉터가 있고, 시력도 잃어 저리하고 다닙니다요.”
“알았다. 가보거라.”
“네. 살펴 가십시오.”
강씨가 그들이 멀어지자 허리를 펴고 소천의 손을 잡아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들이 누군지 아느냐..”
“구미호 사냥꾼입니다.”
“그래. 네가 무엇이라 일러 주었느냐..”
“반은 구미호, 반은 사냥꾼의 피가 흐른다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네, 아버지.”
잠시 후 그들은 집에 도착해서 미리 준비해 놓은 짐만 들고 집을 나서기 전에 강씨가 소천을 바라보았다.
“남자로 변할 수 있겠느냐.”
“어떤 남자 말씀입니까?”
“부잣집 도령말이다.”
소천이 눈을 감고 머릿속에 부잣집 도령을 떠올리자 스르륵 그녀의 몸이 부잣집 도령으로 변하였다.
소천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강씨가 미소를 짓고는 소천을 데리고 시장으로 갔다. 말을 한 필 훔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수장이 있는 처소로 사냥꾼이 들어갔다. 수장이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무하의 아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나?”
“... 죄송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구슬이 빛을 내는 것을 보고 만난 꼬마아이는 한 쪽 눈을 잃어 안대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이 든 노인의 아이라는 말과 검은 단검을 가슴에 대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냥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다시 그들의 집을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고 합니다.”
수장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칼을 순식간에 겨누었다.
“찾아 와..”
“네.. 아.. 알겠습니다.”
수장이 칼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아 마시던 찻잔을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왜 찾으려고 하십니까? 반은 사람이고, 반은 구미호인 그 아이가 어떤 위협이 된다고..”
“그러니 너희가 수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구미호의 특징이 무엇이냐.”
“변하는 것입니다.”
“맞다. 변신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의 약점이 무엇이냐.”
“유리구슬이 몸 밖으로 나오면 그 힘을 잃고, 사람의 생기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유리구슬과 사람의 생기가 필요한가?”
그의 눈이 커지고 눈꺼풀을 껌벅였다.
“이전에도 없던 그 아이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았느냐? 구미호들이 그 아이의 존재를 알면..
어찌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구미호들이 그녀에게서 사냥꾼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못할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일 수 없는 구미호들이 점점 늘어나겠지. 그러니.. 그들이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없애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사냥꾼들을 풀어 즉시 잡아오겠습니다.”
그가 나가자 수장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강씨가 그들에게 잡혀왔다. 수장이 의자에 앉아 바닥에 꿇어 앉혀 있는 강씨를 바라보았다. 강씨가 얻어맞아 터진 입술로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는가?”
“너도.. 많이 늙었구나.”
“자네도 만만치 않아.”
강씨가 한 때 벗이었던 수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어디에 있나?”
“다른 나라로 시집보냈네. 자네가 그 아이를 찾는 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 나라에 그 아이를 두었을 것 같은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야.”
“이유가 뭔가.. 우리가 사라질 수도 있어. 구미호가 세상을 차지하게 만들 생각인가?”
“무하.. 그 아이를 용서해 주었다면 자네는 원하는 바를 손쉽게 얻었을 거야. 하지만 자네는 무하가 싫었지.
겉으로는 예뻐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가진 영특함과 뛰어난 무예로 자네의 자리를 탐낼까 두려워했을거야.
소정.. 그 아이와 함께 살도록 두었다면 오히려 좋았을 거네. 무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렇게 살길 원했으니까..
그렇게 찾아내어 무하와 소정을 죽이고 그 아이까지 죽일 생각을 하는 것은 온전히 자네의 욕심만을 위한
선택이었지. 살기 위해 사람의 생기를 먹어야 하는 구미호와 무에가 다른가. 구미호가 잔인한가..
사람이 잔인한가..”
“말이 길 구나.. 결론은 나에게 그 아이의 거처를 알려줄 수 없다..”
“알려주고 하고 말 것도 없다. 말하지 말고 떠나라 했으니 나를 다시 고문한다고 해도 얻을 만한 이야기가 없을 게야.”
“그 아이의 독특한 능력이 뭔가?”
“....”
“변신에 능한가? 한 쪽 눈에 안대를 한 것은.. 혹.. 구미호의 눈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강씨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음에도 수장이 그의 반응을 알아차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 대나무 단검으로 죽일 수 없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 사람처럼.. 목을 쳐야 할 것인가..”
“그만 하게! 그만 하란 말이야.”
“너야 말로 그만 해! 네가 어느 편인지 이제 분간도 못하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수장이 일어나 칼을 빼어 들자 강씨가 눈가에 눈물을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하아.. 이제야 무하를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가서 할 얘기가 많으니 어서 끝내주게.”
강씨가 눈을 감자 수장이 칼을 높이 들었다.
****
소천이 아이를 낳았다.
“보시오.. 당신을 닮은 딸이오.”
그녀가 남편으로 만난 사내도 신기하게 구미호 사냥꾼이었다. 사내가 아이를 안고 소천의 품에 건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은 구미호가 아니고 사람이오.”
“아이가 저를 닮아 한 쪽 눈이 이래도.. 괜찮으십니까?”
“내 아이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낳아 준 내 소중한 아이. 평생 당신과 아이를 지킬 것이오.”
“서방님..”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아이 이름을 지었는데.. 어느 것이 마음에 드오? 소현, 소은, 소율.. 뜻은 다 좋다고 했소.”
“서방님은 어느 이름이 마음에 드십니까?”
“소율.. 난 소율이 왠지 좋소.”
“그럼.. 저도 소율이 좋습니다.”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소율아.. 아비다.. 아비가 평생 너의 그늘이 되어 줄 것이다.”
소천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는 은빛 눈동자에 그 테두리에 푸른색이 감도는 검은 띠가 만들어져 있었다.
****
소정과 무하의 이야기를 들은 은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를.. 낳았어요?”
“무하님과 소정님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지. 하지만 무하님과 막역한 사이였던 강씨라는 분이 두 분의
아이를 키우셨다. 만 18세가 되어 몸의 변화가 있자 강씨가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자신 때문에
사냥꾼들한테 소천님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거든. 소천님은 홀로 지내시다 사냥꾼과
결혼을 하여 따님을 낳으셨어. 신기한 것은 태어날 때부터 오른 쪽 눈동자가 은빛이었는데 세대를 거듭할수록
태어날 때는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고 만 18세가 되면 한쪽 눈이 은빛으로 변하지만 그마저도 숨길 수
있게 되었단다. 오늘 밤에 지나고 나면 네 오른쪽 눈동자가 은빛으로 변하게 되겠지만 곧 보통 사람처럼 눈동자
색을 바꿀 수 있을 거야.”
“잠깐.. 그러니까 할머니랑 엄마도 저랑 같아요?”
엄마가 시선을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너를 지키던 이는 내 남편.. 그러니까 네 외할아버지셨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부탁을 하셨지. 네 엄마는 내 딸이지만..”
은아의 얼굴에 충격이 어렸다. 자신이 구미호와 헌터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의 후예라는 것보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사실은 피와 살을 나눈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조..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은아야. 그런 말이 어딨어. 엄마는 너를 한 번도 내 딸이라고 생각 안 해 본적이 없어. 너처럼 착하고, 예쁜 딸이 생겨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늘 일하느라 바빠서 너에게 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어.”
“엄마..”
“그래..”
“제.. 부모님은.. 살아 계세요?”
“그건 우리도 몰라. 중요한 것은 이젠 헌터들만 너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구미호들도 너를 찾는다는 거야.
왜냐하면 너는 헌터들이 죽일 수 없는 유일한 구미호이면서 구미호들처럼 사람의 생기를 빨아들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에 넘어가든.. 고통스러울 거야. 오늘 밤 보름달이 뜨면
네 몸이 변할 거야. 반은 구미호이기에 아름다운 미모를 갖게 될 것이고,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예전엔 헌터들의 구슬에 반응을 보였지만 점차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어서 훨씬 지내기 수월할 거야.
언젠가 너를 사랑해주고 보호해 줄 헌터를 만나 가정을 꾸리거라.”
은아가 두려움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할머니와 엄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엄마.. 저를.. 버리실 생각이세요?”
“홀로 서야 할 나이가 된 거야.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야.”
“할머니.. 엄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소은이라고 했어. 이 곳을 떠날 준비를 할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떠나. 우리에게도 말하면 안 돼.”
할머니와 엄마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시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
류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불이 크리스마트 트리처럼 반짝이는 걸 보니 그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한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자 류가 고개를 돌렸다. 한은 헌터를 사냥하는 일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류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동족을 위해 복수하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문득 은아의 따뜻한 미소가 그리웠다. 붉은여우가 신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이 먼저 뛰어 내려갔다. 류도 아래로 내려갔다. 한이 헌터의 기를 빨아들였다. 헌터가 바닥에 쓰러지자
그들은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동족이 검은 단검에 당해 하얀 빛을 내는 것이 보이자 류가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위로 올라간 헌터를 그가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건물 사이를 뛰어 위로 올라갔다.
헌터와 마주보았다. 뒷짐을 지고 있는 류가 그를 바라보았다. 헌터의 왼쪽 손목에 있는 시계가 반짝였지만
류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에 너무 많은 숫자가 있어서 그 이유를 헌터가 알리 없었다. 헌터가 오른 손에
검은 단검을 들었다.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두 사람이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류의 가슴에 박으려던 단검을 그가 손목을 잡아 꺾었다. 헌터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류의 손놀림에 헌터가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류는 한 손으로 헌터를 들어 올리며 싸늘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난 당신을 알아.. 류..”
“내가 유명한 존재인가보군.”
“도대체 왜 우릴 공격하는 거지?”
류가 정윤의 물음에 싸늘하게 웃었다.
“그 질문 그대로 돌려주지.”
“너희들은 사람들의 기를 빼앗잖아.”
“너희들은.. 우리 동족으로 약을 만들었잖아.”
정윤의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약?”
“죽기 전인데 웬 오리발이신가.”
“무슨 약..”
류가 팔을 천천히 내렸다.
“우리 동족의 피와 살로 만든 약. 우리처럼 모습을 단시간이지만 바꿀 수 있는 약.”
정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절대로 우리 짓이 아니다. 그런 약이 있다는 것 자체를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어. 진심이다.”
“헌터의 진심 따위.. 믿을 리 없다.”
“어차피 기가 빨리면 죽을 몸이 거짓말은 왜 하겠어?”
류가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달빛에 드러난 정윤의 얼굴이 보였다. 류의 눈이 커졌다.
‘미술선생..’
“김영신이라는 학생을 아나?”
“영신이를 당신이 어떻게..”
정윤이 손을 들어 류에게 반격을 하자 두 사람의 몸이 조금 떨어졌다.
“네가 영신이를.. 그랬나? 그녀의 기를 빨아들였나?”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만든 약을 먹고 부작용으로 죽은 거잖아.”
정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네 놈이 하는 말을 하나도 모르겠다.”
“그것이 너희 인간들의 한계다.”
두 사람이 다시 몸을 날려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의 공격을 막아내는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한이 올라왔다.
“헌터들이 너무 몰려온다. 일단 물러나자.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할게.”
“내가 처리할 놈이다.”
“그럼 이따 보자.”
한이 몸을 돌려 건물사이를 뛰어 건넜다. 다시 류의 손에 잡힌 정윤을 류가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가까이에 류의 얼굴을 가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정윤의 기가 류에게 빨려 들어왔다.
정윤은 고통스러워했고, 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아..’
류가 눈을 반짝이더니 그를 밀어냈다. 정윤이 기운을 잃고 숨을 쉬고 있었다.
“왜..”
류는 정윤을 바라보지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건물 사이를 뛰어 넘자 근식이 정윤을 품에 안았다.
“괜찮아?”
“응..”
정윤이 힘없이 고개를 돌리자 류가 그를 돌아보다 다가오는 헌터들을 피해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윤이 숨을 내쉬었다.
“근식아..”
“응? 일단 기운을 아껴. 치료부터 받자.”
“본부로 가야 할 것 같아.”
“응.”
근식이 그를 부축해서 일어났다.
****
그들의 본부로 돌아온 류가 소파에 앉아 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보이는 구나.”
그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원.”
“오늘도 수고했다. 쉬거라.”
“네.”
원이 가자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눈을 감자 자신을 바라보던 슬픈 눈의 은아가 떠올랐다. 웃고 있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따스함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
정윤이 위 분들에게 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윗분들이 알아보겠다고 하고 그들을 다시 D구역으로 배치했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있는데 현주가 정윤에게 물었다.
“진짜 그런 약이 있다고?”
“그렇대. 김영신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교통사고가 아니라 그 약의 부작용으로 사망한 거랬어.”
“구미호 말을 믿어?”
정윤이 조용히 생각했다.
“모르.. 겠어..”
“홀린 거야. 구미호의 말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책에도 있고, 네가 살아있는 경험자면서... 정신 차려.”
“응.”
“다행이다. 집에 가서 좀 쉬자. 기 보충 좀 해야 해.”
“응.”
정윤이 눈을 감았다.
****
은아는 침대에 누워 고통을 참고 있었다. 몸이 뜨거웠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하지만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눈을 들어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진우오빠.. 신유.. 류.. 아저씨.. 아저씨..’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꼬맹이..”
류가 눈을 감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유난히 붉은 빛이 도는 달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네..”
그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
며칠이 지났는지 몰랐다. 침대에서 일어난 은아는 한 숨을 내쉬었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본 그녀는
조금 놀랐다. 이제껏 보았던 얼굴과 조금 달라보였다. 땀으로 젖은 옷을 벗자 굴곡이 없던 몸이 변해 있었다.
그녀는 한 숨을 내쉬며 샤워기 아래에 섰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는 엄마가 미리 준비해 둔
브래지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포장을 뜯지 않은 새 아래 속옷을 꺼내 입었다. 밖으로 나오자
할머니와 엄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소은..”
“은아예요. 할머니.. 엄마..”
엄마가 눈물로 젖은 눈으로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수고했어..”
“응..”
엄마가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듯 쥐고는 슬픈 미소를 짓자 은아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혹시.. 남자 구미호도 있어요?”
“아주 옛날엔 구미호들이나 붉은 여우들이 성별과 상관없이 여자로 둔갑을 해야 했어. 여자들을 유혹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쉬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여자로 둔갑을 했던 거지. 그러다 헌터들이 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하자 자신의 종족을 보호하기 위해 남자 구미호들과 붉은 여우들이 그룹이 형성이 되었지. 요즘은
남자나 여자가 유혹하기 쉬우니까 각자 자기 성별대로 둔갑을 하는 것 같아. 워낙 미인, 미남들이니까
사람들 스스로 그들에게 찾아 가는 것 같아. 그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렇다면.. 아저씨도..’
그녀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헌터들이 저를 원하는 이유는 제가 구미호들의 손에 들어갈까 걱정하는 걸까요?”
“응.. 구미호들도 반인호라 하여 너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지만 단지 만나기 어려워 막연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잘.. 숨어 살았나봐요.”
할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은아를 바라보았다.
“은아야..”
“네, 할머니..”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건강 하거라.”
엄마가 통장과 도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엄마..”
“이런 날을 위해서 모은 거야. 가면 당장 집도 구해야 하고, 먹을 것도 사야 할 거야. 필요한 곳에 써.”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요..”
“너를 위해서 모은 거야. 절대로 기죽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산다고 약속해.”
“....”
“얼른? 엄마랑 약속해. 우리 은아는 약속은 지키는 딸이니까.. 엄만 우리 딸 믿어.”
“엄마..”
그녀가 엄마 품에 파고들고 울먹이자 엄마도 그녀를 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전 어디로 가야 하나요?”
“우리한테 말하지 말고 가야 해.”
“제가.. 잘 지낼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분명 잘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손녀 딸.. 은아는 분명 씩씩하게 잘 해 낼 수 있어.”
“할머니.. 엄마..”
그녀가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할머니가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부디.. 강건하거라.”
“할머니도.. 건강하세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엄마였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엄마.. 이 선생님이랑 잘 해 봐요. 난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응..”
그녀가 떨리는 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택시에 오른 그녀가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도착한 그녀는 전국으로 향하는 버스들을 바라보았다.
‘하아.. 어디로 갈까.. 친구들아... 미안해..’
그녀는 촉촉해진 눈을 감고 한 숨을 내쉬었다.
****
은아엄마가 할머니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고마워요, 엄마.. 나를 딸로 받아주셔서, 우리 은아한테 내 존재를 숨겨 주셔서.. 우리 은아.. 저렇게 예쁘게 잘 자랄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에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즐거웠어. 딸 먼저 앞세우고 난 어찌 살아야 하나.. 했는데.”
“죄송해요..”
할머니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찌 네 잘못이야..”
“저도 절반은 그들의 피가 섞여 있는 걸요..?”
“넌 내 딸보다 고통스런 삶을 살았잖어. 그들에게도, 사냥꾼에게도 쫓기느라 얼마나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을고.. 잘 참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엄마 덕분에 사람이 되었는걸요..”
“그래. 다행이야. 하지만 네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괜찮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내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아요.”
할머니가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이젠 어떻게 살고 싶어?”
“엄마랑 이렇게 살고 싶어요. 그래도 되요?”
“당연한 걸 뭘 물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이내 떨리는 한 숨을 내쉬었다.
“우리 은아.. 잘 지내겠죠?”
“그럼.. 누구 자식인데..”
두 사람이 소리없는 눈물을 조용히 훔쳤다.
****
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류의 미간에 주름이 만들었다.
“우리 동족의 피해도 만만치 않으니 여기에서 휴정을 하기로 했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네!”
류가 고개를 들었다.
“원.”
원이 고개를 돌려 류를 바라보았다.
“은밀히 조사를 계속 할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당분간 쉬면서 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하지만 이렇게 물러난다면 저들은 우리 동족을 해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우리 종족도 보호해야 하지 않겠느냐. 붉은 여우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그들을 위한 일이니 네가 한 발 물러 서거라.”
류가 고개를 숙였다.
“D구역으로 다시 돌아가거라.”
“죄송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다른 구역으로 가고 싶습니다.”
원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결정 했나?”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죄송합니다.”
원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모두 다 너처럼만 해 준다면 벌써 끝났을 싸움일지도 모르지. 수고했다. 자리 잡으면 찾아 오거라.”
“네.”
류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가자 밖에 김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박사가 고개를 숙여 류에게 예를 갖추고 원의 방에 들어갔다. 한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심신이 조금 지치신 모양이야. 김박사님을 다 부르시고 말이지.”
“응. 네가 옆에서 잘 보살펴 드려.”
“그래야지. 집으로 갈 거냐?”
“다른 곳으로 갈 거야.”
“왜?”
류가 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곳에 오래있으면 헌터들이 알아차릴 테니까.”
“정말 그 이유야? 어차피 너에게 시계는 반응하지도 않잖아.”
류가 한 쪽 눈썹을 올리며 한을 바라보았다. 한이 그의 싸늘함을 느끼며 조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니.. 잘 생각했다고. 자리 잡으면 놀러갈게.”
“그러던지. 쉬어라.”
류가 계단을 내려오자 각자 떨어져 싸우느라 오랜만에 만난 수호가 차에서 내려 그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수고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어디로 가고 싶나.”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자 수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집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류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 숨겼다.
“너는 내가 살아남을 줄 알았나?”
“그러길 바랐습니다.”
“고맙군. 도착하면 깨워.”
“네.”
차가 출발하자 그가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김박사가 원이 있는 방에서 나오며 밖에 서 있는 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
은아는 새로운 곳에 작은 옥탑방을 얻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가 겁이 났다. 그녀는 아직 변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도 낯설었다. 그녀의 눈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붉은 여우의 눈동자가
살짝살짝 보였다. 그들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헌터들은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그들의 손목시계가 빛을 냈다. 그녀에게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시계가 반짝이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옥탑방에 올라와 문을 잠그고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훔쳐야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줄 헌터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엄마를 위해서라도 그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루하루 커져가는 두려움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류는 원에게 가는 길이었다. 룸미러로 류를 바라보며 수호가 말했다.
“클럽에 먼저 들르겠습니다.”
류가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기운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그 분에게 가시기 전에 식사를 하시죠.”
“아직은 괜찮다.”
류가 눈을 감자 수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정윤은 현주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차라리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그래?”
“나 기운이 없어.”
현주가 어이없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철썩 때렸다.
“마! 아프잖아~.”
“6개월 전이거든? 기운이 없다니..”
정윤이 피식 웃었다.
“학교 일도 하기 싫고, 헌터 일도 재미없어.”
“새로 들어온 신입들 훈련이나 시키지?”
“음.. 재미없어.”
그가 잡지책을 넘기며 말하자 현주가 피식 웃었다.
“그럼 이야기를 해 볼까? 그 아줌마랑 꼬맹이.. 어디로 간 것 같아?”
정윤이 잡지책을 덮고 소파에서 기지개를 폈다.
“으~~. 저녁으로 해물탕 어때? 난 실업자고, 넌 의사 선생님이시니까 네가 쏘는 거다.”
정윤이 일어나 상담실을 나가자 현주가 한 숨을 내쉬었다.
****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현주의 질문은 집요했다. 정윤이 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사실은 구미호 아니었을까? 그 엄마랑 꼬맹이 말이야.”
“네 시계랑 내 시계를 모두 속이고? 그 때 파티 건으로 만났을 때 근식이 시계도 멀쩡했었어.”
“그럼 왜 도망을 가?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뭔가 사연이 있으니까 숨은 거 아니겠어?”
“돈 문제였을까..? 항상 밤낮으로 일하느라 피곤해 했으니까. 빚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좋은 집에서 살면서?”
“아는 분이 이민을 가시면서 관리해 달라고 부탁해서 살고 있던 집이었어.”
“그러니까 빚 때문이다?”
“응.”
현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끼우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의혹은 있지만 선배가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거겠지.”
“흠.. 여러 가지 의혹? 그런 거 없는데?”
“정말 안 궁금해? 아줌마 많이 좋아한 거 아니었어?”
“좋아했어. 하지만 나한테 마음을 조금도 안 줬으니까.. 다른 사람이 내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거 싫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생각하기 싫은 것 뿐이야.
생각한다고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닌 일에 머리 아프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가끔.. 자전거를 타고 가며
해맑게 웃던 은아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 엄마가 사다 놓은 반찬을 찬합에 넣어 갖다 주며 엄마랑
잘 해보라고 말하는 그 녀석이 어디에서 잘 지내나.. 그냥 궁금할 뿐이지.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반갑게 인사하고 맛있는 거나 사주고 싶고..”
“아줌마는?”
“글세.. 술 먹여서 확 넘어뜨릴까?”
“참으로 고급스러운 표현이네.”
정윤이 키득거리며 소주잔을 들자 현주가 한 숨을 내쉬었다.
“일을 해. 나한테 계속 얻어먹지 말고.”
“인마.. 후배 잘 둔 덕 좀 보자. 혹시 아냐? 내가 너한테 한 턱 쏠 날이 올지.”
“원래 선배가 사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공짜로 영양제를 얼마나 맞춰줬어?”
“알았다. 알았어. 잔소리는..”
“일 한다고?”
“본부에 한 번 가 볼게. 궁금하기도 하고.”
“약속 했어.”
“그래, 인마.”
정윤이 현주를 향해 소주잔을 들어 공중에서 건배하듯 하고는 단숨에 마셨다.
*****
류는 원의 방에 앉아 있었다. 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류에게 말했다.
“식사를 안 하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저희 종족을 살피느라 조금 피곤한 것뿐입니다.”
“네가 건강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어서 건강을 되찾거라.”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원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가서 쉬거라.”
“건강하십시오.”
류가 인사를 하고 원의 방을 나왔다.
****
배가 너무 고파 집을 나온 은아는 검은 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후드 티셔츠 모자를 그 위에 덮어 썼다.
20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는 슈퍼에 들어갔다. 이미 안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커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사람이었지만 남자는 붉은 여우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 옆을 지나갔다.
다행히 그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간단하게 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긴장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머리의 땀을 닦았다. 그녀가 모자를 벗자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호흡을 한 참 한 후에야
그녀는 일어나 장을 봐 온 것을 대충 정리하고 냄비가 물을 붓고 휴대용 버너를 켰다. 그녀는 끓인 라면을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있는 돈을 쓸 수는 없고..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녀는 한 숨을 내쉬며 TV를 바라보았다. TV에서는 피부관리를 하는 요령을 알려주고 있었다.
“돈을 벌려면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녀는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
며칠 후, 그녀는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보려고 집에서 가까운 PC방에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그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을 켜고 검색을 하던 그녀는 몇 가지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갖고 간 메모지에 적었다. PC방을 나온 그녀는 편의점 안을 살피다 들어간 후 라면을 조금 더
주문해서 계산대로 갔다. 앞에 있는 아주머니가 계산을 하시는 사이에 그녀는 고개를 조금 돌리자
신문 가판대가 보였다. 그녀는 신문을 하나 들어 같이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르바이트 자리에
전화를 해 볼까 고민하다 이내 물을 올려서 라면을 먹으며 신문을 펼쳤다. 신문을 한 장 넘기고 면을 집어 입에
넣으려던 그녀는 손을 멈추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붉은 여우와 함께 갔던 여자가 사망했다는 기사와 함께
엉뚱한 사람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는 기사였다. 여자의 사망 원인은.. 과다출혈이었다. 그녀는 신문을 덮고
떨리는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붉은 여우였던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자 그녀는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
구토를 했다. 너무 두려워 그녀는 욕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진정이 되고 나서야 그녀는
스케치북을 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붉은 여우의 얼굴이 완성이 되자 그녀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그림을 그리면 뭐.. 누구한테 줄 수도 없는데..”
그녀는 이 선생님의 친구 분이라는 박근식이라는 경찰아저씨가 떠올랐다. 분명 그의 왼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가 헌터들이 차고 있던 시계와 비슷했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
그녀는 드디어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았다. 근처 편의점으로 배송된 택배를 갖고 집에 들어왔다. 상자를 열자 전기 충격기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전기 충격기를 바라보았다.
****
정윤은 본부에서 신입들이 훈련을 받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반인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근식이 그의 옆으로 와서 섰다.
“저거 개뻥 아니냐?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만..”
“나도 궁금하긴 해. 봤다는 사람도 없고, 나도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위에서는 저 교육을 빼놓지 않고 하라고 지시하는 모양이야. 위험하니까 만나게 되면 본부로 데리고 오라고 말이야.”
“아니.. 헌터와 구미호 사이에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무슨 전설의 고향 판타지 버전이야? 다들 소설쓰고 있네..”
정윤이 고개를 저으며 비웃듯 말하자 근식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홀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겠지. 안 그래?”
근식의 말에 정윤의 턱이 단단해지자 근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정윤이 이내 표정을 바꾸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근식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 비밀이냐? 다들 수군거리더만.. 괜찮다. 특별히 넌 용서해주마.”
근식이 안쓰러운 듯 그를 바라보다 이내 화제를 돌렸다.
“저 녀석 어때? 이번 신입 중에 제일 실력이 좋은 녀석이야.”
정윤은 그들 중 눈에 띄는 한 남자요원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한동운.”
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식이 정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복귀하는 거야?”
“언제까지 쉴 수 없으니까.. 쯧.. 현주가 나보고 돈 벌어서 밥 사 달랜다.”
근식이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좀 얻어먹지, 좀.. 잔소리 들었네?”
“응. 아주 귀가 따가워서 말이야.. 그럼 난 팀장님 만나러 갈게. 수고~.”
“응. 또 보자.”
근식의 어깨를 잡고는 그를 지나쳐 팀장님을 만나러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며 정윤은 쓰레기통을 밀고 오는 청소부와 부딪쳤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수고가 많으시네요.”
청소부가 고개를 숙이며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자 정윤이 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팀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안에 들어가자 팀장님이 인상을 찡그렸다.
“노크 좀 하지?”
“우리 사이에~. 잘 지냈수?”
“드디어 복귀하는 거냐?”
“놀면 뭐 하겠어~. 나 뭐 할까? 너무 센 건 주지 말고.”
“센 거? 살인 사건 같은 거 말이냐?”
“응. 피는..”
정윤이 고개를 저으며 몸서리를 치듯 하자 팀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몸은.. 괜찮아?”
“보통 놈이 아닌 녀석한테 기가 쏙 빨렸었다고.”
엄살을 부리던 정윤이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팀장을 보며 쿡쿡 웃었다.
“괜찮아~. 현주가 비싼 수액으로 주사 많이 놔 줬거든.”
“진짜 괜찮아?”
“응.”
“그럼 당분간 본부로 출근하면서 몸부터 만들어.”
“에이, 형~. 몸은 지금도 좋아~”
팀장이 날카롭게 바라보자 정윤이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
본부를 나온 정윤이 오토바이에 올랐다. 시동을 걸어 출발한 그의 오토바이가 큰 길로 나가 신호등에
멈추었다. 그의 옆에 차 한 대가 멈추었다. 초록불이 들어오자 정윤의 오토바이와 그 차가 동시에 출발했다.
다음 사거리에서 정윤은 좌회전을 하고, 그 차는 우회전을 했다. 차 안에는 조금 전 본부에서 청소부였던
남자가 모자를 뒷좌석으로 던지듯 놓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뒷좌석에는 상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를 덮은 천이 조금 미끄러졌다. 남자가 손을 뻗어 천을 잡아 내용물을 가렸다. 그 짧은 사이에 상자에
담긴 수정구슬이 반짝였다. 선글라스를 쓰며 남자는 운전을 계속 했다. 그가 하얀 건물 앞에 멈추고
선글라스를 조금 내리고 경비원을 바라보았다. 경비원이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반짝이자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차를 통과시켰다. 하얀 건물 안에 들어가 차를 멈추고 그가
내리자 하얀 옷에 마스크에 모자까지 완벽하게 몸을 감싼 이들이 다가왔다. 그가 트렁크를 열자 그들이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상자를 들고 가 수정구슬들을 세척하기 시작했다. 세척된 구슬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거대한 기계 안으로 들어간 구슬들이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더니 이내 액체가 되어
작은 앰플이 되어 상자에 담겼다. 잠시 후 앰플들이 포장되어 2.5톤 탑차에 실렸다. 탑차 옆의 스티커를
떼어내니 의약품 차량이라는 표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들을 맨 위층에서 통유리 너머로
바라보고 있던 김박사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김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탑차의 문이 잠겼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박사는 건물을 나가는 의약품 트럭을 바라보았다. 트럭들은 건물을 빠져나가 도로를 타고 나가
톨게이트를 통과해서 전국으로 흩어지듯 움직였다. 각각의 트럭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앰플들이 들어있는
상자들로 가득했다.
*****
<성형외과>
의사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음 푹 놓으세요. 시술이 끝나고 나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선생님만 믿을게요.”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수액을 맞는 줄에 연결 부위를 찔러 액체를 넣자 환자가 수면상태가 되었다. 그는 다른 주사기를 들어 안의 내용물을 흔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주사기 안에서 일렁였다.
첫댓글 헐!!!! 김박사??????????원?????????? 오늘도 너무재밋게읽엇어요!!!!
김박사는 그들을 돕는 의사겸 박사님이시죵. 영신이때 오신 그 분입니다~. 원은 구미호들의 최고 우두머리인 '그분' 입니다^^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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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행 중인데 넘 재밌어요^^*
사쿠라메이지님~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