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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라성
1954년 12월 10일, 부산 광복동 대화재
◯ 1953년 1월 30일,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화재발생 : 1953년 1월 30일
화재원인 : 선술집에서 실화
화재피해 : 점포 4,260채 전소, 6,800세대 3만명 이재민 발생, 재산피해 1,400여억원
1953년 1월 30일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경제적 심장부였던 국제시장을 휩쓴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날 저녁 7시 40분 춘향원(春香園)이라는 판자집 술집에서 실수로 일어난 불은 7시간만인 1월 31일 새벽 2시에야 겨우 진화됐다.
당시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데다가 겨울바람에 의해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한·미 합동소방대까지 출동하였으나, 수도가 고장나 초기 진화가 어려웠다고 한다. 피해규모로는 재산피해총액이 1,400여억원, 4,260채의 가게전소, 6,800세대 3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부산의 중구 신창동에 위치한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전시 물자를 팔아 돈을 챙기기 위해 국제시장 자리를 장터로 삼으면서 시장이 형성됐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이 몰려와 장사를 하며 활기를 띠었고, 미군의 군용 물자와 함께 부산항으로 밀수입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되었었다.
국제시장은 최근에 발생한 실내사격장화재와 더불어 크고 작은 화재로 인해 피해를 많이 입었었는데, 1953년 1월 30일 오후 7시 30분에 해방후 최대의 화재를 겪게 되는데 이 때의 화재로 일대인 신창동, 부평동 등 상가 1천여호를 하룻밤사이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화재는 해방후 발생한 사건중 가장 피해가 컸을 뿐만 아니라, 부산시민의 경제생활면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재민 2만 2천명에 가옥 4,260동이 전소하는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켰다.
1953년 대화재 이후 590여원을 투입하여 국제시장을 재건시켰으나1956년 8월 2일 밤에 또 다시 클 불이 일어나 136개의 점포가 불타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전소되는 등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내기도 해 부산시 소방당국에서는 국제시장 일대 상가에는 소방설비를 강화시켜 화재예방을 기울려 나아갔다.
◯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
화재발생 : 1953년 11월 27일
화재원인 : 판자촌에서 일어난 실화
화재피해 : 2천여 가옥소실, 이재민 6천여세대 3만여명, 피해액 177억환 (현재가치로 1조 7700억원)
1953년 11월 27일 저녁 8시 30분경 부산시 중구 영주동 서쪽 산비탈에 있는 피난민 판자촌에서 불이 일어나 거세게 불어 닥친 바람을 타고 영주동·동광동·중앙동·대청동 입구 일대까지 불길이 번져 부산 중구 일대와 부산역을 모두 태우고 그 이튿날인 11월 28일 새벽 6시 30분이 돼서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
역전 대화재로 1백 77억환의 재산피해와 3,132채 가옥소실, 29명의 인명피해, 6,000여 세대 30,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해 초에 일어난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때의 12.6배에 이르렀다.
부산역전 대화재는 지금의 중구지역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초토화시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 화재로 르네상스 양식의 부산역사(釜山驛舍, 1910. 10 준공)와 부산우편국(釜山郵便局, 1910. 5 준공), 부산일보사 사옥, 부산방송국이 불타 도시의 중추 기능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그 영향이 전국에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었다.
화재가 일어난 1953년 11월 27일은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휴전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돌아간 지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부산 일대는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지역이었고, 정부가 전쟁을 피해 내려왔기 때문에 전쟁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처음 화재가 시작된 중구 영주동 일대는 피난민 판자촌이 밀집해 있어 작은 불도 쉽게 대형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부산역은 비잔틴풍이 가미된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1908년 6월 공사를 시작해 1910년 10월 31일 준공했다.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에 따른 붉은 벽돌 건물이었고 외관장식은 벽돌 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겹의 테두리를 둘렀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이어져 있으며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이 있었다. 부산역과 그 주변에는 최신의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간선도로와 전차가 부설됐으며 세관과 잔교 관광안내소 여관 등이 세워졌었다. 역사 옆으로 2층으로 증축된 철도호텔과 공회당, 산업장려관 등이 연이어 들어서 있었다.
저녁 8시 30분경 판자촌에서 발생한 불은 바람을 타고 판자촌 전체로 번졌고 이 사고로 부산역이 전소되었다. 이후 1966년까지 부산역은 가건물 역사를 사용하다가 1968년에 현재의 초량동으로 이전했다.
◯ 1954년 12월 10일, 부산 용두산 화재
화재발생 : 1954년 12월 10일
화재원인 : 판자촌에서 일어난 실화
화재피해 : 판자집 1000여채 전소, 8000여명 이재민 발생
1954년 12월 10일 새벽 4시 용두산에 자리 잡은 피난민 판자촌에 불이 나서 용두산 동쪽 언덕 그 기슭일대와 광복동·창선동 일대의 판자집 1,093채가 전소되고, 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용두산은 조선시대부터 해송이 울창하게 이루고 있다고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불렀다. 용두산은 화재가 발생하여 피난민 판자집이 거의 전부 불타 버렸고, 또한 아름들이 소나무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화재 이후 용두산은 다시 정비하여 나무를 심어 산림지대로 가꾸면서 지금의 용두산으로 가꾸어지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부산에는 전쟁을 피하려 몰려든 피난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당연히 주택난도 심각해져서 피난민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건물에서 살았다. 문제는 이런 상태는 상대적으로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화재의 위험성이 대단히 컸었으나, 피난민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1954년 12월 10일 새벽 3시 57분에는 부산시 동광동의 고물상 윤모씨 집에서 화재가 난 적이 있는데 당연히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집의 특성상 불이 삽시간에 번졌고 판자집 1000호와 동광국민학교(초등학교)가 전소되는 등 큰 피해가 있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불에 타던 장소는 높은 곳에 위치한 지대였으므로 불을 끌 물이 나오지 않아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길을 막을 수 없었다> 라는 기사가 있어 그야말로 그 당시 이 지대에서는 화재가 발생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태였다. 그리고 결국 16일 뒤인 12월 26일에는 비슷한 지대인 광복동과 동광동 일대인 용두산에서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해 그나마 남아있던 판자집들이 다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뒤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안전 하에 궁중유물들을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황급히 이송시킨 적이 있었다. 이 궁중유물들은 부산까지 내려와서 어느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창고가 바로 관재청 창고였다. 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유물들은 총 4000여점이었고 궁중일기, 조선왕들의 어진, 왕실유물, 역대재상을 그린 초상화, 어필, 많은 서적과 은제기 등이었다. 이 국보급 유물들은 전시에 한 번도 폭격당하지 않았고 1950년~1954년에 발생했던 크고 작은 화재에도 무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창고 안에 있는 유물들은 즉각 서울로 옮겨지지 않았고 그 안에서 1년을 보내었다. 허나 위에 서술한대로 이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 인근은 화재에 취약한 판자촌들이 몰려있는 곳이라서 당장 유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동안 이러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결국 화재 발생 두어달 전에 문교부가 국립박물관장 김재원(1909~1990)에게 공문첩을 보내 국보보존에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하여 대책을 요청했지만 씹혔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고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화재가 발생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전기공사청부업자 정수홍(33)의 집 식모 안순자(22)라는 여자가 판자집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둔 채로 잠자고 있을 때 촛불이 마룻바닥으로 그만 떨어져 불길이 일어났다. 하필 그 때는 겨울이었으므로 이때 부는 계절풍인 서북풍이 강하게 불어서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거칠 것 없이 태우던 불길은 용두산 동남쪽 일대의 피난민촌 298동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인해 1명이 죽고 142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397만 4천환이라는 피해금액이 나왔고 이 화재의 범인인 안순자는 구속되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1954년 12월 31일자에 따르면 화재로 판자집들뿐만이 아니라 창고까지 소실돼 고전악보, 악기 등이 없어졌으며 구황실재산관리총국하에 보관되어 있었던 어진과 같은 귀한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진상조사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고 1955년 1월 6일에 조사결과 유물 4000여점 중 무려 3500점이 소실되고 반만 타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유물 546점을 겨우 빼내 광복동에 있는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고 현재 남은 유물들은 영조와 철종의 어진과 덧불여 34점의 역대 재상 초상화, 그리고 어필과 제기만이 남았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그런데 경향신문이 밝힌 당시 화재상황에 따르면 창고에는 평소 경찰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화재 발생 20분만에 창고지붕에 불이 옮겨 붙었는데, 화재도 화재지만 더 가관이었던 것은 이 때 창고의 열쇠가 없어서 창고가 불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문교부와 구황실에서는 서로 상대방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도 신문에 그대로 기사화 되었다. 종합하자면 문화재를 귀중히 여길 줄 몰라 생긴 참사였다.
더하여 화재로 소실된 3500여점의 유물들은 어떤 유물들이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 이유는 이 유물들을 적어둔 서류가 1960년 6월 6일 창덕궁 청사 방화사건로 소실됐기 때문이다. 현재 역사학자와 학생들이 보면 매우 한탄할 일이다.
이 화재로 현재까지 남은 건 왕의 어필과 초상화, 은제기, 공신들의 초상화 등이다. 46축의 어진 중 소실된 어진만 35축이었다. 그나마 불길에서 구해낸 11축 중 복원이 쉬운 세축은 태조, 영조, 그리고 철종의 어진이었다. 이것들은 성공적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순종과 정원군의 어진은 얼굴이 남아있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으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복원되었다. 최근에 순종의 어진을 복원하였다. 복원이 불가능한 어진은 2축인데, 바로 순조의 어진과 문조(효명세자)의 어진이다. 얼굴이 불에 타버려 복원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이다. 게다가 공신들의 초상화들은 표제의 대부분이 타버려서 강세황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2016년 세조의 어진 이모작 초본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세조의 어진도 남게 되었다.
◯ 1960년 3월 2일, 부산 범일동 국제고무공장 화재
화재발생 : 1960년 3월 2일
화재원인 : 성냥에 의한 실화
화재피해 : 사망 62명, 부상 39명, 1억환의 재산피해
부산시 중구 범일동 국제고무 공장 성냥에 의한 발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나 101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망 : 62명, 부상 : 39명) 1억환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1960년 3월 2일 오전 8시경, 부산 범일동 국제고무공업주식회사(국제상사, 현 LS네트웍스 전신)에서 공장 신입 여공이 작업대 위에 있던 미제 황화인성냥(마찰면 없이 발화되는 성냥)을 장난삼아 켜는 순간 옆에 있던 동료직공이 제지하자 당황하여 연료통에 버려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은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건평 600평의 공장건물을 전소시켰다.
이 화재로 인한 사상자의 대부분은 젊은 여직원들이었다. 불이 나자 작업장 관리인이 불을 꺼야 한다며 직원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소화기로 진화를 시도했으나 불길이 삽시간에 번졌고 이에 당황한 여직원들이 두 곳밖에 없는 계단으로 일제히 몰려들면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밟히며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여직공들은 2층에서 뛰어내리면서 허리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기도 했다.
작업장에는 신발 밑창을 접착하는 데 쓰는 본드 등 인화물질이 많았다. 불은 삽시간에 공장전체로 번졌고 화재 당시 공장이 위치한 곳은 부산 진시장 안이라 길이 좁고 사람들이 많아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웠다.
◯ 1967년 1월 1일, 대구 서문시장 화재
화재발생 : 1967년 1월 1일
화재원인 : 전기누전으로 추정
화재피해 : 점포 372개 소실, 재산피해 2억 3천만원
대구 서문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위치한 대구 최대규모의 재래시장이다. 조선중기부터 형성된 시장으로 옛이름은 대구장이었다. 대구장은 조선시대에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 중 한 곳이었다. 1922년 대구읍성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문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대구 서문시장은 화재의 역사라고 할 만큼 대형 화재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무려 10여 차례 이상의 화재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5차례 정도는 수백 곳의 점포가 소실되는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특히 과거 서문시장 화재는 대구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만큼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1967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일어난 화재는 1지구 포목상가에서 전기누전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 372곳의 점포가 몽땅 소실되는 대형사고였다.
점포372 소실, 피해 2억3천만원. 양력 정윌 초하루라 점포가 닫혀 있어 많은 피해를 냈다고 보도하고 있다. 불은 오후 1시께 서문시장 1지구 포목부 2층에서 일어나 삽시간에 3백 70여 점포를 태우고 1시간만에 진화됐으며 피해액은 당시 돈 9억 원으로 추산, 대구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안겨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