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대전이 한참일 때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의 손을 뻗지 않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에 점령된 영토는 나치 독일의 그것보다 더욱 광대하였다. 거의 전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남북 7천키로미터, 동서 1만키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전역에서 전사자 117만명, 부상자 461만명, 일반 시민의 사상자 678만명의 큰 희생을 치른 이 전쟁은 일본의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다. 이 전쟁과정에서 또는 점령지에서 일본이 벌인 잔혹한 범죄는 그에 대한 응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오랜 전쟁이 끝난 뒤 1945년과 1951년 사이, 연합국은 920명의 일본인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또다시 3천여명에게 유기형에 처했다. 자업자득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전쟁범죄형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연합국들이 각자 수행한 일본인 전범에 대한 처벌의 숫자와 그 처벌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극동국제군사재판(흔히 동경재판이라고 불린다)은 주요한 전쟁범죄자들을 피고인으로 한 것이었다. 동경재판에서 재판을 받은 25명은 일반적으로 A급전범으로 불리고 있다. A급 전범은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시작,수행한 사람들이고, B급전범은 전쟁법과 전쟁관습법을 위반한 자들이며 C급전범은 상급자의 명령에 의하여 고문과 살인을 직접 행한 사람들로 분류되고 있다.
이 가운데 25명의 주요 전쟁범죄자들에 대하여 동경에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동경전범재판은 그 규모, 역사적 비중, 국제법상의 의미에 비추어 깊은 연구를 요하는 부분이다. 2년반이나 지속된 이 재판에는 연2만명의 방청객이 지켜 보았고 818회의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2등병에서부터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까지 419명의 증인이 나섰으며 779개의 진술서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4,336개의 문서가 증거서류로 제출되었고 공판조서가 49,858페이지에 달했다.
이 재판의 비용으로 9백만불이 지출되었으며 100톤의 종이가 소요되었다. 재판관과 피고인, 변호인들과 진행요원들, 헌병과 속기사, 통역관, 사진사, 방청객과 동서의 언론인들, 그 어느 날에도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법정을 붐볐다. 그러나 동경재판은 일본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시아전역에서 저질른 모든 범죄와 비행의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빙산의 일각이었다. 당장 그 기나긴 침략과 학살의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한 최고의 지도자 아키히토 일왕은 멀쩡하게 전쟁의 책임을 면하였고 아우슈비츠의 그 유명한 생체실험과 비견될 만한 이른바 741부대의 지독한 범죄는 미국정부의 우산하에 불문처리되었다.
전쟁과 식민과 점령의 가혹한 정책에 관여하였던 수많은 책임자들이 대부분 면죄부를 받고 전후 일본 건설의 주역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그들의 죄악은 추궁되지 않은 채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더구나 동서양의 학자들이나 법률가들은 뉴른베르크의 그림자(shadow of Nuremberg)'에 묻혀버린 이 재판에 대해 오랫동안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동경재판은 그야말로 20세기의 역사속에서 커다란 블랙 홀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단지 몇권의 책과 글만이 동경재판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뉴른베르크 재판에 쏟아진 관심과 연구와 보도에 비교하면 참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냉대였다.
이러한 동경재판의 망각의 가장 큰 원인은 그 재판을 진행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자신의 관심이 사라진 데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유럽의 연합국들에게 일본과 극동아시아는 이미 먼 존재가 되고 있었고 중국은 날로 치열해 가는 내전 속에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던 것이다. 공산권의 팽창이 아시아 지역에서 날로 높아가고 중국 조차도 공산화 물결속에 잠긴 상태에서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자산(the most vital asset)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에게 있어서는 전범처벌등 과거에 대한 집착보다는 강력한 일본의 건설이 그 물결에 대한 확실한 방파제였던 것이다.
2.동경재판의 준비
(1) 항복 이전과 그 직후의 전범처리
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일본에 대하여 당초 연합국 당국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문명국가의 행동과 국제법의 원칙을 준수할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연합국들은 여러차레 경고를 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1월 영국 런던에서 마련된 전쟁범죄의 처벌에 대한 연합국 선언(Inter-Allied Declaration on Punishment for War Crimes)에 이어 최초의 대일본 경고가 있었다. 그 회의의 옵저버였던 운쯔 킹(Wunz King)은 중국이 전쟁범죄자들에 대하여 반드시 책임이 추궁되도록 한다는 다짐을 하였다. 1942년 8월 21일, 미국의 프랑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다 명확한 경고를 했다.미국은 추축국들에 의하여 벌어진 전쟁범죄를 잘 인지하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기소에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야만적 범죄에 관련된 정보와 증거가 적절히 이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943년 10월 30일 모스크바 선언은 가해자들이 그 범죄가 행해진 국가의 법률에 따라 그 국가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임을 다짐하였다. 또한 범행이 특별한 지역적 연고를 가지지 않은 주요 전범들의 경우에는 연합국 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처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도 이 선언에 포함되어 있었다. 동경재판이나 뉴른베르크 재판이 후자의 언급에 의해 구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막바지로 다가서면서 이러한 전범처벌의 의지는 더욱 확고히, 빈번하게 언급되었다. 바탕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에 관한 상세한 소식이 전해진 1944년 1월 미국무성 헐 장관과 영국의 에덴 외무장관이 동시에 책임자의 처벌을 경고했다. 프랑스의 국민해방위원회 수반인 드골 장군도 1945년 5월 프랑스인과 인도차이나인들을 학대하는 어떠한 일본인도 전범자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1945년 6월 스위스 정부를 통하여 미국은 연합군 포로의 학살을 허용한 문서를 소지하고 있음을 일본에게 통보하였다. 가장 중요한 논의는 역시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이었다. 미국,영국, 중국, 그리고 소련은 일본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노예화되거나 멸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포로에 대해 가해진 학대를 포함하여 모든 전쟁범죄자들에 대하여 엄격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비록 이 조항은 10개의 요구조건 가운데 마지막으로 있었지만 일본의 전쟁 지도자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요구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942년 12월 미국과 영국 사이의 합의에 기초하여 유엔전범위원회(UNWCC,UN War Crimes Commission)가 1943년 10월 생겨났다. 16개국으로 조직된 이 위원회는 연합국의 전범 처리에 필수적인 기구였다. 사실조사를 으뜸가는 임무로 삼고 있던 이 위원회는 수십개의 조사단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파견하였다. 연합국에 의하여 해방된 지역에 파견되어 조사활동을 벌인 이들은 증거의 수집, 증인의 행방, 원주민의 인터뷰, 석방된 포로의 진술등을 채취했다.
1944년 5월 신설된 중경소위원회(Chungking Sub-Commission)는 중국의 王寵惠를 위원장으로 하여 중국에서의 전범용의자 목록을 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1945년 8월 25일 유엔전범위원회는 일본의 전범용의자들이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재판받을 수 있도록 유엔이 이들을 파악한 내용에 관한 백서를 발간하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정부, 군부, 재정 분야의 주요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의 체포, 재판은 이제 필지의 사실이 되었다.
한편 유엔 전범위원회는 같은해 8월 28일 일본의 전범에 관한 권고안을 채택하였다. 이 권고안은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갖는 중앙전범기구(Central War Crimes Agency)를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미국은 이러한 기구 대신에 연합군최고사령관의 권한으로 넘김으로써 미국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고 말았다. 실제 이 제안은 광범하고도 지속적인 전범재판을 실시할 구상을 담고 있었다.
1) 일본 영토안에서 계획되거나 지시되거나 범해진 모든 전쟁범죄를 조사하는 일
2) 그 어느 곳에서 범해졌던 간에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모든 증거를 수집하는 일
3) 발견된 전쟁범죄의 증거와 아직 유엔의 전범위원회 또는 소위원회에 등재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범해진 전쟁범죄의 증거를 위 유엔의 전범위원회 또는 소위원회로 전달하는 일
4) 유엔의 어느 국가나 국제군사재판소에 의해 확인되거나 수배되거나 재판을 받은 모든 일본 전범의 명단을 확보하고 관리하는 일
5) 어떤 정부나 기관에 의하여 확보된 모든 증거를 보내야 하는 중앙 전범 증거센타를 설치하고 관리하는 일
6) 이 기관, 유엔 전범위원회, 그 소위원회, 또는 유엔의 어느 정부에 의해서도 발견되는 일본 전범의 이름의 확인과 체포를 준비하는 일
7) 확인된 모든 전범의 이름을 유엔의 전범위원회 또는 소위원회에 통보하는 일
8) 일본 전범을 요청하는 국가에 인도하는 일. 요청국가가 2개 이상인 때에는 이 기관이 인도의 조건을 결정한다.
9) 일본 전범문제에 관하여 유엔 전범위원회, 소위원회, 또는 해당 정부와 협력하는 일
10) 전범에 관한 모든 증거와 정보를 수집하고 각국의 전범위원회의 업무를 조정하기 위하여 전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지부를 설치하는 일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과 더불어 일본정부는 프츠담선언을 수용하였다.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의 결정을 위하여 연합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가 설치되었다. 미국은 이 극동위원회와 연합군최고사령부등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점령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대일 점령정책의 목표는 일본에서의 탈군사화와 민주화에 있었다. 전범처리는 바로 이러한 점령목표와 잇닿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점령정책은 그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점령군의 대부분을 차지한 미국의 입김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만하였다. 따라서 전범의 처리를 위한 준비도 미국에 의하여 초기부터 기획되고 있었다.
미국은 국무성.전쟁성.해군성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는 9월초에 이미 전범정책을 마련하여 맥아더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이 정책 속에는 중일전쟁과 나아가 태평양 전쟁의 계기가 된 1931년 9월 18일 묵덴(Mukden)사건 이후의 전범용의자들의 구금과 일왕에 대한 불구금 원칙이 담겨 있었다.
(2) 전범용의자들의 검거와 구금
전범들에 대한 재판은 기정사실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신병확보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점령군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완료하기 전에 전범용의자를 수배하거나 체포에 나서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전쟁범죄 용의자 체포를 명한 것이 1945년 9월 11일이었다.
그 당시의 명단은 39명. 東條英機, 東鄕茂德, 嶋田繁太郞, 賀屋興宣, 岸信介, 寺島健, 岩村通世, 橋田邦彦(자살), 井野碩哉, 小泉親彦, 鈴木貞一, 本間雅晴, 黑田重德, 村田省藏, 長兵彰, 太田淸一, 테이 몬 박사(주일 버마대사), 호세 라우렐(필리핀 대통령), 비루가스(주일 필리핀 무관), 아키노(필리핀 국민호의의장), 하인리히 스타마(주일 독일대사), 그레치마(독대사관 육군무관), 우카탄 위치트(주일 타이대사)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진주만공격 당시의 내각 각료, 필리핀 군관계자, 일본내 포로수용소 관계자들이었고 외국인도 일부 체포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동경라디오로부터 국제전파를 방송한 자, 주일독일대사관 관계자, 이른바 대동아제국인 버마,타이,필리핀등의 주일수뇌부등이 체포대상이었다.
국적별로 보면, 필리핀 3명, 호주인 2명, 네들란드, 버마, 타이, 미국인등이 각각 1명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으뜸가는 전범은 東條英機, 그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중 포로가 되느니 자살하라고 가르킨 가혹한 군인이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패전의 소식을 듣고 자살한 마당에 최고의 전범으로 체포가 예상되던 그가 그대로 잡혀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드디어 그가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살에 성공하지 못하고 미수에 그친 채 미군의 체포와 긴 재판의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9월 12일 필리핀의 주일대사 비르가스가 미국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같은날 오후 東條의 해군에서의 분신이었던 嶋田繁太郞 해군대장이 연합국 군인들에게 역시 체포되었다. No.2의 전범이었다. 같은 시간 제1군 총사령관으로서 본토방위의 책임자였던 杉山이 자살했다. 체포명령을 받은 전범용의자들이 차례 차례로 미제8군헌병대사령부에 출두하였다.
체포의 선풍이 몰아닥치자 당시의 히가시쿠니 항복내각은 구금 명령권을 일본법원에 주기를 SCAP에게 요청하였고 일부 언론 역시 일본정서를 감안하여 그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가 전범체포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연합국 언론의 비판과 압력에 추가구금에 나서게 된다. 이리하여 9월 19일 연합군사령부는 다시 11명의 전범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荒木貞夫, 本庄繁, 鹿子木員信, 小磯國昭, 久原房之助, 松岡洋右, 曷生能久, 松井石根, 眞崎甚三郞, 南次郞, 白鳥敏夫등이다.
추밀원 고문이자 봉천.만주사변을 주도한 육군대장 本庄繁 대장은 20일 오전 자결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차레로 巢鴨(쓰가모)형무소로 구금되었다. 11월에 이르러 유엔전범위원회는 두 건의 전범용의자명단을 맥아더에게 전달하였다. 여기에는 관동군의 악명높은 7명의 장군과 3명의 전직 수상을 포함하여 20명이 넘는 용의자들이 들어 있었다.
사령부내에서 가장 관심과 논쟁을 일으켰던 사람은 후미마로 코노에 왕자였다. 그는 3번의 수상직을 역임하였지만 전후 일본헌법기초위원회의 위원장을 맡는등 평화의 왕자로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투철한 반공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그의 전범용의자 포함은 미국이나 맥아더로서는 당황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범용의자로 거론되는 사람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았다. 논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12월 2일 또다시 59명에 대한 체포명령이 떨어졌다.
72세의 황족의 몸이었던 梨本宮守正王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황족으로서는 최초의 체포였다. 그 명단과 약력은 다음과 같다.
橫山雄偉. 12월 6일에는 고노에 왕자와 일왕의 가장 중요한 측근이었던 코이치 키도(木戶幸一)가 드디어 구금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일왕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이틀후인 12월 28일 히로히토는 맥아더를 방문하여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일왕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기로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고노에는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미군 진주 이래 2-3개월 사이에 100여명의 전범용의자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동경에서의 A급전범자 용의자들에 대한 구금이 신중하고도 느릿느릿 진행되는 동안 과거의 대동아공영권에 속했던 곳곳에서 B.C급전범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마닐라에서는 말래야의 호랑이로 이름을 날렸던 토모유키 야마시타 대장이 이미 1945년 10월 29일 기소가 된 상태였다. 12월 7일에는 사형선고까지 이루어졌다. 필리핀에서는 미국과 필리핀의 포로들을 저 악명높은 바탕 죽음의 행진으로 몰고간 마사하루 홈마장군이 다른 193명의 일본군인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한편 요코하마에서는 동경전범재판이 열리기 전에 하위급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B.C급전범으로 재판받기 시작하였다. 854명이 요코하마에서 재판받았고 그 가운데 51명이 처형되었다.
(3) 전범처리를 위한 근거, 기구등의 마련
가.연합군최고사령부내의 기관
주요 일본전범의 재판을 위한 군사재판소의 설치를 위한 조치는 항복 직후 곧바로 시작되었다. 미국 합참본부(JSC)는 맥아더 최고사령부에 1945년 9월 22일 일본의 전범용의자의 기소와 재판소 설치와 관련한 상세한 지시를 내렸다. 일본의 항복 직후 연합국최고사령부 법부국( SCAP Legal Section)은 주요 전범의 파악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작업이 전적으로 미국의 손 안에서 진행되는 동안 다른 연합국들은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었다.
미국과 영국, 중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연합국최고사령관을 자문하기 위한 극동위원회(The Far Eastern Commission)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것은 1945년 12월 27일에 이르러서였다. 당초 항복문서에 서명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네들란드,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 외에도 필리핀과 인도가 추가되어 11개국이 극동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항복문서의 실행을 위하여 대일본 연합국 이사회(The Allied Council for Japan)도 함께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국의 기구들이 제대로 작동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의 점령정책은 거의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로 기획되고 수행되었다. 연합국들이 국제검사국과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검찰관과 판사를 파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미국의 들러리를 서는 것에 불과하였다. 극동위원회에서 미국과 소련, 미국과 필리핀 및 중국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과 의견 다툼은 결국 이 기구의 파산을 초래하고 말았다. 뉴른베르크 재판이 4대 연합국의 완전한 합의와 조정의 산물이라면 동경재판은 미국의 단독 작품이었다.
나.국제검사국의 설치와 진용, 전범수사
1945년 11월 30일 트루만 대통령은 죠셉 베리 키난(Joseph Berry Keenan)을 일본인 전범재판의 수석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로부터 1주일 이내에 동경에 나타난 그는 곧바로 전범들의 수사와 기소를 위한 준비에 들어 갔다. 그러나 키난과 그의 보좌관이 법정의 규모와 기소에 참여할 연합국의 숫자, 기소할 혐의의 요지등에 관하여 아무런 방침이나 구상이 없이 그들의 직무를 시작하였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연합국으로부터 파견된 수십명의 검찰관을 이끌은 키난은 동경재판 내내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동경재판에 관여한 사람들이 대체로 키난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역사적인 재판의 수석검찰관의 직책에 맞는 자질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특히 그가 알콜중독자였다는 평가가 많았다.뿐만아니라 단순히 상원의원의 지렛대로 그 직위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었다. 12월 8일 최고사령부하에 설치된 국제검사국(International Prosecution Section, IPC)은 개별적 전범의 수사와 기소를 담당하였다. 최초의 국제검사국 팀은 미국 법무성에서 차출된 22명의 변호사들을 포함하여 39명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경재판이 끝나기 직전에는 전부 50명의 변호사들과 104명의 연합국 출신의 직원, 184명의 일본인으로 불어나 있었다. 키난은 수석검찰관이었으며 연합국에서 파견된 검찰관들은 단순한 보조 검찰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은 미국의 다른 검찰관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명단과 직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 Arthur S.Comyns-Carr. 영국 의회 의원. 지도적인 바리스터
* Hsiang Che-chun. 상해고등법원 검사장. 전 중국 대법원 소속 검사. 국제법 전공
* W.G.Frederick Borgerhoff-Mulder. 헤이그 특별전범재판소 판사
* Robert L.Oneto. 프랑스 법무장관.베르사이유 특별법원의 수석검찰관으로서 나치와 비쉬 전범자와 부역자의 재판에 참여
* Alan Mansfield. 오스트랠리아 퀸스랜드 대법원의 판사. 뉴기니아의 일본전범 수사.
* Brigadier Henry Nolan. 캐나다 육군법무차감.
* Ronald Quilliam. 전 뉴질랜드 대학 형법학 교수. 뉴질랜드 육군 군무국장.
* S.A. Golunsky. 모스크바 법학원 및 소련 적군법학아카데미 교수
그러나 전범 용의자들의 확인, 소재파악, 체포, 적확한 증거의 수집등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미군의 상륙 전에 많은 일본 군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증거의 인멸과 조작을 완료한 뒤였던 것이다. 일왕의 항복 방송부터 미군의 점령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치가야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전쟁성에는 밤낮으로 수톤의 문서들이 불탔다고 한다. 육군과 해군 주둔지, 헌병대 본부, 비밀경찰등 일본제국의 전역에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이렇게 인멸된 증거 속에는 내각회의, 어전회의등 전쟁수행을 위한 각종 회의자료, 필리핀과 동남아 침공에 관련된 모든 명령과 계획, 만주와 중국에서의 전쟁에 관련된 문서등이 포함되었다. 심지어 주요 지휘관들의 개인적 서신이나 일기등 집에 보관된 문서조차 파기하도록 하는 지시도 있었다. 때로는 연합국의 조사에 혼란을 초래하기 위하여 위조, 변조된 문서들조차 적지 않았다.
국제검사국의 수석수사관으로 임명된 미국 육군 중령 Ben Sackett는 당초 주요 전범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수집되어 있지 않다고 극비 메모를 통하여 보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당초의 이러한 황무지 상태에서 조사의 시작과 더불어 의외의 자료들이 수확되기도 하였다. 樞密院 의사록이라든가 木戶日記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특히 키도의 구금과 더불어 제공된 그의 방대한 일기는 그야말로 기소의 살아 있는 바이블이며 향후 모든 조사의 주요 열쇠가 되었다.
이 일기는 1930년 1월 1일부터 1945년 12월 15일까지 계속되면서 內府秘書官長, 內大臣으로서 그가 목도한 일본의 거의 모든 정치.군사.외교적 결정의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구금된 전범용의자들의 訊問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 또한 개전을 반대하였던 정치인과 군인들도 비공개 자료원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미 구금된 전범용의자들과 책임을 면하려는 비구금 참고인들의 변명은 대체로 다른 용의자들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와 증거를 제공하였다.
다. 재판소헌장의 공포
이제 재판을 위한 재판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규정이 필요하였다. 재판소의 헌장이 1946년 1월 19일 연합군사령부의 일반명령으로 공포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진행될 동경재판의 근거가 되었다. 이 헌장의 권원은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선언과 거기에서 수용되고 있는 포츠담선언에 있다.
포츠담선언이 전범에 대한 엄정한 재판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이미 본대로이다. 극동에 있어서의 중대전쟁범죄인의 공정하고도 신속한 심리 및 처벌을 위해 마련된 이 헌장은 제1장은 재판소의 구성, 제2장은 관할 및 일반규정을, 제3장은 피고인에 대한 심리, 제4장은 재판소의 권한 및 심리의 집행, 제5장은 유죄 무죄의 판결과 형의 선고를 규정하고 있다.
중요한 법률적 및 절차적 규정은 이 헌장의 부속문서인 재판절차규칙, 기소의 유죄항목 내용등에 담겨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관할의 문제였다. 재판소가 취급할 수 있는 범죄는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전쟁법규 또는 관습법에 위반한 죄, 인도에 대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세가지였다(헌장 제5조).
평화에 대한 죄는 침략전쟁 혹은 국제법,조약,협정 또는 보장에 위반한 전쟁의 계획, 준비, 개시 또는 수행 혹은 위 각 행위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계획 또는 음모에의 참가를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다. 다음으로 통례의 전쟁범죄(Conventional War Crimes)는 전쟁법규 또는 전쟁관례의 위반으로 이루어진다. 세째의 인도에 대한 죄는 전전 또는 전시중 민간에 대하여 행해진 살륙,섬멸,노예적 혹사, 추방 기타 비인도적 행위 혹은 범행지의 국내법위반인지 여부를 불문한 본재판소의 관할에 속하는 죄의 수행으로서 혹은 이것에 관련하여 행해진 정치적 또는 인종적 이유에 기한 박해가 해당된다.
통례의 전쟁범죄에 관해서는 이미 국제적 규범과 처벌의 관행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평화에 대한 죄와 인도에 대한 죄는 2차세계대전 이후에 확대된 전쟁범죄의 유형이다. 평화에 대한 죄는 침략전쟁 그 자체를 처벌하는 것이므로 정치적 판단이 개재되기 마련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패전에 따른 정치적 보복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인도에 대한 죄는 종래의 형벌규범에 비추어서도 죄가 되는 것들을 인도에 대한 죄목의 이름하에 통합하여 개념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뉴른베르크 재판이나 동경재판을 비판하는 견해는 주로 평화에 대한 죄를 적용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전쟁범죄인의 조사와 소추를 위하여 연합국최고사령관은 수석검찰관을 임명하도록 하고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었던 각 연합국은 수석검찰관을 보좌하기 위한 참여검찰관 1명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헌장 제8조). 재판의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피고인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하되 다만 재판부가 변호인을 기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피고인 또는 그 변호인은 방어에 필요한 증거를 제출하거나 증인을 소환, 신문할 권리를 가졌다(헌장 제9조).
재판관은 항복문서의 연서국(連署國)이 제출한 사람 가운데서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임명한 6명 이상 11명 이내의 재판관으로 구성하고(헌장 제2조) 그 가운데 재판장을 역시 최고사령관이 임명한다(제3조). 전 재판관의 과반수의 출석을 정족수의 성립요건으로 하고 유죄 무죄의 결정 및 형의 양정을 포함한 재판소의 일체의 결정과 판결에는 출석한 재판관의 과반수에 의하며 가부 동수인 경우에는 재판장이 결정한다(제4조).
이 헌장의 내용은 뉴른베르크의 그것과 거의 다른 것이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SCAP 법무국과 국제검사국 키난 팀에 의하여 기초된 이 헌장은 맥아더로 하여금 재판소 판사와 재판장을 임명할 막강한 권한을 주었다. 연합국사령관은 항복조항의 이행을 책임지고 있었고 그 이행사항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전범에 대한 처벌이었기 때문이었다.
(4)일본정부측의 대응
가.自主裁判工作
일본정부로서도 일단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이상 전범처벌의 문제는 기정사실이 되어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 공관들을 통하여 나치전범재판의 관련자료를 입수하면서 향후 일본에서의 전범재판의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22일 이미 일본정부는 종전처리회의를 설치하였으며 같은해 9월 22일자 회의에서는 재판이 연합국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라도 공정한 재판이 되도록 노력하되 먼저 자주재판을 열어 약간의 자에 대한 처벌과 행정처분을 단행하고 그 결과를 연합국측에 통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일본이 자체적으로 군법회의를 열어 처벌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성 명
일본측 군법회의
판결일
죄 명
형 량
M육군소좌
대만군임시군법회의
1945.11.5
직권남용
금고10월
N육군대위
대만임시군법회의
1945.11.5
직권남용
금고11월
K육군대위
제38군임시군법회의
1945.9.11
살인
징역13년
H육군주계소위
제38군인임시군법회의
1945.9.11
살인등
징역15년
T육군주계소위
제38군임시군법회의
1945.9.11
살인
징역8년
육군헌병조장
제38군임시군법회의
1945.9.11
살인방조
징역3년
B해군기관병조장
제11근거지임시 군법회의
1945.9.14
살인
징역7년
Y육군헌병조장
제2군임시군법회의
1946.3.27
살인약탈
종신
종신징역까지 선고되었으나 그 죄명에 비추어보면 결코 무거운 것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속하고도 약삭빠른 조치는 결코 일본의 자체 반성과 진정한 처벌의지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교묘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즉, 일본정부로서 연합국에 먼저 처벌을 하면 일사부재리의 법원칙에 따라 처벌이 어려울 뿐더러 일본정부가 생색을 내어 연합국의 전범처벌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위의 명단을 보아서 알 수 있지만 일본정부의 이같은 뜻은 전혀 연합국의 진정한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송사리 몇마리를 잡는 것으로 해결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군의 점령후 오래지 않아 전범용의자들의 검거에 나선 것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맥아더 사령부와 이른바 자주재판구상에 관하여 계속 논의를 추진하였으나 맥아더 사령부가 거부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들은 나중에 B.C급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국에 의해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범죄사실이 보다 쉽게 입증되어 중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히로히토는 자신의 운명도 운명이려니와 전범 처벌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보좌진들이 히로히토로 하여금 전범재판을 일본의 손에 남겨주도록 요구하도록 하였으나 히로히토는 이에 반대하였다. 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특히 국가에 충직한 사람들인데 일왕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는가라는 답답한 히로히토의 질문에 뉴른베르크 식의 전범재판을 구상하고 있던 맥아더의 의중을 알고 있던 전후 최초의 내각 수상이었던 東久邇는 전혀 대안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일본의 자주재판의 의지는 그 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시데하라 내각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 문서는 외국과의 전쟁으로 히로히토의 평화의지를 거스른 사람들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가하려고 한 재판계획을 담고 있었다. 국민감정의 안정과 국가질서의 유지에 필요한 국가윤리 수립을 위한 긴급 칙령이라는 제목의 초고는 이같은 계획의 초안을 만들고 있으나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1946년 3월 연합국사령부가 일본정부에 의한 전범의 조사나 재판을 완전히 금지함으로써 자주재판의 구상은 완전히 끝났다.
나.전범 보호 위해 광분
변론방침 정하고 證人宿까지 만들어 사태가 거스르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안 일본정부는 그다음으로 이들 전범자들을 위한 변호를 위해 나선다. 1945년 10월 23일 A급전범에 대응한 방침을 보여주는 소위 戰犯人 辯護方針은 다음과 같이 근본목적과 기본방침을 정하고 있다.
<근본목적>
1.至尊(일왕)에게 누가 미치도록 하지 않는 것
2.제국으로서의 피해를 극소히 방지하는 것
3.개인의 피해를 극소히 방지하는 것
<기본방침>
1.국제법상 소위 전범처벌의 불합리한 것을 선명히 한다
2.제국헌법상 지존에 관계가 없는 것을 선명히 한다.
3.기왕의 국제정세에 의해 제국은 개전이 멸망하지 않는 유일한 길임을 선명히 한다.
4.소위 전범의 공적 사적 사정을 명확히 하고 범죄사실을 부정 또는 변호한다.
이어서 1945년 11월 5일 종전연락간사회의 이름으로 전쟁책임등에 관한 응답요령을 만들어 체포 또는 신문시에 대비하여 답변의 요령을 제공하였다. 이 요령은 통칙과 세칙으로 분류하여 일왕과 일제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연합국의 국제검사단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일본군은 연합국측의 소환 또는 방문을 받은 경우의 행동 및 응접요령, 포로취급관계연합측신문에 대한 응답요령등에 관한 건등을 하달하여 그에 대비케 하는등 주도면밀하게 대응 하였다.
뿐만아니라 관방임시조사부를 설치하고 변호자료연구반을 조직하는등 연합국의 기소에 대한 자료수집과 대응논리등을 연구 제공하는 부서를 두어 기소된 전범들의 지원체제를 갖추었다. 이들은 영미법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는가 하면 증인숙(證人宿)까지 만들어 증인의 진술요령까지 훈련시키는 등마치 전투준비를 하는 군대와 같은 일사불란한 체제로 들어갔다.
(5) 연합국의 최초의 전범재판
동경재판의 기소에 앞서 열린 전범재판도 있었다. 이른바 土屋재판이 그것이다. 피고인 土屋辰雄은 전쟁 중 만도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수용소의 포로들을 구타하여 사망하게 하는등 학대행위로 전범 제1호로 기소된 土屋은 미제8군의 장교들로 구성된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사건에서 적용죄명에 대한 국제법적 근거, 군사재판으로서의 재판부의 관할권에 대한 적법성 시비등에 관하여 논란이 벌어졌고 이것은 동경재판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재판은 동경재판의 예행연습 또는 리허설이라고 불렸다.
3.동경재판의 진행
(1)재판의 당사자
가.피고인석의 면면들
국제검사단에 의해 기소된 사람은 총 28명이었다. 일본 제국을 주름잡던 주인공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동경전범재판에 얼굴을 드러냈다. 19명은 직업군인이었고 나머지 9명이 민간인이었다. 4명의 전직 수상, 3명의 외상, 4명의 육상, 2명의 전직 해군상. 6명의 장관, 2명의 대사, 3명의 재계 지도자, 1명의 귀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28명의 면면과 간단한 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름
약 력
荒木貞夫
교육총감부본부장.犬養내각 및 薺藤내각 육상. 군사참의관. 近衛내각 平沼내각의 文相
그러나 이들이 모두 끝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가운데 국제연맹 탈퇴의 주역이었으며 1930-40년대의 일본 외교를 이끌었던 마츠오카가 6월 3일 결핵으로 입원하였고 그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아 사망하였던 것이다. 또한 개정 초기 법정에서 토조를 때려 소란을 일으켰던 슈메이 오카와는 정신질환으로 밝혀져 재판을 받지 않았으나 그의 혐의는 동경재판이 모두 끝나면서 함께 취하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질환이 진실인지 가장인지는 지금까지 논란이 있는 상태이다.
체포된 다수의 사람들,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범으로서의 혐의가 두어지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28명이 최종적으로 기소된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한 뒤였다. 전범체포 리스트는 이미 보았던대로 유엔전범위원회의 것을 비롯하여 영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가 각각 자국이 판단한 것을 기초로 하여 제출한 것들이 있었다. 당시 국제검사국의 검사들이 조사한 보고서에 근거하여 Carr의 집행위원회가 기소자를 선별하였다. 키난은 피고인의 선별이 진정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당시 검사들의 다수결 투표가 동원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피고인들은 전체 연합국의 이름으로 기소되었고 뉴른베르크전범재판 처럼 연합국에게 개별적으로 기소할 사람이 할당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기소자의 선별과정에서 이루어진 토론과 논쟁은 남아 있지 않아 그 상세한 경위는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나.판사들의 구성
재판소의 헌장이 마련되고 전범용의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국제검사국이 수사를 마무리해 가면서 이제 관심은 판사들의 도착에 쏠렸다. 1946년 2월 15일 항복문서에 조인한 9개국이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참여할 판사를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전원 맥아더에 의하여 그대로 임명되었다.
당초 키난은 미국측의 판사로서 Willis Smith 미국변호사협회 회장이나 하버드 법대 Roscoe Pound 학장을 임명하도록 추천하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국제적 명성이나 평판에 어울리는 재판소 구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임명된 것은 메사추세츠 주대법원장 John P.Higgins 였다. 단지 일개 주의 대법원장으로서 다른 연합국의 피임명자와 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키난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명은 강행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예상대로 퀸스랜드 대법원장이던 William Webb을 임명하였다. 그는 2월 20일 맥아더에 의해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당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에 대한 일본군의 가혹행위를 수사하는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에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판사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재판의 초기에 피고인의 변호인들이 Webb뿐만 아니라 일본군 포로였던 필리핀 판사 Delfin Jaranilla에 대해서도 부적격 항변을 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소련에서 추천한 사람은 레닌의 볼쉐비키 혁명의 과정에서 사법위원장을 지냈던 I.M.Zarayanov였다. 적군의 소장과 적군의 법학군사아카데미 원장을 지낸 사람이기도 하였다. 중국은 역시 소장과 중국전범재판소장을 지낸 Shih Mei-yu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2천명이 넘는 중국내 일본 전범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빴던 그는 결코 동경에 나타나지 못하였고 그대신 파견된 사람이 중국 의회 외교위원장 Mei Ju-ao였다. 네들란드의 B.V.A Rolling 역시 국제적 명사의 한 사람이었다. 유트레히트 대학의 교수출신이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대법원 판사였던 Harvey Northcroft가 임명되었다. 영국의 Lord Patrick은 스코틀랜드 최고법원 판사였다. 프랑스에서는 당초 Henri Reimburger를 파견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프랑스의 여러 법원에서 나치담당 검사를 지낸 Henri Bernard가 임명되었다.
중국인 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럽 중심의 서양사람이었다. 여기에 필리핀의 Delfin Jaranilla와 인도의 Radhabinod Pal이 추가되었다. 필리핀과 인도는 항복문서 조인국은 아니었지만 전전의 종주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강력한 희망에 의해 뒤늦게 판사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인도와 달리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버마가 대표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필리핀과 인도는 그당시 아직 독립국의 지위를 확립하지 못하였음에도 대표를 낼 지위를 부여받았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전쟁 중 비쉬정권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독일의 요청에 의해 일본군의 전진 기지로 사용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재판 참여를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판사들의 출신국별로 보면 모두 7개국의 영미법계 국가여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필리핀, 뉴질랜드, 미국, 영국이 그러하였다. 연합국 가운데서도 전쟁에 직접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던 나라들은 제외되었다. 1922년의 9개국조약의 당사자였던 포루투갈이나 벨기에는 이 행사에 전혀 초청받지 못했다. 평화회복과 연합국 포로의 고통 경감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스웨덴, 스위스, 아르헨티나 역시 배제되었다.
다.검사와 변호인
동경재판의 검사측은 당연히 수사를 담당하였던 국제검사국 소속의 검사들이 그대로 맡았다. 피고인들을 위한 변호인 선임과 그 활동의 문제는 SCAP이나 국제검사단 측에서 별로 준비되지 못한 것이었다. 구금된 전범들을 위해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의가 들어 오면서 이 문제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변호인단(Defense Division)이 꾸려진 것은 1946년 4월 5일이었다. 재판소의 사무국장 Vern Walbridge가 이날 변호인단이 향후 있게 될 재판절차에서 변론을 담당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피고인들을 위한 변론에 핵심이었던 일본인은 세사람이었다. 종전 전에 일본 중의원을 8차레나 역임한 이치로 키요세 (淸懶一郞)는 가장 우수한 변호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 그 자신이 극우인사로 분류되어 SCAP에 의해서 숙청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켄조 타카야나기는 하버드 법대에서 로스코 파운드 아래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학자로서 변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변호인단의 3인방(trio) 가운데 또한사람은 명치대학 총장이자 유명한 법률가였던 소메이 우자와였다. 그는 변호인단의 단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판사들의 대부분이 영미법계 출신이어서 일본인 변호인만으로서는 재판 절차와 변론의 내용에 있어서 대응하기가 부족하였다. 일본정부는 1946년 2월 14일 피고인들을 위해 영국과 미국의 변호사들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법정변호사(바리스터)는 원래 외국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변호사들만이 변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히데키 토조의 경우 자신은 미국변호사들이 일왕의 전쟁책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도움을 받겠다고 하여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이들 미국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피고인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변론을 하였음은 일본 변호인들과 가족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특히 일본인 변호사들은 국가의 명예와 일왕의 보호에 중점을 둔 반면 미국변호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고객의 이익에 더욱 열중이었다. 이러한 점이 일본인. 미국인 변호사간의 충돌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변론 비용은 미국정부의 예산에서 지출되었다. 국선변호인이었던 셈이다.
(2)기소의 제기와 그 요지
당시 쓰가모형무소안에 구금되어 있던 80명 이상의 A급 전범용의자 가운데 누구를 기소할 지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키난이 행사하였지만 국제검사단의 이사회가 논의와 권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사회는 우선 평화에 대한 죄, 즉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주도한 적이 없는 사람은 기소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다음으로 기소대상은 반드시 정책결정자로서 책임이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또한 A급 전범으로 기소되는 사람은 15인 이내로 하자고 하였으나 연합국 상호간의 역학관계로 각국이 2명씩의 용의자를 기소할 수 있도록 비공식적으로 합의되었다.
1946년 4월 중순경 이사회는 당초 약속한 22명 보다 4명이 더 많은 26명의 기소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도착한 소련 대표단의 요청으로 그당시까지 아직 구금되지도 않았던 전 외무장관이자 주소 대사였던 시게마츠와 1939년부터 1944년까지 관동군 사령관을 지냈던 우메즈 장군을 그 기소자 명단에 포함시켜 총 28명이 되었다. 이리하여 국제검사단은 5개월여의 수사의 결정(結晶)으로서 기소장을 작성하여 4월 29일, 종전후 최초로 맞는 천장절(天長節)에 발표하였다. 그 기소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1928년 1월 1일부터 1945년까지 사이에 일본의 대내, 대외정책은 범죄적 군벌에 의해 지배되고 지도되었다.
① 대내정책: 일본국민에 조직적으로 민족적 우월성의 사상을 심어 정치적으로 일본의 의회제도에 나치 혹은 파시스트당과 같은 조직을 도입하여 이것을 침략의 도구화하였으며 또한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자원을 대부분 전쟁목적에 동원하였다. 또한 정부에 대한 육해군의 제압을 강화하고 익찬회를 창설, 국가주의적 팽창정책을 가르치고 신문 라디오에 엄격한 통제를 가하여 이로써 국민의 여론을 정신적으로 침략전쟁에 이용하였다.
② 대외정책: 나치독일, 파시스트 이태리의 통치자를 동원하여 침략국가에 의한 세계지배와 착취획득을 위하여 공동모의를 행하고 평화국가들에 해하여 국제법, 조약에 위배하여 침략전쟁을 계획,준비,개시하고 실행하였다.
2. 세계분쟁을 야기하고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한편으로 포로학대등의 전시법규위반 및 일반 민간에 대한 잔학행위를 감행하였다.
기소장은 범죄를 제1류 평화에 대한 죄, 제2류 살인, 제3류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로 3분하고 있다. 공소사실로서 55개 항목을 설정하고 부속서 A에 이러한 공소사실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사실을 10개절에 걸쳐 例記하고 있다. 55개 공소사실 가운데 36개가 평화에 대한 죄, 16개가 살인, 3개가 인도에 대한 죄 또는 전통적 전쟁범죄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A급 전범은 대체로 평화에 대한 죄가 압도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부속서 B,C,D에서는 일본이 침략하였던 조약의 주요한 것, 일본이 위반한 공식의 보장 또는 전쟁법규를 예거하고 있다. 부속서 E에서 3종류의 범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피고의 약력에 의하여 설시하고 있다. 21명의 피고인이 1931년의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한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하였던 혐의가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 오카와와 시라토리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이 헤이그와 제네바협정을 위반한 전통적 전쟁범죄와 인도에 대한 죄가 부가되어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피고인에 대해 단독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미국과 영국, 소련에 대해 침략전쟁을 기획한 혐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3)재판의 개정
드디어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1946년 5월 3일 동경재판의 첫 공판이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방청객들은 자리를 잡기 위하여 법정으로 쓰이게 될 이치가야 전 전쟁성 건물로 몰려들었다. 4개월 동안이나 단장된 이 법정에는 일반 방청객석 660개를 비롯한 1천개의 좌석이 배치되었고 각 좌석에는 통역장치가 설치되었다. 영어와 일어, 러시아어 세 언어의 통역이 이루어졌다.
28명 가운데 26명이 법정에 나타났다. 스가모 형무소에서 구금이래 각기 고립된 방에서 오늘의 재판을 기다리며 고립되어 지냈던 것이다. 이들은 이미 위풍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린 노인들에 다름아니었다. 군국일본의 재정통이었던 오키나리 카야는 체중이 현저히 줄어들어 자신이 옷이 두배나 커 보였으며 한때 조선의 호랑이로 불렸던 쿠니아키 코이소는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와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나타난 전쟁광 쇼메이 오카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복이거나 계급장이나 표식없는 국민복을 입었다.
예정된 10:30을 넘겨 11:13에 재판장 Webb을 비롯한 판사들이 입정하였다. 정리의 개정선언에 이어 재판장의 간단한 개정연설이 있었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형사재판은 일찌기 없었다. 이 크나큰 과업을 위하여 열린 마음으로 사실과 법률 심리에 임할 것이다.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유죄의 입증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검찰의 공소장 낭독이 시작되었으나 그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피고인들의 기소인부절차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4)심리의 전개와 쌍방의 공방
① 재판부 기피 신청
첫번째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재판부의 기피신청이었다. 재판장 Webb이 뉴기니아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가혹행위를 조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재판의 판사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이 피고인측 변호인단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잠시의 휴정끝에 이루어진 결정으로 배척되었다. 재판부는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의해서 임명된 판사를 해임할 권한이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뿐만아니라 Webb 자신도 임명당시 그 문제를 고려하였으나 재판에 아무런 결격사유가 될 수 없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후 7월 20일에는 미국측의 히긴스 판사의 사임후 대신 임명된 크레머 판사에 대한 기피가 있었다. 크레머 판사는 소장으로 일본군과 싸운 군인데다가 재판소 조례에 의하면 11인 이상 6명 이하의 판사가 열석한다고 되어 있는 바 그동안 크레머 판사는 재판에 12번째 판사이고 증거조사는 이미 상당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직접 참여하지 않은 판사로서 재판의 공정을 위해 기피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Webb 재판장은 뉴른베르크 헌장과 달리 동경재판소 조례는 이에 관한 규정이 없어 판사의 갱질을 허용하는 취지로 보아야 하며 사고와 질병등으로 판사의 갱질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재판은 강행할 수 밖에 없으므로 크레머 판사의 임명은 적법하다고 결정하였다.
② 관할권의 하자 주장
피고인들은 기소인부절차에서 모두 범죄를 부인하였다. 뿐만아니라 이들의 변호인들은 이 법정의 관할권 자체에 도전하였다. 변호인단의 키요세(淸懶一郞) 변호인의 주장은 독일과 달리 일본의 경우 포츠담선언에 관하여 전범처벌은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용어의 해석에 따라(in accordance with the commonly accepted understanding of that term) 이루어질 것임을 승인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용어의 해석이란 전통적 전쟁범죄일 뿐이며 평화에 대한 죄라든가 인도에 대한 죄등은 모두 전통적인 국제법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포츠담선언의 수락은 1941-1945년 전쟁의 종료를 위해 이루어졌던 것이지 1931년의 만주침략과 관련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주요 연합국의 하나인 소련은 바로 만주국을 승인했던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공소 자체가 기각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측 변호인 Blakeney는 육군소령의 복장으로 일어나 재판부의 부적격과 무관할권을 다시 공격하였다. 그는 판사들이 모두 연합국 출신이기 때문에 공정하고 합법적인 재판을 기대할 수가 없다면서 왜 중립적인 국가들의 판사로 재판을 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어서 전쟁은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권리이며 진주만에서 4천명이 죽은 것이 살인이라면 어떻게 히로시마는 살인이 아닌가를 반문하였다.
이에 대해 국제검사국측은 포츠담선언과 항복문서가 연합국최고사령관에게 전범재판을 포함하여 그 내용을 구체화하는 일체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일본을 포함하여 62개국이 서명한 1928년의 Kellog-Briand 조약 또는 파리협정이 전쟁을 불법화시켰기 때문에 전쟁은 더이상 당사국의 절대적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만주침략의 경우, 선전포고가 없는 하나의 사건(incident)이라고 해서 전쟁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 뿐더러 전쟁이 아니라면 그것은 수백만 중국인에 대한 살인죄가 성립한다고 하였다. 진주만의 경우 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진 선제공격으로서 이것은 일본 자신이 당사국인 헤이그협적 위반이라는 반론이었다. 며칠이 소요된 이 치열한 논쟁은 5월 17일 재판부의 변호인측 항변의 기각으로 끝이 났다.
③ 공동모의(Conspiracy)는 있었던가
중국과 미국등 연합국에 대한 침략전쟁의 수행과 세계정복의 야망은 피고인들의 공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공소사실의 주된 내용이었다. 검찰측은 이러한 공모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참가와 동의가 전제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모의 시작은 1928년의 만주침략으로서 만주사변-->일지사변-->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침략전쟁의 발단이라는 것이 검찰의 인식이었다. 또한 일본은 1928년 체결된 파리조약, 이른바 켈로그-브리앙 부전조약의 당사자가 되었는 바 침략전쟁을 포기한 이 해 침략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은 피고인들 사이의 그러한 공모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동모의의 직접적 증거로 이른바 田中上奏文 또는 國策基本要綱을 제출하였다. 이 증거는 중국 대륙에서의 일본의 팽창과 무력의 증대를 꾀하고 아시아에서의 구미 세력을 축출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피고인측은 뉴른베르크재판에서 유죄로 확정된 독일 지도자들과는 다른 일본의 정치 구조를 내세우며 공동모의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은 당시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였지만 일본의 경우 히로히토가 즉위한지 3년부터 항복때까지 17년동안 16회의 내각이 교체될 정도여서 일당독재 또는 전제국가라고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사건 또는 특정한 침략전쟁의 책임이 있는 피고인이라도 다른 사건 또는 전쟁에는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공동모의설에 기반한 공소사실은 허무하다는 것이었다.
④ 만주침략과 만주국 황제 溥儀의 증언
공소사실의 순서에 따라 먼저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입증활동에 들어간 검찰은 먼저 일본 육군소장이었던 田中隆吉을 증언대에 세웠다. 그는 1928년 6월 4일의 張作霖의 폭사사건이 관동군 참모 河本大作 대좌등 십수명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며 1931년 9월 18일의 柳條溝폭발사건은 만주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일본군의 음모였음을 증언하였다. 일종의 내부고발이었다. 만주침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등장한 것은 이밖에도 리튼보고서였다. 일본의 만주진공이 파리조약 위반인가 아니면 정당한 자위행동인가에 관하여 국제연맹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파견되어 조사를 벌인 리튼 조사단이 내놓은 보고서였다. 거의 6개월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고 난 뒤 그 결론으로 127페이지의 본문과 부속서로 이루어진 보고서를 냈던 바 만주사면의 진상을 구명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자료였다.
8월 16일은 동경재판에서 획기적인 날이었다. 만주국 황제였던 溥儀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였던 것이다. 그는 키난 검사의 직접신문에서 만주국 초창기의 이면사, 청조 최후의 황제로부터 축출되어 북경,천진,여순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일본 관동군의 괴뢰로서 만주국 황제에 옹립될 때까지 기구한 개인사를 진술하였다. 연합국에 의하여 승인받지는 못하였지만 사실상 5族 3천만 민중의 위에 군림하였던 일국의 원수가 법정에 나타난 것은 세계 재판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법정은 내외신 기자와 일반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는 법정에서 만주국 황제로 취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 관동군의 협박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나간 수많은 칙령을 단 하나도 알고 있지 못하였고 그당시 일어났던 만주사변, 만보산사건등에 대해서 신문을 통한 외에 보고받은 바가 없다고 증언함으로써 일본 관동군의 손아귀에 든 꼭둑각시 황제였음을 확인하였다. 더구나 행동의 자유가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자유라는 말은 10년 이상 나와 관계가 없었다, 나의 처도 일본의 吉岡중장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의 억류중에 있던 溥儀의 신분상 연합국에 의하여 강요 또는 교사된 증언이라는 것이 변호인측의 반박이었다.
⑤ 중국침략 10년, 세기의 참극 남경사건
중일전쟁의 단초가 된 蘆溝橋에서의 일발의 총성이 중국측에 의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일본군의 도발에 의한 것이었는가가 검찰과 변호인측의 피나는 논쟁을 붙였다. 蘆溝橋 사건으로부터 시작한 일본의 중국침략은 중국인의 엄청난 피의 희생을 초래하였다. 일본은 중국측의 공격에 대한 자위였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 중국의 저항일 뿐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10여년 계속된 중국 침략 가운데에서 가장 악명높은 사건은 역시 남경학살사건이었다.
남경의 비극을 가장 잘 증언해준 사람은 그당시 남경대학병원에 외과의로 근무하고 있던 미국인 의사 로버트 윌슨이었다. 1938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남경에 입성하였을 때는 이미 중국군의 무장은 완전히 무장해제당하였고 저항은 그쳐 있었는데 그때부터 목이 잘려나갈 뻔 한 환자, 총상을 입은 민간인들이 수없이 병원으로 실려 오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중국인들을 양자강 연안에 모아 놓고 사살하고서는 강에 시체를 던져 버렸으며 자신도 중국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위원회의 난민구조사업을 하고 있던 중국인 증인도 남경 시내 곳곳에 쌓인 시체를 5백까지 헤아리다 그만 둘 정도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본 시체 가운데 남녀노소가 함께 있었으며 그 가운데 군복 착용자는 한명도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동경재판의 판결문은 남경사건에서 20만 이상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고 인정하였다. 피고인측은 당시 장개석 군대가 게릴라부대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여서 민간인과의 혼동이 불가피하여 일어난 불상사라고 변명하였다. 아무튼 남경사건은 그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보도통제가 실시되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어서 동경재판을 통하여 일본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⑥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의 책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태평양전쟁을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일본 국민에게도 米英擊滅의 기세를 돋군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미국 국민을 대일전쟁의 의지를 묶어 세운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기실 세계 지배를 위한 결정적 승리인 것 같아 보였지만 일본 몰락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미국민의 의지는 전쟁 중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이 끝난 후에 까지 초미의 관심이었다. 일본 전범에 대한 수사와 재판의 초점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연합함대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리챠드슨 해군대장은 11월 25일 법정에서 일본은 미국과 전투를 시작한다는 명백한 경고를 사전에 통고하지 않은 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에게 비밀공격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수행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연합국최고사령부가 편찬한 조사보고서가 동시에 이 증언에 이용되었다. 피고인측은 그당시 수교된 통고문이 최후통첩으로 보아야 하고 이러한 최후통첩의 지연은 바로 사무지연에 다름아니었다고 변명하였다.그러나 외무성과 해군성, 東鄕 전 외상과 鳥田해군상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되는 부분이어서 그 진술이 엇갈리기도 하여 더욱 흥미를 끌었다.
피고인들은 미일전쟁의 개시가 당시 일본을 상대로 부과된 이른바 ABCD포위체제로 인한 국민경제의 파탄을 돌파하기 위한 자위적 전쟁이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외국으로부터의 원료 구입에 의존할 수 없는 일본에 대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년 7월 2일 수출통제에 관한 대통령 포고를 내려 모든 물자의 대일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특히 석유금수조치는 일본의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변호인측은 당시 일본이 처한 곤경을 입증하기 위하여 물자동원계획 생산물확충계획등을 제시하고 이러한 계획을 수립한 당시의 상공차관등을 증인으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경제에 대한 압박이 이미 아시아 태평양 전반에 걸쳐 침략을 노골화하고 있던 일본정책에 대한 견제와 보복이었다는 점에서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었다.
⑦ 소련의 조약위반과 원자폭탄 논쟁
3월 3일의 법정에서는 프레그니 변호인을 중심으로 2개의 주요문제가 논제로 떠올랐다. 이 변호사는 먼저 부전조약을 위반한 대국으로서 영국과 소련을 예로 들고 조약위반이 곧바로 국제적 범죄로 볼 수 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소련의 경우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위반하고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에 개입하였으니 이것 역시 전쟁범죄가 아닌가라는 것이 변호인측의 질문의 요지였다. 그러나 1936년 이후 1940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나치 독일과 함께 반-코민테른 조약에 기초하여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아니라 1940년의 독일, 이탈리아와 일본 사이의 삼국동맹을 체결한 이후 소련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독일에 대한 지원을 거듭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소일중립조약을 파기하였다는 것이 소련의 입장이었다.
그와동시에 프레그니 변호사는 원자폭탄의 사용에 관한 미국의 행위를 거론하였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군사시설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비전투원의 대량살륙을 의도한 것이었기 때문에 헤이그육전조약에서 정한 전통적인 전쟁범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웹 재판장은 연합국이 어떠한 무기를 사용하였는가는 본심리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물었다. 변호인측은 잔혹한 병기로서의 원폭을 사용하여 공격당한 것에 대하여 보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심리되어야 하므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원폭 투하 이후의 일본군의 전쟁범죄는 면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폭을 투하한 나라가 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러한 주장은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두고 두고 동경재판이 승자의 정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원폭투하는 실제 일본인의 가슴 속에 원한을 남긴 것은 분명하였다. 많은 일본인이 원폭투하를 결정한 사람 역시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졌어야 마땅하다고 믿고 있다. 과연 전쟁의 종말을 앞당기고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사전에 방지하였다는 주장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일본인의 항변과 같이 그것이 또하나의 전쟁범죄인지에 관한 논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⑧ 戰場의 잔혹행위와 그 책임자
진주만 공격에 대한 입증을 마친 국제검사단은 12월 중순 이후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전 전장에서 벌인 포로, 민간억류자 및 점령지 주민에 대한 일본군의 죄과를 묻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맨스필드 검찰관에 의해 지적된 이 부분은 동경법정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였던 전쟁법규 및 관습법위반에 대한 A급전범들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이었다.
맨스필드 검찰관은 일본이 1929년 7월 27일의 제네바 적십자조약을 1942년 1월 29일 통첩에 의하여 조인하였음에도 포로들을 이러한 국제조약이 아니라 일본 자신의 武士道에 의해 처리하였다고 공박하였다. 포로들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았고 인도의 기본적 고려를 무시하는 것을 정부의 방침으로 하였기 때문에 A급 전범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에서의 5천명의 중국인학살 및 유럽인의 잔인한 학대, 점령지주민의 무차별 살해, 1만6천명의 연합군포로의 생명의 상실, 10만명 이상의 고통스런 노동으로 인한 죽음, 버마.타이철도 건설 중의 학대, 바탕 및 보르네오에서의 악명높은 죽음의 행진, 방카섬에서의 오스트레일리아 간호부와 시민의 대량학살, 파라윈의 학살, 뉴기나아의 돌 농원의 학살, 나하에서의 2백명의 포로의 학살등 곳곳에서의 잔혹한 살해와 학대는 결코 점령군의 개인이나 일개 부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쟁정책 결정자나 지휘관의 지시 또는 암묵적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5)선고와 집행
① 결심과 판결의 선고
검사와 변호인측의 쌍방 주장과 입증이 대체로 끝난 1948년 2월 11부터 3월 2일까지 검찰측의 최종논고, 3월 2일부터 4월 15일까지는 변호인측의 최종변론이 이어졌다. 4월 16일에는 모든 심리를 종결하였고 판결공판까지 긴 휴정을 선언하였다. 드디어 1948년 11월 4일 판결을 위해 개정되었으나 판결문을 낭독하는 데에도 1주간이나 걸렸다.
판결문은 본재판소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조례에 형식적으로 구속되어 평화에 대한 죄등을 정한 재판소 조례를 심사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전체 55개의 소인(訴因)가운데 10개의 소인을 인정하고 있다. 나머지는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거나 각하하고 있다. 10개의 소인 가운데 8개는 평화에 대한 죄를 적용한 것이고 나머지 두개의 소인이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가 적용되었다. 검찰측의 입증이 거의 인정되어 25인의 피고인 전원이 유죄로 선고되었다. 특히 松井石根, 重光葵 두 피고인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이 모두 침략전쟁의 전반적 공동모의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긴 판결문의 낭독이 끝나고 11월 12일 오후 3시55분부터 비로서 모든 피고인에 대한 형이 선고되었다. 판결의 형량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수의견에 대하여 5종의 소수의견이 있었다. 다수의견에 반대한 것은 인도의 팔 판사, 프랑스의 베르나르 판사, 네들란드의 롤링 판사의 의견이었고, 다수의견을 인정하면서 보충의견을 낸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웹 재판장, 필리핀의 자라닐라 판사 두사람이었다.
소수의견의 내용도 제각각이지만 특징적인 지적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재판소가 극동국제군사재판소조례에 대한 심사권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수의견은 심사권이 없다고 하였으나 베르나르 판사, 팔판사 두사람은 심사권을 가진다는 견해였다.
둘째, 일왕의 전쟁책임에 관한 견해 차이였다. 프랑스의 베르나르 판사는 木戶日記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태평양전쟁 개전의 주요한 책임자는 일왕 히로히토인데 다른 공범자가 그 대신 처벌받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논하였다. 웹 재판장도 일왕의 면책은 모든 연합국의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결정되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일왕이 면책되었다는 점은 다른 피고인의 양형에 고려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째, 아시아인으로부터의 관점이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인도와 필리핀 2개국의 판사가 있었는데 이 두 판사의 관점은 너무도 대척적이었다. 팔 판사는 뒤에서 자세히 보는 바와 같이 모든 피고인이 무죄라고 판결하였고 필리핀의 자라닐라 판사는 다수의견의 양형이 그 중대한 범죄에 비하면 너무 가볍다면서 중형을 요구하였다. 팔 판사는 원폭투하가 연합국이 범한 전쟁범죄라고 한 반면 자라닐라 판사는 그것은 정당행위였다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필리핀과 그러지 않았던 인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체 피고인에 대한 무죄의견을 낸 것은 인도 출신 팔 판사이다. 이 의견은 법정에서 낭독되지 못하였고 연합국사령부에 의해 인쇄도 금지되어 일본의 주권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야 비로서 판결원본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의 소수의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조례의 법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무엇이 법인가, 조례는 적정한가에 관하여 당재판소 자신이 심사할 심사권을 가진다.
2.증거에 관한 규칙은 변호인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하다. 특히 중국관계에서 중공발표에 관한 증거수리의 제한이 지나치고 사건확대의 책임을 판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3.가장 중요시된 공동모의는 직접적 증거는 없고 정황증거에 의존하였다. 일본의 행동은 공동모의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고 증거는 단지 정세의 추이를 보여주는 것 뿐이다. 태평양전쟁도 당초부터 기획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보여진다.
4.통레의 전쟁범죄에 관하여 소인 제54에 관한 증거는 전혀 없고, 공소사실 제55조의 임무무시는 조례의 범죄가 아니고 본법정의 관할밖이다. 제1차대전의 독일황제의 명령에 의한 무차별살인정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원자폭탄 사용의 결정이다.
5.각피고의 공소사실 전부에 관하여 무죄를 강하게 주장한다.
팔 판사의 견해는 대체로 뉴르베르크 재판에 대한 비판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특히 침략전쟁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단지 승자에 의해 패자에게 붙여진 레벨(a label applied by conquerers to the conquered)이라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이 소수의견은 전범의 무죄를 통하여 일본의 무죄를 증명해 준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연합국의 재판이 승자의 정의였을 뿐이며 피고인석에 섰던 전범들은 무고한 정치적 재판의 희생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전후 일본국민은 팔 판사의 판결문을 통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후 몇차레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일본방문기간 동안 그는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영구적인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아시아의 민중들에게 각성을 불러온 명예로운 나라이다. 그 나라를 내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③ 전범의 처형과 집행
위와같이 형을 선고받은 25명의 피고인들은 1주일 후인 19일까지 맥아더에게 재심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전 피고인의 뜻에 따라 탄원조의 내용 보다는 판결중의 사실인정의 오류라든가 법에 관한 주장이었다. 맥아더 연합국최고사령관은 이들의 형량을 경감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11월 23일 대일이사회와 극동위원회를 소집하여 그 대표에게 판결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변경을 원하지 않았고 일부 국가가 일반적인 경감 또는 특정인에 대한 경감의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원판결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는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제8군사령관에게 집행의 지시를 내렸다.
이 사이 피고인측의 변호인들은 11월 29일 미국 대법원에 인신보호영장을 구하는 소원제출 허가신청을 냈고 이에 따라 맥아더 사령관은 그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집행을 연기하였다. 미국 대법원은 12월 6일 소원을 청취하기로 결정하고 12월 16일과 17일 양일간 심리가 열렸으나 곧 국제군사재판소의 결정에 대하여 소원을 허가할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각하하고 말았다.
드디어 1948년 12월 23일 오전 0시 1분 쓰가모 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7명의 피고인들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히로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일왕에 대한 충성을 마지막으로 보이기 위해 만세를 부르면서 집행에 응했다. 연합국의 공식 입회인으로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소련의 4개국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화장되어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지 않도록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았다. 그 일부는 비밀리에 수거되어 인근의 아타미 신사에 봉안되었다. 7년후인 1955년 3월 후생성 배상지원과에서는 그 재를 일곱개 상자에 나누어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나중에 이들에 대한 묘비가 세워졌으며 다시 靖國神社에 모셔져 일본인의 추앙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판결당시 쓰가모 형무소에는 岸信介, 兒玉譽士夫등 17명의 A급전범용의자들이 있어 제2의 동경재판이 예상되고 있었으나 사형 집행 직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2월 24일 17명 전원을 불기소 석방하고 그와같은 종류의 재판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의 성격은 모호한 것이었으나 사실상의 사면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 석방된 키시 노부스케는 1958년 정계에 복귀하여 수상까지 되었으며 코다마 요시오는 미국의 정보기관과 손을 맺고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석방은 필리핀,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1948년 12월 29일 이 재판소는 문을 닫았고 이듬해 2월 24일 극동위원회는 미국의 주문대로 재판의 종결 정책을 승인하고 말았다.
키난은 일본을 떠나기에 앞서 히로히토 부처를 만났는데 싸인이 들은 사진과 그 부인을 위해 핸드백을 선물받았다. 동경의 유명한 화랑 주인은 그에게 일왕의 무죄를 위해 공헌한 그 의 노력의 대가로 황옥을 주었다. 더러운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시게마츠 마모루는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후인 1950년 11월 석방되어 나중에 일본정부의 외상이 되었다. 1958년까지는 모든 남은 피고인들이 석방되었다.
4.동경재판의 한계
(1)뉴른베르크 재판과의 비교
동경재판은 흔히 또다른 뉴른베르크(The Other Nuremberg) 또는 뉴른베르크의 극동아시아판(Far Eastern Counterpart of the Nuremberg Hearing)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에 의한 추축국(樞軸國)의 전쟁범죄 처단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양 재판의 근거가 된 헌장이 거의 유사하다. 특히 동경전범재판은 훨씬 유명한 뉴른베르크 재판의 메아리(echo)에 지나지 않았다. 동경전범들에 대한 기소와 재판은 거의 뉴른베르크 문서의 일반적 패턴을 그대로 따라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판 당시 세계여론의 관심도에 있어서나 연합국의 재판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동경재판은 뉴른베르크의 그것에 비교되지 못하였다. 이미 위에서 본대로 이 재판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던 미국 자체가 뉴른베르크 재판의 수석검찰관으로 연방대법원 판사를, 동경재판에는 겨우 주연방법원 판사를 판사로 파견하는등 경시하는 태도가 역연하였다. 동경재판은 뉴른베르크 재판에 비하여 그야말로 2류재판임이 분명하였다. 당시까지의 세계사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현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뉴른베르크 재판이 먼저 실시되었고 비교적 신속히 끝나면서 이미 세계적 관심이 초점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이후에 벌어진 동경재판에 시선이 그만큼 모아지지 않았다.
뉴른베르크 재판은 주요 연합국이 모두 피해국가였고 당연히 재판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경재판의 경우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한 연합국 보다도 일방적으로 일본의 침략과 점령을 당한 아시아국가들이 더 큰 전쟁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들은 중국,필리핀, 인도를 제외하고는 이 재판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연합국의 피해는 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학대에서 비롯되었다. 나머지는 구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연합국들이 상실한 자산과 민간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한국,필리핀,베트남,싱가포르,말레이지아등이 입은 피해는 그 국민과 국토가 함께 피폐해질 정도의 막대한 것이어서 비교조차 힘든 일이었다. 이들 국민들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공헌한 점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에게 가해진 비인도적 행위는 결코 유태인에게 가해진 것에 못한다고 볼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일본의 전범들에 대한 수사, 기소, 재판의 전과정에서 소외 당함으로써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였다. 만약 이들의 참여가 보장되고 동경재판이 이들에 대한 비인도적 범죄의 부분을 좀 더 다루었다면 이 재판은 그 정당성에 있어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재판의 대상은 시기적으로도 만주침략 이후의 범죄에만 국한되어 그 이전의 한국등에서의 이권쟁탈, 러일, 중일전쟁 또는 식민지침략,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비인도적 행위등은 모두 제외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피해국들의 소외는 전범의 재판을 연합국의 수중에만 둠으로써 필연적으로 온당한 처벌의 실패를 가져왔다.
뉴른베르크 재판의 헌장 제10조는 일정한 그룹의 범죄적 성격을 못박아 두었다. 이리하여 나치당, SS(Schutzstaffel), 게슈타포등이 모두 범죄집단으로 낙인찍혀 뉴른베르크 재판에 이어 각국이 계속하여 이들 집단의 구성원을 재판하는 법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동경재판의 경우에는 이들 집단에 대한 범죄의 낙인을 찍지 않음으로써 단지 기소된 개인의 형사책임을 묻는 데에 그쳤다. 더구나 독일과 달리 전범을 처벌하는 국내법을 제정하지도 않았을 뿐만아니라 실제 단 한명의 전범도 일본 정부의 손으로 처벌한 적이 없어 결국 동경재판은 한때의 사건으로 지나가고 말았다.
또한 동경재판의 피고인 속에는 재벌이 들어 있지 않았다. 방대한 강제노동을 사용하고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인권유린을 한 것은 독일의 재벌과 다르지 않았다. 뉴른베르크 재판에는 나치정권을 돕고 도움을 받은 기업가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동경재판에는 어느 기업가도 기소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 후 일본의 부흥과정에서 이들이 재등장하는 직접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기의 두 재판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나 50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나 독일에 대한 관심과 감시의 눈이 일본에 대한 세계의 관심과 압력보다는 더욱 강한 것이 현실이다. 독일의 신나치에 대한 관심과 경고는 유럽을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로부터 나오고 있고 독일정부는 이에 대하여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아시아의 피해국 몇나라만이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나치시대의 베를린 일본대사관 건물을 새로이 단장하여 1987년 학술센타로 개장하는 것을 기념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일본은 일왕숭배의 신토이즘과 독일민족 신화의 공통성을 점검하는 것을 주제로 제의하였으나 독일측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과거 군국주의 파시즘에 대하여 독일이 얼마나 신중한지, 일본이 얼마나 개의치 않는 대범한 자세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일본을 감시하는 눈은 멀어 있거나 약시임이 분명하다.
(2)정치적 재판과 법률적 재판
동경전범재판소는 뉴른베르크재판소와 마찬가지로 군사법정 (Military Tribunal)이었다. 이 재판소의 최종 근거는 연합군최고사령관의 명령에 있었고 국제검사국과 재판소 판사들의 구성권 역시 그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연합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국가들의 대표로 구성된 민간재판소를 세울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동경재판의 법적 근거와 구성의 특색은 결국 연합국이라는 주관성과 군사적 색채를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주게 된 것이었다.
동경재판에 앞섰던 뉴른베르크재판의 경우에도 그것이 일종의 소급입법에 의한 재판으로서 죄형법정주의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이미 보았듯이 뉴른베르크 재판과 동경재판의 피고인들에게 적용되었던 죄명은 세가지 종류였다. 그 가운데 이른바 통례의 전쟁범죄는 이미 국제법의 규범으로 확립되어 있던 것이어서 비난의 여지가 없었다. 비인도적 범죄의 경우에도 새로운 죄명이기는 하였으나 이미 거의 모든 문명국의 국내법에서 가벌적인 행위를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일본이 그토록 집요하게 관련 자료들을 소각하여 은폐하려 했던 것은 역으로 그것이 범죄라는 규범적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규범은 종래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것을 강제하는 재판이 없었던 것 뿐이었다. 문제는 평화에 대한 죄였다. 동경재판의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주된 죄명은 바로 이 평화에 대한 죄였다. 다른 죄들은 전쟁 수행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개별적 범죄였기 때문에 하급 장병들도 그 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평화에 대한 죄는 침략전쟁의 기획,실행자들을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군부를 포함한 가해 국가의 지도자들이 피고인이 되었다. 평화에 대한 죄가 과연 동경재판 당시 국제법 규범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1924년 10월 2일의 제네바의정서, 1928년 8월 27일의 파리조약에 의하여 국가정책의 수단으로 전쟁에 호소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다.
즉 그로티우스 이래 정당한 전쟁개념이 발전하여 한 국가가 자신의 존립과 정당한 방위를 위해 전쟁을 시작할 권리를 인정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전쟁을 침략정책에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당시의 규범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바로 뉴른베르크 재판과 동경재판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정책으로서의 침략전쟁 금지가 당시의 국제법적 규범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책을 추진한 개인에게 형사책임을 지운다는 것이 당시의 국제법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았다. 즉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배상금을 물었던 것일 뿐 불법한 전쟁의 개시를 결정한 개인이 형사책임을 지는 예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일본은 이 재판을 승자의 정의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또는 승전국의 의식(儀式)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동경재판이 정치적 고려에 의한 승전국인 연합국의 일방적인 복수재판이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동경재판의 인도출신 판사 팔은 소수의견에서 이러한 견해를 반영하여 복수의 욕망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적 절차를 밟은 것과 같은 외양을 띄고 있더라도 국제정의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儀式化된 復讐는 순간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후회가 따르게 마련이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견해는 형벌이 일반적으로 응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뉴른베르크 재판이든 동경재판이든 간에 한 국가의 전쟁의 시작과 수행과 관련하여 개인을 전쟁범죄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형사 법정에 세운 것은 최초의 일이었던 점은 사실이다. 승전국은 패전국의 전쟁 지도자들을 아무런 재판없이 처단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재판의 절차와 정의와 인류의 양심의 이름을 빌어 그 처단에 법률적 형식을 갖추고자 한 것이다. 더구나 전쟁 중의 살인, 강도, 강간등의 행위는 그 가해자가 소속한 국가에서도 엄정한 군기의 확립과 점령된 주민들의 반감을 경감을 위해서도 스스로 처벌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범죄(individual criminality)와는 달리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국가의 지도자들이 명령하고 조장한 체계적 범죄(systematic criminality)는 더욱 중대하게 취급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금진된 무기의 사용, 불법화된 방법에 의한 전투, 부당한 목표물에 대한 공격, 작전 또는 점령지역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폭력, 전쟁포로의 부당한 대우, 점령법의 위반등이 포함될 수 있다. 동경재판은 바로 이러한 범죄들을 종합적으로 지시하고 수행한 체계적 전쟁범죄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국제법적 발전이었고 인류의 평화를 보장하는 하나의 초석이었다. 침략적인 전쟁을 시작한 것이 죄가 되어 개인이 처벌받게 된 것은 전쟁의 방지에 큰 선례를 남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동경재판의 직전 선례가 된 뉴른베르크 재판의 헌장과 판결이 남긴 국제법의 원칙은 그후 1946년 12월 11의 유엔총회결의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이 총회 결의는 전범재판을 위한 국제법의 근거와 그 합법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그 재판의 구성과 절차, 판결의 결과에 있어 다른 형사재판과 달리 부당하게 피고인의 이익을 해하거나 절차적 권리를 무시당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당시 가장 사법적 정의가 앞서 있었던 영미법계 국가의 재판절차가 그대로 온전히 실시되었고 일본인 전범들은 당시 일본의 법정에서 보다 더욱 민주적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재판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더구나 그것은 국제적으로 공개되고 감시된 분위기 속에서 조사와 재판을 받았다. 다만 동경재판 보다는 뉴른베르크 재판의 판사들이 자신들의 정부와 검사로부터 보다 독립성을 지켰다는 평가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재판이 정치적이라고 비난 받을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그동안 비판의 핵심은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간인의 무차별 살상이 전제된 원폭의 투하는 그 자체가 전쟁범죄 또는 국제범죄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연합국의 범죄는 그대로 두고 일본의 범죄만 추궁당했던 것은 동경재판이 가진 정치적 성격의 상징이며 불공정한 재판의 사례라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점령정책의 편의와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실제 법정에 섰던 A급전범 보다 더 크게 책임을 져야 할 용의자들을 불문에 붙이거나 책임의 추궁을 포기하였다.
일왕과 741부대 관련자들에 대한 용서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후자의 사례를 통하여 미국의 도덕성 조차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동경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보다 더 심각한 전범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의 면책은 동경재판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침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정쩡한 기소와 처벌은 오히려 일본의 반박의 여지와 기회를 주었다.
그후 미국은 나치 전범들을 보호하거나 은신을 묵인하는등으로 당초의 전범처벌의 의지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소련등 동구권 국가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은 냉전질서의 한 축으로서 수많은 제3세계의 내전과 국지전에 개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무수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강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응징받을 수 없었다. 베트남, 구아테말라, 도미니카, 그레나다, 니카라구아등 남미, 중동 여러 곳에서 미국은 결코 정당한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전쟁을 일으키거나 일으키도록 하였다.
베트남전쟁에서는 1968년 3월 16일 비무장한 4백명의 여성, 어린이, 노인들을 단 네시간만에 학살해 버린 미라이 사건과 같은 학살사건도 벌어졌다. 그 사건에서 단 네명만이 재판에 회부되어 그 가운데 켈리 중위만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그도 몇달만에 풀려났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국의 정치지도자들과 미국 국민들조차 어쩌다 일어난 사건이라거나 전쟁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치부하였다. 이것은 결국 동경재판이 하나의 역사적, 정치적 쇼였다는 일본의 부당한 비판이 정당함을 미국 스스로 증명해 주고 만 꼴이었다. 그것은 동경재판의 주역을 담당했던 미국이 동경재판의 정신과 의미를 배반하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5.결 론
전전의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서구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용하는데 열성을 보였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로부터 법률체제와 의회제도, 지방자치를 수입하여 접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외양일 뿐 경찰국가로서의 일본은 그대로 온존하였다. 사상은 통제되고 일왕이 신격화되었으며 군국주의가 숭상되었다. 이러한 전근대성이 일본제국주의를 무모한 팽창과 침략, 비인도적 잔혹과 야만으로 몰고 갔으며 그 당연한 결과와 대가로서 패배와 전범처벌이 있었다. 동경재판의 주된 대상이 된 이른바 15년전쟁은 명치유신 이래 추구된 팽창정책과 아시아 침략의 길의 불가피한 도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경재판이 다룬 것은 근대 일본이 저지른 엄청난 범죄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다. 당연히 재판에 올라야 했던 것은 근대 일본의 역사 자체였던 것이다.
더구나 동경재판은 15년 전쟁의 기간에서나마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책임을 묻고 그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잔혹한 범죄를 처단하기에도 너무나 큰 한계가 있었다.유엔전범위원회의 초대 의장이었던 라이트(Wright)경은 대다수의 전범들이 처벌을 면할 것이다. 단지 10%만이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선례를 만드는 것 뿐이다 라고 실토하였다. 특히 일본인 전범들이 처벌받은 것은 단지 1%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아시아의 어느 곳에서도 시몬 비센탈같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일본인 전범들은 정의를 비껴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일본은 동경재판의 정당성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본인 학자들과 정치인, 일반국민들은 동경재판이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들의 정치적 보복 수단이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 이것은 동경재판이 실체적으로나 절차적으로 위법한 재판이었으며 나아가 그 재판의 대상이 된 침략행위와 비인도적 행위등이 연합국에 의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던 것이라는 신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경재판에 대한 비판은 나아가 일본이 벌인 전쟁이 정당한 것이었다는 지경으로 확대 비약되고 있다. 그 진정함이나 발언의 동기조차 확인할 수 없는 외국인의 발언들을 인용하면서 이들은 당시의 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되고 있는 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구미야말로 증오해야할 아시아 침략의 장본인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당신들은 자식들에게 일본은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은 침략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인도의 팔 판사, 1952년 11월 히로시마변호사회관 강연)
대동아전쟁은 대식민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백인과 유색인종의 평등을 가져왔으며 세계만방의 기초를 쌓고 있다(H.웨일즈 박사, 영국의 역사학자, 항복 직후의 언명)
일본이 역사에 남긴 업적의 의의는 서양인 이외의 인류의 면전에 아시아와 미국을 지배해 온 서양인이 과거 200년간 생각해 온 불패의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었다(아놀드 토인비 박사, 1956년 10월 28일자 옵저버지 기고)
진주만의 진정한 책임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다(1945년 8월 31일자 뉴욕 데일리 뉴스지)
완전히 역사의 진실을 뒤엎는 말을 편집하여 이것들이 전세계 지식인의 의견인양 선전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주요 정치지도자들이 일본의 과거 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망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바로 일본인의 보편화된 이러한 신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해방전쟁을 통하여 일본이 아시아 각국과 그 민족들에게 준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학살과 참혹한 고통뿐이었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미 여러차레 아시아의 전쟁희생자들에게 사죄의 의사표시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체면치레일 뿐이었다. 한편으로 군국주의에의 노스텔지어를 부추기고 일왕 숭배와 우경화의 징표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 한편으로는 영화 연합함대 대일본제구등에 의한 군국일본에의 노스탈지어의 환기, 현직 대신이 긴시훈장의 부활을 공언하는등의 상황에 놓여 있다. - - - 이 시점과 행동--그야말로 행동이란 이름에 합당하는 행위야말로 참다운 반성이며, 참다운 사죄인 것이다. 반성없는 민족으로서의 슬픈 특유성 가운데서 이와 같은 행동이 보기 드문 것이 아닌 것으로 되는 날에는, 우리들 일본인도 지구상에서 타민족과 손색없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을 것이다. - 반성없는 민족이 변하는 날이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는 이와같은 싹이 크게 자라는가, 짓밟히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인 스스로의 눈에도 오늘 일본의 무감각이 이같이 꼬집히고 있다. 불행히도 반성의 싹은 사라지고 전쟁 미화의 싹만이 점점 자라는 일본사회를 보면서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동경재판의 명암은 더욱 깊숙이 역사속에서 드리워지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언제나 얘기가 되는 것이지만, 전후 독일과 일본의 역사인식이 갖는 차이점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분노하고 있죠. 흔한 얘기로 독일인은 자신들의 죄과를 반성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저는 독일인이 뭐 착하고 진실해서, 그 반대로 일본인들이 사악한 악당이라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재판의 탓도 있겠고, 전후 급부상한 공산주의 세력의 탓도 있겠습니다만, 일본인들은 독일인들에 비해 '과거 역사의 청산'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습니다. 독일인들은 나치와의 확고부동한 결별선언으로 '조국의 통일'이라는 큰 선물을 얻었고
전후 유럽을 이끄는 지도국의 위치를 다지는데도 그 도덕성의 회복에서 주위 국가들에게큰 점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만, 일본에게는 이런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죠. 중국이야 공산국가니 냉전시대에는 그냥 생까면 되는 것이고 유일한 골칫거리는 우리나라인데, 가끔 과거사 반성하라고 칭얼대면
형식적인 립서비스만 해주면 충분히 달랠 수 있다고 안이하게 대응해왔죠. 언젠가 어느 일본학자가 자국의 우경화에 대해 비판한 글을 읽었었는데, 마지막에 이런 구절로 끝을 맺더군요. 한 국가의 과거사 청산은 그 나라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피해 당사자인 주변국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필요하다.
첫댓글 언제나 얘기가 되는 것이지만, 전후 독일과 일본의 역사인식이 갖는 차이점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분노하고 있죠. 흔한 얘기로 독일인은 자신들의 죄과를 반성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저는 독일인이 뭐 착하고 진실해서, 그 반대로 일본인들이 사악한 악당이라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재판의 탓도 있겠고, 전후 급부상한 공산주의 세력의 탓도 있겠습니다만, 일본인들은 독일인들에 비해 '과거 역사의 청산'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습니다. 독일인들은 나치와의 확고부동한 결별선언으로 '조국의 통일'이라는 큰 선물을 얻었고
전후 유럽을 이끄는 지도국의 위치를 다지는데도 그 도덕성의 회복에서 주위 국가들에게큰 점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만, 일본에게는 이런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죠. 중국이야 공산국가니 냉전시대에는 그냥 생까면 되는 것이고 유일한 골칫거리는 우리나라인데, 가끔 과거사 반성하라고 칭얼대면
형식적인 립서비스만 해주면 충분히 달랠 수 있다고 안이하게 대응해왔죠. 언젠가 어느 일본학자가 자국의 우경화에 대해 비판한 글을 읽었었는데, 마지막에 이런 구절로 끝을 맺더군요. 한 국가의 과거사 청산은 그 나라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피해 당사자인 주변국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필요하다.
피해국들마저 지금처럼 과거사를 트집잡아 일본정부한테 정치자금 뜯을 생각만 하는 한에는 자생적인 일본의 반성이나 전쟁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뭐,...이런 얘기였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