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벨의 은밀한 출현 일찍이 주류 브랜드에 적용되었던 블랙 라벨 전략은 위스키를 즐기는 사람에겐 이미 익숙한 용어다. 조니워커에는 라벨 컬러에 따라 위스키의 특징과 숙성 연수가 다른 레드, 블랙, 블루 등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러한 블랙 라벨 붐이 패션계에 거세게 불고 있다. 따로 광고를 하거나 세일을 준비하고, 쿠폰 북을 만들어 발송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블랙 라벨에 열광한다. 원래는 단순한 개념이었으나 일부 해외 의류 회사들이 브랜드 이름에 블랙 라벨을 붙여 고급 소재 사용과 가격 높이기를 시작하면서 고급 브랜드를 의미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블랙 라벨의 특징은 생산되는 수량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 최고급 의류의 경우 10벌을 넘지 않고, 많아도 50벌을 초과하지 않는다. 값이 저렴하고 젊은 고객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화이트 라벨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의 고급화, 고가 전략, 희소성 등 삼박자가 잘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블랙 라벨의 진면모가 나타나는데, 그런 희소성과 도도함이 소비자의 애간장을 태우게 된다. 이런 시류를 타고 블랙 라벨에 대한 브랜드의 열망은 상상 이상인데, 쌤소나이트 블랙 라벨 론칭에 얽힌 사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쌤소나이트는 쌤소나이트 블랙 라벨의 탄생을 위해 구찌, 프라다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디자이너 닐 바렛과 돌체앤가바나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지지 베졸라까지 영입하는 등 사활을 걸 정도.
명품 브랜드의 블랙 라벨 열풍 블랙 라벨이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브랜드로는 랄프 로렌, 버버리, 아르마니, 프라다 등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랄프 로렌의 블랙 라벨은 고현정이 드라마 <봄날> 제작 발표회를 시작으로 드라마 속 의상으로 입고 나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2006년 랄프 로렌이 새롭게 선보인 블랙 라벨 남성복은 유행에 민감한 20~30대 젊은 층을 겨냥한 제품으로 홍보대사에 가수 비를 선정했다. 아르마니의 블랙 라벨은 아르마니 스타일을 가장 잘 드러낸 라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고급 소재를 사용하고 남성복보다 손이 많이 가는 여성복 공법을 이용함은 물론 일부 제품은 100%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버버리 블랙 라벨은 일본 산요상사가 영국 버버리 본사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일본에서 직접 생산 및 판매하는 일본 내수 브랜드다. 런던 버버리의 품격과 젊은 감각을 조화시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여러 번 선보인 프라다의 블랙 라벨은 프라다 스포츠 라인인 레드 라벨보다 20~30% 비싼 데다 극히 적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터라 구입하기 위해 열띤 경쟁이 벌어질 정도라 한다. 또 브랜드마다 블랙 외에 독특한 컬러 라벨로 여성복·남성복·스포츠 라인을 구분하면서 고급화하는 전략을 선보이고 있다. 랄프 로렌은 최고급 라인으로 퍼플 라벨, 컬렉션을, 여성 스포츠 라인을 없애고 블루 라벨을 선보이고 있다. 휴고 보스는 포멀한 정장 라인인 블랙 라벨뿐 아니라 밝고 경쾌한 남성 캐주얼 라인인 오렌지 라벨, 스포츠 라인인 그린 라벨 등을 선보인다. 프라다는 스포츠 라인의 라벨 컬러를 레드로 선택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오트 쿠튀르 라인으로 골드 라벨을, 상업적인 캐주얼 라인으로 레드 라벨을 선보인다.
내셔널 브랜드의 럭셔리 라벨 붐! 대한민국 패션 브랜드 또한 블랙 라벨 열풍을 재해석하며 실험 중이다. 쌈지의 경우 디자이너 하상백과 함께 데님 팬츠 종류를 H+하상백 by SSAM이라는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였고, 앤디 워홀 작품 프린트를 모티브로 한 고가 라인 앤디 워홀 by 쌈지를 선보인다. (주)데코는 데코갤러리를 선보여 고급화 전략에 앞장서고 있다. 그 외에 마에스트로 임페리얼, 닥스 시그내츄어, 미샤 콜렉션, 타임 포스트모던 등으로 브랜드의 라벨 고급화 전략이 진행중이다. 소비자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무엇보다 기업에서는 새로운 노블레스 브랜드를 출시하는 것보다 기존 브랜드에 노블레스 라벨을 더하면 시간과 비용의 절감 효과가 크다. 더욱이 노블레스 라벨은 생산량에 비해 판매율이 높고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마진율 역시 높다.
고급 라벨 전략에 딴죽 걸기 블랙 라벨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새삼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블랙 라벨의 미덕을 누리는 VVIP 안에 들지 못하는, 그저 밥 세끼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처지 때문일까? 사실 블랙 라벨의 성격은 이중적이다. 디자이너에게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쳐낼 수 있는 최고의 상품 시장이 되고, 소비자에게는 다양한 프리미엄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반면 귀족주의 경향과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죄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블랙 라벨을 향한 기업의 맹렬한 러브 콜과 소비자의 충실한 워너비는 꾸준하다. 이것이 퍼플, 블랙, 레드, 골드, 오렌지와 같은 다양한 라벨 컬러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무엇을 소비할까’는 언제나 선택의 자유이며 가진 자는 그들이 가진 여유로 블랙 라벨을 향유하며 살 뿐이다. 어차피 라벨이란 폴리에스테르 천을 열선으로 잘라 만든 것. 별 거 아닌 합성섬유 한 조각에 굳이 목을 맬 필요가 없다. 단지 라벨이,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라벨에 적혀 있는 브랜드나 컬러가 당신에게 저절로 패션의 아름다움과 빛나는 개성을 선사해줄 것이라 속단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차피 진정한 가치는 가시적이고 암묵적인 파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다만 끝으로 프라다 원피스에 버버리 가방 따위는 필요 없는, 우주복 하나면 장땡인 그 먼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블랙 라벨은 우주복 네크라인에 붙어 당당히 미소 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플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