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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의 여공에서 중국 최고 여자갑부로,
란쓰커지 저우췬페이(周群飞) CEO
3월 18일, 애플의 주요 부품업체로 유명한 란쓰커지(蓝思科技)가 선전증권거래소의 차스닥(창업반)에 상장하던 날 저우췬페이(周群飞) CEO가 ‘종을 치러’ 나타났다. 공장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렸던 10대 소녀가 400억 위안의 여성 최고갑부가 되는 날, 저우는 30년 인고의 세월을 회고하며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 틀림없다.
‘유리여왕’으로 불리는 저우 CEO는 이 회사 주식의 88%를 소유하고 있다. 3월 하순 현재 보유주식 시가는 420억 위안.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선정한 부자 순위에서 현 1위인 푸화(富华)국제그룹 천리화(陈丽华)일가(275억 위안)를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다.
후난성 류양(浏阳)에 들어선 란쓰커지 공장에선 주로 액정강화 유리를 생산한다. 휴대폰, 태블릿 PC, 노트북 컴퓨터, 카메라용이다. 주 고객은 애플 삼성 화웨이 등. 지난해 매출은 145억 위안, 순익은 11.8억 위안이었다. 매출의 절반을 애플에 의지할 정도로 수년 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장의 샤오싼(小三·유부남의 어린 애인)으로 시작해 둘째 부인, 첫째 부인 자리까지 꿰찼다. 남편을 꾀어 자기 회사를 차린 뒤 고객을 대부분 빼 돌리고 나서 차버렸다. 이제 곧 상장하면, 중국 최고의 여성부호가 된다.’
란쓰커지가 유명해진 것은 상장과 함께 벼락부자가 될 저우CEO를 둘러싼 이 같은 뒷소문 때문이다. 일부 투자가들은 아예 대놓고 ‘샤오싼 개념주’라고 부른다. 1993년 창업 후 저우는 거의 언론에 나서지 않았기에 풍문은 사실처럼 퍼져왔다. 샤오싼이냐, 여장부냐, 어느 쪽이 사실일까.
“겸손해서가 아니라, 내세울 것이 없었다”
저우의 고향 집은 후난성 샹샹(湘乡)의 산 속에 있다. 샹샹 시에서 산 기슭까지 2시간 차를 타고 와 또 산 길을 4Km 걸어야 닿는 곳이다. 저우의 2층 옛 집은 아버지 오빠 언니 등 가족들이 모두 선전으로 오래 전 이사를 갔기에 마당엔 잡초가 무성했다. 아직도 옆집에 살고 있는 작은 어머니는 기자에게 “저우 어머니는 저우가 5살 때 세상을 떴고, 아버지 역시 1960년대 화약 폭발 사고로 두 눈과 손가락 2개를 잃었다”고 말했다. 저우의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아 대나무 바구니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고를 당한 뒤에도 이 기술로 아이 셋을 먹이고 교육을 시켰다.
상장 기념행사가 끝난 뒤, 저우 CEO는 간수(甘肃)성 위성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삼자경(三字经)2을
외우고, ‘증광현문(增广贤文)’3을 베껴 쓰게 했다”며 “내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연구개발을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다. 작은 어머니는 “저우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대나무 바구니에 땔감, 대나무, 돼지 꼴 등을 베어와 돼지와 닭에게 먹이를 줬다”며 열심히 집 일을 도운 착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부친의 거동이 불편했던 탓에 저우의 가족은 대나무
바구니와 직접 재배한 벼로 근근이 배를 채웠다.
저우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고, 또 선전 아르바이트를 함께 시작한 친구는 “학비를 내지 못해 저우의 오빠와 언니는 소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생계에 뛰어들었고, 저우만이 중학교 2학년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웃사람들은 저우의 부친이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고도 말했다. 부친은 2001년 7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선전에서 세상을 떠나 고향에 묻혔다. 저우는 최근 후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이들이 나를 겸손하다고 말하지만, 단지 난 내세울 만한 것이 없
을 뿐”이라고 말했다.
조용하지만, 욕심이 많았던 아이
중학교 2학년 담임교사는 저우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기억했다. 자격지심이 있었으며 다른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우 친구는 “열등감이 심하거나 사람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집 형편이 어려워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기억에는 저우는 고통과 어려움을 잘 견뎌내면서도, 항상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어했던 친구였다.
15살 때 타지로 나가 돈벌이를 결심한 것은 외삼촌이 광둥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삼촌의 소개로 4개월간 현장 감독을 도왔던 저우는 이어 선전의 아오야(澳亚)광학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오야는 당시 손목시계용 유리를 만들었는데, 저우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녔다. 당시 남쪽 지방에서는 공장 아르바이트가 붐을 이뤘던 시기로서, 때마침 ‘외지 여자’란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저우는 본인도 모르게, 당시 드라마 주인공의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었던 셈이다.
공장 아르바이트는 2년 계속됐다. 저우의 작은 어머니는 “명절 때 아버지를 만나러 온 저우가 일이 힘들다며 발에 잔뜩 잡힌 물집을 보여줬다”고 털어놓았다. 아오야광학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고향 친구는 “저우는 정말 열심히 돈을 벌었다”며 “그 돈으로 옷 가게도 차렸다”고 회고했다. 당초 저우가 선전으로 갔던 것이, 의류디자인을 배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1993년 회사가 많은 이윤을 남기는 데도, 봉급인상을 거부하자 고향친구를 비롯한 100명 직원이 퇴사했다. 저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오야광학 옆에 작은 작업실을 차려 드디어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란쓰커지가 상장일을 3월 8일로 잡은 것은 바로 22년전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사장과 결혼했지만 ‘샤오싼(小三)’은 아니었다”
후난일보에 따르면, 1990년 아오야광학은 공장을 증축하다 중간에 투자를 취소하기로 했다. 저우는 사장을 찾아가 자신에게 경영을 맡겨달라고 제안했다. 성공하더라도 봉급은 정해주는 만큼 받고, 실패하면 평생 연봉 없이 일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사장은 포기할 바엔 저우에게 일을 맡기기로 했다. 새로 완공된 공장은 주로 손목시계 유리에 글씨나 그림을 인쇄하는 공정을 맡았는데, 저우는 따로 배운 실크인쇄 기술을 접목시켜 대히트를 쳤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 일하던 사장의 일가 친척들에겐 저우가 눈엣가시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산라인에선 이익이 그만큼 나지 않았던 것이다. 텃세에 밀리기 시작한 저우는 결국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아오야광학의 사장이 나중에 저우의 첫 남편이 되는 양다청(杨达成)이다.
저우의 작은 어머니 말에 따르면, 독립한 지 1년 뒤인 1994년 23살이었던 저우는 16살 연상인 양다청과 후난의 고향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양다청이 이혼경력이 있었기에 작은 어머니와 아버지 등 많은 친척이 결혼을 반대했으나, 저우가 가족들의 형편이 좋아질 것이라고 설득해 마지못해 승락했다. 저우의 학교시절 교사는 “저우의 근면 성실한 모습이 양다청의 눈에 들어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결혼을 두고, 인터넷에선 소문이 무성하다. 저우가 일종의 미인계를 써서 결혼하고 결국 회사 기밀을 빼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확인한 결과, 아오야광학의 도산은 경영 실패 원인이 컸다. 저우와 함께 이곳에서 일했던 고향친구도 “실적이 점차 악화하면서 하나둘 직원들이 빠져나갔다”며 “이직자 중 몇몇은 저우의 공장에 취직했다”고 전한다. 이 친구는 세간의 샤오싼 소문은 황당무계하다며 “양사장이 저우와 만날 때는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우췬페이와 양다청이 언제 이혼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두 사람은 딸 하나를 뒀는데, 저우는 현재 영국 유학 중인 딸의 학비를 대고 있다. 저우의 현 남편은 2008년 결혼한 정쥔롱(郑俊龙)이다. 선전에서 열린 두 번째 결혼식은 저우가 고향 친지들을 비행기로 초청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한 살 연하인 정쥔롱은 후난 닝위안(宁远) 출신으로, 1994년부터 저우와 사업을 시작했다.
남편 정씨는 란씨커지의 주식 1%를 보유하고 있으며, 저우에 이어 회사경영의 2인자이다. 저우의 언니인 저우이후이(周艺辉)와 오빠 저우신린(周新林), 올케 조카 등이 주식 일부를 가지고 있지만 회사 경영에선 손을 뗐다.
우연히 맺어진 애플과의 인연
다시 22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저우의 첫 사업은 선전시 바오안구의 방 3개 딸린 개인주택에서 시작됐다. 가족 일가 8명이 긁어 모은 2만 위안이 자본금이었다. 생산품목은 저우가 강점을 가진 실크 스크린인쇄였다.
방 세 칸 중 큰 곳에선 여자들이, 작은 곳엔 남자들이 함께 잤다. 거실은 인쇄, 완제품 검사, 포장을 하는 ‘공장’이었다. 먹고, 일하고, 자는 24시간이 모두 이 곳에서 이뤄졌다. 저우의 오빠는 도구를 만드는 것을 도왔고, 형부는 코팅을 맡았고, 언니는 포장과 완제품 검사를 맡았다. 사촌 동생들은 나눠 인쇄를 하고 품질 검사를 했다. 매일 새벽 두 세시까지 정신 없이 일했다. 가족친지만 참여한 것은 다른 직원에겐 월급을 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4년 정쥔롱이 처음으로 ‘외부에서’
들어와 구매 수주 배송을 맡았다.
저우의 ‘공방’은 힘들게 기반을 잡아나갔다. 1997년 금융위기 때, 대금을 못 갚는 고객들은 설비들로 갚게 했다. 덕택에 저우 공방은 손목시계용 유리의 완전한 생산라인을 갖출 수 있었다. 첫 결혼도 이 때 했다. 저우의 고향친구는 “양사장이 저우에게 사업상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저우 공방은 2001년 한 회식 자리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후난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TCL의 휴대폰 패널을 주문 받은 레이띠(雷地)과기 사장이 저우 등 친구 몇을 저녁자리에 초청해 분업을 제안한 것이다. 저우는 핸드폰 패널 표면가공을 맡게 됐는데 시계유리 공예기술을 핸드폰 패널에 접목한 것이다. 저우의 유리 스크린은 당시 유행했던 유기유리 스크린을 대신한 것이었다. TCL 휴대폰이 히트를 치면서, 중싱(中興), 캉자(Konka) 등도 유리 스크린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글로벌 브랜드
중에서도 유리 스크린 도입이 대세를 타기 시작했다.
2003년 저우는 선전에 란쓰커지를 세워 본격적으로 휴대폰 스크린 사업에 나섰다. 란쓰는 영어 ‘lens’와 소리가 같아 외국 바이어가 인터넷에서 ‘lens’를 찾으면 바로 란쓰커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애플과의 관계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애플의 주문을 받은 경쟁사가 애플규격과 수량을 못 맞추자 란쓰커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애플은 이후 란쓰커지와 장기계약을 맺었고, 주문량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고향
란쓰커지는 2006년 류양경제기술개발구에 공장을 세운 데 이어 법인 본부도 이곳에 뒀다. 개발구 투자유치 담당 국장은 “11년 전 란쓰커지의 한 경영자가 이곳 투자현황을 조사한다고 해서 만났는데, 청바지에 큰 배낭가방을 매고 와 처음엔 사장인 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저우는 당초 고향 샹샹에 생산거점을 세울 것을 검토했으나, 투자여건이나 물류입지가 류양보다 열악해 포기했던 것으로알려진다. 류양개발구는 후난성 성회도시인 창샤에서 고작 35km가 떨어져 있다.
저우의 투자계획에는 반대가 많았다. 내지(內地)였기 때문이다. 회장이 직접 입지 자료와 투자 인센티브 등을 챙긴 끝에 부품업체와 고객들을 가까스로 설득할 수 있었다. 현재 란쓰커지의 6개 공장 중 류양 공장이 가장 규모가 크다. 이 공장은 지난해에만 류양시에 15억 위안의 세금과 5만 명의 현지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곳 개발구 내에서도 최대 기업이다. 고향인 샹샹시 정부로선 피를 토할 만큼 억울한 일이다.
“멀리 천국을 보고, 가깝게는 은행을 보며 기계실에 들어선다”
그렇지만, 란쓰커지가 류양에 행복만을 준 것은 아니다. 류양 공장의 설비는 쉬는 법이 거의 없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2교대로 움직인다. 바쁠 때는 2주 근무 후 1일 쉬는 강행군이다. 초과근무 수당은 기본수당의 1.5배를 받는다. 급여는 초과근무를 적절히 할 경우 비숙련자라도 월5,000~6,000위안을 받을 수 있다. 내지 류양 주민들에겐 적지 않은 유혹이다. 류양 공장 입구에선 매일 면접 희망자들이 대기하고 있지만, 이직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저우의 공장에는 지인들이 적지 않지만, 특별대우는 없다. 저우 숙모의 며느리는 3년동안 말단 일만하고 있다. 숙모의 아들 역시 이 공장에서 일하다, 힘들어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 “직원들이 당신을 따르게 하려면 세뇌가 아니라, 진정으로 아끼고 가족처럼 여기며, 직원이 기업을 집으로 여기게끔 해야 합니다.”
저우 회장은 후난일보 인터뷰에서 창업한 이후 직원 월급을 미룬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월급날을 맞추기 위해 집도 2번이나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류양의 근로자들은 “돈을 벌려면, 기계처럼 초과근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멀게는 천국을 보고, 가까이 은행을 보며, 기계실에 들어간다”는 자조적인 표현은 그래서 등장했다. 란쓰커지의 숙소 창문은 철망이 덧대있다. 직원들이 한 순간 뛰어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LG瞭望中國)
첫댓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중국의 사업환경과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군요. 대단한 여장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결과가 과정을 미화시킬수는 없다하더라도, 성공한 대단한 기업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