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 출가자, 마하파자파티-꽃잎은 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정운 스님이 이번 주(2021-1-11)에 유트브 여성출가자를 녹화하는데,
준비한 원고입니다.
유트브 채널 : 경전숲길
http://cafe.daum.net/saribull/IbVe/99
부처님과 여성 수행자 :
(1) 마하빠자빠띠 비구니 / 최초 여성출가자,
빨리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고타마 종족이라는 뜻)의 번역 대애도大愛道는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의 의역이고, 구담미瞿曇彌는 고따미(Gotamī)의 음역이다.
‘마하빠자빠띠’는 ‘위대한 자손의 어머니’를 뜻하는 통칭이다.
관상가와 수상가들이 그녀의 외모의 특징을 보고, 만약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전륜성왕의 어머니가 될 것이고, 만약 딸을 낳으면 전륜성왕의 아내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 맛자(Majja)의 주석서.
마야 왕비가 싯달타를 출산하고, 이레 만에 돌아가셨다. 마야 부인의 동생인 마하빠자빠띠 가 정반왕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얼마 안되어 마하빠자빠띠는 난다(Nanda) 왕자를 출산했지만 자기가 낳은 왕자는 유모에게 맡기고, 싯달타를 돌보았다.
마하빠자빠띠는 싯달타가 카필라국을 강대국으로 만들 성군이 되기를 간절히 발원하면서도 왕자가 출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염려했던 대로 싯달타는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들 몰래 출가. 당시 마하빠자빠띠가 감당해야할 고통은 정반왕보다 더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아들이 7년 만에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성자(석가모니)가 되어 카필라국에 찾아옴.
마하빠자빠띠는 부처님이 카필라성에 도착하기 전부터 직접 짠 옷감으로 가사 만들어 공양, 부처님께서 그 가사를 “개인이 아니라 승가에 보시하라”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친아들 난다와 손자인 라훌라, 조카들까지 모두 출가하였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자, 꼴리야족과 석가족의 사이에 있는 로히니강을 두고 두 종족이 싸움이 있었다. 두 종족은 고대로부터 한 종족이나 다름없었고, 꼴리야족은 마하빠자빠띠와 야소다라의 고향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평화적인 중재로 두 종족은 화해, 감화를 받은 석가족 수백여명이 출가하였다.
이 무렵 정반왕이 서거하였다. 마하빠자빠띠는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부처님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아들이지만 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자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 부처님을 비롯해 사문들이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유행을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을 뵙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마침 부처님이 베살리에서 안거에 들어갈 무렵, 마하빠자빠띠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은 뒤,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인도 출가하여 얼마든지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도 출가하고 싶습니다.”
“그만두십시오. 여인은 출가해서 신명身命을 받쳐 법 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녀는 부처님의 단호한 거절에 한 마디도 못하고 물러났다. 얼마 후, 마하빠자빠띠는 부처님을 찾아가 또 출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으나 이번에도 부처님께서 거절하였다.
세존께서 여름 안거를 마치고, 제자들과 유행에 나섰다. 마하빠자빠띠는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수소문해 또 찾아갔다. 예전과 같이 부처님이 여성 출가를 거절하자, 문밖으로 나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이때 아난 존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마하빠자빠띠 이모님, 무슨 까닭으로 흙 묻은 맨발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슬피 울고 있습니까?”
“아난 존자님, 여인도 출가해서 얼마든지 정각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부처님께 세 번이나 출가하기를 요청했으나 계속 거절당했습니다.”
“이모님, 잠깐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부처님께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아난은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한 채 여인 출가에 대해 여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인 출가에 대해 반대하셨다. 아난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는 예전에 세존을 양육하는데 고생이 많았습니다. 세존의 모친께서 돌아가신 뒤 오로지 세존의 양육을 책임진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 앞에 남녀 구별이 없고, 진리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고 하면서 왜 여인 출가를 반대하십니까?”
“아난아, 여인도 출가해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인 출가로 인해 교단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여인 출가를 반대한 것이다. 마하빠자빠띠가 여성 출가자만이 지켜야할 팔경계八敬戒를 받아들인다면 여성이 출가해도 괜찮다.” - 중아함 28권 <구담미경>
우여곡절 속에 마하빠자빠띠는 출가하였고, 석가족의 여인들(500명)이 함께 출가하면서 최초로 비구니 교단이 생겼다.
당시 승가의 비구들은 유행 생활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여성이 출가해서 유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고대로부터 인도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하고 여성을 하천한 존재로 여긴다. 어느 교단에서든 여성 출가자는 없었고, 어쩌면 경전에 전하는 것보다 여성 출가 문제는 매우 큰 문제에 봉착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어렵게 출가한 마하빠자빠띠는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녀의 게송은 <장로니게>에 157∼162에 전한다. 이 가운데 160번 게송에서 그녀는 이렇게 읊고 있다.
“저는 거룩하신 스승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금생에 저는 최후의 몸을 받은 것으로
저는 삶을 반복하는 윤회를 완전히 멸했습니다.
이제는 헛된 삶을 거듭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녀가 반열반에 들 무렵이 되어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나는 내 아들 붓다가 입적하거나 두 명의 상수 제자, 손자인 라훌라, 조카인 아난다가 죽는 것을 볼 때까지 살지는 않겠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죽어야겠다. 나는 지금 내 아들 붓다에게 가서 내가 먼저 죽는 것을 고해야겠다.’
그녀는 부처님께 자신의 죽음을 고하며 자신의 먼저 죽는 것에 양해를 구했다. 마침내 그녀가 입적하고, 하늘에서 연꽃이 허공에 뿌려졌고, 온갖 꽃들과 향기가 감돌았다. 또한 열반한 아라한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온갖 음악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졌다.
장례 행렬이 지나는 동안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하늘에서 별까지 반짝거렸다. 시간은 정오였지만 태양은 달처럼 서늘했다. 마하빠자빠띠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부처님과 사리불 존자와 같은 장로들이 직접 장례식을 주관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인도 여성은 결혼 지참금(dowry) 제도 문제로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죽음을 당하는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심할 정도로 여성 사각지대이다. 이런 인도에 수천년 전, 여성 출가를 허용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어쨌든 마하빠자빠띠의 출가로 인해 북방에서는 비구니 승가가 엄연히 존재한다. 남방[태국ㆍ미얀마ㆍ스리랑카 등]에는 비구니가 존재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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