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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헛된 꿈 (요21:18-23절)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덧없는 꿈이 있는가 하면 헛된 꿈이 있고 망상적인 꿈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적인 꿈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꿈이든 간에 사람들은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야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나라의 왕이 되시면 자기는 그 우편에 앉아 영화를 누릴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수제자의 자리에 앉고 싶었고 모든 일에 다른 제자를 앞서며 위신을 뽐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의 꿈은 한 순간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면 적어도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자칭할 때부터 그의 몸가짐을 바로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같이 지든지, 대신 지든지, 끝까지 따라가든지,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편없이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예언하실 때에 베드로는 무엇이라 장담하였습니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며 호언장담하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며 부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약속대로 갈릴리 바다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손과 발로 해변을 걸으시고 나뭇가지를 주어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구워 놓으시고 떡을 준비하시고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고생한 제자들을 위하여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해변의 모래 위에 앉게 하시고 주께서 친히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구워 주시며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난 날의 잘못이나 과거의 일은 묻지 아니하시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엊그제의 일이지마는 제자들의 부끄러운 일을 들추어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 베드로는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조용하고 자상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이름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신 것은 이름값을 못한 베드로를 책망하시기보다는 그가 처음으로 안드레의 전도를 받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때의 추억을 되살리시려는 친근감이 넘치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나약하고 실패한 모습들을 폭넓게 감싸시고 그의 사랑으로 수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네가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네가 다른 제자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어제의 베드로의 배신이 아니라 오늘 베드로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고개를 들고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이 헬라어로 ‘아가페’ 인데 반하여 베드로의 대답은 ‘필레오’ 입니다. 예수님께서 헌신적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데 반하여 베드로는 그저 친구의 우애나 가족의 사랑 정도로 대답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의 내용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순간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겠다고 공언했던 사실이 얼마나 허무하고 보잘것 없는 헛맹세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대답이 달라졌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나아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를 사랑합니다.” 가 아니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겸손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떤 설명도 더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구속한 고귀한 영혼들을 네가 맡아서 꼴을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아주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뿐만 아니라 큰 양, 즉 치리에도, 권징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의 연륜이 깊은 성도들도 보살피며 나아가 장성한 양들도 계속하여 꼴을 먹이는 사역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심이요, 다시 한 번 제자로 인정해 주시는 엄청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이자 당부에 대한 베드로의 응답은 없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드로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이어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그의 장래 즉 그의 인생의 마지막 운명을 미리 정해주셨습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서 ‘팔을 벌린다’ 함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살아서는 평생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죽을 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장렬하게 순교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서나, 죽을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평소에 베드로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하였으며 조금 전만 하여도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이나 자신의 사랑을 용감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베드로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그것도 부족하여 나의 인생을 마감하는 일에 주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영광으로 초대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여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듯 놀랍고 영광된 이 은혜의 시간에 베드로는 또 한 번의 실수를 합니다. 그는 이 큰 영광을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벌로 소화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 같은 형벌이 주어지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고 하시던 주님의 축복은 생각하지도 않고 “손을 벌려 죽는다.” 는 사실만을 염려합니다.
이스라엘에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진 언덕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 제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 뿐 아니라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곳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요단강 산언덕에서 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경배하게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 했던 나무는 찍혀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소가 핥아먹고, 말이 먹이를 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굿간 한쪽 귀퉁이에 팽개치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찢기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 올라타고 비린내 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이 없을 때에는 쓸모없이 버려져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자신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어버렸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의 형틀이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하면서 비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마굿간 한 쪽에 버려져있던 그 첫 번째 나무로 만든 구유가 쓰임을 받고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제목으로 쓰임 받기를 원했던 그 나무는 결국 그의 소원대로 예수님의 침실이 되고 침대가 되었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그 보잘 것 없는 작은 배에 오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는 주님의 강단이 되어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갈보리 언덕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세 번째 나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 나무는 저주의 형틀이 되었지만 자신의 소원대로 높은 산언덕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명을 맡을 때에 보상적 관계에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받을 핍박과 고난, 심지어 순교까지도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갖추어야 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절대적인 성실과 정직, 자기 진실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실입니다. 내가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곳에는 사명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성실은 정직과 진실을 기본으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에 대하여, 나의 처지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나 환경을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로--순수한 동기입니다.
순수한 동기란 분명하고 불변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랑의 마음 외에는 순수한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오직 한마음이어야 합니다.
단순한 마음이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위선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업적이나 수고를 자랑해서도 안 되며 평가를 받으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스스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 자기의식을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기간도, 업적도, 형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대적인 충성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자기 위치를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보고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요한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져 있음을 책망하시며 너의 임무는 오로지 나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질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트라르카 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그 마음속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평화를 방해하는 요소를 다섯 가지로 꼽고 있는데, 첫째는 탐욕이요, 둘째는 분노이며, 셋째는 야망이요, 넷째는 자랑이요, 다섯째는 질투라 하였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질투입니다. 질투는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질투는 열등의식에서 일어납니다.
*요21:19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킴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묘사할 때 사용한 말씀입니다.
*요12:31-33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베드로가 죽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지만 죽음으로서도 영광이 돌아갑니다. 우리는 내가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패함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때가 있고 내가 죽음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임을 압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궁극적으로 늙어서 순교하기까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주신 “내 양을 먹이라” 는 소명을 이루어 주시는 말씀이요 동시에 베드로의 소원을 이루어주신 말씀입니다.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잠시 자신의 꿈을 잊어버리고 헛된 꿈을 꾸면서 살았지만 주님은 결국 그의 꿈을 이루어 주시고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고백하고 소원했던 대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제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물어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경기장에서 처참하게 죽일 때 베드로 역시 체포되어 성도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순교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자신들은 이렇게 죽을지라도 베드로는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그를 감옥에서 탈출시킵니다. 베드로는 로마 감옥을 벗어나 밤새 도망을 쳤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때에 잠시 쉬고 있는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이 다가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보자 너무나 기뻐서 주님을 맞이하려 했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본체도 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너무나 놀란 베드로가 ’쿼바디스‘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며 주님을 부르자 주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버리고 온 그 양들을 위하여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서 처형장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과, 이제는 주님 대신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즉시 신자들이 처형되고 있는 경기장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라는 것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 자신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습니다. 베드로는 살 길을 택했지만 주님은 그를 십자가로 인도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살아서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 소중한 것인줄 알았지만 그의 순교가 이천 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도 기독교의 근간이 되고 뿌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주님은 그의 순교를 통하여 그를 진정한 수제자의 자리에 올려 주셨고 사도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살아서도 하나님께 영광이요 죽음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의 헛된 꿈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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