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원주민 중 라코타 수우족은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을 대신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닿을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출신의 승려 틱낫한은 말한다.
"오래전 나는 폐에서 피가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는 수시로 피를 뱉어야만 했다. 그런 폐를 가지고 숨쉬는 것은 무척 힘들었고,
숨쉬는 동안 행복해지는 것도 어려웠다.
치료 후 폐가 완치되었고 호흡이 훨씬 나아졌다.
지금 숨을 쉬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폐가 세균에 감염되었던 때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쉬는 매번의 숨마다 너무 맛있고, 너무 좋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가 아닐까?
상처 없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은 스스로 고난이 필요한 시기를 아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다는 것도.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