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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05월20일(수요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유영국-산은 내 안에 있다] 관람일정
탐방지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유영국-산은 내 안에 있다]
[“산은 내 안에 있다”…평생 새로운 산을 세운 유영국
중앙선데이 기사 입력 2026.05.09. 00:26, 업데이트 2026.05.09 00:27
한국 1세대 추상화가
한국 추상미술 1세대 작가 유영국(1916~2002)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두 곳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4월 10일 막을 올린 현대화랑의 ‘탄생 110주년 특별전: 유영국·이봉상·최영림’은 1916년생 동갑내기 세 작가의 작업을 한자리에 묶었고, 5월 19일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단독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가 시작된다.
유영국은 1916년 4월 7일 강원도(현 경상북도) 울진의 양조업 가문에서 4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경성 제2고보 시절 미술교사 사토 쿠니오를 만나 그림을 시작했고, 친일 행위에 동의할 수 없어 자퇴한 뒤 1935년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로 진학했다. 같은 도시에 김환기가 있었고, 동갑인 이중섭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끌린 곳은 동료들이 아니라 일본 전위 추상의 흐름을 이끌던 무라이 마사나리의 강의실이었고,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받는다. 한국인 화가가 일본 전위 미술 단체에서 받은 최우수상은 그가 처음이었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3년 귀국한 그가 한 일은 그림이 아니다. 어선을 운영했고, 가업인 양조장을 경영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16년 동안 작품 활동은 거의 멈췄다. 1953년 부산 피난 중 제3회 신사실파전에 두 점을 출품한 것이 거의 전부다. 이중섭이 비극적 천재로, 박수근이 가난한 서민화가로 신화화되던 시기에 그는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었다. 작가 강석경은 1986년 인터뷰집 『일하는 예술가들』에서 유영국을 두고 “신화 없는 화가”라 불렀다. 다른 어떤 호칭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본격적으로 작업현장에 돌아온 것은 1955년 무렵이다. 모던아트협회와 신상회를 잇따라 결성했고, 1963년에는 김환기와 함께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해는 1964년이다. 마흔여덟의 봄,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자리에서 모든 단체 활동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작업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직도 사임한다. 바깥의 모든 자리를 지워내고 그림 안으로 들어간 해였다.
1964년 이후 그가 한 일은 그림뿐이다. 그렇게 평생 그린 모티프는 산·바다·나무·노을·태양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작품 제목은 대부분 ‘작품(Work)’이고 가끔 ‘산’이 섞인다. 그러나 화면이 자연 모티프에만 묶이는 것은 아니다. 1955년 작 ‘직선이 있는 구도’, 1965년 작 ‘해토(解土)’처럼 모티프가 추상의 구조 자체로 미끄러진 작업도 적지 않다.
그가 평생 같은 풍경을 다시 빚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산의 그림’이라기보다 ‘산을 다시 짓는 형식’에 가깝다. 작가 본인이 그것을 가장 명료하게 정리했다. “산은 자연이 부여한 하나의 물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시립미술관 회고전 제목이 바로 이 문장에서 왔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산이라도 같은 그림이 아니다. 1989년의 ‘산’은 정사각의 화면에 네 개의 삼각형이 솟는다. 짙은 보라색 배경 위로 큰 진홍색 봉우리가 자리하고, 그 너머 주홍색을 띤 가파른 삼각이, 곁으로는 녹색 봉우리가 깎인 채 서 있다. 빨강 위에 빨강이 겹친 자리에서 색의 무게가 묵직해진다. 1983년의 ‘도시’에서는 사각과 사다리꼴이 쌓여 솟고, 화면 위쪽 진녹색 띠 한가운데에 환한 연두색 해가 떠 있다. 두 화면은 다른 모티프지만 두께가 같다. 평생 다시 그린 그의 산들은 우리 눈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그 경험이 미세하게 다른 것처럼, 그에게 1989년의 산은 1985년의 산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복은 환원이 아니라 매번 다시 도착하는 일이다.
색에 관해 작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색채란 써보면 참 재미있는 거요. 옆에 어떤 색을 가져와야 이 색도 살고, 또 이 색도 살고….” 단색조로 환원하지 않고 색을 끝까지 충돌시키고 공존시키는 태도다. 단색화가 한국 추상의 한 줄기였다면 유영국은 그보다 먼저, 다른 길로 같은 자리에 이른 화가다.
유영국이라는 이름이 한국 바깥에서 들리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2023년 3월 페이스갤러리가 PKM갤러리와 공동으로 작가의 에스테이트 대리를 맡게 되었음을 밝혔고, 그해 가을에는 뉴욕에서 작가의 첫 해외 개인전 ‘Mountain Within’을 열었다. 페이스가 같은 시기 함께 선보인 전시는 피카소의 드로잉전이었다. 2024년 봄에는 ‘무한 세계로의 여정’이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이어졌다. 유럽에서 열린 작가의 첫 개인전이었다. 이 모든 곳들은 2002년에 작고한 작가가 생전에 닿지 못한 도시들이다.
미술이 한 해에도 여러 번 결을 갈아입는 지금, 어떤 흐름에도 묶이지 않은 채 평생 자기 작업을 끌고 간 한 화가의 일관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신화 없는 화가”로 불렸던 유영국의 신화 없음이 이제는 새로운 신화가 될 차례가 되었다. 그는 한 시기 작품을 내려놓고 일했고, 캔버스 앞에 다시 선 뒤로도 영광 없는 노동의 결을 끝까지 유지했다. 두 전시장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그가 평생 매일 다시 도착한 산이다.
박재용 독립 큐레이터]
탐방코스: [시청역 10번 출구~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유영국-산은 내 안에 있다]를 관람~시청역 1번 출구]
탐방일 : 2026년05월20일(수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16분 소요)
12:50~13:22 연신내역에서 3호선을 타고 을지로3가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시청역으로 간 후 시청역 10번 출구로 나옴
[32분 소요]
13:22~13:27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번지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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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7~15:3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실에서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유영국-산은 내 안에 있다]를 관람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실
전시기간 : 2026.05.19~2026.10.25
관람료 : 무료
도슨트안내 : 매주 화-일 오전 11시(현장 선착순 20명)
전시부문 : 회화, 부조, 사진, 드로잉, 아카이브
전시장르 : 기획,국내
참여작가 : 유영국
작품수 : 170여 점
주최 및 후원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조선일보사 / 후원: 불가리 / 협찬: 한솔제지, 삼화페인트
전시문의 : 여경환 02-2124-8925
관람문의 : 안내 데스크 02-2124-8868
관람시간
평일(화–목) 오전 10시–오후 8시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오후 9시
(매주 금요일 연장운영)
토 · 일 · 공휴일 하절기(3–10월), 오전 10시–오후 7시
동절기(11–2월), 오전 10시–오후 6시
입장시간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1월1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전시 안내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유영국미술문화재단과 조선일보사와 함께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개최한다. 미공개작을 포함한 회화, 부조, 사진, 드로잉 작품 및 아카이브 170여 점을 통해 그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선보이는 ‘한국 근대 거장전’ 시리즈의 첫 프로젝트로, 이를 통해 한국 근대 미술이 이룩한 성취를 오늘의 시점으로 새롭게 연결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작가로 유영국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민주화와 경제의 압축 성장 같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추상 미술이라는 당대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삶과 작품으로 올곧이 실천했던 작가이다.
이번 전시는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시작된 추상 미술에 대한 실험부터 생애 후반 심상 추상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의 유영국 화업을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관람객이 유영국이 선택했던 결단과 몰입, 숭고와 무한의 리듬을 보다 흥미롭게 만날 수 있도록 전통적인 회고전의 방식을 탈피한다. 대신 유영국에게 중요했던 1964년을 기점으로 시간을 역행했다가, 또 순행하는 독특한 시간 여행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점, 선, 면과 색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로 ‘산’을 추상화했던 유영국의 예술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산은 고향 울진의 실제 풍경이자 기억의 총체이며, 동시에 선과 색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구조였다. 산은 그에게 외부의 재현 대상을 넘어 마음속에 존재하는 조형적 본질이다.
유영국 작품이 단지 근대 거장의 미술사적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의 작품을 통해 한 시대를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구축한 아름다움의 질서는 여전히 시각적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이끈다. 디지털과 AI 기술이 창작의 개념을 흔드는 오늘, 유영국의 회화는 창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호출한다. 특히 유영국 후기 작업이 함축한 무한 너머의 시선은, 회화라는 고유한 매체가 지닌 숭고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가 발견한 자신만의 크고 깊은 산처럼 유영국의 작품은 단단한 생명력으로 오늘도 자신의 산을 찾아가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유영국(劉永國)
출생지 : 경상북도 울진
출생-사망 : 1916년 4월 7일 - 2002년 11월 11일
유영국은 한국 근현대기의 추상화가로, 일본 문화학원에서 그림을 배웠고 귀국한 뒤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등 한국의 미술단체를 이끌었다. 유영국의 작품은 산, 바다 등의 자연을 선과 면 중심의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형상화한 추상회화 작업을 특징으로 한다.
• 국적 : 대한민국
• 활동분야 : 회화
• 사조 : 한국 현대
• 시대 : 근대, 현대
• 주요작품
- work(1938/2002년 재제작)
- work(1940)
- 산(1957)
- work(1964)
- work(1970)
생애
유영국(劉永國)은 1916년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4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울진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로 진학, 이곳에서 미술교사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를 만났고, 쿠니오를 통해 미술을 접하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친일 행위에 불복하여 중퇴한 후에 쿠니오의 조언으로 도쿄 문화학원(文化學院) 유화과에 지원, 입학했고 1938년 문화학원 미술과를 제11회로 졸업했다. 1940년에는 오리엔탈사진 실기강습회와 오리엔탈사진학교 과정을 통해 사진을 배웠다. 1943년 중반까지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태평양전쟁의 징후로 인해 1943년 8월경 귀국한 뒤, 부친이 운영하던 고기잡이배를 탔다. 그는 1944년에 김기순과 결혼했다.
유영국은 김환기(金煥基)의 제안으로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부 교수로 부임해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50년 사퇴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울진으로 피난하여 양조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1954년에 환도하여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6월경 홍수로 일본에서 제작한 100여점이 넘는 작품이 유실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1955년 양조장일을 완전히 접고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재개하였다. 그는 미술대학 교수활동도 재개했다.
1957년에 홍익대학교 전임강사에 취임하였다가 1958년에 퇴임하였으나, 1966년에 홍익대학교 정교수로 부임하고 서양화과장을 맡았다. 그러나 1970년에 근무일 수가 주 3일에서 6일로 늘어나자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후 전업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유영국은 1977년 심근경색이 발병하였고 치료 후 다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002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작품 활동
유영국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도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문화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37년 제7회 ‘독립미술협회전’에 유화 ‘랩소디’를 출품해 데뷔했으며, 같은 해에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입선했고 이듬해 제2회전에서 협회최고상을 받아 회우(會友)로 추대되었다. 이후 유영국은 자유미술가협회와 N.B.G.(Neo Beaux-Arts Group) 양화동인 그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등 일본 추상미술가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에는 ‘work(1938/2002년 재제작)’와 같은 릴리프(부조) 작업과 1942년 경주 답사 중의 불상 및 고건축 사진 작업 등 회화 이외의 매체를 탐구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을 통해 유영국의 작품이 소개되었으며,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1943년 여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유영국은 1948년 김환기, 이규상(李揆祥)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형이념에 기초한 그룹으로 여겨지는 신사실파(新寫實派)를 결성하여 ‘신사실파 창립전’을 통해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국전(國展)’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50년미술협회’도 결성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창립전이 무산되었다. 피난 중에는 부산에서 ‘현대미술작가 초대전’과 제3회 ‘신사실파 부산전’에 출품했다.
휴전 후 유영국은 박고석(朴古石), 이규상, 한묵(韓默), 황염수(黃廉秀) 등과 1956년에 창립한 ‘모던아트협회’와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작가초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2‧9 동인회’와 ‘신상회(新象會)’를 결성하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도 출품하는 등 그룹활동을 주로 하였다, 유영국은 1964년 일체의 그룹 활동 중단을 선언한 뒤 같은 해에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개인 작업에 몰두했다.
유영국의 작품세계는 산, 바다, 노을 등의 일상 속 자연의 형태를 선, 면 등으로 단순화시켜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추상화 작업을 특징으로 한다. 형태는 ‘산(1957)’, ‘work(1964)’와 같은 비정형에서 ‘work(1970)’처럼 점차 엄격한 구성의 기하학적 조형을 사용하는 양상을 보였다. 색은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을 기반으로 초록, 보라 등을 통해 변화를 주었으며 같은 계열도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었다. 전반적으로 표면의 질감은 살렸다. 이 같은 유영국의 추상화들은 자연의 정수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평가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다. 기본 조형요소와 강렬한 색채를 절묘하게 사용하여 자연의 추상상태를 형상화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현대의 전위적인 미술운동 그룹들에 리더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60세까지 다양한 조형실험을 하기도 했으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한국 미술계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선과 면과 색을 중심으로 자연이라는 대상을 환원시키려는 작품세계를 고수하여 1960, 70년대에도 기하학적 추상의 경향을 유지한 것은 외골수적 면모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참고문헌
• 유영국, 『Yoo Young Kuk』, 마로니에북스, 2012
• 유영국미술문화재단
• 이일,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한 전형: 유영국」, 정연심, 김정은, 이유진 편,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 하』, 2013.]
[한국 추상미술의 대부, 유영국(劉永國)
한국 모더니즘의 제1세대 작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다. ‘산’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1960년대 말부터 산을 모티브로 하는 비구상적 형태로서의 자연을 선, 면, 색채로 탐구했다. 강렬한 원색과 절제된 구성이 특징인 유영국의 추상화에는 절정과 달관의 경지에서 구축한 장대한 자연의 숭고미가 응축되어 있다.
1916년 경상북도(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군 울진읍 읍납리 216번지(현재 울집읍 말루길 118-21)에서 태어났다. 유영국의 집안은 조부 유재업 때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자였다. 아버지 유문종은 뛰어난 사업가이면서 사재를 털어 사립학교를 설립한 의식 있는 애국지사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유영국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과 천자문을 모두 깨우쳤다. 1926년 울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 울진 공립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재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미술교사인 사토 쿠니오로부터 미술 지도를 받았다. 1934년 일본인 교사의 구타에 저항하여 학교를 자퇴했다. 상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상선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그림을 전공하기로 했다. 유영국은 제국주의 교육을 시키는 제국미술학교나 동경미술학교 대신 자유로운 분위기의 동경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했다.
문화학원에서 미술강사인 추상화가 무라이 마사나리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유영국은 무라이 마사나리의 영향으로 추상미술을 표방한 청년화가단체 N.B.G.에 가입했고 전위적인 미술을 지향하는 자유미술가협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937년 독립미술가협회전에 유화 「랩소디」를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화가로 데뷔했다. 같은 해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작품B」가 입선했다. 1938년에 동경 문화학원을 졸업하고,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자유미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1940년 오리엔탈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던 유영국은 일제가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작품활동에 제약을 받자 1943년 동경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가업인 어업을 경영하던 중 1948년 김환기의 소개로 서울대학교 미술부 전임강사로 부임하면서 상경했다. 같은 해 김환기, 이규상 등 추상화가들을 중심으로 미술그룹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그해 12월에 서울 화신화랑에서 ‘신사실파 창립전’을 열고 「회화1」에서 「회화10」까지 10점을 전시했다. 1950년 자유로운 미술가들의 모임인 ‘50년 미술협회전’ 참여문제로 서울대학교 미술부 전임직을 사퇴했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고향 울진으로 피난하여 양조장을 운영했다. 1952년 ‘제3회 신사실파 부산전’에 「산맥」, 「나무」, 「해변에서 A」, 「해변에서 B」 등을 출품했다. 1955년 다시 서울 약수동으로 올라와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1956년부터 해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로 초대되었으나 거부했다. 1957년 전위적 예술운동 모임인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했다. ‘제1회 모던아트협회전’에 「호수」, 「산맥」, 「가을」, 「산과 구름」 등 7점을 출품했고, 이후 모던아트협회전에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다가 단체의 폐쇄적 엘리트주의에 반발해 1959년 탈퇴했다. 1958년부터 ‘현대작가초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61년 장욱진, 임완규 등과 함께 ‘2.9동인회’를 결성했다. 1964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수로 부임했다.
1960년대 말부터 유영국은 산을 주요 모티프로 작품을 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산은 총천연색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삼각형과 원의 기하학적 추상의 형태와 강렬한 색상만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장엄한 순간을 형상화했다. 이후 기하학적 패턴을 끝까지 밀어붙여 곡선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은 전통건축의 초가를 떠올리게 하는 지붕형태가 등장하면서 곡선 형태가 나타난다. 1977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죽을 때까지 병마와 시달리며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2002년 심장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끝까지 순수하게 성실했던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 유영국
한경 기사 입력2022.09.22. 16:18, 수정2022.09.22. 16:25
마케터를 위한 (문화 서적) 저자 기고
■ 「인생, 예술」저자 윤혜정
한국의 1세대 서양화가이자 김환기와 함께 추상미술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유영국의 하루는 지극히 단순했다. 아침 여덟 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곱평 남짓한 작업실로 향했고 점심식사 후 다시 저녁까지 작업만 하는 식이었는데, 그나마도 작품 한 점을 몇 달에 걸쳐 완성했다.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일과는 정제된 삶을 대변하는 동시에 이와 대조를 이룬다.
1916년에 태어난 유영국은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갔다. 그는 한 명의 시대인으로서 국가의 상실, 참담한 전쟁, 남북의 분단, 이데올로기의 갈등 등 갈기갈기 찢겨 피투성이가 된 근대사를 생의 한가운데서 고스란히 겪어 냈다. 동시에 한 명의 작가로서는 낭만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전형적인 논쟁도, 제대로 된 미술사학자도 존재하지 않는 미술 주변국에서 스스로를 작가로 곧추세우기 위해 분투했다.
추상의 사전적 의미가 “여러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라면, 유영국에게 그 공통의 대상이자 개념은 바로 산이었다. 그는 산을 비롯한 한국의 자연을 점·선·면·색 등 그림의 기본 요소로 환원하면서 ‘색면추상’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삼각형 형태로 단순화된 산, 원으로 표현된 빛, 직선의 나무 같은 기하학적 형태들은 순도 높은 색을 입은 채 밝음과 어둠, 절망과 희망, 구속과 해방 같은 상징성을 얻는다.
유영국에게 산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그리고 그림을 열망했던 삶 자체를 추상화한 결과물이었다. 조형적·기하학적 요소에서 출발한 그의 추상은 지금까지도 “자연의 관찰과 자기 탐구로 추출한 가장 순수한 추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라는 평을 이끌어낸다. 그가 구현한 선과 면의 질서, 색의 조합은 1916년에 태어난 화가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시대적이다.
“산은 내 앞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는 명언을 남긴 유영국이 그린 산은 실재하는 산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관념 안에 맥락 없이 덩그러니 갇힌 산이 아니라, 자신의 고단한 인생과 강퍅한 시대적 상황, 미술에 대한 열정과 현실의 한계 등이 치열히 충돌하고 갈등하다가 마침내 조화를 이루어 영원히 살아 있는 산이었다. “산을 그리다 보면 그 속에 굽이굽이 길이 있다. 꼭 나의 인생 같다. 내 그림 속 산에는 여러 형상의 삶이 숨겨져 있다.” 작가의 자아성찰적 소회는 그의 추상 기법이 세상을 해석하고 살아 내는 고유한 논리를 창조하는 과정임을 실감하게 한다.
오랫동안 유영국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한국의 근대 작가들이나 해외 미술가들에 비해 ‘아는 사람들만 아는 좋은 미술가’로 통했다. 방탄소년단의 RM이 좋아하는 작가로 그를 꼽고 이건희 컬렉션의 핵심 작품으로 그의 그림이 언급되면서 지난 몇 년 사이에 유영국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함께 높아졌지만, 그가 미술계에 존재해 온 시간이나 기여한 정도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의 인지도는 턱없이 낮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평론가들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유영국은 “이렇다 할 장식도, 수사도, 기교도 없이 과묵하게 살아온 작가” 혹은 “수도원의 수사”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에게서는 세상이 흔히 ‘천재 화가’에게 기대하는 문학적 신화나 낭만적 기행담을 찾아볼 수 없다.
가장이었던 예술가는 생계를 책임지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다가, 1964년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생의 첫 개인전을 선보일 수 있었다. 예상하겠지만 그에게는 미술 제도에 편승해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당시 구태의 상징이었던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반대하는 전시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고 이제라도 작업에 매진하고 싶은 마음에 비해 현실적으로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유명 미술대학 교수직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는 일평생 미술계든 주류 화단이든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고립함으로써 작업에 매진했다.
이제 막 붓을 든 신인 화가처럼 평생을 산 유영국은 2002년 작고할 때까지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어느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끝까지 생각한 사람의 웅숭깊은 마음으로, 세상의 인정과 찬사에 연연하는 대신 삶과 예술을 자기의지대로 끌고 나가려고 고요히 노력한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루었다.
유영국에게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그것을 구현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바쳐서 자연을 이해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묵묵한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그저 예술가로서만 살고자 했다면 그의 그림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곡진하게 다가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작품(Work)〉, 1964, 유영국
1964년 48세 유영국은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구심점으로서 신사실파(1947년), 모던아트협회(1957년), 현대작가초대전(1958년), 신상회(1962년) 등을 이끌었던 그에게는 이례적으로 늦은 개인전이었다.
평론가 김영주는 유영국을 “탐구적인 색채의 연마사”로 명명하면서 “강렬한 녹, 황, 적, 청 등의 원색이 다이내믹하게 처리된 1백호 이상의 대작”에 대한 놀라운 반응을 전했다. 당시 화단에 충격을 준 것은, 대형 유화 15점이 뿜어내는 에너지 넘치는 선과 색채의 향연뿐만은 아니었다. 유영국은 이 개인전을 기점으로 작가 동인전 중심의 그룹 활동 대신에 2년에 1번씩 여는 개인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했다.
그와 함께 아방가르드 미술에 헌신했던 동료 예술가 한묵과 문신은 프랑스로(1961), 그리고 김환기는 뉴욕으로(1963) 떠났지만,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작업실로 침잠하면서 급변하는 시대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내밀한 예술 언어에 집중할 것을 결단한다. 그리고 매일 작업실을 오가는 단순화된 일상으로 묵묵히 추상의 길을 걸어간다. ]
[〈직선이 있는 구도〉, 1949, 유영국
〈직선이 있는 구도〉는 유영국의 1949년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로 제작된 53 × 45.5cm 작품이다.
유영국의 초기 추상 경향과 자연 풍경을 단순화한 표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Work)〉, 1967, 유영국, Oil on canvas, 130 x 130cm ]
[아버지는 작은 그림의 큰 가치를 알았다
한국 1세대 추상화가 유영국
미공개작 전시 여는 세 자녀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기사 입력 2024.09.26. 00:40
“서울 약수동 적산가옥에 살던 시절, 겨울에는 너무 추웠어요. 화실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안방 앞의 좁은 마루에서 소품을 그렸지요. 사람들은 대작을 그리던 아버지가 소품을 그리니까 소품 값은 싸겠거니 했는데, 아버지는 ‘가격을 그런 식으로 매기는 게 아니다’라면서 안 팔고 보관해왔어요.” (차녀 유자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한국 1세대 추상화가 유영국(1916~2002) 사후 처음으로 미공개 소품이 한자리에서 공개됐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유영국의 자연: 내면의 시선으로’에 1950~80년대 유화 34점이 나왔다. 이 중 21점이 유족들이 한 번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소장해온 작품. 대작 위주로 작업해온 유 작가가 생전에 간혹 그린 10호(53×45cm) 내외의 희귀 소품들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유영국의 세 자녀는 “각자 따로 갖고 있던 그림도 있어서 처음 본 작품이 꽤 있다”고 했다.
소품이지만 꽉 찬 밀도감과 색감을 뿜어낸다. 형·색·면으로 고향 울진의 높은 산과 깊은 바다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유영국의 독자적 작품 세계가 그대로 살아있다. 유자야 이사는 “작은 그림이라고 허투루 그리신 분이 아니다. 대작과 똑같이 완성도가 높은데 사람들은 5호 그림이면 100호 가격의 20분의 1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차남인 유건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전 이사는 “아버지 화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이 그림은 뭐냐고 여쭤보면 늘 ‘네가 보는 대로 보면 된다’고 하셨다”며 “그림을 완성한 후에도 벽에 몇 개를 진열해 놓고 끊임없이 고치셨다. 마음에 드는 색깔과 형태가 나올 때까지 계속 고치셨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유영국은 과묵한 화가였다. 아무도 추상화를 알아주지 않던 시절, 처음부터 추상을 시도한 이유도 “말이 없어 좋다”는 것이었다. 유자야 이사는 “아프신 것도 표현을 안했다. 돌아가신 뒤 보니까 아버지가 그림 그릴 때 쓰던 안경이 7개가 나왔는데, 마지막 안경의 렌즈 두께가 1cm가량 되더라. 그런데도 한 번도 눈이 불편하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없다”고 했다. 장남인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건 직업정신이다. 늘 서서 팔레트를 들고 그림 그리시던 모습. 1992년인가, 거동이 불편하셔서 이제 좀 쉬었다 하시라고 했더니 ‘환쟁이가 그림 그리다 죽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소리를 치셨다”고 했다.
최근 해외에서 ‘유영국의 재발견’이 시작됐다. 지난해 미국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 첫 해외 개인전이 열렸고, 올해는 세계 최대 현대미술 축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유럽 첫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고택에서 열리는 전시는 ‘비엔날레 병행 전시 중 꼭 봐야 할 전시’로 꼽혔다. 현지 관람객들은 “마크 로스코 같다” “원색의 깊이와 풍부한 에너지가 놀랍다”며 오랫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달 초 열린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에서는 유영국의 1973년 대작이 첫날 오전 20억원에 팔려 화제가 됐다.
유진 이사장은 “사실 아버지를 해외에 소개하는 게 많이 늦었다”며 “꾸준히 아버지의 예술을 알리고, 언젠가는 유영국미술관을 세우는 게 재단의 목표”라고 했다.
유영국의 유족들은 최근 제1회 서울시 유리지공예상 시상식 때도 뉴스에 올랐다. 유영국의 장녀는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인 고(故) 유리지(1945~2013) 작가. 유족들이 서울공예박물관에 작가의 작품 327점을 기증하고, 30년간의 공예상 운영 기금 9억원을 기부하면서 상이 제정됐다. 유자야 이사는 “예술가의 길에 철저했던 아버지는 그 시절 여성은 예술가와 결혼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술가의 길을 택한 언니는 공예와 결혼한 셈”이라며 “젊은 공예가를 양성하는 것이 큰 꿈이었던 언니를 대신해 상을 제정했다. 공예상과 연계된 전시를 통해 작가들이 더 많은 영감을 받고 의욕을 키워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PKM갤러리 전시는 10월 10일까지. 무료.]
15:30~15:38 시청역 1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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