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역사는 복음을 위해 사람을 세우는 역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세우신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우셨고, 양 치는 목자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고, 박해자 사울을 열정적인 전도자 바울로 세우셨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이 시대를 섬길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복음을 위한 인물들을 세워오셨고, 앞으로 세워가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족한 우리가 제자양성가요, 성경선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배우심으로 다음 세대들을 제자들로 잘 세워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3-5)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파하였다는 이유로 로마의 어둡고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형 집행의 시간이 임박했습니다(딤후4:6). 이런 바울의 처지를 생각하면, 편지 내용이 한없이 어둡고 우울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넘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않고 디모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꿈에도 디모데가 생각났고 낮에도 디모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현재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디모데가 생각이 났으며 그를 생각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며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의 거짓없는 믿음때문이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1차 전도여행때 루스드라에서 그를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여행 때 그를 동역자로 세웠습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믿음의 기초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로 박해가 시작되고 사도바울이 투옥된 힘든 상황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바울을 버렸지만 디모데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큰 에베소 교회를 맡아 신실하게 양무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의 거짓없는 믿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뿌리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보다 어머니 쪽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졌고 또 눈물이 많았습니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내면이 순수하고 목자의 심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도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사람을 도울 때 먼저 그 사람에게서 감사제목을 찾고 격려하는데서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특징이 전투적이고 도전적이며 장군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반면에 바울이 볼 때 디모데는 눈물이 많고 소심하여서 약점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를 답답하게 여기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점보다도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이를 기초로 지도자로서 소망을 두고 키웠습니다. 우리도 어린 성도들을 볼 때 실수와 약점이 많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연약하고 우리가 볼 때는 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안됩니다. 늘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훌륭한 점을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감사제목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칭찬은 공개적으로 책망은 개인적으로 란 말이 있습니다. 먼저 장점을 찾아 격려하고 도와주면 누구든지 힘을 덧입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가 너무도 중요합니다. 적극적인 사람을 너무 극성맞다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섬세한 것을 좀스럽다고 여겨서도 안됩니다. 주관이 분명한 것을 고집이 너무 세다고 여겨서도 안됩니다. 저가 만나본 많은 분들이 남편이 고집세다 자식이 너무 고집이 세다 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면 이것은 모두 주관이 있는 것이요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은사를 불일 듯 하게하여 은사를 갖추어야 합니다. (6) 이제 바울은 본론으로 들어가 디모데의 약점을 돕고자 합니다. 6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이 말씀을 볼 때 디모데는 현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발휘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사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능력. 지혜, 리더쉽등을 말합니다. 특히 디모데에게는 예언을 잘 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딤전4:14)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불일듯하게 한다"는 말을 불을 붙여 위로 활활 타오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개인적인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역을 위해 주셨으므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이것을 왜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7@보면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큰 에베소교회를 담임하다보다 연로한 장로들도 업신여기기도 하였고 어른 집사들도 불평을 많이 했던가 봅니다. (딤전4:12) 그러다 보니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다 자격지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는 네로 박해가 계속되면서 사도바울이 옥에 같혔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심령이 눌리게 되었고 소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해도 안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 몸의 기능이 마비되어 무기력하게 됩니다. 생각도 마비되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그러다보면 자연이 하나님의 은사를 발휘하지 못하고 썩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사단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특히 영적지도자들의 두려움을 심어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이 부정적이고 어둡게 보입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소극적이고 소심하게 만듭니다. 지도자는 두려움을 잘 극복하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것은 성격문제가 아니라 두려움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단의 거짓말을 물리치고 속두려움을 이기면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할 수 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1) 7절을 보면 능력을 주십니다. 사역을 할 때 능력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만 주시고 능력은 주지 않으시는 예가 없습니다.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의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모세는 조롱만 당하다가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울어도 안되고 타일러도 안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상한 마음이 있어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기도는 태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 골수를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나타나심으로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2) 사랑을 주십니다. 이사랑은 우리의 조건적인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기적이고 까다로운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3) 절제를 주십니다. 사역을 할 때 우리가 절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신경질을 부려서 영이 다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을 절제하지 못하여 의심과 회의에 빠져 사역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열매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를 불일듯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먼저 이런 은사가 우리에게 왔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은사는 사도바울과 디모데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못하여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아니라 적극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불씨와 같아서 열심히 부채질하면 활활타오르지만 그냥두면 스르르ㅡ 꺼지게 됩니다. 은사는 이와같이 활활타오르면 불신도 타버리게 되고 소심함도 타버리게 되고 점점더 능력있고 사랑이 많고 절제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용은 내가 해야합니다. 디모데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적극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셋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동참해야 합니다.(12)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이며 또 왜 이 복음을 진정으로 힘써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전도와 또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대신에 복음과 함께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명령형으로서 디모데가 마음에 새기고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무시를 받을지라도 심지어는 바울처럼 감옥에 갇힐지라도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길이 기쁨이 넘치고 인정과 존경받는 삶이요 열매와 영광만 있고 고난이 없다면 누구든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누구도 알 수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고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고난에 동참하도록 강하게 권면하는 것은 자기만 혼자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억울하게 여겨서가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 가장 영광스럽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삶을 살았을까요? 9-12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대문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은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영원전부터 자기 뜻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은혜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이는 구원의 완전성과 확실성을 말해줍니다. 10절을 보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사망은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영혼의 죽음 즉 영원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완전히 폐하심으로 우리에게 참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성철스님처럼 수십년 도를 닦아도 안되고 어떤 노력을 해도 안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복음을 믿었을 때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런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2) 그는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선포자란 영어로는 헤럴드 즉 군대용어는 전령 으로서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전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소식보다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소식이 없습니다. bc 490년 아테네 동북쪽에 있는 마라톤에서 그리스도의 명장 밀터 아데스가 침략해온 페르시아 군을 격파했을 때 아테네 군의 한 병사가 그리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42.195M를 단숨에 달려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다” 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 경주가 생겨났습니다. 그 병사는 그리스의 승리를 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죽기까지 달려서 그 소식을 전하고는 죽었습니다. 사도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받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를 말하고 교사는 전파된 복음이 뿌리를 내리도록 가르치는 자입니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로 복음을 선포하며 복음진리를 가르치던 복음전파자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같이 죄인중의 괴수를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 주신 것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감사했습니다. 12절의 “고난받는다” 는 것은 원어상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어쩔 수 없이 고난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렇게 힘든 가운데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13,14절을 보면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여기서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은 모두 복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줍니다. 복음은 아름다운 것 곧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각양 값지고 좋은 것이 많지만 복음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그 동안 이 복음을 헬라의 철학과 거짓 교리를 가리치는 무리들로부터 지켰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잃어버리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원형 그대로 잘 보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진리를 그대로 지키기 위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싸워서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복음의 진리를 디모데에게 맡기고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디모데는 진리의 복음을 굳게 지키고 후손들에게 전해야 할 책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고난이 있다해서 시대가 죄악되다 해서 세상과 타협하고 복음진리를 변질시키면 순수복음 역사는 약해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순수복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진리를 어떻게 잘 지켜야 할까요?
포스트모더니즘과 인본주의로부터 순수복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초대선교사들은 조선영혼들을 위해 순수하게 희생하며 십자가의 희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나라 성도들의 신앙이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회개와 십자가, 희생과 헌신이 점차사라지고 축복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편리한대로 신앙생활합니다. 이런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맛잃은 소금과같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께서 쓰시기 어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사랑의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제는 나도지고 이생명다바쳐서 주님을 따르리라“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5절 보면 바울은 이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 오네시보로의 예를 들어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잇는 많은 사람이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특별히 구원의 은혜를 크게 받았던 부겔로와 허모게네까지 떠났습니다. 이런중에 오네시보로는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울이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부지런히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섬겼는데 시험의때에도 그 충성심과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로인해 마음이 유쾌해지고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우리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하여 다양한 은사의 불길이 활활타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복음전도를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요 복음 때문에 생기는 고난을 받기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으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올해도 기쁨으로 감당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