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대속의 고난이 주어지는가
마태복음 27:41~44
요절:”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마태복음 27:43)
참고 요절:“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찬송가 374장(나의 믿음 약할 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예루살렘 성 서문밖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조롱하면서 내뱉은 말 중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르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놀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 없기에 지금 이렇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은 그의 신성 모독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받아야 할 신적인 심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 절대로 그렇게 될 리 없지만,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고 또 그가 하나님을 철썩같이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께 요청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자기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겠노라고 그 앞에서 말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맘이 추호라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고통 중에 죽어가는 예수님을 희롱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 대적자들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그처럼 처참한 고난 중에서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렇게 십자가 사형을 받아 처절한 고통 중에 죽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고 버림받은 것을 증거하는 표지로서, 그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처절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자기를 십자가의 고통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를 십자가의 극한 고통에서 그를 지극히 적은 분량이라고 감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린 것도 아니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서 저주받도록 내버려 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내버려두사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죄인들을 살리는 대속의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철저히 신뢰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 극한의 고난 중에 조금도 고통을 감하여 주지 아니하고 그에게 주어진 고난의 무게를 예수님께서 고스란히 홀로 다 담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 고난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우리 주님을 철저히 신뢰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당한 고난을 조금도 감하지 않고 끝까지 철저하게 고스란히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열한째 아들 요셉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 또한 고난 중에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였지만 그는 점점 더 깊은 고난 속으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도 모자라 그는 그곳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절대로 다시 나올 수 없는 신세로 떨어졌습니다. 그가 다시 나올 수 있는 반짝하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가 도움을 주었던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년을 보냅니다. 아버지 야곱에서도 사랑받던 17살 나이에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먼 타국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온 후에 30세까지 약 13년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한 것처럼 그렇게 계속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서 나이 삼십 세에 애굽의 국무총리로 높이셨으니, 그에게 배정된 고난의 분량을 다 채운 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정된 고난의 분량을 자기를 굳게 신뢰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내리실 때에 그 고난을 결코 감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 고난을 당할 만한 아무런 죄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속에서 고난을 배정하실진대, 그 고난 중에 아무리 부르짖어 구원을 청할지라도 전혀 그 고난을 감하지 아니하시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 중에 그러한 고난을 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소아시아 곧 에베소 지역에서 사역할 때에 마치 사형 선고를 당한 것처럼 극심한 고난을 당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극심한 고난 속에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린 후에 고난을 넘겼는데 그 후에 그가 깨달았던 바를 고린도후서 4:7 이하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린도후서 4:7~12)
사도 바울이 극심한 고난을 고스란히 당한 이유가 그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사도의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인데 그로써 그의 몸에도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이 그의 육체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음과 같은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도 그의 몸에 나타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생명, 곧 부활의 새 생명이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그가 당한 육체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가 있고, 그렇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나아가 그가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사도가 그토록 극심한 고난을 고스란히 당한 것도 그가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의 생명과 유익을 위한 대속적 고난, 내지 대리적 고난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1:24 말씀에서 고백한 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는 말씀이 곧 성도와 교회를 위한 사도의 대속적 고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죄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대체불가의 유일무이한 대속적 고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외에도 사도들이나 주의 성도들인 우리 역시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누군가를 위하여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군대 있을 때에 제 부하 중에 단기사병 김태훈 일병이 군 선배들의 구타 때문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 태훈이를 위한 기도를 위하여 제가 김미순 권사님에게 전화 부탁을 했을 때 구역원들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 부대에 새벽예배에 함께 나와서 저와 함께 기도하던 김분선이라는 여집사님이 계셨는데 김분선 집사님이 태훈이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일주일 동안 그 몸이 심각하게 갑자기 아팠습니다. 목이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겪고 온 몸에 반점들이 생기고 온 몸에 힘이 없어지는 등 이유없이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모든 병원들에서 못 고친다고 말하며 장례치를 일만 기다리던 태훈이가 그 다음 일주일 후에 멀쩡해져서 퇴원했습니다. 그 태훈이를 살리려고 금식하는 대리적 고난, 눈물로 기도하던 분들의 이러한 육신의 대속적인 고난이 태훈이를 살려냈다고 저는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수술 후에 갑작스런 면역력 악화로 안면 마비가 와서 힘들었을 때에 김미순 권사님이 저를 위하여 마음 고생을 하며 기도하셨는데, 그 때 권사님의 온 몸에 붉은 점들이 깨알처럼 다 생겼습니다. 그것이 마음 고생한 결과로, 걱정과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의학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저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제가 매우 심각했던 병에서 말끔히 나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대신하여 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고난으로, 혹은 정신적인 고난으로, 혹은 물질적인 고난으로, 혹은 불명예와 수치를 당하는 고난으로 누군가를 위하여 대속적인 고난, 혹은 대리적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겪는 것은 곧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속적 고난을 겪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와 축복과 영광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와 축복과 영광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역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사랑할지라도 때로는 고스란히 고난을 끝까지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삶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속히 끝나기를 바라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고난을 다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같은 고난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스란히 고난의 분량을 다 채움이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외면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림이 아니요 도리어 그렇게 고난을 고스란히 당하는 것이 꼭 필요한 대속적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난을 통하여 더 깊은 예수님의 생명과 축복이 그 깊은 고난을 통하여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당하는 성도에게도 그러하며, 그 고난당하는 성도의 대속적 고난을 통하여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생명과 축복을 넘치게 역사할 수 있기 위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은 깊은 고난을 우리가 겪을 때도 있다면, 그것은 앞서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겪었던 그러한 대속적인 고난의 경우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대속의 고난이 주어질 경우도 있을 때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가장 숭고한 주님의 대속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것이요 그것은 누군가를 정녕 살리기 위하여 꼭 필요한 가장 소중한 고난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묵묵히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계속하면서 그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 계속하여 기도해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