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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1
2024년 10윌은 온전히 유럽에서 시간을 보낸다.
큰아들이 첫 직장으로 대한 교과서 해외 영업부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판 계통 일을 하면서 매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을 다녀오곤 했는데 금년에는 우리 부부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늘 해외 출장을 갔다 올 때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50이 내일인데 아직은 그런 일은 없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금년에는 혹시 그 여친의 자리를 우리 부부가 빼앗았는지도 모를 일,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한편 아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가족 여행을 부모와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울지도 모른다.
집사람이 1998년에 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스위스엔 꼭 다시 오고 싶었고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에서 누나들이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숫가를 산책하는 장면을 보고 같은 흙길을 거닐고 싶다고 늘 말하곤 했는데 아들이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이번 여행을 설계한 것이다.
나는 유럽 땅이 처음이라 모든 것이 새로움이어서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도착하는 날 저녁 한순간에 두려움으로 급변했는데 아들의 건강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바로 지하철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찾다가 먼저 눈에 들어온 에스카레이터를 탔는데 아들이 25kg에 가까운 트렁크를 두 개를 밀고 오르자 삑 소리가 나더니 멈춰 버렸다. 나는 집사람과 함께 작은 트렁크를 밀고 옆의 줄로 끼어들어 탔는데 고지식한 아들은 새치기 안 하려는 마음에서인지 층계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을 찾아 가려고 하는데 한 젊은이가 친절을 베풀어 하나를 들고 올라가자 따라 올라가는 상황이 되었으니 친절이 독이 된 것인가. 먼저 역사 1층에 올라와서 큰 트렁크 둘을 밀고 오는 아들을 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잘 걷지를 못하고 휘청거렸다. '괜찮아'를 반복했지만 얼굴빛이 창백했고 눈이 풀려 있었다. 잠깐 쉬고 간다며 집사람의 지팡이 겸용 의자에 앉아 트렁크에 한참 엎드려 있었지만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양손과 목 주위를 주물러 주며 보니 온 몸이 차디차고 땀투성이다. 위기 상황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들이 가까이 있음을 느끼며 빨리 몸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최선의 행동이었지만 몸 전체에서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었다. 급히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안전 요원한테 달려가서
' Please help me ... patient ... hospital!'
하고 다급하게 단어 몇 개를 나열했더니 아들 있는 데까지 따라와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데 아들이 극구 괜찮다고 해서 두 요원은 철수하고 우리는 역사 로비까지 이동했는데 더 심해지는 것 같아 달려가 도움을 청했더니 다시 와 주었다. 정말 친절했다. 아들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또 전화를 했다. 얼마쯤 기다리니 역 앞에 구급차를 대고 제복 입은 여자 두 명이 와서 아들 얘기를 듣고 혈압을 쟀는데 100 이하로 아주 저혈압이었다. 지팡이 의자에 앉아 아픈 가운데서도 몸 상태가 어떤지 설명을 잘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한국 여인이 다가와 ㅡ영어가 좀 능숙하지 못한 듯한 근무자에게 독일어로 중간에서 보충 설명을 해 주더니 구급 대원의 말을 전했다. 탈수 현상일 수도 있고 가볍게 볼 수 없는 심각한 상태라면서 일단 역 밖에 나가면 의사 만나기가 어렵고 의료 체계가 역 안에서는 비용이 안 나가게 되어 있으니 구급차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라는 권하는 것이었다.
한열이가 구급차로 따라간 다음, 7시까지는 시간이 있다는, 그 친절한 여인과 쥬스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중에 자기 소개를 했는데 왕년의 스키 국가 대표 선수-김나미-로 올림픽도 출전했고 어머니-이정순-는 화가이며 베스트셀러였던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의 지은이란다.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동계 스포츠 계통 일을 하다가 라이프치히에서 한식당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산 지가 5년째란다.
나중에 아들이 살아 돌아와 하는 말이 침대에 누워 부정맥 검사를 하고 좀 쉬다가 혈압을 쟀는데 정상으로 돌아와 링거도 맞지 않고 왔다는 것이다. 얼굴빛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안심되었다.
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그녀의 것은 사진 대신 어머니가 그려준 얼굴이 돋보였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면서, 한국으로 출국하는 아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가 연착해서 이런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말에 더욱 그녀의 친절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헤어진 후 숙소로 가려고 역사 안을 걸어가는데 한 가게에서 나오는 그분과 또 마주쳐 작별 인사를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돌아서서 가는데 걸음걸이며 몸 움직임이 아주 날렵했다.
플랫폼을 24번까지 수용하는 역사-테제베도 눈에 띔, 고전적이고 거대한 철골 유리집으로 비둘기가 날아다님, 비둘기와 전쟁 중으로 비둘기가 앉을 만한 곳은 그물을 치거나 짧은 철사를 꽂아 거북선을 만듦-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자 바로 전차, 트램 정거장이었다. 대중교통의 연계가 아주 효율적이었고 전차 선로가 사방에 깔려 있었는데 전깃줄은 별도의 기둥은 최소로 줄이고 도로 양쪽 건물 벽에 매어져 있어서 도시 미관을 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로 사이는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2차선 도로에서는 버스가 전찻길과 정거장을 함께 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짐-큰 트렁크 둘, 작은 트렁크 하나-이 많아 걸어서 B&B Hotels에 도착했는데 먼 거리는 아니었다. 5박 6일 머물며 시내와 주변 도시를 관광했다.
10월 1일 화요일, 먼저 뢰머 광장 주변과 재래 시장을 방문했는데 과일 가게에 소량씩 진열된 다양한 과일의 빛깔과 모양이 전체적으로 화려한 정물화처럼 보였다. 괴테 하우스는 괴테가 살던 집에 덧붙여 현대식 건물로 박물관을 지었는데 건축미가 뛰어났고 전시물도 알찼다. 괴테가 4살 때 선물받았다는 인형극 무대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었으리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는 읽었는데 그 외에 읽은 작품은 없다. 위낙 괴테를 멀리하다가 만났으니 몇 작품은 더 읽어야 하리. 내가 문학의 신비성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이제 본으로가서 베토벤을 만나는 시간이다. 멀리서 찾아온 나를 맞이하는 그의 표정은 데스마스크로 굳어 있었다. 베토벤의 아주 작은 얼굴과 크고 작은 놋쇠 보청기에서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전시물을 다 보고 마당 한쪽 별채에서 합창 교향곡 동영상을 통해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음악으로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쾔른 성당은 역사驛舍 안 유리 지붕을 통해 깜짝 등장했다. 높게 하늘을 찌르며 서 있는 첨탑이 범상치 않았는데 나가서 올려다보니 그 엄청난 규모-첨탑 높이가 약 150m-와 구석구석 섬세한 마무리-문양과 인물 조각-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성당 입구를 지나자 양쪽으로 타윈형으로 물결치며 두기둥이 높이 솟았는데 점차 안으로 휘어지며 한 점에서 만났으니 이른바 고딕식 건축이었다. 기둥 하나의 지름이 10 걸음에 가까웠는데 수많은 기둥들이 네 개씩 짝을 이루어 뾰족 아치형 천장이 되었는데 기하학적인 균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제 몇 분과 마주쳤는데 체구가 작아 보인 것은 모두가 고개를 쳐들고 보는 건물의 높이로 인함인가. 채색 유리창이 하늘 이야기를 전하고 파이프 오르간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연주한 음악이 건물 구석구석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설계자와 설계도가 있었기에 몇 번 중단되면서도 100여 년 동안의 건축 과정을 통해 완공되었을 것이니 인생은 짧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건축 예술을 통해 상호작용을 하며 문화사가 길게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 옆의 미술관-Ludwig Museum-도 풍성한 전시 작품으로 마음까지 넉넉하게 했는데 건물 자체도 예술품이었다. 피카소의 작품이 아주 많은 것으로 봐서 투자를 많이 하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준고속열차를 타고 하이델베르그역에 내려 20번 버스를 타고 가니 강삭철도가 하이델베르그 성으로 연결되었다. 10.3이 독일 통일 기념일이어서 관광객이 많아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짧은 강삭철도로 이동. 우리 나라 성과는 다른 종류의 놀라움을 선사했다. 우선 성곽이 높고 둘레가 길지 않아 병력이 분산되지 않음으로써 방어가 효율적일 것 같았다. 내려올 때는 돌로 포장된 길인데 중간에 비가 와 나무 아래에서 비를 긋고 쉬다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관광. 숙소에 오니 19시가 지남.
다음날은 라인 뤼데스하임역에 도착하여 선착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인도가 온통 플라타나스 가지로 깔려 있어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인부가 사다리차 바구니에 서서 이파리가 붙은 가지는 남김없이 잘라내고 있었다. 낙엽이 지는 동안 상당 기간 지출해야 할 청소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한 사전 조치인 듯 했다. 인위적으로 낙엽을 재촉함으로 인해 계절에 맞지 않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이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다른 용도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2인승 리프트를 타고 경사지에 조성된 포도원 위를 지나 니더발드 기념비-보불 전쟁 전승 및 독일 통일 기념탑-를 보고 라인강 건너편 평원을 내려다보니 장관이었다. 모래사장은 없고 그릇 가장자리까지 물이 가득 담긴 것처럼 수량이 풍부한 라인강에는 화물선, 유람선과 크루즈선이 다니는데 멀리 지평선이 굽은 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펼치는 듯했다. 다시 리프트로 내려와 유람선을 타고 로렐라이 언덕을 향했다. 양쪽 강안 선착장을 들를 때마다 손님들이 내리고 탔는데 강 중간을 따라 설치된 부표에 하얀 물거품이 이는 걸로 보아 수심도 깊고 유속이 빠름을 알 수 있었다. 강과 산맥이 동행하는데 지그재그로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농로를 조성한 포도밭이 한참 이어지다가 꽤 높은 절벽 위 전망대에서 관광객 무리의 움직임 보였는데 바로 로렐라이 언덕이었다. 우리는 건너편 선착장에 내려 수리 중인 작은 역에서 기다리다가-집사람이 앉아서 '옛날부터 전해 오는 ...' 하고 '로렐라이 언덕'을 불렀는데 가사를 꽤 많이 기억함- 프랑크푸르트행 기차를 탔다.
마지막 날엔 뢰머 광장을 다시 방문했다. 성당 주변 산책 후 재래 시장에 들러 두 번째로 그 유명한 할머니가 직접 만든다는, 소세지를 넣은 빵을 먹고 마인 강가를 산책함.
프랑크푸르트에서 6일을 보내고 이제 우리가 탑승한 비행기-discover 항공인데 저가 항공이어서 비행장 안 버스를 타고 가 트랩으로 오름-는 16시 50에 독일 땅을 이륙하여 바이어-의사이며 저술가인-와 만날 장소인 스플리트로 향한다. 아들은 여행 중에도 틈틈이 노트북을 열고 One Click Agent(Responsive Printing Partner) 관련 업무를 보는데 이번에는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18시 7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공항에 착륙했다. 땅에서는 움직임이 서툴러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진동이 심하지만 일단 하늘로 솟구쳐 올라 날개가 양력을 얻는 순간 진정한 비행기가 되었다가 다시 착륙하면 날개는 새처럼 접지도 못하니 거추장스럽게 흔들거릴 뿐 그 기능을 잃고 바퀴에 의존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의 유무로 이착륙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스플리트의 일요일 아침, 여는 시간 08:00에 맞춰 수퍼에 가는 길에 교회의 맑은 종소리가 길게 그리고 깊게 마음을 울리며 특별한 시간임을 알린다. 여리게 화장한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한 분의 미소가 나그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데 나를 종소리로 이어주는 듯했다.
스플리트 숙소를 떠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2박 하고 숙소로 돌아와 글을 쓴다. 공원 안에 있는 호텔에 묵었는데 숙박비에 입장료, 셔틀버스와 유람선 요금이 다 포함되어 있어서 객실 열쇠고리 보여 주고 투숙객임이 확인되면 입장이 된단다.
도착한 날 늦은 오후, 체크인하고 A~ F 코스 중 F 코스를 돌았다. 공원에 입장하여 작은 배로 바로 호수 건너편 출발점 도착해서 100인승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긴 호수를 가로질러 선착장에 내리니 호숫가로 이어진 오솔길이 정겹다. 흙길이 걷기 편했는데 길이 끊어지면 다리로 연결됐다. 호수나 작은 폭포 위에 놓인, 가는 통나무를 한쪽은 평면으로 깎은 후 못을 박아 만든 다리를 건널 때는 좁기도 했지만 조금씩 휘청거렸고 삐그덕거렸는데 난간이 없어 조심스러웠다. 굵기도 다르고 나무와 나무 사이는 가공목이 아니어서 좁았다 넓었다 일정치 않았지만 자연미가 있었다. 피로감이 쌓인 나무는 새 나무로 간 곳이 가끔 보여 나무다리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안내판 그림으로 호수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강물이 급경사지에 흘러들고 석회석이 침식되면서 넓은 계단식 호수 넷을 이루었으니 호수에서 호수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호숫가-대부분이 석회석임-에서부터 물이 넘쳐 흐르는 지점마다 폭포가 됨으로 인해 여기저기 그 수를 셀 수가 없고 크기가 다양했는데 폭포를 이룬 절벽의 모양으로 인해 대부분 여러 줄기로 물이 쏟아지며 하얀 줄무늬를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주변은 폭포 소리로 가득했다.
여행 기간 동안 메모 겸 카페에 글을 올리고 차차 퇴고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번 여행이 가족이라는 가까움 때문에 오히려 멀어졌던 아내와 아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만나러 가는, 내게는 아주 중요한 여정으로 귀국하면 한 편 기행 소설로 태어나기를 희망합니다.
첫댓글 멋지십니다. 사모님은 좀 힘이 드셨군요. 참 사연도 많았지만 보람찬 여행이네요. 줄거운 여행 마무리 잘하셔요.
참 '강한 여자는 ~~' 김정순씨의 책을 읽고 조금 가슴이 아팠었는데, 딸과 함께 살아가니 다행이군요. 아마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고 갔나봅니다. 아니면 사망했거나요, 인생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월가면 늙은이로 그리고 세상을 바꾸어 가는 게 진리겠지요. 긴 글에서 노익장이 느껴집니다. 여행기도 기대할 게요. 즐거운 여행 게속 되시길~
네
저도 월드컵 때 독일에 갔었습니다
여관에 들어 명함만 소지하면 전철을 무료로 탈 수있고 모든게 편리했어요
전혜린님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를 읽으며 독일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에 낮설지 않는 느낌을 갖게되었습니다
아드님 건강을 웨해 규칙적인 운동을 권 합니다
Evergreen님 풋볼님, 방문 감사!
건강이 만사의 바탕이 됨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여행이 적당한 운동이 되어 건강해져 귀국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자연과 가족을 새로이 발견하여 한 계단 성장한 삶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