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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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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6 04:24
-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라고 바오로는 얘기하는데
이백 주년 성서에서는 ‘의지’ 대신에 ‘원의’라고 번역하고,
이전의 공동 번역 성서는 ‘할 마음’이라고, 영어는 ‘to desire’라고 번역합니다.
제가 다른 번역을 얘기하는 것은 ‘의지’보다는 ‘할 마음’이나
‘원의’로 번역함이 낫겠다는 제 생각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는 ‘하느님의 호의’와 ‘우리의 원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실제로 원의를 일으킵니까?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우리는 주님을 따르려는 원의를 가지느냐는 말입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는 모든 호의를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누가 호의를 베풀어도 거절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 많지요.
누구의 호의는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호의는 싫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애초부터 부담스러운 사람은
하느님의 호의를 따를 생각이 아예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호의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느님은 믿어도 예수는 싫은 사람이 그럴 겁니다.
싫고 좋음을 떠나서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럴 겁니다.
어제 복음에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자기가 장가들어서 응하지 않고,
겨릿소를 부리러 가야 하기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르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주님을 따를 때 요구되는 것들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자녀와 아내 곧 가족과 자신마저 미워하면서,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따르는 것이니
그 호의는 더더욱 따를 원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당신의 호의에 따라 주신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부모는 없고,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것은 호의도 선의도 아니듯이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그 호의에 따라 우리에게 베푸시기에 우리의 호불호가 바뀌어야 합니다.
장가가기보다 천국 가기를 더 좋아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호의에 우리의 원의를 맞추고 입맛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싫고 그래서 원치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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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설날에 네 살짜리 조카가 할아버지에게 두 손 모아 세배하는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손녀딸이 귀여웠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세뱃돈으로 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받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저자인 고모는 조카에게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니 ‘감사합니다’하고 받으면 돼.”라고 말했는데 조카는 딴청을 피우다가 고모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고모, 나 저거 집에도 있거든.”
만 원짜리 지폐가 집에 있으니 받을 필요가 없다는 꼬마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린이가 행복하다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만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미사 후에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줍니다. 아이의 부모는 미사가 끝났으니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아이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사탕 받아야 한다며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탕도 아닌데도, 이 사탕을 받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요? 지금의 자리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습니까? ‘더~ 더~’를 외칠수록 하느님 나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데, 계속해서 ‘더~ 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이 말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껏 살면서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주님을 제일 마지막 자리에 놓는다면 결코 만족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롯한 모든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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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過猶不及)(논어 선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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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일까요?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종 권위가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의 권위’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된 것일까요? 혹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이윤추구가 차지한 까닭이 아닐까요?
가치관이 변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떤 이를 스승을 모시고 싶어 할까요?
또한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는 할까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을 배우고자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대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앞세워’ 배우고자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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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추구해야 할 가치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대립하고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곰곰이,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탑을 세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듯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식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식별의 결과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녀는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다른 것에 앞서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나 자신도 하느님에 앞서 내세우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내 자녀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혹 남의 자녀가 출가하는 것은 환영하고 내 자녀의 출가는 막는 이가 있다면 그 집착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소유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 충만하길 빕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더 챙기고 더 채우는 준비가 아니라 더 내려놓고 더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그분의 능력을 감사히 만나게 됩니다. 비우는 만큼, 내려놓는 만큼 기쁨이 함께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탈랜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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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관에 들어오려면 단지를 통과해야 하고, 단지에는 문이 있습니다. 관리 사무소에서 3달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고 있습니다. 10월 중순에 비밀번호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예전의 비밀번호를 눌렀습니다. 당연히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비밀번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 주변을 보면 ‘비밀번호’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컴퓨터를 시작할 때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요즘은 지문을 등록하기도 합니다. 은행 계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은행에서는 복잡한 비밀번호를 요구합니다. 대문자, 숫자, 영문자, 특수기호를 조합해서 8자리 이상으로 만들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아마존, 넷플릭스, 유튜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메일에도 당연히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의 문을 지키는 겁니다. 아무나 나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정보를 보호하는 겁니다. 나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겁니다.
예전에 서울의 밤거리를 밝히는 것 중에 ‘붉은빛의 네온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에서 십자가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의 죄를 구속하고 구원을 이루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구속과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희생을 통해 인류는 죄에서 구속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둘째,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지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과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며, 이는 모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으로 초대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넷째, 승리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부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과 영광을 상징하는 표식이 된 것입니다. 다섯째, 희생적 사랑과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길이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 희생적 사랑과 헌신의 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도구가 아니라, 구속, 구원, 사랑, 승리, 희생적 헌신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내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 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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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위의 구절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 우리 삶의 최우선권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학연이나 지연 등의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차별도 소외도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차별과 소외가 없는 사랑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시작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을 제한하거나 방해할 수 없음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은 이팔청춘일 때나 하는 거야! 나이 들면 그런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병들고 약해질수록 사랑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특히 사랑은 위기의 순간, 어려운 순간, 꼬이고 꼬인 인생길에 더욱 필요합니다.
사랑은 필요합니다. 사랑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버리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님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스승님이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나를 내어주는 사랑을 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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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는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장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파는 것이 아니라
남이 좋아하는 것을 파는 것이다.-
어느날 예전에 썼던 노트를 보다가 한 페이지에 적혀 있는 위의 문장을 보았습니다.
맞습니다. 장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파는 것이 아닌 남이 좋아할 만한 것을 파는 것입니다.
빗대어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원하는 것만을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집착이고 폭력일 뿐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사랑을 주면 줄수록 내 안에도 기쁨이 가득 차오른다는 사실을…. 만약 사랑을 하면서 피곤하고 지친다면 그 사랑은 방향을 잃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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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늦가을 밤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라는 권고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필리비서 귀한, 아름다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뜰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대로 살 수 있음은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은총이 있어 이렇게 살 수 있음을 봅니다.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으로 단호히 구체적 처방을 주십니다. “누구든지”로 시작되는 말마디에서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제자의 삶의 원리임을 깨닫습니다. 열광하면서 큰 기대를 지니고 있는 군중들에게 꿈을 깨라는 듯 찬물을 끼얹는 듯한 제자직의 필수조건입니다. 값싼 은총도 없듯이 결코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다음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 말에는 비교급이 없기에 이렇게 말합니다만,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은 ‘목숨보다 나를 더 좋아하지 않으면’, ‘목숨을 나보다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으로 바꿔읽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사랑을 우선순위에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강조하는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주님께 대한 이런 열렬한, 한결같은 사랑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사실 이래야 친지들과 자신을 맹목적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밝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무사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으로 친지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평생공부가 주님께 대한 사랑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이런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선물로 주십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민초들에게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연민이 넘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참 엄격한 잣대를 적용합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제 책임의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를 온사랑으로 죽기까지 기꺼이 지고, 끝까지 따라야 비로소 당신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당신의 제자답게 살아야 함을 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운명애(運命愛)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내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합니까? 역시 이런 제 책임을 다하는 사랑, 제 운명에 대한 사랑도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기인힘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이런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은 여기에 둘의 예화를 추가합니다. 당신 추종은 1회성의 이벤트도 아니고 값싼 낭만도 아니기에 과연 끝까지 주님을 추종할 수 있을런지 냉철히 그 성소를 식별하라는 취지에서 망대와 전쟁 이중비유의 예화를 드십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모하게 값싼 감상으로 주님을 따랐다가 유혹에 빠져 도중하차하는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전 성철 큰 스님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백련암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을 속이는 곳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화입니다. 값싼 낭만이나 감상에 결코 착각하거나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역시 깨어 살지 않으면 그대로 세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사실 당대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버림과 따름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자그대로는 힘들더라도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무소유의 정신은, 무집착의 이탈의 정신은, 무욕의 정신은 너무나 절대적입니다. 버림과 따름 역시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여정임을 봅니다.
저의 경우는 모든 보장된 것을 다 내려놓고 수도원에 들어왔기에 마음 해이해지거나 내적으로 무너지려는 순간, “내가 이렇게 살려고 늦깎이로 수도원에 왔나?”하며 심기일전 마음을 다잡고 살아왔음도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전 권정생 동화작가가 어느 스님의 고백을 듣던중 “그렇게 살면서 죄를 지을 바에야 절에서 나오라” 했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한두번으로 끝나는 제자직의 여정이 아니라. 죽기까지 계속될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해야 하고, 한결같이 제 십자가를 져야하고, 한결같이 버림과 따름에 항구해야 하는 평생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주님의 제자직 수행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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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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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5-27)
원수를 사랑 하고 가족을 미워하라는 역설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이제 막 그리스도의 계명을 쫓아 살기로 결심한 햇내기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당황스런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것입니다 ... 그분은 제자들을 영원한 나라로 부르시려고 당신 몸을 낮추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지요. 그 나라는 모든 인간관계를 넘어섭니다.
거기에는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콜로 3,11).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그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람들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이승의 삶을 받쳐 주는 지상의 관계들과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일시적인 삶을 미워해야 합니다. 이것들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태어남도 죽음도 시집 장가도 없는 다른 생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깊이를 헤아릴 수도 알 수도 없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모든 표상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을 영혼 안에서 발견하려면 더해서는 안 되고 덜어 내야만 한다." 이 ”덜어 냄“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 됨 및 단순성과 접촉할 수 있다. 하나 됨과 단순성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깊이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느님 아닌 분. 마음 아닌 분, 사람 아닌 분. 표상 아닌 분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을 무심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마음을 여의고, 모든 사고 활동을 여읜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마음처럼 작동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표상들과 상들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표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매개물들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매개물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가 되지도 못할 것이고, 단순해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은 마음을 여의고, 무심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27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그레고리오 7세 교황과 더불어 시작된 발전은 인노첸시오 3세하에서 교황권을 세계적 세력의 정점으로 이끌었다. 인노첸시오 3세에게서 “교황권은 현기증을 일으켜 견지하기 어려운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제 서구 그리스도교계의 승인된 우두머리는 이미 황제가 아니고 명백히 교황이었다.
1197년에 하인리히 6세 황제가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던 중, 두 살짜리 아들 프리드리히 2세를 계승자로 남겨놓고 32세로 사망하고, 몇 달 후 로마에서는 노쇠한 첼레스티노 3세 (1191∼1198)의 뒤를 중세의 가장 강력한 교황으로 37세의 정력적인 인노첸시오 3세가 이어받았을 때 그것은 갑작스러운 장면의 변화였다. 독일에서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났고, 결국 제국의 붕괴룰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제 교황직이 전 서구교회에 대한 수위권적 지위를 완전히 성취하는 동시에 유럽 사회에서 중앙지배적이며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 훈령」에서 요구하였던 것이, 항상 그레고리오 개혁을 추구한 인노첸시오 3세하에서 실현되었다. 그는 최고의 입법자요 재판관이며 관리자로서의 “전권”을 지니고, 이 최고의 권력을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전 교회에 행사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서구의 그리스도교계와 일치되어 있었으므로, 민족들의 정치적인 운명도 그것과 무관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사상은 일반적으로 진본으로 인정되던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로 뒷받침되어, 교회를 참된 로마 제국으로 나타나게 하여 교황에 의한 세계 지배 이념을 낳았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 정치적인 사고에 깊이 뿌리를 둔 것이었고, 또한 쇄신된 교황직이 서구 그리스도교계를 위하여 느끼던 그리스도교적인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 백성”은 초자연적인 공동체였고, 교회 백성 전체의 초국가적인 공동체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그리스도교계의 우두머리”로서 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그러나 동일한 신앙으로 통일된 서구세계의 머리요 지도자가 되었다.(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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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누구든지 자기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참으로 많은 사람이 여행을 즐기고 저 또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많은 사람이 국내 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에 따라 텔레비전에서도 여행에 관한 프로그램이 참 많습니다.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에는 여행에 대한 유명한 글귀가 나옵니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 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간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 못한 반면 더욱 신속히 나타난다.』 이처럼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주며,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합니다. 결국 루카치가 표현했듯이 『소설이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듯이, 여행은 궁극적으로 지금의 안일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기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찾으면 그 길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길이 아니고, 그러기에 여행은 끝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식사 초대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군중들과 함께 길을 떠나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기에 이 여행은 여타의 다른 여행과 성격이 전혀 다른 죽음을 향한 여행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길을 가는 데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으로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저 역시도 여행에 많은 이들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단순히 여행뿐만 아니라 인생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었던 군중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으며, 어떤 의도에서 동행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동행同行의 의미는 ‘일정한 곳으로 길을 함께 가거나 오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일정한 곳, 예루살렘으로 길을 함께 간다고 해서, 그들의 여행 목적이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행하는 동안 필요한 사람은 단지 함께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꿈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 필요한 사람은 당신이 이미 시작한 꿈을 함께 공유하고 실현해 나갈 추종자입니다. 추종追從의 의미는 ‘뒤를 따라서 좇아가는 것’으로, 이는 곧 파스카의 여정을 함께 따르고 쫓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에서 추종, ‘따라가다’의 의미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마르3,13참조),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꿈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끊임없이 떠나고 버려야 하는 이탈과 포기의 여정입니다. 이 여정은 장미밭과 같이 화사하고 아름답고 낭만적이 길이 아니라 가시밭을 통과해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 던져야 하는 십자가 길입니다. 이러한 여정은 일명 제자도弟子道, 곧 예수의 제자됨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과 동행으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예수님의 꿈을 함께 나누고 실천할 제자를 모집하고 선발해서 교육하는 여행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고 모든 이를 초대하지만, 이 초대를 응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운 과정과 기간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하는 힘듦과 어려움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14,28) 그리고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14,31)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서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즉,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먼저 앉아서 헤아려보지 않겠느냐? 지극히 평범한 표현을 통해서 지원자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여러 어려운 과정을 극복할 수 있을지 먼저 심각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숙고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지원자가 참으로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기도 가운데 생각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라고 못 박듯이 표현한 추종의 기본 정신인 자기 부정이며, 이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제자 됨의 요건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라 곧 주님을 따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십자가(=가족이나 사람과의 인연의 끈, 세상적인 욕심과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구, 미성숙한 성격이나 기질, 고집, 교만, 이기심 등)로 작용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겠지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자유롭게 의연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자신과 싸우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추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추종의 여정은 단지 눈에 보이는 길만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은 내적 여정으로 이런 여정은 늘 모험과 위험함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참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참된 자기를 만날 때만이 그 길에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되고, 참 생명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길 곧 제자 됨의 여정을 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길보다 더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진리를 만나고 그 진리가 모든 묶임에서 자유롭게 하고, 또한 생명을 충만하게 한다면 누가 이 길을 따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따르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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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오로지 자신을 철저히 내어놓는 그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41105. 22:04 ㅣNo.177353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 될 수 없다. 또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이 역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정말 황당하다. 마치 가족을 멀리해, 형제자매를 미워해야만 제자가 될 수가 있다나.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리라.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누구나 가족에게는 기대를 건다. 자녀들에게서도 희망은 찾는다.
예수님께서는 사랑보다는 조금 다르게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단다.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시다니 다소 의아하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게 아닌,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맺어 주신 가족은 소유가 아니다. 관계이다. 가족이 주는 십자가는 작게 보여도 쾌나 무겁다. 사랑의 관계이기에.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게 십자가이다. 자신 뜻만을 고집하다보면,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십자가이다. 다투고 멀어지는 이유이다. 내 뜻과 네 뜻의 공통분모를 찾아보자. 그리고 그 공통분모를 예수님 뜻에 일치시키려 애써 보자. 그게 삶의 즐거움이기에.
누구를 따른다는 말에는 ‘순종’(順從)과 ‘순명’(順命)이라는 말이 있다. 그게 같게 보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난다. 순종은 좇아서 따르는 것, 순명은 명령만을 따르는 것이다. 순종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면이, 순명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게 다르다. 주님 따를 때에는 순명보다는 순종 쪽이 더되어야 될 게다. 어쩜 순종은 아이가 부모를, 순명은 종이 주인을 따르는 것이기에.
우리가 주님께 순명보다 더 순종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분을 따르려면, 역시 스스로 모든 걸 훌훌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 사실 예수님 제자가 되려면 그분을 끝까지 따를 각오가 있어야 한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도 안 되며, 세상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끊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고 따르자. 곧 우리 삶에서 그분만이 첫째가 되고 가장 중심이 되도록 하자. 그러면 은총이 언제나 함께 해 줄게다. 이처럼 그분 뜻이 언제나 먼저다.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고 싶을 때, 주님 가르침을 더 많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하늘의 기운이 안내를 하리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동의와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 제자가 되려면, 내가 포기해야 할 것과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살피자. 하느님이 첫 자리 차지하도록 하자. 이제라도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자.
사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또 그분 마음에 어쩜 들 수도 없는 이들이 될 수도.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호의가 필요하기에, 먼저 우리의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며 하느님과의 화해를 꼭 청해야만 할게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오직 한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호의에 기대며 자신을 철저히 내어놓는 그것뿐 일게다. 지금껏 자신의 출세만을 삶의 이유로 여겼다면, 이제는 예수님 가르침으로 온 마음을 무장하자. 그리하여 그 안에 숨겨졌던 주님 뜻을, 정말 마음을 다해 열심히 찾아 실천하자. 십자가 뒤에는 꼭 부활이 있다. 그러니 순명보다는 순종으로 그분만을 따르자. 그게 부활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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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는 윤리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것’은 마치 동방 박사를 그리스도에게 안내한 별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요한 17,15-16 참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마태 5,13-16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시류를 거슬러 가십시오.’ 세상 논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편협한 관점에서 자유로워져 사회의 비판적인 양심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프란치스코, 제36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1.11.21. 참조).
부의 분배, 공무 절차, 사회 갈등, 낙태, 환경, 기후, 전쟁, 난민 등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비인간적이고 물신 주의적인 관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보통 이러한 시류 안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맺는 모호한 타협을 거부하고, 시류를 거스르며, 어두운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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