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8
7월4일[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fAIZWn6DLE
[서울대교구 김준휘 토마스데아퀴노(논현동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제게 있어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실려 온 중풍병자’ 스토리에 대한 묵상은 손에 잡힐 듯이 실감이 납니다. 스스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처지를 저도 200퍼센트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저도 한동안 꼼짝 못하고 똑바로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몸에 미사도 나가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하니, 일어나긴 하는데,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만 5분이 족히 걸렸습니다. 양말 신는데 5분, 옷 입는데 5분, 최소한으로 씻는데도 5분...평소 1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10분 이상 걸렸습니다.
참으로 기기 막히고 비참해지더군요. 이게 과연 사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삶의 질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닥 체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니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지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은혜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되다보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주님 자비 아니라면 나는 정말 비참한 존재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상 인자하신 한의원 원장님께서 “이 몸으로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어요? 마음 넓게 갖고 조금만 참으세요. 꼭 낫게 해 드릴께요!”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동료 인간 존재 안에 굳게 현존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고통만이 전부였던 중풍병자가 은혜롭게도 치유자 예수님과 대면하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환우를 향한 가족들의 큰 측은지심,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치유를 향한 환우의 강한 의지가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춥고 어두운 긴 죽음의 터널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화로이 구원의 창가에 앉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죽음 같은 오랜 병고, 그것이 한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까지 잘 견딘 결과 이제 참 하느님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 총체적 치유,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 구원을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침내 은혜로운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병생활 뿐이었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끔찍한 고통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 같지만, 그래서 쉽게 체념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예고 없는 방문, 성령께서 주시는 뜻밖의 선물인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내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의사도 내놓은 사람이어서,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내게 좋은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눈물을 거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육체와 영혼 모두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sIK1FmDASk
++++++++++++++++++
<사람을 치유하는 이가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내 눈을 바라봐.”라고 하며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던 허경영 씨가 지금 성추행 등의 혐의로 피소되었습니다. 허경영 씨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없다면 왜 수많은 사람이 수백억씩 바치면서 자기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했을까요? 혹시 마귀도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는 곧 당신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며 이분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이 사탄의 힘으로 이루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을까요?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은 러시아의 신비주의자이자 자칭 성자로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차르 니콜라스 2세의 가족과 가까워져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렸던 인물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막을 내렸습니다.
라스푸틴이 러시아 왕권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차르의 혈우병 아들인 알렉세이에 대해 치유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던 황제와 왕비는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치유 능력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은 부패하고 부도덕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치유의 능력이 있는데 사악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알렉세이는 혈우병으로부터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다시 아파서 내쫓았던 라스푸틴을 다시 불러드려야 했습니다.
사탄은 치유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과 능력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에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느님과 사탄은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사탄은 무능하고 하느님은 빛이시고 사탄은 어둠이고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탄은 증오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치유의 기적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그린 마일’에 보면 험상궂은 흑인 살인범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살인범일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친절하고 착하고 심지어 치유의 능력도 있습니다. 사형수였던 그를 지키던 간수들은 그의 면모를 보며 사형수일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수 없어 그가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이의 가족에게까지 치유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라인드’에 보면 자신을 피하는 못생기고 나이 많은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려고 자기 눈을 찔러 눈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 피를 흘려야 합니다. 내 피를 흘리는 이가 타인에게 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악하다는 말은 모기란 뜻입니다. 모기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려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보여주시기 위해 치유의 기적을 택하셨다면, 치유의 기적은 당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믿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서 치유의 기적이 나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단순하게 믿어서 스트레스가 사라져 병이 낫는 정도는 안 됩니다. 루르드처럼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치유의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이들에게서 이런 기적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치유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먼저 성화 되어야 교회가 성화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예부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거룩한 모습을 보이면 공동체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에 있을 때는 사제성화의 날을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교구는 사제성화의 날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이하는 사제들을 축하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도 8년 전인 2016년 사제성화의 날에 은경축 축하 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음을 알았지만 덤덤하게 지냈습니다.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제가 속했던 브루클린 교구에서도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사제성화의 날에는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10시 미사를 마치고,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5개월 전에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시는 할아버지를 위한 봉성체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두 분은 먼저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5개월 동안 성당엘 못 오셨으니 ‘주님 부활 대축일’도 참례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셔 드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왕은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파병을 결정하였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한산, 노량에서 일본의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은 일본의 도자기 생산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일본 근대화의 기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가 유럽으로 수출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보다 먼저 조선이 근대활 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명하기도 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막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입니다. 율곡 이이는 일본의 힘이 강해질 것을 예측했습니다. 강해진 일본은 조선을 넘보리라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십만의 병사를 양성하자고 했습니다. 무너진 산성을 개축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율곡 이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조선은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살펴본 수신사들은 엇갈리게 보고했습니다. 한쪽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야욕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할 만큼 강인하지 않다고 보고했습니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 조선의 정부가 율곡 이이의 충정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수신사의 보고를 받아들였다면 임진왜란을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조선은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왕과 예언자들은 아모스 예언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아모스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성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전을 빼앗긴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였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말씀하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가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것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3-26) 소돔 땅을 두고 시작된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이 대화에서 의인의 숫자가 쉰 명에서 열 명까지 점점 줄어듭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18,3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시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당신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미사를 드릴 때, 신앙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이 신비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찾으며 십자 성호를 긋는 순간, 그와 동시에 죄인들을 향한 자비와 용서도 함께 쏟아져 나옵니다. 기도가 메말라 갈 때마다, 신앙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이 신비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찾으며 드린 그 한 번의 기도 안에는 누군가가 죄를 용서받게 되는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 모습 안에는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아멘.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이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또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넓은 뜻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나를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구원받는다는 것을), 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죄의 용서’는, ‘구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이고,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병자가 실제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무슨 죄 속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여기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그의 병이 죄 때문에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튼 회개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합니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는, “그들의 믿음과 회개를 보시고”라는 뜻인데,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병자도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과 회개입니다. 남들이 나를 위해서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나 자신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기도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는데,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으려고 애를 쓴 것은, 그곳의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의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창세 18장).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간청을 받아들이신 것은, 혹시라도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있다면, 그 의인은 구해 주시겠다는 뜻이지, 죄인들을 그냥 용서해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예를 잘못 든 것이기도 하고, 설명 자체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고, 소돔과 고모라는 그냥 멸망했습니다. 죄인들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기도로 용서의 은총이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2) 율법학자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나는 너를 구원한다.)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생각 자체는 옳지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하고, 또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모든 권한을 주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마태 28,18)>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사람들을 구원하는 일)과 불치병을 고쳐 주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고, 죄를 용서해 주고, 그를 구원하는 일은, 율법학자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었다고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좀 더 생생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된 배경 같은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권능을 통해서, 당신이 용서와 구원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3)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올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왔지만, 치유의 은총을 받은 뒤에는 스스로 일어나서 혼자 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일은 ‘구원의 시작’이고, 이제 그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회개도,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몸소 행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시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늘 나라의 구원과 기쁨을 이 땅에 실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졌고(레위 26,16; 신명 28,22.35 참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마음속으로 단죄합니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와 치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가치론적으로 본다면 육체의 치유가 죄의 용서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신 다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니, 그가 치유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군중은 몹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이 같은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신 기적 사건으로 우리는 죄와 질병, 고통과 죽음까지도 모두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강신모 프란치스코 신부님]
<한 집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는 것과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 물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대사제조차도 심지어 메시아조차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유하심으로써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보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과학을 발전시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처럼 서로 용서할 능력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는 능력은 계속 개발해 왔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 서로 용서하는 능력은 그냥 버려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전했어도 사람들은 욕심 부리고 자연을 파괴하고 서로 미워하고 스트레스 받으며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겉으로는 발전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비틀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명이 무절제한 욕심과 증오로 파괴되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용서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
[원주교구 홍금표 알비노 신부님]
<닫힌 마음>
오늘 복음은 사죄권을 놓고 벌어지는 율법 학자들과의 대립입니다. 예수님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에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며 반감을 표시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쉽겠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는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함으로써 당신의 능력과 함께 사죄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율법 학자들과의 대립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닫힌 마음입니다. 당시의 논리로는 메시아도 사죄를 선언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율법 학자들의 항변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과 논리는 실제적인 사실에 의해 재해석 될 때 의미가 있는데, 율법 학자들은 과거의 논리를 가지고 현재의 실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합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자신들의 논리로 판단합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 쏠린 백성들의 관심과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릴지도 모를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 그리고 예수님의 등장으로 드러날 자신들의 허례허식이 예수님과 대립의 각을 세우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6)
관구 봉사자 소임을 끝내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성요셉 병원에서, 현재는 안성 요양병원의 원목 신부로 저는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중풍병, 편마비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어려움과 힘듦을 익히 알고 있기에 오늘 복음의 내용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인생은 홀로 걷는 것이 아니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길에서 함께 걸어갈 동반자나 도반이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이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 ‘전우신’이란 분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분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간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고 있는 인생길의 동반자와 도반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사실 중풍병을 앓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오는 그는, 몸은 비록 불편하였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자신의 불행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으며, 그래서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을 앓는 그 사람을 동네 이웃들은 오래도록 지켜보아 왔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고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자비로운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중풍병을 앓고 있는 이의 믿음이나 간청이 아니라 순전히 그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하지 않으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2)하고 말씀하신 것은 당대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질병이나 불행은 죄의 결과하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풍병의 원인인 죄를 용서해 주었기에, 죄의 결과인 중풍병도 치유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고서 율법 학자들은,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을 목격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9,3)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과 중풍 병자의 치유를 목격하면서 시비를 거는 율법 학자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사람을 보는 시선의 차이이며, 이는 자비와 거룩함의 차이라고 봅니다. 율법 학자들은 몸은 비록 건강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결코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일그러진 마음에서 세상을, 이웃을 바라보는 ‘악한 생각’(9,4참조)으로 넘쳐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6)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부디 그가 치유와 치료받고 난 뒤에 율법 학자들처럼 혼자 걷지 않고, 치유 받기 이전의 자신처럼 혼자서는 걷지 못한 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에게 향한 바램입니다. 전우신은 말합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함께 잘 살아야지. 그게 재미난 삶인겨.”라고, 그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군가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치유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떠나온 삶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들 곁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동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4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저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1999년 1월 28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지금까지도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했을까요? 당연히 안 했습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신부는 독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처럼 신앙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 또 사회적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기에, 이제는 사제로 독신을 지킨다고 해도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에 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이나 결혼했고, 세 번 모두 헤어졌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세 번이나 결혼하셨냐고 물으니, “다 다른 줄 알았어요.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살아보니 똑같더라고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아내가 문제라는 생각에 이혼하고 결혼했지만, 다음 아내도 또 다음 아내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결국 누가 문제일까요?
한 사람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제대로 지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낸다고 하더군요.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따라서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좋은 관계인가요? 나쁜 관계인가요?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 병자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에 맞게 산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서 치유를 받습니다. 어쩌면 중풍 병자와 데리고 온 사람들의 관계를 본 것이 아닐까요? 중풍 병자인 자신을 데리고 올 정도로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면 주님 당신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라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더불어 죄의 용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하고, 또 죄의 용서라는 특별한 은총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나 역시 주님과 친밀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웃에 대해 계속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나 역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걸작품>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 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마태오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믿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희망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사랑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보듬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나누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일으켜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살려요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
"치유의 기적"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 19,8)
이런저런 예화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다산 어록집은 도반 사제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제가 아끼는 평전중 하나가 다산 정약용 평전입니다. 아마 5000년 한국 역사중 최고의 학자가 백성을 참으로 사랑했던 다산이며 평전의 제목도 ‘백성을 사랑한 지성’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어른이란 먼저 등을 보여주고 길을 여는 존재다. 막혔던 길이 뚫릴 때 비로소 즐거워한다.”<다산>
“선비는 세상의 근심에 앞서 근심해야 하고, 세상이 다 즐거운 뒤에 즐거워해야 한다.”<주희朱熹의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이런 어른이나 선비가 진짜 어른입니다. 참으로 보고 배울 참 어른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저절로 나이 먹어 어른이 되어 가는 게 아니라, 삶의 지혜와 모범이 축적됐을 때 큰 그늘과 큰 산같은 배경의 어른이겠습니다. 어제 이민자들이 바티칸의 교황님을 만나 느낌을 말한 한마디가 평범하나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와 같았다.”
아마도 종파를 초월하여 금세기 최고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어른이 프란치스코 교황일 것입니다. 날마다 그분의 일정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분들을 만나고 또 말씀을 주시는지 참 불가사의입니다. 그대로 주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요즘 세인들 대부분의 관심은 건강일 것입니다. 얼마전 받은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잘 지내시는지요? 매일 보내주는 강론이 없으면 아프신가 걱정이 되요.”
“미안합니다. 착각했네요. 보낸줄 알았습니다.”
“건강만 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미사봉헌의 대부분도 건강을 기원하는 생미사입니다. 자주 회자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인생 초년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 싸운다는 말마디입니다. 정말 노년을 맞이한 많은 분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병마와의 싸움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말하는 노년의 품위 유지의 우선 순서가 있으니,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진정한 건강을 위해서 믿음 다음에 건강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른중의 어른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 주인공인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주님처럼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고 희망과 꿈을 주는 빛같은 이들이 정말 어른입니다. 오늘 본기도 말씀대로 오류의 어둠속을 걷지 않고 진리의 빛속에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이 진정 어른입니다. 새벽 산책때 마다 예수 성심상 앞에서 바치는 기도도 생각납니다.
“주님,
슬픔과 좌절이 있는 곳에 위로를 주시고,
전쟁과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주시고,
아픔과 질병이 있는 곳에 치유를 주소서!”
예수님을 닮아 위로와 평화, 치유를 주는 이들이 진정 참 어른입니다. 오늘 복음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복음서의 내용도 대부분이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살려주시고 먹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 후에 주님은 온전히 하느님 나라 선포와 더불어 민초들의 심신의 치유에 온힘을 다하십니다.
주님을 참으로 감동시키는 것이 믿음이요 오늘 복음에서도 중풍병자 동료들의 우정의 믿음이 빛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이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아는 행려자가 된 형제가 생각납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모두가 피하며, 찾아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삶의 중심도 의미도 방향도 희망도 없으니 참 막막할 것입니다.
이런 고립단절의 혼자만의 삶이라면 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중풍병자의 동료들은 간절히 제대로 주님을 찾았고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은 중풍 병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요! 예수님 자주 쓰시는 말마디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라”입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세상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하지만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경문중 한 대목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하셨으니, 저희 죄를 보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새삼 교회의 믿음에 날로 깊이 뿌리내릴 때 성장, 성숙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믿음에는 이미 회개가 전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동료들의 믿음에 감동하신, 죄를 용서받기에 충분한 이들의 믿음을 본 주님의 과감한 용서 선언에 이어 치유 선언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일어나 내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으니, 주님을 만나 온전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중풍병자입니다. 이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게 된 치유받은 중풍병자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만나 죄를 용서받고 치유받아 파견되는 우리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죄로 병들면 몸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심신의 치유, 영육의 치유에 참된 회개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몸의 치유에 앞서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으로 튼튼하고 건강해야할 정신이요 마음이요 영혼입니다. 이래서 영육의 치유에 앞서 죄의 용서를 위한 고백성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와 하느님의 예언자 아모스와의 대결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참 어른이자 예언자인 아모스의 권위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다음 대목이 보여줍니다.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에 이런 솔직하고 과감하고 통쾌한 고백입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는 이제 주님을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사명을 다하며 제대로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죄를 용서 받고 치유의 구원을 받아 이제 이렇게 온전한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제자리에서 제대로 치유와 구원의 기쁨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금보다 순금보다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시편19;9.11)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셔도 받아야 내 것>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당신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율법 학자들과 권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주님께서는 용서의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이 되신 당신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비단 주님만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뒤에 군중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권한을 주신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본래는 하늘의 하느님께만 있는 것인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 권한을 땅에까지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신 당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에게도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권한은 본래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오히려 용서받아야 할 주제지요.
그러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권한을 받은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이로써 인간인 우리가 신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광스러운 권한을 주심에 감사하지 않고, 이 권한을 포기하고 우리는 용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는데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이 겸손과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처럼 용서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청하면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다시 하느님 사랑과 용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그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군중이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받는 존재들인데, 하느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우리가 받지 않으면 그 무슨 소용입니까? 늘 그렇듯 하느님께서 주셔도 우리가 받아야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능력도, 용서의 권한도, 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넙죽 받아 하느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의 아들들이 되기로 결심하고 용기를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ㄷ)
<구원의 도우미!>
오늘 복음(마태9,1-8)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중풍 병자는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간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2ㄷ.6ㄷ)
그러자 중풍 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가고, 이 일을 본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 몇 사람은 예수님의 이 구원 행위를 보고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
예수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병을 죄인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를 씌워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두 가지'를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확실하게 믿고 있고, 그리고 이 믿음이 나를 부활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가?'입니다. 또 하나는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런저런 이유로(영육의 아픔으로)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는가?'입니다.
나의 구원이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구원받으면 너를 또한 구원받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ㄴ)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오늘도 너의 구원을 위한 '작은 도우미'가 되어 봅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iba8bRw4aA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마태 9, 2)
좋은 이웃들의
믿음과 좋은
공동체의
믿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믿음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약한 이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어제의 믿음이
아니라 오늘의
믿음이
더 간절하듯
공동체의 믿음이
우리의 오늘을
다시 살립니다.
공동체의
믿음으로
우리의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그만큼
믿음의 사람과
믿음이라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사람 사이에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서로에게서
믿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닌 용기와
용서로 다시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가슴 아픈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길들은
우리의 힘만이
아니라
이웃들과
공동체의
믿음으로
깊게 이어지는
길들입니다.
마음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오늘이 되고
믿음은 돌아갈
우리의 집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공동체에 속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일어나 평상을
들고 걸어갑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믿음의
기쁜
오늘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