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목사님께 드리는 편지
오래 기다리시고 저를 참아 주시고 구원의 좁은 길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 드리며 저의 구세주 예수님께 먼저 감사합니다. 저는 100퍼센트 목사님 글 보며 다 믿고 제 삶에서 적용하고 더 예수님 사랑합니다.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현직 교사입니다. 교실에서도 성령님을 힘입어 복음 전하지만 저는 미친 교사라는 쉬쉬하는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들도 언젠가 때가되면 믿을 자들은 믿고 깨닫고 회개하겠지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은 못갑니다. 저도 인본주의에 사로잡혀 종교인으로 30년 살다가, 병든 몸 되어 성경을 밤낮으로 보는 중 찾아오신 성령님 은혜로 확 뒤집어진 후, 새 영 받고 5년 통곡 회개로 지난 죄의 생활 청산하고, 이제 3년째 감사하는 눈물과 기도로 가족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음을 슬퍼하며 간구하며 삽니다. 저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는 날마다 저를 살게 하시는 힘이 되고 영 혼 육이 잘 되게 이끄십니다. 쉰목사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저는 너무나 좋고 감사합니다. 30년간 다니던 교회는 천국과 지옥도 모릅니다. 피상적인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만 주님 사랑해요라고 습관적인 고백을 하는 앵무새같은 교인들이 강대상에서 나오는 세상 설교와 돈과 성공을 추구하는 설교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2012년 12월 가족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했어요. 제게 퍼부어지던 고함과 비난을 묵묵히 당하면서, 저는 성령 충만하고 예수 외치는 작은 지하 교회를 찾아 새 삶을 시작했답니다. 고난 고생 핍박 등등 참 힘들지만요, 예수님보다는 쉬워요. 불뱀에 물린자가 놋뱀을 쳐다보는 순종의 마음으로 살아난 것처럼, 겸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제 모든 문제에서 해방됩니다. 쉰목사님 카페에서 가끔 제 자식들 중보기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 영은 그들 속의 귀신들이 너무나 싫어서 대적하느라 탈진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과 쉼 없는 기도로 충전합니다.
영성학교 하루 시간표처럼 계속 기도합니다. 매일 순간마다 틈 없이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은 세상 즐거웅과 가히 비교할 수 없답니다. 돈 따르는 남편 시어머니도 제 동생도 하루 속히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건강하시고 늘 승리하셔서 더 많은 사람들 깨닫고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주님과 늘 동행하시는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서울의 좋은 밭 올림
위의 편지는 필자의 칼럼에 댓글 형식으로 쓴 것을 올려 드린 것이다. 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필자의 칼럼들이 인터넷 카페에 실리고 있다. 그러면 적지 않은 이들이 댓글로서 필자의 주장을 힐난하며 비난하고, 심지어는 인격을 모독하며 폄훼하고 있다.
힐난, 비난, 인격모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칼럼을 퍼 나르지 못하도록 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라도 필자의 칼럼을 읽고 돌이켜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해서이다.
사실 필자의 구원론과 성령론은 우리네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필자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요지이다.
이 부분에서 신목사님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고 나머지가 다틀렸다고 주장하시면서 그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주장에 화가 나서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통해 글을 올려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지금의 사역으로 진행되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비난과 수모를 참아가며 칼럼을 쓰고 있다.
필자의 주장의 핵심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령의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증거나 능력, 변화와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귀신을 �i아내며 고질병을 치유하며 이적과 기적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부족한 성품에서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돈과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인생관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결심하는 인생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위의 견해는 우리네 교회들이 모두 추구하는 바입니다.
위의 견해를 들고 교회를 가셔서 이런 견해에 대해서 물어보십시요.
아마 모든 한국교회가 이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증거와 변화와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내주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이 없다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성령의 증거와 변화와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내주를 인정하지 않고" 이 문장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혹시 신목사님은 아니신지요?
성경에서는 사람은 알 수 없고 가늠만 할수 있다라고 나와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더라.
요한복음 3장 8절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1분짜리 영접기도를 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들어오시고, 주일성수와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고 있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필자의 주장은 기존 교회의 구원론과 성령론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근거로 두고 있지만, 우리네 교회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교단 신학자의 교리를 근거로 두고 있는 것이 다르다.
위의 말씀의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두아티라에 나머지 사람들,
즉 이 교리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자에게 말하노니,
내가 어떠한 다른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겠노라.
요한계시록 2장 24절
사데에 있으면서 자기들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들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2장 4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처럼 교회는 다양하며,
하나의 교회안에서도 다양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다. 성령이 누구신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사도들과 120여명의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 끝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들은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불구를 일으키고 고질병을 고치면서 영혼을 구원하고 초대교회를 세워나갔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그런 기적과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신학자의 말을 앞세워서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 신학자와 그 교단에 가서 이야기 하시길 바랍니다.
이 문제로 이미 한국교회내에서도 논쟁이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없어질 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눅21:33)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경멸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보다, 교단신학자의 교리를 가르치는 목회자의 말이 위력적이다.
맞습니다. 한국교회의 목사숭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무서워하여 벌벌 떤다면 목사에 대한 숭배가 있다고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고기 맛을 알 것인가?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가 되어 교인들을 가르치는데, 어떻게 성령의 임재가 내려오는 기도를 가르치고 훈련시킬 것인가?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도들이 새로 입교한 교인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로마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후에, 기독교는 기득권층의 종교가 되어 종교지도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했다. 그 뒤로는 성령이 임재 하는 기도훈련의 맥이 끊겨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교인들의 영혼은 건조하고 냉랭하며 삶은 고단하고 팍팍하다.
그러나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여전히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에는 관심이 없이, 교회에 모여 먹고 마시고 낄낄거리고 있다.
이 부분은 성경 어디를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훈련이라는 말이 쓰일 만한곳이 있습니까?
훈련이라는 단어는 어떤 기능을 타인의 도움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검색해보았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형제가 사로잡혀갔음을 듣고
자기 집에서 태어난 훈련받은 종 삼백십팔 명을 무장시켜,
그들을 추격하여 단까지 가서,
창세기 14장 14절
위 말씀은 군사 훈련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대로 쓰인 경우입니다.
불경스럽고 늙은 부녀자들의 꾸며낸 이야기들을 버리고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
디모데전서 4장 7절
여기서는 스스로의 훈련을 말하고 있습니다.
몸의 훈련은 유익이 적지만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여
현재와 미래에 생명의 약속을 소유하게 하느니라.
디모데전서 4장 8절
여기서의 의미는 몸의 훈련 즉 육체의 단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장 11절
위 말씀의 훈련은 하나님의 징계로 훈련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서 훈련의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혹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의 좁은길의 삶에서 타인의 도움은 필요하나 한정적입니다.
성경어디에 기도를 훈련한다는 내용이 있는 지요? 기도의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교회가 거대한 친목단체가 된 셈이다. 이들의 운명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땅에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살다가 죽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맹인이 맹인을 이끄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마지막도 일반화의 오류로
숨어있는 한국의 진짜 교회에게는 억울한 누명을 던지시고 끝을 맺으시니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