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세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축령산 앞에 있는 한 재활요양 병원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 찬양을
매일아침 의사선생님들이 회진을 돌기 전
환자들과 로비에서 손뼉을 치며 부릅니다.
이 요양병원의 내과과장이셨던
한원주 원장님은 손뼉 치기와 노래부르기가
건강에도 좋고 치매 예방에도 좋기때문에
2020년 9월 30일 94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향의 봄”과 함께
찬양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오늘은 평생을
환자들과 동거동락하시며 사셨던
(고) 한원주 원장님의 삶을 나누며
묵상하려고 합니다.
1926년에 태어나신 한원주 원장님은
딸 여섯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는 호적에도 안올거나
여자가 똑똑하면 팔자가 드세다,
많이 배우면 시집을 못간다는 등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원장님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독립운동가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원장님의 어머니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무식하면 당한다,
주변 강국들에게 당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공부를 안해서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라며
여자라도 원한다면
공부할 수 있는데까지 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월급 20원이던 시절 의대 학비 10원으로
남편을 의대 공부를 시켰던 분입니다.
한 원장님은 고려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전문의를 딴 뒤 의학을 공부하던
남편과 결혼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자녀가 셋 있었는데
친정 부모님이 키워주셨습니다.
미국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서
내과에 흥미를 느껴 내과전문의를 따고
10년 동안 근무한 뒤 귀국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귀국 후 개원을 하니 환자들이 수없이 밀려왔고,
그 당시 (의대 학비 10만원이던 시절)
한달에 천만원을 벌 정도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돈벌이에만 매달렸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남편을 잃고 의지할 때가 없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복된 삶을 살았는데
남편을 잃었다고 울고불고 하느냐?
너는 네 주변을 돌아본 적 있느냐?”
“없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무늬만 크리스찬이었던 원장님은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기 시작했고,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결핵퇴치 운동, 콜레라 예방 운동,
한센병 환자와 형무소 수감 환자들,
두메산골 주민들을 위한 무료진료에
힘을 쏟으시다 60세에 병원을
다 정리하시고 다 나누어 주신 후에,
돌아가시기 6개월 전까지도
무료진료를 하시다가
돌아가셨던 아버지였습니다.
한원주 원장님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의학을 공부하게 한 것도
어쩌면 다른 이웃들을 위해 살라는
뜻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기로 한 이후
원장님은
당시 돈을 긁어모았던 병원을 정리하고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버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1982년, 국내 최초로 환자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과 환경까지 함께 치료하는
'전인치유소'를 열어 가난한 환자들의 생활비,
장학금을 지원하며 온전한 자립을 돕는
무료 의료봉사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소외계층 환자들에게
육신의 건강 뿐 아니라
영혼의 건강까지 돌봐주셨습니다.
돈 받고 진료하는 것보다 도우면서 진료하는
무료진료가 훨씬 기분이 좋고 더 행복했다고
고백하던 원장님은
세월이 흘러 아흔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환자를 돌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가족들도 힘겨워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습니다.
요양병원에서 받는 월급 대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했고, 주말이면
외국인 무료 진료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해외 의료봉사도 다니셨습니다.
의사 생활 70년중 40년을 봉사한 삶을
살아오셨던 공로가 좀 뒤늦게 알려져서
2017년도에 생명존중 정신으로 귀감이 되는
의료인에게 주는 “성천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상금이 무려 1억원이었는데
어려운 이웃과 NGO단체에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
돌아가시기까지 주5일을 병원에서 숙식하며
회진하면서 자신보다 젊은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걷고 노래하며 건강하시라고 권면했습니다.
작년 9월 30일, 영원히 환자들 곁에서 함
께 해주실 것 같았던 한원주 원장님은
별세 직전까지도 직접 회진을 돌며
하루 1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셨다던 원장님은
갑작스레 노환이 악화되어 하늘의 별이 되셨습니다.
한 원장님은 임종 전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남긴
한 원장님의 평생의 불우 이웃 섬김과 나눔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 감동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Photo by KBS1TV / 경기도 시흥시 관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