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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조성국(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
1. 새로운 의미의 주일신앙교육
안식일 혹은 주일 기독교공동체가 회집하여 예배하고 신앙을 교육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기독교는 그 본질에서부터 교육을 요청하는 교육공동체의 신앙이고, 주일은 그 신앙공동체가 공적으로 모이는 시간이므로 주일에
신앙교육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왔다.
구약에서도 안식일은 신앙교육을 위해 적합한 시간으로 인정되었고, 신약에서도 초대교회 공동체는 주일에 회집하여 신앙교육을
실행하였으며, 신앙교육을 강조했었다.
교회역사에서도 초기교회시대,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에도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일에 신앙교육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주일학교라는 것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주일에 신앙교육을 실행하였을 것이다.
주일에 교회에서 신앙을 교육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새로운 발상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봉사하고 있는 “주일학교”는 근원적으로는 신앙공동체의 교육적 본질에 연결된 것이지만,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교육공동체가 당면한 새로운 시대적, 사회적 요청에 적절하게 대응하여 학교라고 말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만들었고, 평신도의 활동을 통하여 주일학교운동을 성공적으로 확산시켜,
주일학교를 체계적으로 조직된 신앙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에서 그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주일학교는 1780년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 1735-1811)의 주일학교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2. 주일학교의 역사적 발전
2.1 영국에서의 주일학교운동
2.1.1 주일학교 발생의 배경
주일학교발생은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주일학교의 발생은 직접적으로는 사회적 요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주일학교의 발생을 촉구하였던 요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국에서는 일반보편 의무교육은 다른 유럽의 국가에 비하여 비교적 늦게 시행되었다. 교육은 가정과 교회의 일로 인식되었고,
국가는 교육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는 생각이 팽배하여 모든 국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하였으며,
교회가 설립한 학교들은 라틴어를 중심한 귀족교육기관이었으므로 빈민이나 평민들은 교육에서 제외되어있었다.
보편교육이 국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영국에서 1830년대를 지나서였다. 빈민교육에 대하여는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한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므로 빈민과 노동자를 위하여는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제공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무지가 팽배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와 이에 따른 환경적 악화가 미친 악영향을 들 수 있다. 방직기계의 발명과 증기엔진의 발명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루었고, 이에 따르지 못한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은 사회질서에 가히 위협적이었다.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도시중 하나인 글라우체스터(Gloucester)에는 농촌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포악한 감독아래서 하루 15시간 이상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 극심한 빈부의 격차, 범죄와 악과 부도덕의 확산 등이 이
도시의 특징이었다. 어린이들도 8세가 되면 노동자로서 공장에 들어가 일하였다. 1800년이 지나서야 비효율적이기는 했지만
아동노동자들의 건강과 교육을 보장하기 위한 법령이 겨우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빈민노동자들은 일주일동안 내내 일의 노예가 되어
일하다가 주일이 되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난폭하게 행동하고 싸우며 쉽게 범죄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던 시기가 영국의 18세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구조에서 가정이 교육적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2.1.2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 1735-1811)
로버트 레익스는 1735sus 인쇄업자이면서 글라우체스터저널(Gloucester Journal) 신문편집장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한 이후, 21세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문과 인쇄업을 운영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로버트 레익스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고, 특히 범죄와 감옥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감옥은 비위생적이며 비도덕적인 범죄의 온상이 되어있었으므로 감옥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신문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한 결과 여론을 환기시켜 의회로 하여금 감옥제도에 대한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키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환경의 일시적인 개선은 범죄와 사회적 질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25년간이나 지속된 그의 노력에 대하여
실망감을 느꼈던 로버트는 악과 범죄와 부도덕과 가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지에 있다고 확신하고는 근본적인 치료의 방법을 교육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780년 로버트는 자신이 45세였을 때, 자신의 재산으로 실험학교에 착수하여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휴일인 주일에 학교를 개설하였고, 부인교사를 고용하여 집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핀공장에서 일하는 문제아이들 90여명을 모아 주일아침 10-12시, 오후 1-5시까지 실행된 이 실험학교는 읽기와 쓰기도 가르쳤으나,
유일한 교과서였던 성경을 통하여 주로 인격형성을 위한 도덕훈련과 신앙교육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위생과 청결의 습관을 강조하고, 질서와 예절을 직접 지도하였다.
3년간 실험학교를 경영한 이후, 로버트는 이 운동이야말로 가장 소망스러운 사회개선의 대안임을 확신하여 자신의 신문을 통하여
그 경과와 성과를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가 어린이들에게 미친 영향과 효과는 즉각적으로 확산되어 영국전역에 주일학교운동으로 확산되었다.
2.1.3 영국에서의 주일학교운동의 발전
로버트 레익스의 주일학교운동은 다양한 반대를 극복해야만 했다.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종교에 관한 것을 평신도가 가르친다는
문제에 대하여 우려하였고, 또 주일에 개설되는 학교공부는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된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운동이 교회를 분열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반대하거나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공장주와 귀족들은 교육이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워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불만족하고 반항하도록 자극할런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노동자들과 어린이들이 무지중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겼으므로 반대하였다. 또한 이 운동이 세속적인 즐거움에 대한 자유의 분위기를 방해할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사회는 주일학교를 통한 변혁을 오랫동안 갈망해왔다고 할 수 있다.
주일학교의 발전과 확장의 요인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일학교운동은 감리교창시자인 죤 웨슬리의 적극적인 지지를 통하여 확산되었다. 로버트 레익스가 주일학교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죤 웨슬리(1703-1791)와 죠리 휫필드(1714-1770)의 부흥운동은 영국을 불붙이고 있었다.
웨슬리는 어린이의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소그룹을 구성하여 어린이를 가르치도록 격려하였고,
성인들을 대상으로 신앙교육을 강화해오고 있었다. 단지 조직적인 학교교육과 같은 형식이 아닌 신앙교육이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웨슬리는 로버트 레익스의 주일학교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감리교회의 구조 안에 주일학교를 영입하여 복음전도와 신앙교육에
몰두하였다.
둘째. 주일학교운동에 대한 영국귀족층의 인도주의적 호응은 주일학교의 자리매김과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여왕 샤롯트는 로버트 레익스의 주일학교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금을 제공하면서 격려하였고, 뒤이어 신앙을 가진
많은 귀족부인들이 기부 및 봉사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지위와 부는 주일학교의 설립과 입지에 도움을 주었다.
로버트 레익스의 개인적 교제와 신문사업도 이 일에 도움이 되었다.
셋째, 주일학교운동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고 주일학교의 교육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협회와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윌리암 폭스(William Fox)는 1785년 영국주일학교진흥회를 조직하여 자금과 문서들을 지원하였다. 1803년 조직된 런던주일학교연합회는 주일학교봉사를 완전한 무보수의 자원봉사활동으로 자리잡게 하였고,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교육자료들과 교재를 개발하여 출판하였다. 이러한 주일학교의 연합활동은 주일학교운동의 지역적 확산과 조직적 체계성에 도움이 되었다.
로버트 레익스가 주일학교를 시작한 지 4년만에 주일학교학생으로 보고된 수는 25만여명에 달하였고, 1831년 로버트 레익스의 동상이
제막될 때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그 수는 125만명, 1835년의 보고에 의하면 주일학교에 등록된 학생수가 150여만명에 달했다. 이 학생들 중
절반이상이 주일학교교육이 유일한 교육경험이었다고 한다. 또한 자원봉사하던 교수의 수는 16만여명에 달했다. 맨체스터 시의 어떤 주일학교에서는 120여명의 자원교사에 270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그 학교의 교사중 3명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주일학교출신의 교사였다고 한다. 가히 폭발적으로 확산된 영국의 주일학교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사회개조운동에서 시작되어 종교적인 각성운동과 합류하여 일반교육과 신앙교육에 주력하였던 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미국에서의 주일학교운동
2.2.1 미국주일학교의 발전를 위한 배경
미국의 사회적 상황은 영국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미국은 다양성의 특징을 가진 나라였다. 뉴잉글랜드 지방은 민족구성에 있어서나
종교에 있어서 공통성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서는 일찍 교육제도가 수립되어 공립학교를 운영하였고, 그 학교의 성격은 기독교적 색체를 짙게 띠고 있었다. 학교의 교과서는 신앙적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들도 비교적 엄격하게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1750년경부터 점차 학교교육이 세속화되면서 교과서도 종교적 내용들을 탈피해가기 시작하였다.
남부에서는 귀족들의 자녀들은 라틴어학교에서, 혹은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신앙심이 깊은 농장주에 의해 흑인아이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하류계층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의 기회는 제공되지 못했다. 중부는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신앙의 전통과 민족적 다양성에 따라 교구학교들이 설립되어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이주민들이 넓고 광활한 지역에 흩어져서 생활하고 있었고, 민족과 신앙의 형태와 전통의 다양성 때문에 효율적인 신앙교육과 일반교육이 실행되기 어려웠다. 더욱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의 결과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교사부족과 시설부족의 현상은 심각하였으므로 체계적인 일반교육이 이루어지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어려웠다.
미국의 상황에서 주일학교가 설립되어 발전되어야 할 절대적 요청은 교육에서의 정교분리가 적용되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국가가 일반교육만을 담당하면서 교육의 내용을 세속화시켜 버리자 교회는 종교교육에 대한 절박한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영국과는 달리 주일학교가 더 이상 일반교육을 담당할 필요가 없었고, 그 대신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교육을 강화해야할
상황적 요구에 직면해있었다. 1790년 미국의 감리교파는 영국에서처럼 주일학교를 교회의 교육프로그램으로 수용하는 공적인 결정을
내렸으므로 주일학교는 교회의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되었다. 그에 따라 각 교회는 교회당 내에 혹은 교회당 근처에 주일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받았다. 감리교회의 결정은 미국의 각 교단에 영향을 주어 주일학교들이 설립되었고, 평신도를 중심한 주일학교연합활동을 통하여 주일학교는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물론 미국주일학교는 처음부터 복음전파와 신앙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2.2.2 미국주일학교연합회의 활동과 발전
영국에서부터 전해진 주일학교운동은 주일학교연합회활동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주일학교연합회는 주일학교가 비교적
교육의 내용의 질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학교로서의 조직적 체계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809년 피츠버그에서, 1811년 필라델피아에서, 1816년 뉴욕과 보스턴 등지에서 도시중심의 주일학교동맹이 결성되어 주일학교운동을 상호격려하여 새로운 주일학교들을 설립하고 교육의 질적인 심화를 꾀하였고, 교파를 초월한 주일학교연합운동을 촉구하였다. 주일학교연합회의 활동과 사업범위가 확장되면서 1824년에 북미주일학교동맹이 결성되어 미국 대부분의 주와 교파에 속한 주일학교들이 연합하여 주일학교확장, 교재개발, 교수방법의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1830년 북미주일학교동맹은 미시시피강 유역의 9개 주에 집중적인 주일학교개척사업을 전개함으로써 2년간 78명의 주일학교선교사를 파송하고, 2687개의 주일학교를 신설하는 과업을 이루기도 했다.
미국 내의 주일학교사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1832년부터 전국주일학교대회가 조직되었고 연합활동은 힘을 더해갔다. 당시에 비록 지방활동에 대한 개별적 관심이 많았고,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며, 남북전쟁의 결과 남북교회들의 연합활동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국주일학교대회는 활발하게 진척되어 마침내 1872년에는 통일공과작업에 들어갔고, 7년간의 집필활동을 통하여 1879년 통일공과가 발간되어 그 이후 약 30 여년 동안 절대적인 지지속에 사용되었다.
전국주일학교대회는 미국 내의 다양한 교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협력을 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75년 이래로 매 4년마다 국제적인 주일학교대회가 여러 도시를 순회하면서 미국과 카나다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1889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제1회 세계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하였고, 제2-3차 대회를 거치면서 동양의 일본의 주일학교에 조차 깊은 관심을 확장하였으며, 특히 1913년 스위스 쮜리히에서 열린 제7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는 우리 나라의 신흥우씨가 참가하여 한국주일학교운동을 소개하였다. 1920년 제8회 세계주일학교대회가 일본에서 열렸을 때, 3.1운동의 여파로 한국은 공식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으나 개인자격으로 참석한 박정찬씨는 다른 나라 대표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924년 제9회 세계주일학교대회부터 남궁혁, 정인과씨가 정회원으로 참석하여 한국주일학교의 활동도 세계주일학교운동에서 점차 인정받아가게 된다.
주일학교연합회의 활동을 통한 주일학교운동의 발전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일학교연합회 활동은 주일학교운동을 활성화하여 전국에 확산되도록 했다. 연합회활동의 주요한 목적중의 하나가 주일학교운동의 전국적 확산이었다.
둘째, 주일학교연합회활동은 주일학교 운동을 개교회와 개교단의 범위를 넘어 평신도를 주축으로한 범기독교적 대회가 되도록 함으로써 주일학교의 조직과 힘을 확장하였다.
셋째, 교재와 교육자료 등 문서활동사업을 전개함으로써 주일학교교육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직접 기여하였다.
넷째, 주일학교연합회의 활동은 교사훈련과 교수방법개선을 위해 효과적인 공동노력을 일구어내었다.
주일학교연합회의 확산은 곧 주일학교운동의 발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보고에 따르면 19세기 말경에 미국에는 약 1백만명의 주일학교교사와 약 8백만명의 주일학교학생이 있었다. 1884년에는 8712551명의 주일학생이 보고되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오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2.3 미국에서의 주일학교운동의 침체와 회복
주일학교운동은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장이 둔화되다가 1916년에는 통계자료에서 분명한 감소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침체현상은 1946년까지 지속되었다. 계속적인 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등록학생수가 1926-36년 사이에 12.6%나
감소현상을 나타내었다. 주일학교운동의 침체원인에 대하여 복음주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03년 종교교육협의회의 조직과 영향이 주일학교운동의 침체에 원인이 있다. 주일학교교육의 전문성에 대한 강조는 좋았으나 종교교육협의회의 중요한 구성원들은 자유주의신학을 기초한 종교교육의 시각에서 주일학교교육을 변화시켜가려고 했다.
자유주의신학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자연히 전통적 의미의 복음전파를 위한 열정은 식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자유주의신학사상은 교회와 교파 내에서 화해하기 어려운 분열을 초래하였다. 또한 교육의 전문성에 대한 강조는 좋았으나
그 결과로서 평신도들의 참여활동이 위축되어버린 것은 주일학교운동을 약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둘째, 교육이해에 있어서 경험중심의 교육이론이 확산되면서 주일학교교육의 내용이었던 성경에 대한 집착과 가치의식이 약화되었다.
일반교육이론의 분별없는 수용은 기독교적 가치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셋째, 주일학교교육은 복음 외의 구태의연한 전통에 대하여 깊은 집착감을 가졌다. 그 결과 주일학교는 시대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일반학교의 발전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발전에도 부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변한 종교교육협의회에서 분리된, 보수적 신학을 견지하였던 보수적 특성의 교파에서 주일학교는 계속 성장하였고, 모범적인 성공사례를 보고하기도 했다. 1947년을 기점으로 오랜 침체의 시기를 벗어나 주일학교운동은 일시적인 회복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직후 주일학교의 출석수는 전반적으로 상승하였고, 1945년 전국주일학교연합회가 복음주의자들의 후원 아래 새롭게 조직되어 대규모의 주일학교대회를 개회하면서 평신도사역을 고무하였고, 복음주의적 통일공과를 출간하였으며, 복음적 열정으로 주일학교운동을 활성화하였다.
1960년대에는 여러 교파의 교회에서 교인수가 감소하였다. 새로운 교육관 건축계획을 포기하는 교회들이 많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주일학교의 효과에 대하여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주의교회에서는 주일학교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968년의 보고에 따르면,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산하교회에서 주일학교의 학생수는 전반적으로 3.5%나 증가하였다. 1968년에 크리스챤 라이프 잡지는 100대 주일학교의 목록을 발표하기도 했다. 복음에 집착하는 주일학교의 활기있는 성장이 그 주일학교들의 주된 특징이었다.
1970년대는 대규모 주일학교의 시대였다. 1968년의 보고서에서 주일학교학생수가 2000명이 넘는 주일학교는 전국에서 20여개였으나, 1977년의 보고에 따르면, 2000명을 넘는 주일학교가 60개를 넘었다. 가장 많은 학생들이 출석하는 하몬드제일침례교회의 주일학생수는 13561명이었다. 대규모주일학교 100개중 대부분은 침례교회주일학교였고, 36위에 약 2000여명의 주일학생이 모이는 개혁교회가 있었고,
장로교회는 71위에 있는 한 교회가 1500여명의 주일학생이 출석하는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다.
2.3 한국에서의 주일학교운동
2.3.1 해방이전의 주일학교의 발전
한국에서의 주일학교운동은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록상 최초의 주일학교모임은 1888년 1월 15일 이화학당에서 어린이 12명과 부인 3명이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1897년 평양에서 6개의 주일학교가 시작되면서 주일학교는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10년에는 노블선교사 부인에 의해 주일학교교사양성반이 운영되었다.
1905년 선교사들의 모임인 선교연합공의회에서 주일학교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통일공과편집작업에 착수하였다. 매월 월간지로 발행되던 공과는 1912년 무스, 피터, 게일 박사에 의해 만국주일학교통일공과로, 그리고 1913년에는 비록 1년간 계속되었으나 계단공과가 편집되기도 했다. 주일학교잡지도 몇 종류 발간되었다.
1908년 브라운(F.L. Brown)과 해밀(H.M. Hamil)이 한국주일학교를 돕기 위해 내한하였고, 1913년에는 서울 경무대 마당에서 주일학교대회가 열렸는데, 참석한 학생수가 14000여명에 달하였다. 제5회 세계주일학교대회 직후 지도자들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21년에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조직되었으며 초대회장은 남궁혁 박사였다.
1925년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 보고된 주일학생의 수는 26만명이었다. 1928년 개회된 제10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서 보고된 한국주일학교의 발전은 세계의 대표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1932년 제11회세계주일학교대회에 발표된 한국 주일학교교사와 학생의 수는 402311명으로서 세계 8위였다. 통계자료를 보면, 1934년 장로교단이 3198개의 주일학교에 293810명의 주일학생과 26810명의 교사를, 감리교단은 561개의 주일학교에 50046명의 학생과 3800명의 교사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1938년 6월 21일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주일학교연합회는 해체되어 버렸고, 주일학교는 교단별로 겨우 명목을 유지하다가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마비되어버렸다.
해방이후 1947년에 주일학교연합운동이 재건되었고, 성결교단이 추가로 가입되어 연합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48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대학기독교교육협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한국동란이후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출판사업만을 전담하게
되었고, 주일학교운동은 교단별로 새로운 연합회를 조직하여 교사양성을 위한 강습회개최 및 교재와 문서사업에 주력하였다.
2.3.2 고신교단의 주일학교운동
교단별로 조직된 주일학교는 그 교단의 신학적 특색과 평신도의 봉사활동이 함께 조화되어 이루어져야 하므로, 교단 교육부서의 통제와
지원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고신교단은 1952년 총회를 조직한 이후, 1954년에 열린 제3회 총회에서 종교교육부를 설치하여 1956년부터 공과를 출간하였다. 1965년부터 생명의 양식을 출간하기 시작하여 1969년에는 4권으로 이루어진 계단공과를 출간하였다.
1964년부터 전국교육연구대회가 개최되었고, 1982년에는 총회교육위원회가 발족되어 교단교회의 교육을 위한 교재편찬사업과 교사양성
사업에 큰 발전을 이루어오고 있다. 교사통신과정은 효율성있게 운영되어오고 있다.
각 노회별로 주일학교연합회가 구성되어 있고, 교단전체적으로 전국주일학교연합회가 교단출범과 동시에 조직되어 성경학교준비를 위한 교사강습회, 주일학교교사대회, 주일학교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교회 내의 주일학교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교회의 주일학교는 각 교회의
목회자와 담당교역자의 방침에 따라 종종 강조점과 운영방안의 차이 및 변화를 경험하고 있기는 하지만, 총회교육위원회가 교단의 주일학교교육을 지도 및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단과 교회의 지도하에 평신도교사들은 주일학교의 운영 및 학생지도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회교육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기독교교육연구를 위하여 고신대학교에 1977년 기독교교육과가 신설되었고, 대학원은 이듬해인 1978년에 개설되어 기독교교육의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기독교교육의 발전을 위한 연구를 심화시켜가고 있고, 교단의 교육정책에 깊히 관여하여 전문적 조언을 주고 있다.
3. 주일학교의 역사적 특성과 의의
주일학교의 교육역사적 의의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일학교운동은 시대적 요청에 대한 기독교공동체의 적절한 대응이었다. 주일학교의 발생원인과 발전에 있어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은 직접적인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종교 및 도덕적 상황과 사회경제적 여건은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헌신을 요청하고 있었다.
성경을 통한 인격형성과 그것을 기초한 사회개조의 의도는 당시의 상황에서 좋은 대안적 방안이었다.
미국의 경우도 교육의 세속화의 결과 학교로부터 밀려나고 만 신앙교육을 주일학교가 담당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하여 신앙공동체는 적합한 방법으로 대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주일학교운동을 통하여 평신도의 헌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확인되었다.
교회는 전체의 구성원이 지체로 참여하는 신앙교육공동체이다.
중세기를 지나오면서 신앙교육은 전문적 신학훈련을 받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왔다.
종교개혁시대에 부모의 교육적 역할이 강조되고, 국가의 교육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배태되기는 했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평신도도 신앙교육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복음을 위해 함께 사역하도록 명령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이 신앙교육에서 성경과 교리를 취급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주일학교운동은 처음부터 평신도들을 통하여서도 신앙교육과 복음전파의 명령이 효율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산증거이다. 수많은 평신도들이 보여준 헌신과 잠재력은 평신도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직자들 못지 않게 복음을 위하여 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동역자들임을 입증하였다. 다양한 계층과 연령에 속한 평신도들이 보여준 헌신의 결과로서 계속되고 있는 주일학교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분명한 헌신의 장이 되고 있다.
평신도의 헌신은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져왔던 교회의 중요한 발견중 하나이다.
셋째, 주일학교운동은 복음전파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영국에서 처음 로버트 레익스가 주일학교를 운영할 때 복음전파는 간접적인
목표였으나, 웨슬리의 감리교회가 주일학교를 수용하고, 특히 미국에서 발전할 때의 주요한 목표는 복음전파였다.
교회는 주일학교를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이해하였고, 주일학교연합회는 복음전파를 위해 주일학교설립운동을 실행하여 낙후된 오지에
주일학교를 위한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주일학교는 또한 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주일학교운동은 복음전파를 통한 사회봉사의 열매를
거두었다. 신앙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던 어린이들을 위하여 주일학교를 운영함으로써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어린이들의 신앙적 성숙의 결과로서 또 다시 주일학교를 위한 헌신자들을 확보하였다.
복음전파의 열정은 주일학교운동의 동력이었다.
넷째, 주일학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주일학교의 교재는 처음부터 성경이었다.
교과서로 편집된 공과는 성경의 내용을 해설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처음 주일학교가 설립될 때 성경은 기본교육과 인격형성의 도구였으나, 교회의 주일학교가 성경을 사용할 때 그 성경은 신앙교육을 위한 교과서였다. 성경의 위치가 강조될 때 주일학교운동은 확장하였으나,
성경의 가치가 약화될 때부터 주일학교운동은 침체되었다.
주일학교연합회는 성경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다양한 교육방법개선을 도모하였고, 교재를 개발하였으며,
교사를 교육하였다. 기독교교육사가인 이비(C.B, Eavey)는 기독교교육과 주일학교의 핵심이 성경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사용에
주일학교운동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관점에서 주일학교의 발전과 침체와 결과를 서술하였다.
다섯째, 주일학교는 교회 안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주일학교는 처음 성직자들로부터 심각한 비판과 반대를 받았으므로 교회를 교육의
장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후 교회는 주일학교를 교회안의 한 기관으로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지원, 통제함으로써 교회의
교육기관이 되게 했다. 신앙교육공동체인 교회는 주일학교를 자연스럽게 교회에 유입하여 체질화하였다.
교회가 소홀히 하였던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역사속에서 재발견하여 교회가 다시금 수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일학교는 이제 신앙교육을 위한 교회의 학교가 된 것이다.
4. 평가 및 결론
주일학교운동은 이제 200년을 넘었고, 한국의 주일학교운동도 100년을 넘었다. 그 사이에 주일학교는 더 이상 일반교육을 실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동안 신학적 차이의 틈은 서로 깊은 골을 만들어 더 이상 전세계적인 연합운동을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어린이들의 생활도 바빠지고 무척 복잡해져서 쉽게 주일학교에 잡아두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2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과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시대적 요구도 처음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상황과 도덕적인 상황은 더욱 어두워져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복음에 대하여 길가 밭처럼 더욱 굳어져가고 있다.
주일학교운동이 교회의 본질적 자리에 속하는 교육활동으로 인정되었고, 지금도 주일학교가 계속 발전해가야 하고,
또 곧 시작될 새로운 천년동안에도 그 영향력을 계속해가야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면 주일학교교육은 어떻게 발전해야 할 것인가?
첫째, 주일학교는 교회 밖에서 교회 안에 유입되어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부가적 이질성을 완전히 극복해야 한다.
주일학교는 교회에 붙어있는 한 기관으로 인정될 것이아니라, 교회자체가 교육을 통하여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 본질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더욱 철저한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교육공동체는 구약과 신약의 공동체의 특징이었고, 종교개혁시대에 재발견된 교회의 특징이었다.
둘째, 어린이에 집중된 주일학교, 또 청소년은 SFC 등으로 더욱 축소된 주일학교교육은 교회의 전체적인 그리고 전생애적인 교육에
포함된 연관성 안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동시에 간세대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다양한 방법과 활동을 개발해내어야 한다.
교회의 교육은 모든 세대를 포함하여야 하고, 또 모든 세대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유된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셋째, 기독교신앙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주일학교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교육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대한 도덕적 관점과 이야기식 방식에 국한된 교육뿐만 아니라 교회의 교육이 처음부터 견지해 온, 교육적 방식으로 체계화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교육이 보완되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잠재적 교육과정에 유의하여 신앙공동체의 모든 신앙행위를 통하여
전유되는 것에 대한 교육적 안목을 갖추어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기독교신앙의 교육은 주일 잠시 개설되는 주일학교교육으로 충분하지 않다. 종교는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교육이 가정교육에서, 학교교육에서, 또한 사회의 참여와 직업세계에서도 일관성있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의 주일학교는 가정과 학교교육과의 연관성과 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모에 의한 교육교재, 기독교학교의 설립, 기독교선교단체들의 활성화 등을 통하여 전체적인 신앙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교육의 전문성과 교육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시설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교사직의 전문성에 가까운 훈련과 교사직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분중 하나라는 것은 성경적 기초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의 가장 성숙한 사람들에 의해 교사직은 수행되어야 하며,
전문성을 갖추어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교육의 기회와 시간적 배려를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기독교교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력을 교육하고 전문가들을 많이 양성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교육의 상황은 구태에 젖어있고, 복음과 무관한 전통에 얽매여 있다.
학생들의 필요와 관심,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는 교육형식과 방법의 개선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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