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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뿟따 존자의 하심
2020년 10월 4일 상수제자의 깨달음 22강
-법문: Ven. 한국마하시 사야도(우 소다나 사야도)
-통역: 우 담마간다 스님
-녹취: 담마시리 님
출처 : https://cafe.naver.com/koreamahasi/1708
현재 「상수제자의 깨달음 법문」 중 사리뿟따 존자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설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회향 날이기도 해서 사리뿟따 존자의 본받을 만한 덕목을 몇 가지 소개하는 식으로 법문을 하겠습니다.(「사자후 경Sihanādasutta」(A9:11))
한때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께 허락을 받은 뒤 유행을 떠났습니다. 많은 비구들도 사리뿟따 존자의 뒤를 따라갔고, 그 모습을 본 한 비구가 질투가 생겨 부처님께 가서 다음과 같이 불평하면서 아뢰었습니다. “부처님, 사리뿟따 존자가 떠나면서 저를 일부러 부딪히고 갔습니다. 그럼에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그대로 유행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확인을 위해 사리뿟따 존자를 다시 오게 해서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에 사리뿟따 존자가 답한 내용이 나눠드린 자료에 있는 “사리뿟따 존자의 사자후”입니다.
Yassa nūna bhante kāye kāyagatāsati anupaṭṭhitāassa, so idha aññataraṁsabrahmacāriṁ āsajja apaṭinissajja cārikaṁ pakkameyya.(A.iii.380)
【대역】
Bhante세존이시여, yassa어떤 이에게 kāye몸에 대해 kāyagatāsati몸에 대한 새김이 anupaṭṭhitā assa확립되지 않았다면 so그는 aññataraṁsabrahmacāriṁ청정범행을 실천하는 동료 다른 이들을 āsajja부딪히더라도 apaṭinissajja용서를 구하지 않고 cārikaṁ pakkameyya nūna유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우선 “부처님, 어떤 이에게 몸에 대한 새김kāyagatāsati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러한 이는 청정범행을 실천하는 다른 도반 스님들에게 부딪히더라도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유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몸에 대한 새김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이면 용서를 구하지 않고 떠날 수 있지만 사리뿟따 존자 자신은 몸에 대한 새김을 잘 닦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딪히고서 용서를 구하지 않고 떠나는 일이 생겨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중요한 내용이 kāyagatāsati입니다. 저희는 kāyagatāsati를 ‘몸에 대한 새김’이라고 번역하는데, 경전마다 부처님께서 조금 다양하게 설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여러분들이 지금 가면서 서면서 앉아 있으면서 누우면서 몸에 대해서 <간다; 선다> 등으로 관찰하는 그것을 몸에 대한 새김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들숨날숨새김ānāpānasati을, 또 어떤 경우에는 머리카락·털·손톱·발톱·이빨·피부·살·힘줄·뼈 등 32가지 신체의 혐오스러운 것에 마음 기울이는 것을 몸에 대한 새김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먼저 몸에 대한 새김을 말한 다음 이어서 다음과 같이 9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1) “땅 위에 사람들이 깨끗한 것을 던지기도 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던지기도 합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대변, 소변, 침, 고름, 피 이런 것까지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땅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혐오하지 않습니다. 넌더리 치지도 않습니다. 저도 땅과 같이 마음을 두고 지냅니다. 부처님.”
이 말을 통해서 사리뿟따 존자도 땅처럼 어떤 안 좋은 것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잘 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2) “물속에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던지기도 하고 씻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깨끗하지 않은 것을 씻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대소변까지 버리고 씻습니다. 하지만 물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혐오하지 않습니다. 넌더리 치지도 않습니다. 저도 물과 같이 마음을 두고 지냅니다, 부처님.”
마찬가지로 물이 이렇게 혐오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처럼 사리뿟따 존자도 잘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불은 깨끗한 것도 태우지만 깨끗하지 않은 것도 태웁니다. 불은 대변을 태울 때도 있고 쓰레기를 태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혐오하지 않습니다. 넌더리 치지도 않습니다. 저도 불과 같이 마음을 두고 지냅니다, 부처님.”
즉, 불처럼 잘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4) “바람은 깨끗한 것도 날려버리지만 깨끗하지 않은 것도 날려버립니다. 대변, 쓰레기 등 더러운 것도 날려버립니다. 하지만 바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혐오하지 않습니다. 넌더리 치지도 않습니다. 저도 바람과 같이 마음을 두고 지냅니다, 부처님.”
바람처럼 역시 마찬가지로 잘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몇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까? (대중: 4가지입니다, 스님) 첫 번째가 땅, 두 번째가 물, 세 번째가 불, 네 번째가 바람입니다. 지수화풍 이렇게 외우면 될 것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땅·물·불·바람처럼 마음을 두고 지내서 잘 참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의 이러한 마음과 여러분들이나 저희들의 마음을 비교하면 무엇과 같을까요? 하늘과 땅, 저쪽 언덕과 이쪽 언덕,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이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사리뿟따 존자가 잘 참는 인욕 덕목과 관련해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사리뿟따 존자는 인욕의 덕목이 대단하시다. 다른 사람이 모욕하고 때리더라도 조금도 화내지 않으신다”라고 덕목을 칭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견을 가진 어느 바라문이 사람들한테 물었습니다.
“화를 안 낸다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그를 화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나 보지요. 그러면 내가 한 번 화나게 해 보겠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시오. ”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화를 내는지 알고 있소.”
사리뿟따 존자가 성내에 들어와 탁발하고 있을 때 바라문은 뒤를 살짝 따라가서 주먹으로 사리뿟따 존자의 등을 힘껏 내리쳤습니다. 존자는 ‘무슨 일인가?’라고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라문은 자신이 한 일이 몹시 후회스러워 몸과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잘못했구나! 존자는 참으로 인욕의 덕목을 갖추고 계시는구나’라고 사리뿟따 존자의 발아래 엎드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가 존자님의 인욕을 시험하려고 존자님의 등을 세게 내리쳤습니다.”
“괜찮습니다.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오늘부터 저희 집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바라문은 사리뿟따 존자의 발우를 받아들었고, 사리뿟따 존자는 그대로 바라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바라문은 직접 존자를 모시고 집에서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맞은 분은 가만히 있는데 바라문이 사리뿟따 존자를 내리치는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이 나쁜 놈이 감히 허물이 없는 고귀한 사리뿟따 존자님을 치다니. 그냥 놔둘 수 없다. 이놈을 죽여야겠다.”
사람들은 흙덩이, 몽둥이, 돌 등을 들고 바라문의 집 앞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공양을 끝내시고는 바라문에게 발우를 주고 따라오게 했습니다. 바라문을 혼내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바라문이 사리뿟따 존자의 발우를 들고 함께 나오자 함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존자님, 발우를 좀 돌려받고 저 바라문을 돌려 보내주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바라문이 감히 존자님을 내리쳤으니 그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가 당신들을 쳤습니까, 아니면 나를 쳤습니까?”
“존자님을 쳤습니다.”
“그가 나를 쳤고 나는 그를 용서했으니 그대들은 그냥 돌아가십시오. 괜히 화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다시 사리뿟따 존자의 비유로 돌아가겠습니다.
(5) “먼지를 닦는 걸레는 깨끗한 것을 닦을 때도 있지만 깨끗하지 않은 대변까지도 닦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걸레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혐오하지 않습니다. 넌더리 치지도 않습니다. 저도 걸레와 같이 마음을 두고 지냅니다, 부처님.”
잘 참을 수 있다고 사리뿟따 존자가 사자후를 외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천민입니다. 인도는 당시 사성 계급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낮은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난 사내아이나 여자아이라면 다 헤진 옷을 입고 동냥 그릇을 들고 마을에 들어갈 때 다른 사람한테 부딪히지 않으려고, 자신이 천민임을 알리려고 막대기로 소리를 내며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심하는 마음으로 마을에 들어갑니다.
(6) “저는 그 천민 사내아이 여자아이와 같이 마음을 낮추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지냅니다. 부처님.”
사리뿟따 존자는 당시 바라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거룩한 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한 사리뿟따 존자가 자신을 짠달라caṇḍāla라고 하는 불가촉천민처럼 마음을 낮추고 그러한 마음으로 지낸다고 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을 모범 삼아서 자기 마음을 낮추고 지내도록 해야 됩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한때 어느 날 사리뿟따 존자가 지나가고 있는데 그때 존자의 가사가 조금 고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곱 살 난 사미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존자님, 가사 밑이 고르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일곱 살 조그만 사미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다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사리뿟따 존자는 그 말에 한 곳으로 가서 가사를 잘 고쳐 두르고 사미에게 다시 갔습니다. 사미 앞에서 합장까지 하고서 “이 정도면 적당합니까, 스승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갓 출가한 일곱 살 난 사미가 훈계하더라도 그 훈계를 머리 위에 올리고 받아지닌다”라고 감흥어를 읊었습니다.
부처님을 제외하고 지혜에 있어 첫 번째여서 “지혜제일”이라는 칭호를 받고, 상수제자 중에도 첫 번째 상수제자인 사리뿟따 존자 스스로 낮추는 이런 하심의 덕목, 하심의 자질은 누가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매우 본받을 만합니다.
경전에도 “완전히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속이 완전히 꽉 찬 벼는 아래로 고개를 숙이듯이 지혜를 많이 갖춘 분들도 하심하면서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나 조그만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익지 않았거나 쌀알이 들어있지 않은 쭉정이처럼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우쭐거립니다.
(7) “뿔이 짤린 황소는 누구도 해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잘 길들여지고 유순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마음을 둡니다, 부처님”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미얀마에는 “이가 빠진 뱀처럼, 뿔이 잘린 황소처럼, 먼지 오물 닦는 걸레처럼 마음을 두라”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8) “목욕하고 향수를 바르고 깨끗하게 단장을 끝낸 남성이나 여성이 그 목에 뱀의 시체나 개의 시체를 걸어 둔다면 그 시체들을 혐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 자신의 몸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과 관련되어서 화를 내지 않습니다, 부처님”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9) “많은 구멍이 나 있어서 거기로부터 기름이 배어 나오는 항아리를 어쩔 수 없이 머리에 이고 있는 이가 그 기름 항아리를 혐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몸을 혐오하고 있습니다. 애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라는 내용도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문헌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이렇게 사자후를 외쳤을 때 대지가 9번 진동을 했다고 설명돼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리뿟따 존자는 몸에 대한 새김 수행을 통해서 몸이란 원래 성품대로 더러운 것, 혐오스러워할 만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 몸을 연유로 자만할 일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자만으로 다른 이에게 불경하게, 공손하지 않게 대하는 이런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런 여러 비유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사리뿟따 존자의 이러한 마음가짐을 교훈 삼아서 아만·자만을 제거할 수 있는 만큼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법과 관련해서 어떤 수행자에게 법이 깃들었는지 깃들지 않았는지는 그 수행자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공손함과 하심이라는 두 가지 덕목이 중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라는 삼보와 자기보다 공덕이나 나이가 높은 분들에 대해서 공손하게 대하고 공손한 말을 하고, 자기를 낮추는 말과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그 수행자에게 법이 깃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사리뿟따 존자에 대해서 불평했던 비구는 아마 존자의 가사 자락이 살짝 닿았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연유로 자기와 부딪히고도 그냥 떠나갔다고 트집을 잡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목적도 다른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곁에 많은 비구들이 남지 않고 떠나가버려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으신데 이 비구가 ‘아, 부처님 곁에 많은 비구들이 남지 않고, 전부다 사리뿟따 존자의 뒤를 따라가 버리는구나’라고 질투해서 그렇게 많은 비구들이 떠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허물이 없는 분에게 트집을 잡고 비난했기 때문에 사리뿟따 존자의 사자후를 들었을 때 이 비구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뜨거워졌습니다. 후회가 생겨나고 걱정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용서받고자 용서를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비구를 용서해 주시고, 사리뿟따 존자에게도 이 비구를 용서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사리뿟따 존자가 이 비구에게 한 말이 중요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당연히 “이 비구를 용서합니다”라고 말한 뒤에 “혹시라도 제가 모르는 저의 허물이 있으면 스님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마음에 교훈 삼을 것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살면서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허물이 있으면 자신이 허물을 범한 이에게 허물을 밝히고 용서 구하기를 주저하면 안 됩니다. 허물이 있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선한 이들, 참사람들의 실천이자 의무입니다. 반대로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용서를 빌지 않고 자만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우쭐거리는 것은 저열한 이들의 실천입니다.
좀 무서운 일입니다. 수행을 이전에 해본 적이 있는 분에게 몸이나 말 등으로 허물을 범했는데 그 허물을 범한 대상이 성자인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허물을 범한 것은 성자비방업이 되지만 직접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성자비방업이 그대로 지속되어 이번 생에 아무리 수행을 해도 도와 과 열반을 증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는 사악처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마하시 수행방법의 수행 준비 첫 번째가 ‘용서구하기’이고, 매일 아침 예불 끝나고 처음에 한 번씩은 꼭 하시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지금 생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가르침, 승가, 부모님, 스승님,
저보다 공덕이나 나이가 많은 분들께
제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면서 예경 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린 것도 이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리뿟따 존자의 인욕의 덕목, 하심의 덕목 등에 대해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따라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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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21년 1월 정기법회 관련] 사리뿟따 존자의 하심 (한국마하시선원) | 작성자 한국마하시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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