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외 2편
김진광
수 공작이 날개를 편다
천개의 손이 펴지고
천개의 눈이 열린다
아,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의 세계가 펼쳐진다
극락도 저렇게 아름다울까
반복되는 짝을 위한 유혹의 춤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나는, 유혹의 춤에 늘 홀려 살고 있다
닭의장풀
예수님,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날
성경책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꼬꼬댁-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삶은 달걀을 주신다
텃밭에 가니
며칠 전 호미로 매어놓은
닭의장풀이
꼬꼬댁-
이슬에 목 가누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외친다
예끼,
그럼 안돼
예수님도 부활한 후
아직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어
모래 불에 멸치 떼가
모래 불에 멸치 떼가 파닥이고 있다
파닥이는 멸치들을 너도나도 이게
웬 횡재야 웃으며 줍는 사람들
큰 고기 떼에 쫓겨 바닷가로 밀려온
멸치 떼를 파도가 밀고 온 것이다
멸치 떼를 따라서 고등어 떼가
고등어 떼를 따라서 고래들이
먹이 사슬에 이끌려 왔으리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옛 대통령의 음성이 떨리며 밀려온다
매미 뒤에 사마귀가, 사마귀 뒤에 까치가,
까치 뒤에 장자가, 장자 뒤에 밤나무 주인이
바라보는 깨달음이 파닥이는 오후이다
사자의 무리와 악어 떼를 불러다놓고
아프리카 생존의 강을 건너는 누우떼 울음에
멸치 떼도 장자도 팔짝팔짝 뛰는 오후이다
성인의 강변을 산책하며
내 시는 성인의 말씀이 흐르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강변을 산책한다. 이번에 발표하는 3편의 시 중에 「유혹」은 관음보살 세계에 사물을 비유했고, 「닭의 장풀」은 예수님의 부활을, 「모래불에 멸치떼가」는 장자의 세계를 슬쩍 훔쳐보았다. 종교의 세계에 너무 깊게 빠진 시는 좀 식상하고 재미가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즉 종교의 용어를 너무 남발하거나 목사의 설교 같은 시는 독자에게 거부감을 주고, 시의 예술성에 걸림돌이 된다.
시골 어느 식당마당 가 새 우리에 수 공작이 화려한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천수 천안 관음보살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저렇게 화려한 몸짓에, 보살의 경지를 펼쳐보이는 세계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인간도 서로의 유혹에 넘어가 결혼을 하고 산다. 눈이 멀어서 택한 것이라도 이미 인생의 기차는 출발해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는 어려운 것이다. 옷을 사는 것도, 집을 사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유혹에 홀려서 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유혹의 춤에 홀려서 산다는 이런 생각에서 졸시를 금방 건져 올렸다. 몇해 전부터 찬불가사를 짓게 되어 작곡되어 찬불가 책에 실린 것이 수십곡이 된다. 그러다가 보니, 내 입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생보살이라는 말이 불쑥불쑥 나와서 놀랐다.
우리 집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다. 교인들이 이따금 행사 초대장을 주며, 교회에 나오라고 권한다. 어느 날 부활절을 맞아 부활절을 기리는 삶은 달걀을 주었다. 요즘 코로나 19가 세계를 휩쓸어 사람간 거리두기로 인생에 한번 뿐인 지인의 결혼식에도 장례식에도 참석 하기가 어렵다. 중소기업과 소상인들은 부도 직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는 어떤가? 저들의 정권을 위하여, 당리당략을 위한 끝없는 싸움에 국민들은 피곤하다. 코로나는 권력을 가진 자도 부자도 가난한자도 하느님의 집인 교회도 상관없이 공격한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후에 세상를 심판하러 온다면서 긴 세월 오시지 않는가? 죄가 넘치는 세상을 이따금 재림하여 심판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의문에 시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평 채소를 심어가꾸는 뙈기밭에 갔더니, 지난 번에 호미로 매놓은 ‘닭의 장풀’이 이슬을 먹고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졸시 한편을 얻었다. 다만,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이 세상에 재림하는 것은 안된다는 핑게로 다시 호미로 매버렸다. 이유는 또 있다, 너는 내가 가꾸는 채소가 아니라는.
나는 바닷가에 살아서 실제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일을 많이 경험했다. 멸치떼가 지나갈 때 해안 언덕에서 보면 바다의 색깔이 더 짙고 작은 물결이 일어난다. 갈매기 떼도 몰려와 날아다닌다. 멸치 떼가 바닷가 모래 위로 파도에 밀려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그릇을 들고 멸치를 줍는다. 바다 구경을 왔던 사람들도 이게 웬 횡재야 하며 재미있는 체험을 한다. 멸치 떼 뒤에는 고등어가, 고등어 뒤에는 더 큰 고래가 먹이 사슬에 끌려서 따라 왔으리라. 여기서 장자의 깨달음 하나가 생각났다. 밤나무 숲 까치가 바라보는 곳에 사마귀가, 사마귀가 바라보는 곳에 매미가 있었다. 그리고 까치를 바라보는 장자를 밤나무 주인이 바라보고 밤을 주우러 온 도둑인 줄 알고 욕을 했다. 장자는 그 충격에 사흘을 외출을 삼가고 깨달음을 얻었다. 바닷가로 밀려온 멸치 떼를 보고, 도가의 성인 장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한 편의 졸시를 건져올렸다. 나는 시를 쓸 때 금방 써버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깊이 생각했다면, “얽매임이 없는 소요의 경지(자연을 따라서 사는 무위를 말함)가 ‘참된 도(道)의 놀음’이다. 쇠똥구리는 쇠똥을 여의 보물로 생각하듯, 작은 일에 기쁨을 느낄 줄 알아야 행복하다.”는 장자의 좀더 깊은 경지가 시의 향기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인데, 아직 그 것은 시에 대한 욕심과 희망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