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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구하는 신앙 (왕하3:13-20절)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복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으며 복을 받는 비결 역시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당황하고 쉽게 좌절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이 만난 큰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으며 어떤 구원과 축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하나님 앞에 악하기로 소문난 아합 왕의 아들로서 그의 형 아하시야가 재위 기간 중에 중상으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으로 연약했던 아하시아 왕이 병상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틈타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해마다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조공으로 바쳐 오든 모압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형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람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두 가지의 일을 단행하는데 그 첫째는 국내적인 일로 부분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왕하3:2-3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그러나 저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람이 그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은 제하였으나 이것은 진실한 신앙적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 숭배로 인한 부모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유다와의 정략적 정치 수단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제단을 계속하여 섬김으로 그 조상의 죄를 유전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여호람이 단행한 두 번째의 일은 국외적인 일로 자신에게 반기를 든 모압을 숙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군사 동맹 관계에 있던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원조를 청하였고 자신의 속국인 에돔과 함께 세 나라의 동맹군을 이끌고 모압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맹군이 모압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마침 그곳에 물이 없음으로 군사들은 기진맥진하게 되었고 따라가는 가축이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일은 단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하는 불운의 사태가 분명하였습니다. 모압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들이 패전으로 수치를 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요. 여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람은 모압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압을 숙정하는 전쟁을 계획하고 주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판단하고 처리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떠날 때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오늘 최악의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이 선택한 방법과 이를 통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1. 위기 때 나타나는 신앙
북 왕국과 남 왕국 사이에 맺어진 동맹의 관계는 아합 왕 때부터 시작되었고 이 관계는 아합 왕이 죽고 나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여호람의 요청에 흔쾌히 따른 것도 과거에 아합 왕이 아람을 치려고 군사를 요청하였을 때 그와 동맹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저들이 행군한 지 칠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게 되자 먼저 여호람의 입에서 탄식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왕하3: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모압 원정을 준비할 때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무력의 힘을 의지하던 사람이 환난이 닥쳐오자 쉽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강한 척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위기를 당하면 얼마나 나약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모든 일의 전말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슬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죽게 하시는구나.” 여호람의 이 말은 불신의 한계를 넘어서 원망과 오해의 독백이요, 낙심과 좌절의 모습이었습니다. 불신앙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은 첫째는 탄식이요, 둘째는 원망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여호람의 낙담을 듣지 않고 신앙과 소망을 갖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왕하3: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여호사밧이 아합 왕과 전투에 나갔을 때에도 그는 거짓 선지자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참 선지자의 의견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도 여호사밧은 여호람의 의견을 배척하고 하나님의 종을 찾았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의 종으로서 그에게 수종하였던 엘리사 선지자가 이곳에 있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모압 원정군을 따라 모압의 아사 골짜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그 경위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 여호사밧과 그나마 부분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종을 이곳에 보내어 준비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압 땅에 가뭄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모압 땅에 가뭄을 내리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모압 지경에 다 달았을 때에 식수난에 허덕일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말씀의 선지자를 미리 그곳에 보내어 대기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동맹 맺을 때에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하19:2-3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았음이니이다 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아시고 그를 끝까지 지켜주셨습니다. 나아가 악한 여호람에게도 이스라엘의 참 보호자는 여호와 한 분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엘리사를 성령의 감동으로 이곳에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엘리사라는 말을 듣자 그가 참 선지자요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하고 그 권위를 받아들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여호사밧은 곤경에 처한 당신의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실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인생에게 위기가 올 때에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미리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인생에 위기가 왔습니까. 경제에 가뭄이 왔습니까. 사업에, 가정에 어려움이 왔습니까.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때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찾지 않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문제 역시 해결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찾아온 여호람 왕을 향하여 엘리사는 냉대를 합니다.
*왕하3: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하시나이다. 하니라.
여호람의 어머니 이세벨이 아직도 살아 있고 바알의 선지자들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시점에서 엘리사는 여호람으로 하여금 진정한 개혁을 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엘리사의 이러한 책망을 충심으로 받아들이고 진실로 여호와께로 돌아왔다면 그는 후일에 피살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오므리 왕가가 그렇게 비참한 종말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불신의 말을 계속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나이다.” 얼마나 무지한 대답입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입니까.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여호람의 현실입니다. 이제 엘리사는 믿음의 사람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고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게 합니다. 신령한 노래가 시작될 즈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왕하3: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는 이 말씀은 현실과 너무나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모압의 골짜기는 우기에는 물이 많이 흘러 급류가 흐르지만, 건기에는 마른 강바닥이나 계곡으로 변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지금은 가뭄이 심한 터라 물 한 방울도 없는 메마른 강 바닥입니다. 붉은 돌만이 가득한 이 강바닥에 물을 모아두기 위한 웅덩이를 많이 파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볼 때 강바닥을 아무리 많이 파고, 깊이 파더라도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더구나 바람도 불지 않고 구름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빈 구덩이를 파라는 상식 밖의 말씀이 선포된 것입니다.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는 왕과 신하들을 향하여 선지자는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야 하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왕하3:17-19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사람과 가축이 마실 물이었습니다. 물만 있으면 밥도 지어 먹고 힘을 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물만 공급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이적을 통하여 전쟁을 하지도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든지 아니면 목말라 죽든지 가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말씀도 구하지 아니했던 여호람 왕이 어떻게 이 말씀에 순종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마는 포도원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싫소이다.” 하고 거절했으나 뒤에는 뉘우치고 갔던 작은 아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은 밤새 웅덩이를 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계곡에 물을 모을 수 있도록 많은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 결과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침이 채 되기도 전에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편에서 흘러와서 그 땅의 웅덩이에 가득히 고였습니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백성들과 가축과 짐승이 배가 부르도록 마시고 또 마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압의 군사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았습니다. 이 지역은 땅이 붉기 때문에 웅덩이에 고인 물이 피빛으로 보여 저들은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왕하3:23 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원래 적대 국가인데다 에돔은 기회만 있으면 반란을 꾀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모압은 이제 연합군으로 저들이 함께 오기는 했어도 가뭄으로 인한 식수난의 책임 문제로 필경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난밤에 서로 죽이고 죽인 혈전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진중에 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골짜기에 가득한 피를 보고 연합군의 자충자멸의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모압의 군사들은 군장을 해제하고 전승의 노략물을 탈취하기에 혈안이 되어서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내달았습니다. 마치 굶주린 이리 떼가 쏜살같이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 군대의 엄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투의 능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함정에 빠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이스라엘군은 자신들의 포위망 속으로 달려드는 모압의 군사들을 단숨에 공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갑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로 다 이루어집니다.
*왕하3:25 그 성읍들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멧군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얼마나 상황이 급했으면 정예병 칠백을 거느린 모압 왕이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렸겠습니까.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배반한 모압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왜 모압 땅에 가뭄을 내리셨을까요. 믿음이 없는 여호람 왕은 이 가뭄을 바라보고 “슬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곳에 불러 죽이려 하시는구나.” 하고 탄식하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믿음을 보시고 동맹군에게는 물을 얻는 길을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땅에 가득 찬 물을 주셨습니다. 이 물은 이스라엘군을 죽음에서 살렸으며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군대의 사기가 충천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데도 혹시 모압 땅의 골짜기와 같이 우리의 가슴은 메마르고 가파르지는 않습니까. 우기에 비가 내리면 급류가 되어 속히 강물이 흘러내리는 것같이 은혜를 받을 때는 기쁘고 즐겁더라도 받은 은혜가 잠시 머물 여유도 없이 소멸되지는 않습니까. 잠시 후면 메마른 심령이 되어 아무리 샘을 파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골짜기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합니다. 신자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신자에게 하나님은 이제 명령하십니다.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리라.’메마른 개천에 골짜기를 파야 합니다. 우리가 파는 개천에 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개천을 파야 합니다. 내가 개천을 파는 동안에 하나님은 저 먼 곳 에돔 땅에 비를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모압 땅이 아닌 에돔 땅에 비를 내리시는 것은 이 비를 모압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눈에는 이 비가 보이지 않지만 내일 아침에는 에돔에서 강물이 흘러 들어와 이 땅에 가득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귀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흡족히 내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 빗물을 가두어 둘 개천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개천을 깊이 팔수록, 많이 팔수록 빗물은 많이 저축되고 이 기적으로 인하여 먹고 마시며 적군을 유인하여 섬멸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심령에 말씀의 개천을 파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개천을 파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개천을 파시기 바랍니다. 능력의 개천을 파시기 바랍니다. 이 개천에 물이 흘러 들어올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질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더 많은 개천을 파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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