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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리안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 원문보기 글쓴이: 오두
<코리안신대륙발견>
베링해 카약(Qayaq)은 가야의 '가락(駕洛)'에서 유래! (1)
- '카약'은 '물길에 띄우는 가마'의 뜻인 '가락(駕洛)'에서 기원 -
- 金자는 고래뼈 닮게 만든 카약 골조, 金海는 '카약인들의 바다'를 의미 -
- 신라와 가야의 '오리모양 토기'는 카약 Kayak을 의미 -
- 울산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잡이배는 가죽배였다! -
- 조선시대 두만강 하구에 나타난 300명의 '카약 군단' -
글 순서
들어가는 말: 낙동강에서 부르는 '카약의 노래'
1. 고래잡이 후예들의 왕궁 서라벌 반월성(半月城)은 카약을 닮아 있다!
2. 낙동강 유역의 가야연맹은 카약으로 오르내린 물길의 나라
3. 다시 쓰는 카약의 역사(歷史): 유럽기원설에서 선사시대 코리안 '가락' 기원으로4. '카약(qayaq)'은 '물길에 띄우는 가마'의 뜻인 '가락(駕洛)'에서 기원
5. 여러 명이 타는 우미악(Umiak)은 바다의 '움막(Ummak)'이라는 뜻
6. 신라와 가야 시조 金씨 왕조의 '金'은 카약 탄 고래잡이 후예 의미
7. '人'은 고래턱뼈 세운 아치(고래 입)에서 환생하는 사람을 의미
8. 카약의 골조(骨組)에 고래뼈와 바닷가의 '고목뼈' beachwood를 사용한 이유
9. 신라와 가야의 '오리모양 토기'는 가죽배 카약을 의미
10. 짐승 창자로 만든 카피탁(Kapitaq) 파카를 입고 타는 카약(qayaq)은 사람-고래의 일체 형상
11. 울산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잡이배는 가죽배였을 것
12. 코리안 뱃사람들도 가죽배(skin boat)를 탔던 문헌적인 증거들
마치는 말: 거북선은 카약의 후예
들어가는 말: 낙동강에서 부르는 '카약의 노래'
캄차카반도를 잘 아는 우리 동네 러시아인 젊은 친구 알렉스를 비롯 몇몇 지인들과 필자가 사는 엘크 그로브 빌리지 버시우드(Busse Woods) 언덕 위에 올라갔다. 평지이기 때문에 멀리 미시간 호수쪽을 향하여 20마일 떨어진 시카고 다운타운의 고층빌딩들이 바라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시카고 서버브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인 이 언덕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가을저녁 초승달이 떠있었다. 필자는 함께 간 사람들에게 카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코리안 카약 주제가'를 부르겠다고 하니 모두들 한국에도 그런 노래가 있는가 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필자가 다음 노래를 부르자 함께 간 코리안 일행들은 모두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그것은 동요 <반달>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픽/ 필자)
운명적인 인연일까. 이 노래 <반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필자의 상징적 해석은 웃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면 누구나 아는 한국 최초의 동요 <반달>(1924)에 나오는 '하얀 쪽배'로 표현한 반달은 싫든 좋든 큰 배가 아닌 단 혼자서 타는 카약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도 돛대도 삿대도 없이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는 카약이다.
낙동강에서 시작하여 동해 바닷가를 따라 가죽배 카약을 타면서 <코리안 카약의 노래>를 부르면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함께 선사시대 베링해를 향하여 달리는 울산반구대에 고래 암각화를 새겼던 그 옛날 코리안 고래잡이들이 오르내리던 베링해를 향하여 가죽배를 타고 고래사냥을 나가던 시대의 타임머신을 타게 될 것이다.
반달 = 카약을 닮아 있다
푸른 은하(銀河) = 얼음이 뜬 푸른 베링해 바다 빙하
하얀 쪽배 = 흰 고래뼈 골조에 짐승의 흰 가죽을 씌운 카약
계수나무 한 나무 = 계수나무로 된 한 개의 노
토끼 한 마리 = 카약을 탄 한 사람 털옷 후드 쓴 모습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 바람이 아닌 해류와 노를 저어 간다
서쪽 나라 = 멀리 오호츠크해 베링해 용성국(龍城國)에서 바라보는 한반도 카약의 나라
카약은 혼자 타는 쪽배다. 돛대도 삿대도 필요없으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해 가다 보면 먼 나라까지 갈 수 있다. 코리안 최초의 동요 <반달>은 노래를 지은이의 의도를 떠나서 이렇게 카약을 상징하고 있는데 우리 민족사에서 가죽배인 카약(qayaq)은 없었을까?
여기에서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가 왜 '한 개의 노'가 되는가 의아할 것이다. 가야 시조신화에서 김수로왕이 왕후 허황옥을 맞이하러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아갈 때 다음과 같이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은 기록하고 있다.
揚桂楫而迎之.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맞이했다.
'하얀 쪽배 안에 계수나무 한 나무'라니 그것은 결코 자라는 나무가 아닌 것이다. "쪽배를 젓는 계수나무로 만든 노"이다. 흥미롭게도 카약은 가야의 '가락(駕洛)'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듯이 이렇게 '코리안 카약의 노래'라고 필자가 닉네님을 붙인 동요 <반달>의 "쪽배의 계수나무 한 나무"는 카약의 나라 가야 시조신화에서 젓던 바로 그 "계수나무 노"다. 반달 노래가 그저 불러진 것이 아니라 카약과 연관하여 신라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1. 고래잡이 후예들의 왕궁 서라벌 반월성은 카약을 닮아 있다!
신라의 서라벌 왕궁의 성 이름은 반월성(半月城)이다. 그 지형이 반달을 닮아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왕궁은 '반달 닮은 카약을 타고 다니던 고래잡이들'이었다는 것을 석탈해 신화가 말해주고 있다.
"왜국동북 1천리에서 붉은 용(고래)을 따라 돌아온 석탈해"가 그의 '조상 집터'가 있던 언덕이 "초사흘 달 모양"이라고 <삼국유사>가 기록한 것은 그 시대의 풍수에서 카약을 닮은 곳이라는 말이다. 신라의 도읍 서라벌의 반월성의 반월은 카약의 육지 집터를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수에서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은 같은 명당 개념을 가지고 있다. 바다생활에서 카약은 집과 같은 것이다. 집터는 반월과 같은 카약을 닮은 터여야 했기에 신라의 건국 초의 왕궁은 반월 닮은 반월성(半月城)에 정해진 것이다.
반월성(半月城)은 반달만 닮았다는 것보다 더 원천적으로 신라왕실의 시조들이 먼 바다에 가죽배 카약을 타고 다니던 고래잡이 후예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반달 닮은 카약'을 의미하고 있었다. 반월성(半月城)이 왕궁으로 결정된 것은 "왜국동북 1천리 용성국(龍城國)"에서 돌아온 석탈해의 '조상집터'로 차지한 고래토템환생사상을 바탕한 신라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카약 닮은 반월성. 경주.
"왜국동북 1천리 용성국(龍城國)""에서 돌아온 석탈해의 '조상집터'로서 신라의 왕궁이 되었다.
신라가 바다에서 형산강을 따라 들어와 카약 닮은 반월성(半月城)에 왕궁을 세운 것에 이어 가야는 낙동강을 따라 카약의 나라 연맹을 만들었다.
2. 낙동강 유역의 가야연맹은 카약으로 오르내린 물길의 나라
필자가 어렸을 때 살았던 성산가야 벽진가야는 물길이 좋은 곳이었다. 가야인들은 통나무배(카누)는 물론 분명히 가죽배(카약과 우미악)를 타고 다녔다는 것을 이 글에서 최초로 밝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십여년 전 성주댐이 되고 말았지만, 가야천 - 낙동강에 이어지는 금수면 무학동 골짜기는 카누나 카약을 타기 좋은 곳이었다. 낙동강 물길이 합천군 덕곡면에서 갈라져 고령을 거쳐 가야산 기슭 안쪽 계곡인 성주군 수륜면과 가천면을 거슬러 오르면 그 안쪽 금수면까지 물길이 올라간다.
그곳 가야산 기슭의 물길이 아름다워 이름도 금수(金水), 가천(伽川 - 伽倻川)이라 하여 그 물길의 아름다움에 반해 조선시대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년)는 그곳 물길의 아홉구비 명승을 노래하여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는 연시를 남겼다. 그만큼 선사시대로부터 삼한시대이래 가야연맹의 막다른 계곡 가야산 계곡의 무흘구곡(武屹九曲)이 마상이 통나무배 카누나 가죽배를 타고 오르내리기에 절경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은 낙동강 상류지만 계곡은 깊고 물은 맑고 많아 강폭이 좁으면서도 물살은 다이나믹하게 셌다. 그 깊은 계곡 안쪽에는 배를 매어두었다는 '배바위'라는 이름의 동네까지 있다. 낙동강은 그 상류에서 하구에 걸쳐 그 물길이 만들어낸 물의 나라 '카약의 나라' 가야를 만들어냈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물길 나라였던 것이다. 그 물길은 동해안을 따라 연해주 오호츠크해 베링해로 뻗어간 가죽배 고래잡이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대가야(현재 고령)의 회천에는 가야시대 조선소 터까지 발굴되어 근년에 가야물길을 복원 운동이 일고 있다.
*가야는 낙동강의 물길의 나라
'낙동강(洛東江)' 이름은 '가락의 동쪽 강'이라는 뜻.
석탈해 신화 스토리 구조가 보여주듯 가야와 신라는 洛東(낙동)이라는 이름과
駕洛(가락)이라는 카약으로 베링해에 이어져 있다.
낙동강 물길이 영남지방의 산악지대를 거쳐 길게 흘러 내려가기 때문에 통나무배나 가죽배를 사용한 물길 왕래가 잦아 정치적으로도 물길 권역을 이룰 수 있어 6가야가 가지는 특성인 낙동강 유역을 따라 가야연맹이 가능했을 것이다.
낙동강 물줄기의 또 다른 상류 끝인 상주지방에도 가죽배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상주 일대의 고대 국가였던 사벌국(沙伐國) 또는 사량벌국(沙梁伐國)는 강가의 물결과 모랫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벌국은 고령가야의 전신이라는 설이 있다. 육가야 중 고령가야는 지금의 경남 진주 일대로 보는 이병도(李丙燾)설과 『한국사통론』(변태섭, 삼영사, 1986)의 주장과 함께 <삼국유사>와<세종지리지>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일대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 문헌의 기록보다 진주일대에서 가야시대 중요한 유물 발굴 때문에 진주설이 더 힘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두 지역 중 고령가야의 위치가 어디라 할지라도 낙동강 유역의 가야연맹의 강물 유역의 연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사벌국이 있었던 상주(尙州)의 명칭에서 상(尙은 경주(慶州)의 慶자와 함께 오늘날 경상도(慶尙道)의 '慶尙' 명칭이 된 두 고을의 하나가 된데는 尙자가 가지는 '카약'과의 그 어떤 연유에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코리안신대륙발견> 경상도는 慶尙道는 '고래와 카약의 나라'라는 뜻 에서 보다 상세히 논했다.
낙동강 물길의 나라 가야는 동해를 면한 신라와 함께 건국초기부터 바다를 통하여 멀리까지 왕래한 신화적인 배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가락(駕洛)만이 물길의 나라가 아니었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물길(勿吉)·말갈(靺鞨)·등의 국호들도 그 뜻을 보면 '물길의 나라' 또는 '가죽배의 나라'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 건국신화는 허황옥이 먼 바다에서 오는 것을 김수로왕이 환영하는 것에서 나타나고, 신라의 석탈해는 먼바다에서 와서 조상이 살던 집터를 찾아 왕이 되는 신화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는 해척지모(海尺之母)의 아들로 묘사되고, 그 부인 알영은 바닷가에 "용(고래)이 나타나 죽어 그 뱃 속에서 나온 여자아이" 신화로 남아 있다.
석탈해 신화는 특히 '용(고래)을 따라 왜국 동북 1천리 용성국에서 돌아와 신라 해변에 당도하니 까치떼가 울었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신라 신화가 고래가 이동하는 오호츠크해 베링해에 물길로 연결되어 오늘날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고래와 태양새 토템 세트에 이어진 신화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바다의 배가 동원된 시조신화 이것은 보다 강력히 주목받아야 하는 선사시대 코리안들의 위대한 역사의 배경을 보여주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3000년 전 코리안 온돌터와 고래뼈 탈이 발굴된 알류산열도 아막낙 섬(Amaknak Island) 일대의 원주민들인 우난간(Unangan) 또는 우난가(Unangax) 뱃사람들의 가죽배는 카약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래에 그들의 고래잡이 탈 그림에서 보듯이 그들의 토속적인 모습은 코리안들을 닮아 있다.
*코리안 온돌이 발굴된 알류산열도 아막낙 섬이 소속된 유날라스카 지역의 전통 탈 그림. 1789년.
한국 전통 상여꾼의 장식과도 닮아 있다.
Illustrations of masks used at dances. Unalaska, c1790.
From Martin Sauer, “An Account of a Geographical and Astronomical Expedition to the Northern Parts of Russia…Performed by Commodore Joseph Billings, in the Years 1785 to 1794.”
카약은 고래뼈 또는 나무가지를 엮은 골조에 짐승 가죽을 씌운 가볍고 작은 가죽배이다. 물개를 잡을 때나 고래를 잡을 때도 그들은 카약을 타고 바다를 헤엄치듯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알라스카 이누이트 인디안들이나 그린랜드 이누이트 인디안들의 카약도 베링해에 최초로 온 팔레오 인디안들이 만든 카약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베링해의 카약의 기원이 코리안 가죽배 기원이라면 생경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카약'이라는 말은 놀랍게도 가야 건국 전후 '가락(駕洛)'에서 유래했으며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 연안에 도착할 때 가져간 것임이 드러내는 역사적 문헌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다.
더불어 이 글에서 여러 방증들을 제시함으로써 카약의 유래가 선사시대 코리안 '가락'에서 기원했다는 그 역사적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알라스카 원주민 고래잡이들은 가죽배 카약을 타고 고래사냥을 했다! 알라스카 우난간인들의 가죽배카약은 최소 1명을 기본으로 하지만, 고래사냥에 사용하는 카약은 2인용 카약(double-deck qayaq)을 사용한다. 카약은 많게는 4명까지 타지만, 큰 규모로 고래사냥을 할 때는 20명이 탈 수 있는 오픈덱(open deck)인 가죽배(skin boat)인 우미악(Umiak)을 함께 사용했다.
*알라스카 우난간 원주민들의 고래사냥용 2인용 카약(double-deck qayaq).
가죽배로 카약은 최소 1명에서 많게는 4명까지 타며
큰 규모의 고래사냥일 경우 20명이 탈 수 있는 오픈덱 스타일의 가죽배인 우미악이 함께 사용되었다.
알라스카 원주민 고래사냥을 위하여 가죽배를 이용했다.
*작은 가죽배 카약을 타고 고래사냥을 하는 알류산열도 우난간 고래잡이들.
1883년 오리지날 그림에 2003년 칼라를 입힌 그림.
This is taken from the cover of the Aleut Corporation's 2003 Annual Report. This is a colorized version of an original 1883 drawing by Henry W. Elliott, a U.S. Treasury officer and a conservationist, who spent a lot of time out there in the late 19th Century.
*낙동강 상류 가야 권역의 내륙 깊은 계곡 성주군 무학동 선바위.
가야인들은 통나무배(카누)나 가죽배(카약)를 타고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옛사람들에게 물길은 고속도로와 같았기 때문에 수시로 물길을 트는 작업을 했다.
오늘날 필리핀인들의 계곡 카누 물길 정리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카약 투어로도 인기를 끄는 동해안 카약
'카약'이라는 말은 가야의 '가락'에서 유래했다.
베링해 '카약'은 그 기능과 이름에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선사시대 코리안 조상들이 사용하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과연 '카약'이라는 음운은 '가야' 또는 '가락'과 거의 일치하는 음운일 뿐 아니라 그 뜻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3. 다시 쓰는 카약의 역사(歷史): 유럽기원설에서 선사시대 코리안 '가락' 기원으로
현대 사회에는 자동차 문화로 도로가 교통수단이었으나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 고속도로는 카누를 타고 다니는 강물길이었다. 옛사람들에게 물길은 고속도로와 같았기 때문에 수시로 물길을 트는 작업을 했다. 오늘날 필리핀인들의 계곡 카누 물길 정리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흔히 가마라고 하면 시골길에 걸어서 메고가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렵시대는 카약이나 카누를 사용하여 계곡 물길을 따라 이어진 '물길 고속도로'가 주 교통로였다. 걸어서 먼 길을 가는 것보다 물길에 카누나 카약을 타고 다닐 때 그야말로 '가마'와 같은 '고급 승용가마'의 역할을 했던 것이 카약이나 카누 또는 마상이었을 것이다.
카약(qayaq)은 가락국의 '가락(駕洛)'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8천년의 울산반구대 고래잡이배 암각화로 말해주듯이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동해바다 해안을 따라 연해주 오호츠크해까지 올라가 캄차카반도의 코리약(Koryak) 부족의 역사에 이어졌다.
코리약(Koryaks)족은 언어(言語)가 우리 민족의 말과 유사한데가 많다. 특히 가족을 표현하는 친족어(親族語)는 거의 우리말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어 / 코리약어
에미 / 에무(emu)
누나 / nanu
아들 / azut
딸 / tan
아우 / asu
러시아인들이 캄차카반도에 진출한 것은 1648년 이후이다. 코리안들과 그 이전에 이어진 캄차카반도의 코리약 부족의 카약은 알류산열도 아막낙섬 우난간 원주민들의 카약에 이어져 있다. 가락 - 코리약 - 카약은 모두 같은 물길의 교통수단과 사냥수단에서 나온 음운이다.
가락(駕洛) - 코리약(Koryak) - 카약(Qayaq)
코리안신대륙발견은 고래를 따라 간 그들의 배의 전통에서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카약의 역사 추적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카약'의 역사를 통해 본 코리안신대륙발견
동해 북단 석탈해가 온 곳으로 추정되는 캄차카반도의 코리약(Koryak) 원주민들도 카약을 사용해 왔다는 것을 David Zimmerly의 [QAYAQ - Kayaks of Alaska and Siberia]에서 확인할 수 있다.
"... the western Arctic, from Alaska and Siberia, including a vast range of kayaks and related kayaking and hunting equipment used by Koryak, Aleuts, Chuckchi, Inuit and Inupiat peoples."
카약(qayaq)은 나무나 고래뼈 골조에 짐승 가죽을 둘러싼 구조이다. 가죽배 카약의 역사 연구를 통하여 흥미롭게도 필자는 우리의 역사문헌에서 동해안을 왕래하는 가죽배의 역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초기의 카약은 '고래해골 골조(whalebone-skeleton frame)'에 물개, 바다사자 등의 짐승 가죽을 꿰맸다((These first kayaks were constructed from stitched seal or other animal skins stretched over a wood or whalebone-skeleton frame).
카약의 역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4-5천년 전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카약이 발굴된 가야와 신라가 건국하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혹독한 환경의 현실에서 뱃사람들에게 가죽배의 역사는 약 8000년 전까지 올려잡을 수 있다고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8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울산반구대 고래잡이배의 역사에 닿아 있는 것이다.
The oldest known archaeological evidence of a kayak goes back 2,000 years B.P. and there is inferential evidence dating it back another 2,000 years. An 8,000 year existence for the kayak is possible, but we will probably never know for sure.
지금까지 카약의 시초는 시베리아 오지 해안으로 알려져 왔으나 기후로 인한 평가로 보인다. 왜냐하면 추운 곳이라서 시베리아 또는 알라스카 득의 극지방에서는 짐승 가죽으로 덮은 카약은 그 골조를 가는 나무 또는 고래뼈로 만든 카약의 잔흔들이 썩지 않아 그 잔재가 남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선사시대 코리안들의 카약의 잔재는 작은 나무가지와 짐승가죽들은 통나무배에 비하여 쉽게 썩어 사라졌다고 하여 카약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카약 연구자들은 카약의 기원이 시베리아 북극해안 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 고고학적 증거는 미미하여 결코 확실하는 것만은 아니다.
Interestingly, despite being the birth place of the kayak, very little archaeological evidence of the covered kayak can be found on the Siberian Coast.
초기의 유럽 발틱해 기원설은 이미 폐기되었고 현재의 카약의 기원은 북극해 인근 알라스카와 시베리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1900년대 초기에는 전통 바다 카약이 마치 러시인들과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져온 것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했다."
In the early 1900’s the traditional sea kayak slipped in dis-use and history as Russian, European, and American settlers introduced modern ships and boats.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고래를 따라 최초로 베링해로 진출해 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리학적으로 그리고 선사시대 코리안 항해 역사와 고래문화 전통에서 충분히 증명이 되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와 코리안 전통 문화의 연계성에서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추운 베링해 지역으로 올라갈수록 통나무배를 사용하기 어렵고 가죽배가 유용한 사냥배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타고 간 배는 북극해 바다에 알맞는 가죽배를 타고 갔을 것이다.
온돌이 추운 지방에서 사용되는 기능이지만, 코리안들의 온돌 문화로 자리잡은 것은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위도의 길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바다 해변을 오르내리며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같은 배경에서 바다 가죽배는 추운지방의 문화처럼 보이지만, 코리안 가죽배 기원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코리안 배의 역사에는 가죽배에 관한 괄목할만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상세히 밝히겠지만 코리안들의 역사 문헌에서 특히 '가죽배 사냥'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낼 수 있다.
가죽배로서 혼자 또는 두 세명이 타는 카약(qayaq)보다는 스무명 가까이 탈 수 있는 우미악(umiak)이 좀더 오래된 가죽배로 알려져 있다. 우미악 가죽배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1만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미악은 카약과는 달리 열린 갑판(open deck) 보트이며 통나무배가 아닌 고래뼈와 작은 나무가지들을 골조에 가죽을 씌운 보트이다.
카약은 덮힌 갑판(covered deck)으로 바다의 파도를 맞아 뒤집혀도 다시 탑승자가 앉아 있는 그대로 배와 함께 일어날 수 있는 가볍고 편리한 파도를 이기는 보트 구조이다. 카약과 우미악은 함께 사용되는 수가 많았으며 가죽으로 되어 있어 가벼운 특징 때문에 해상 이동이나 바다동물 사냥에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
카약 활동이 많은 곳은 베링해 북극해에 연하는 알류산열도 카약과 카나다 북부 북극해 대서양에 연하는 그린랜드 카약으로 나뉘어진다. 알류산열도 카약은 완만한 곡선의 용마루(chines) 척추가 있고 그린랜드 카약은 모난 형태(angular shape)를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린랜드 지역은 연간 얼음이 녹아 바닷길이 열리는 기간이 짧아 사실상 알류산열도 카약이 더욱 활발하다.
The peoples of the Eastern Arctic and Baffin Island in Canada only had open water a few months of the year.
자주 들어 옮길 수 있도록 만든 구조를 가지는 카약은 알라스카, 카나다, 시베리아, 그린랜드를 포함하여 베링해 북극해 전역에 걸쳐 그 구조와 형태는 대략 40여가지로 세분된다. 분명한 것은 고래잡이배로서도 소형 카약이나 우미악 가죽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선사시대 코리안 고래잡이배에 대한 개념 접근에서 너무 큰 배로 추측하지 말아야 하는 대목이다.
"카약은 물개, 바다사자는 물론 고래까지 포함하여 바다의 포유류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은 물론 강이나 호수에서는 순록떼를 사냥할 때도 사용한다."
Kayaks were used on the sea to hunt marine mammals such as seals, walrus, and whales; and on rivers and lakes from which to hunt caribou.
"카약이 서양인들에게 알려진 최초는 1740년대 러시아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g)이 이끄는 탐험단이 알류산열도에 처음 오면서 그곳 알류트인들의 바다 카약을 보면서였다."
In the 1740’s, under the leadership of Vitus Bering, Russian explorers were the first to come into contact with the Aleutians and their sea kayaks.
"최초의 러시아 탐험대는 알류산열도의 원주민들이 카약을 타고 해달(Sea Otter) 사냥에서 놀라운 카약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카약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때의 러시안들은 북극해 연안에서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 섬(Catalina Island)에까지 확대되어 있는 북미 연안의 원주민들이 사냥배인 바다 카약을 통한 사냥기술을 습득헸다. 카탈리나 섬 사람들이 타는 카약을 본 제수이트 선교사들은 "가죽을 씌운 원주민 보트 (natives in skin covered boats)”라고 저널을 통하여 알린 바 있다."
When the Russians saw the skill and agility of Aleutians hunters in their kayaks they were exploited, even kidnapped, and taken aboard ships to be used for hunting of Sea Otters. The Russians took these skilled sea kayaking hunters throughout coastal North America, from the arctic as far south as Catalina Island, off California where Jesuits priests, made journal references to “natives in skin covered boats”.
알류산열도의 카약을 통한 사냥은 해달(sea otter) 사냥 기술을 통하여 러시아인들의 해달 가죽 교역에서 크게 더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가 알라스카 알류산열도 고래투어에서 본 해달들은 대단히 재빠른 녀석들이라서 여간한 배들로서는 그들을 잡을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알라스카 원주민들의 카약을 따라 배운 최초의 유럽계 백인들의 카약은 1960년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강의 수달이 추운 해안지대 서식지로 연결되어 바다수달 즉 해달에 이어졌다. 이러한 강에 사는 수달이 바다로 나가 해달이 된 것을 보면서 특히 쿠릴열도 알류산열도에 이어지는 바다 연안을 따라 이어진 해달 서식지는 흥미롭게도 코리안 고래잡이 루트에 일치한다.
따라서 수달과 해달은 강물을 오가던 카약이 해안선을 따라 베링해로 간 코리안들의 토템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유사> 혜통황룡(惠通降龍) 편에는 새끼 다섯 마리를 남겨두고 죽은 수달의 뼈가 사라지고 나서 얼마후 다시 보니 그 어미 뼈가 전에 살던 굴로 돌아가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있더라는 설화는 수달이 우리 민족에게서 특별한 토템대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의(白衣)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어귀(지금의 남간사南澗寺 동리東里)에 있었다. 어느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뼈는 전에 살던 굴로 되돌아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다. 혜통이 바라보고 한참이나 놀라고 이상히 여겨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삼국유사> 혜통황룡(惠通降龍) 편
해달은 강물의 수달이 바다 수달이 된 것으로 카약의 활동 유역과 유사한 모습이다. 알류산열도 원주민들이 카약으로 재빠른 해달을 잡아내는 기술에 놀란 러시아인들이 좀더 세밀하게 해석했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다수달인 해달은 본래 강에서 내려와 바다로 이어진 카약을 상징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필자의 주창은 가죽배 카약의 운행과 함께 해석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강물에서 시작한 카약이 바다의 파도를 이기며 베링해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카약과 카약을 탄 뱃사람의 일체된 방수 구조를 가진 '한 몸의 짐승'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었다. 필자는 물 속에 뒤집어졌다가도 금방 다시 제대로 제자리로 오뚝 설 수 있는 카약을 보면서 해달의 모습을 떠올린다.
해달은 카약처럼 강물의 수달이 바다 수달이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코리안들이 해안선을 따라 베링해까지 가는 섬들의 연결에서 해달들의 서식처가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알류산열도 원주민들이나 코리안들에게 해달에 대한 전설들이 상당히 많다는데서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선사시대 코리안 고래잡이들의 항해술은 강에서 먼저 시작했다. 선박 운항 능력은 강물의 카약에서 바다 카약으로 발전한 것이다. 앞선 글 <코리안신대륙발견> 귀신고래(Gray Whale)의 루트와 해달(Sea Otter) 신화 에서 논했지만 해달은 알류산열도 원주민들에게는 중요한 토템숭배 대상이었다.
*귀신고래 루트와 일치하는 해달의 서식지역.
사할린에서 쿠릴열도 알류산열도 그리고 바하 캘리포니아까지 귀신고래 루트와 일치한다.
http://alaska.fws.gov/fisheries/mmm/seaotters/history.htm
해달은 잡기가 쉽지 않지만, 초기의 러시아인들은 알류산열도 원주민들이 카약을 타고 해달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잡을 수 있는 것을 보고 카약의 만능에 대해서 놀랐던 것은 카약이 가지는 해달과 같은 뒤집기도 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카약이나 가죽배에 짐을 싣거나 배의 평형을 유지하려 바닥에 싣는 각하돌(ballast,; 바닥짐돌)은 해달이 가금에 돌을 얹고 조개를 부시는 것에서 더욱 해달은 뱃사람들에게 '카약을 위한 토템'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카약처럼 뒤집어져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해달 떼의 모습.
가슴에 돌을 올려 그 위에 조개 등을 깨서 먹는다.
sea otters use rocks to break open sea urchins and other shell-dwelling
*해달 떼가 몰려다니는 바위 섬 주변. 알라스카 키나이 해상 국립공원. 2012년 8월 4일 필자 촬영.
*해달처럼 뒤집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카약은
해달처럼 해안선 어디서나 이동이 용이했다.
카약 연구자들은 카약이 바다의 물결을 스치는 그 스트림라인이 오늘날 폭격기 수준과 유사한 차원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카약은 "물에 띄우는 건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것( the most advanced, hydro dynamic watercraft in the world)"으로 호평하고 있다.
알라스카 원주민들은 '카약'이라는 뜻을 '사람의 배 또는 사냥꾼의 배("man's boat" or "hunter's boat")'로 여기고 있다. 원주민들의 카약은 타는 사람 자신이 자기의 카약을 직접 만든다. 다만 그 부인이 카약의 겉을 가죽으로 꿰매는 조수 역할을 한다. 앞선 글에서 소개했지만, 알류산열도 원주민들의 미신에는 카약은 카약을 타는 남바의 '부인'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native kayaks were a personal craft, each built by the man who used it—with assistance from his wife, who sewed the skins—and closely fitting his size for maximum maneuverability.
카약은 타는 사람이 사냥활동에 적절한 사이즈로 만들어진다. 카약의 길이는 카약을 만들고 탈 사람의 양팔 길이의 3배로 하고 그 폭은 그 사람의 엉덩이 크기 플러스 주먹 두 개의 폭으로 만든다. 그런 기본 개념에서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카약의 크기는 17 feet (5.2 m) 길이에 그 폭은 20–22 inches (51–56 cm)이고 두께는 7 inches (18 cm) 정도이다.
카약의 영어는 kayak이지만, 알라스카 원주민들의 카약은 qayaq라고 쓴다. 서양인들은 카약의 기원이 발틱해를 중심한 유럽에서 유래하여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 전했다는 주장을 스스로 철회했지만, 그 기원은 아직 모호하다. 베링해와 북극해를 중심으로 사용되어온 카약의 기원은 과연 동아시아 해양세력들이 사용하던 가죽배 전통이라는 것이 필자의 새로운 해석이다. '카약'은 '가야'와 '가락'에서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카약'은 '물길에 띄우는 1인용 가마'의 뜻인 '가락(駕洛)'에서 기원
'가야'는 한자 표기 이전에 사용된 칭호였다. 가야는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구야(狗邪: 개야, 개라로 현지발음), 가량(加良) 등 다양한 표기로 나타난다. 이것은 '가야'나 '가락'의 음운이 기본적인 우리말이되 나중에 다양한 한자가 차용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야와 가락의 뜻은 모두 낙동강 물길에 연계된 칭호들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qayaq(카약) 또는 kayak의 발음은 때에 따라서는 '카야'로 발음된다는 사실이다: kayak (pronounced kai-yah). 가야와 카락을 함께 쓴 가야인들을 생각케 한다.
'가람'은 순 우리말의 강(江)을 뜻한다는 면에서 가람과 연관하여 있는 가야의 국호인 '가락' 또는 '가라(가야)'는 낙동강과 연관한 이름인 것이다. 특히 가락(駕洛)의 '洛'은 낙동강(洛東江)의 '洛'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락(駕洛)'의 駕(가)는 '멍에'가 아니라 사전에서 "추장급이 타는 가마나 수레"를 말하고 있고 駕洛의 洛(락)은 "물길따라 흘러가는"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락(駕洛)'은 '노를 저어 강을 건너거나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카약이나 작은 배'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락국(駕洛國)의 駕洛(가락)은 낙동강에 타고다니는 추장급 카약 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마 중에도 지붕이 없이 타는 사인교가 있다. 사인교는 카약처럼 1인용이다. 그 사인교가 강물을 건너간다면 그 모양은 영락없는 카약을 닮아 있다. 사인교에는 두 사람이 메는 이인교 스타일이 자주 사용되었다. 駕洛(가락)은 물에 띄우는 사인교 가마를 닮은 카약의 모습인 것이다. 카약에 노를 젓는다는 것은 가마 다리를 메는 가마꾼 모습에 유사한 것이다.
*가마의 하나인 사인교. 땅 위의 '카약'이라 할 수 있다.
*사인교 가마를 닮아 있는 알류산열도 카약 '가마' Baidarki
복판의 사람을 모시고 가고 있다.
*사인교 가마의 깔판 나무들도 카약의 골조구조를 닮아 있다.
*스킨보트 카약(앞쪽)과 현대식 카약(뒤쪽)
알류산열도 우난간인들은 ikyak 또는 qayaq이라 칭했다.
As it is spelled in the Aleut/Alutiiq language. In English: kayak. The model in the foreground has a light wooden frame and is covered with seal skin stretched tight.
*카약은 지붕 없는 가마를 강물에 띄운 '가락(駕洛)'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복개식 가마(뒷쪽)와 오픈 덱 스타일의 사인교 가마(앞쪽)
카약처럼 1인용이다.
*임금이 궐내에서 타는 사인교인 어교.
가마꾼들이 노를 젓는 노꾼을 닮아 있다.
캄차카 반도의 '코리약(Koryak)' 부족은 '가락국'의 '가락'과 그 어떤 음운의 유사성이 있다. 베링해의 '카약(Qayaq)'은 결국 가야와 가락(駕洛)에서 유래하는 가죽배 전통인 것이다.
가락(駕洛) - 코리약(Koryak) - 카약(Qayaq)
洛의 '各' 모양은 영락없는 작은 배를 타고 양쪽으로 노젓는 모습이라는 것은 카약이 가락에서 나온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각인의 각자의 各(각)이란 배를 타고 각자가 노를 젓는 것에서 나온 모습인 것이다.
各
*작은 가죽배에서 각인의 노 젓는 모습
낙동강(洛東江)은 洛東 즉 가락국의 동쪽의 강이라는 의미이다. 洛東江의 의미는 카약을 타고 내려가 동해 바다로 가는 강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시조신화에서 석탈해가 온 곳이라고 <삼국유사>가 말하는 "왜국 동북 1천리"의 오호츠크해와 베링해를 향해 이어져 있는 가람이 가락(駕洛)을 타고 내려가는 동쪽 洛東의 강 洛東江인 것이다.
*가죽배의 역사에 이어진 선사시대 코리안 고래잡이들의 루트
선사시대 코리안들이 울산반구대에서 고래따라 알라스카 아막낙섬까지 갔다.
그 증거의 하나가 3000년 된 온돌터와 고래뼈 탈이 발굴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가야는 가락이라고도 한다"라고 동시에 기록하고 있지만, 처음에 가락이라 했다가 나중에 가야라는 말로 변했을 수가 있다.
가야(또는 가락)의 건국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런 가야와 가락 국호를 인도불교의 관점에서 이름 풀이를 해서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가야는 안으로는 가야산, 밖으로는 가야의 강 하구인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김해(金海)의 바다에 이어져 있는 물길에서 그 명칭의 연원을 찾아야 한다. 김해 바다에 이어진 금관가야는 특히 협의적인 가락국(駕洛國)으로 불렸다.
5. 여러 명이 타는 우미악(Umiak)은 바다의 '움막(Ummak)'이라는 뜻
지난 8월 필자는 3000년 전 코리안 온돌과 고래뼈 탈이 발굴된 알류산열도 아막낙(Amaknak) 섬을 답사했다. 그곳에서 온돌터가 남아 있는 아막낙 섬 '아막낙(Amaknak)'이 '움막'이라는 우리말처럼 다가왔다.
'아막낙'은 '움막+낙'이 된다. 여기에서 '낙'은 '물길'을 의미하여 '아막낙 - 움막낙'은 물길에 떠있는 움막이 되는 것이다. 낙동강(洛東江) 물길 따라 형성된 나라 가락국(駕洛國)의 낙(洛)은 물길을 의미하고 있다.
한 개인이 타는 카약보다는 여러 가족들이 탈 수 있는 우미악(Umiak)은 선사시대 코리안 '움막'의 물에 사용한 칭호라 생각한다. 풍수에서 말하는 양택과 음택이 있듯이 지상의 움막과 해상의 움막이 있었던 것이다.
베링해와 북극해 일대에서 사용되는 카약은 알라스카 이눅티투트(Inuktitut) 원주민들에게는 카약(qajaq)으로, 알류트인들과 이누이트인들에게는 이캬(Iqyax)로 표현된다. 러시아어 표기로 X(h에 가까운 발음)가 들어가 ''이캬 - 이캭'은 '이카약'과 같은 발음이기 때문에 이눅티투트의 '카약'과 같은 발음이라 하겠다.
한 사람이 주로 타는 카약(qayaq)이 가야의 1인용 사인교 가마의 물에 띄운 '가락(駕洛)'에서 유래한 명칭이라면 우미악(umiak)도 우리말에서 '움막'인 것이다. 선사시대 코리안들의 집은 '움막'이다. 배는 바다의 집이라면 '우미악'은 우리말 '움막'에서 비롯했을 수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 수혈주거(竪穴住居) 형태인 '움막'은 땅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그 주위에 띠집을 세워 만든 주거 형태를 의미한다. 개인이 아닌 가족이 살 수 있는 '움막'이라는 말은 두 가지 구조의 조합어이다.
'움'은 땅을 파내려간 것을 말하고 '막'은 나무나 큰 동물의 뼈들로 세워 올린 뼈대에 짐승 가죽을 바람가리개로 둘러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움막'은 그대로 음운만이 '우미악(umiak)'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에서도 바다에서 '물을 파고 내려간 것과 같은' 구조의 '움막 배 집'이며 그 겉도 짐승가죽으로 가린 '막'인 것이다.
1인용 카약 기원 = 가락(駕洛) -> 카약(qayaq)
다인용 우미약 기원 = 움막 -> 우미악(umiak)
우미악은 그 길이가 17 - 30 피트(5.2 - 9.1 m)로 나무 골조에 물개 등의 바닷가 짐승 가죽으로 씌운 것으로 한 사람이 하나의 노를 젓는다. 그 노의 모양은 한쪽 끝에만 바닷물을 젓는 노판이 원형이다. 요즈음 카약은 양날을 사용하고 있다. 가죽배 카약에서 외날 노를 사용한 것은 2-4명이 타는 카약이나 우미악 가죽배 등에서 여러사람이 한쪽 씩만 맡아 노를 젓기에 좋은 방편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알류산열도 카약은 캄차카반도에서 옮겨갔다. 그래서 알류산열도의 우미악은 때로 캄차카반도의 용어를 쓴다. 2-3명이 타는 캄차카반도의 바이다르카(Baidarka) 카약은 어딘가 우리말 '배닭'으로 읽혀지기까지 한다.
태양숭배사상에서 닭을 숭상한 코리안들이 바다에 사는 물닭배라는 의미에서 '배닭 - 바이다르카'로 된 것이 아닐까. 가야와 신라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오리모양 토기들은 해돋는 동해 바다의 '닭배 - 배닭'의 카약이 캄차카에서 '바이다르카'로 발음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만 같다.
어쩌면 오리모양 토기는 배달 민족의 '배달'의 어원에 연결도어 있을지도 모른다. 오리는 벼슬이 있는 새가 오리가 아니라 오히려 볏이 있는 닭이나 원앙새를 닮은 오리모양토기 모습은 흥미롭게도 3000년 전 코리안 온돌이 발굴된 알류산열도 아막낙섬 원주민들인 우난간인들의 카약과 모자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리모양 토기 명칭은 원앙새나 닭의 벼슬을 가지고 있다.
'닭모양 토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라 오리모양 토기.
*오리닮은 토기 모양의 베링해 지역 카약 탄 모습.
3000년 전 코리안 온돌이 발굴된 알류산열도 아막낙섬 원주민들인 우난간인들의 카약과 모자.
신라시조 알영부인의 '부리'가 떨어진 것은 바다에서 지상의 왕후가 된 것을 의미한 것.
배달의 나라는 바다를 주름잡는 나라 해석해야 한다. '배달'은 한자말이기 전에 '배닭 = 바이다르카'라는 카약을 타는 바다의 해양인 코리안 선조들의 칭호에서 나온 순 우리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쪽 바다에서 해돋는 것을 알리는 닭의 배 그것이 배닭이었을 수가 있다.
가야 신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오리모양 토기는 카약을 닮아 있으며 카약은 태양을 솟아나게 부르는 금닭을 닮아 있다. 카약의 골조가 金자를 닮아 있고 김알지가 상자 속에서 계림 숲의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 금닭이 울었던 바로 그 금닭이야 말로 '오리모양 토기'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3000년 전 코링란 온돌이 발굴된 알류산열도 아막낙 섬 카약타는 사람들은 새부리처럼 생긴 모자를 쓴다. 신라시조 알영부인의 '부리'가 떨어진 것은 바다에서 지상의 왕후가 된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10/12/12 오두 김성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 다음 장에서 계속 -
- 다음 장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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