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천수경박사되다] 16.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主
1장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신 관세음보살님께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主 말할 것도 없이 자비의 주체이고, 중생 구제의 주인이신 관세음보살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 의지하고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관음觀音
관음은 관세음(觀世音)을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사바세계 중생의 고통의 소리[世音]를 듣고 자비로 구제해 주시는 보살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천수경> 자체가 관세음보살에 대한 경전이고, 더욱 불교의 수행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내용이라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수행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칭찬하는 소리는 듣기 좋고, 단점을 직언하는 소리는 아무래도 거북합니다. 공사장의 소리는 공해지만, 사물놀이나 ‘난타’ 공연에서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는 흥이 납니다.
스님들 중에 법문할 때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를 내면 참석한 부모를 야단치는 민망한 경우도 있습니다. 수행처는 조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오히려 그 소리에 자신의 마음이 어찌 대응하는가를 수행의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세상의 어떤 소리에도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마음은 물론, 마음의 흔들림 자체를 능히 항복 받으신 것입니다.
제가 중노릇 할 초기에 가장 성가신 소리는 새벽녁의 새소리였습니다. 새벽 3시에 예불을 올리니 실상 이 시간은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새벽예불을 마치고 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려고 하면 창문이 밝아지며 이때부터 새들이 떼거리로 울어댑니다. 불과 2, 3미터 밖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아니라, ‘제발 잠 좀 자자’라는 하소연이 나오게 만드는 소음입니다.
이 정도면 오직 소리로만 수행을 삼는다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란 아름다운 곡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미래에는 이럴 경우 해당 곡을 참고로 직접 들을 수 있는 책이 만들어질 겁니다). 이 곡은 푸치니(Renato Fucini: 1843~1921)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에 나오는 아리아입니다. 극중 라우레타가 아버지 잔니 스키키에게 애인 리누치오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인데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그런데 이 아리아를 부르는 주인공의 속마음은, ‘병든 아버지가 빨리 죽어야 유산으로 정부(情夫)와 놀아 날 텐데’입니다. 실제 오페라에서 이 장면을 보며 곡을 들으면, 아름다운 아리아가 아니라 인간의 이중성과 한없는 욕망을 이런 선율에 표출시킬 수도 있구나 하는 한탄에 가까운 감탄을 하게 됩니다.
앞에서 거론되었던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도, 그 절묘한 운율 속의 가사는 ‘넌 내 딸이지만 내가 반대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한없이 저주하리라’라는 내용입니다. 이같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관찰하는 것도 훌륭한 수행이고 이를 완성한 분이 <천수경>의 관세음보살님인 것입니다. ※ 성법스님 저서인 '왕초보 천수경박사되다' 의 내용을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출처 : 매사와 법진(http://cafe.daum.net/beobjingeosa) |
출처: 모두 미래의 부처님 이십니다._()_ 원문보기 글쓴이: 부처님미소
첫댓글 소리를 보다. 음악을 오래 들을 사람으로서 이 말을 그럭저럭 이해하는데요, 음악을 듣는다는 건 소리를 통해 마음이 어떤 풍경을 그리는 거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리가 그림을 그리는 것, 이게 음악이다. 보살이 세상의 소리, 즉 부처께서 언급하신 일체계고(모든 게 고통이다)의 아우성을 듣고 아당안지(내가 그 고통소리를 잠재우겠다)하겠다. 이게 또한 부처를 닮은 관세음보살입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자비를 베풀겠다' 중생이 부처를 닮겠다고 서원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자비를 베풀겠다' 마음만이리도 그렇게 살아보겠다. 이생에 못 다한다면 내생에는 꼭 그렇게 살아야지.
서불산에도 부처님 같이 살고자 하는 분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절에 가서 불상 앞에서 기도해서 얻는 행복과 내 작은 힘으로 남을 위해 사는 삶을 통해 얻는 행복과 무엇이 더 부처님 다울까요. 내 행복만이라면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닫고 저자거리로 나섰을까요. 탁닛한 스님이 말했지요. '미래의 부처님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올 것이다.'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 : 중생
나와 남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 : 보살
나의 행복을 온전히 남의 행복을 위해 바치는 자 : 부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잠도 안 오고 마음도 신산하여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댓글을 달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