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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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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7 03:45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형제 여러분, 나는...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지고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고도 다른 지식이 많다는 뜻이고,
실로 다른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옛날 우리 수도원에서는 백과사전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ChatGPT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한 형제를 만났는데 저는
이 형제를 통해서 ChatGPT를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때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뭐냐?’라고 물었더니
1초도 안 지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며,
자기의 삶이 변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서는
영적 경험과 관계의 발전으로, 이를 통해 신앙인들은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을 키워가게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저는 너무도 놀랐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놀랍기도 했고
1초도 안 되어 답을 제공하기에 더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잡다한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에 그 ‘백과사전 형제’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그 쓸데없는 지식을 왜 그리 많이 모으고 있고 모아놓고 있느냐? 그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지혜 곧 하느님을 많이 알아야지 그런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쓰레기들을 내 머리 안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인데
실제로 그 형제는 얼마 안 있다가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실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많이 알아야 하고 하느님을 많이 사랑해야지
그러지 않고 다른 걸 많이 아는 것은 쓰레기를 많이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다른 지식은 쓰레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론을 아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ChatGPT도 그리고 악령들도 그리스도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정보의 습득을 넘어서는 영적인 체험과 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잘 알지만
ChatGPT 자신은 하느님 사랑과 은혜를 체험치도 않고 관계도 발전하지 않지요.
프란치스코가 권고에서 얘기하듯 악령들도 천상과 지상 일을 얼마나 잘 압니까?
신학자를 수백 수천, ChatGPT를 수백 수천 합쳐놓은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어도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고 하는 것이 악령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바오로처럼 그것을 통해 인생이 바뀌어야 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의 원수였던 바오로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종’이라고 자기의 모든 서간에서 자신을 소개하지요.
이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우리는 다른 것들은 쓰레기로 여기는 한편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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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부활 시기였는데, 한 순례객이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제게 오셨습니다.
“성지까지 왔으니 십자가의 길을 하자고 일행에게 말하니, 한 분이 부활 시기에는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시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세요. 전에도 부활 시기에 와서 십자가의 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잘못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례 주년은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것으로, 한 해를 보내며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돕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삶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지금 열심히 살아서 다가올 종말을 향해 신앙의 여정이기에, 부활 시기에도 주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하고, 사순 시기에도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이야 제게 물어봐서 해결되었지만, 많은 분이 모두 사순 시기에만 십자가의 길을 해야 한다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앎이란 정말로 중요합니다.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은 전혀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기들의 관습만이 옳다면서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인데, 그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면서 죄인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과 되찾은 뒤에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심지어 하느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과연 어떤가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 사랑에 반대되는 말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잔치를 벌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겸손의 마음으로 사랑에 집중하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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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내일은 매우 깨끗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에서 뭔가 배웠기를 희망한다(존 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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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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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의 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의인 아흔아홉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함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넘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넘어져도 일어설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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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성장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힘들게 됩니다. 40년 전에 논문 쓸 때입니다. 당시는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수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청년의 도움으로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글씨체도 예뻤고, 깔끔했습니다. 5년 후에 석사 논문을 쓸 때입니다. 대부분이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 다니는 주일학교 교사의 도움으로 삼보컴퓨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편집과 교정이 간편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논문 완성이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은 손으로 논문 쓰는 사람, 타자기로 논문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작성합니다. 전화기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집에 전화기가 없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전화기를 설치하려면 예치금도 많이 냈습니다. 처음 전화기가 집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전화번호가 기억납니다. 이동통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손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입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똑똑합니다. 전화기로 예약하고, 전화기로 은행 업무 보고, 전화기로 문자 보내고, 전화기로 검색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ChatGPT 4o’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구글, 네이버, 다음이 검색엔진이라면 챗지피티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대화를 통해서 질문에 응답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마치 개인비서처럼 저를 도와줍니다. 강론 준비할 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을 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2025년 생성형 인공지능의 흐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대화를 통한 인공지능도 계속 발전할 거라고 합니다. 대화는 물론, 시청각을 통한 인공지능이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인공지능도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기업과 개인의 자문을 해 줄 거라고 합니다. 창의적인 작업, 예술,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 활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AI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도 심화할 거라고 합니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특정 업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맞춤형 AI 해결책이 더욱 많이 개발될 거라고 합니다. 데이터 처리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엣지 AI의 사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AI 기술의 성숙도와 함께 점차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흐름 역시 피할 수 없다면 배워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걸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 부활, 영원한 생명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런 체험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복자 최일광(안드레아)는 종교를 배반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을 섬기며 살고, 저 하늘에서는 영원히 하느님을 섬길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백정이었던, 천민이었던 최일광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복자 최일광 안드레아에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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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등장하는 비유가 참으로 이상합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없습니다. 아직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깟 한 마리쯤 없어도 됩니다.’라고 세상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아흔아홉 마리 모두를 잃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의 비유는 더 어이가 없게 들립니다. 잃어버린 한 닢을 찾아 온 집안을 뒤집니다. 그 한 닢이 귀한 것이라면 그런 수고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닢을 찾은 이후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한 닢을 찾은 후 그 여인은 친척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엽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참으로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찾은 한 닢보다 잔치를 연 경비가 더 큰 지출이 될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보세요. 하늘나라는 우리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보세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자격이 있어서 인지를 말입니다. 오늘이라는 선물까지도. 그저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넌지요.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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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삼굴(狡兎三窟)
교토삼굴이란 ‘꾀 있는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라는 뜻입니다.
조금더 풀어서 말하면 ‘지혜롭게 준비하여 어려운 일을 면한다.’라는 뜻입니다. 또는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한다.’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시작과 마침을 가진다.’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요?
그때를 위해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때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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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유”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고,
주를 찾는 마음은 즐거워하라.
주님 생각하라, 그 권능을 생각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그리워하라.”(시편105,3-4)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읽은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모든 신자의 선물이자 의무이다.”
모든 신자가 희망의 선물을 지니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여정이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이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의 도움이 되기위해 오신다.”
기도와 성령은 함께 갑니다. 기도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모두가 평범한 말마디이지만 마음에 새롭게 와 닿으며, 우리의 깨달음의 여정에 일조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 자신만큼은 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해쳐서는 안된다.”<다산>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포기한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맹자>
새삼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포기한 자포자기 절망의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제일입니다. 평범하나 지극히 지혜롭고 용기있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 또한 깨달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말마디들입니다.
어제의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는 사람이, 만남이나 글이 있는가 하면 상처나 기분 얹짢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만남이나 글도 있습니다. 어제 읽은 글이 그러했습니다. 글은 사람이라 했는데 웬지 교만하고 건방지다 싶었고 느낌도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전 독료한 책은 친지들에게 품격있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향기로운 책이라 적극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글은, 말은 사람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라는 말마디에 적극 공감합니다.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쓴 글에서는 문자의 향기가 느껴지고 마주 대하면 책의 기운이 풍깁니다. 정말 이런 책이 깨달음을 주는, 길이 보관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런 고전(古典)의 책같은 사람이라면 늘 만나도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문자향 서권기의 정점에 있는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순간 “아,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진정 깨달음의 사람, 각자(覺者)구나!”하는 깨달음이 마음을 쳤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요, 깨달음의 자유입니다. “아, 그렇구나!” 깨달음의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날로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나 글이 말이 좋은 사람이자 글이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숱한 눈이 없는 지식들보다는 보는 눈을 주는 깨달음의 지혜가 백배 낫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이 됩니다. 깨달음의 사람을 각자(覺者)라 부르는데 깨달을 “각覺”자안에는 볼 “견(見)” 자가 들어 있어 깨달음과 보는 눈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실로 영적성장은 깨달음의 여정, 개안의 여정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지혜, 자유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제가 참 많이 나눈 무지의 병의 치유에도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단히 추구할 바 깨달음의 은총이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나 날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깨달음의 예수님과는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군.”
투덜거리는 자기중심적 율법주의적 폐쇠적 사고로 꽉 막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참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신학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무지에 눈먼, 참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지혜와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통해 빛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이 진정 복음입니다. 두 예화의 결론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다음과 같은 확신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하여 지식이 많다하여 이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자유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지식이 차고 넘쳐도 깨달음의 눈이 없으면 모두가 무거운 짐의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바로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오늘 필립비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야 말로 예수님에 버금가는 각자임을 봅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깨달음의 기쁨과 자유로 충만한 바오로의 고백이 덩달아 우리를 기쁘게, 자유롭게 하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깨달음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 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깨달음의 경지를 누리지 못하고 무지의 어둠속에서, 온갖 잡다한 쓰레기 더미속에서 무거운 짐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지요! 말그대로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 청해야 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자유의 은총입니다. 오늘따라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 주님의 초대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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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를 향한 마음>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수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하나가 모여
이루는 모두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고작 하나쯤이야
고작 하나쯤이야
고작 하나쯤이야
하나가 모여
이루는 모두를
죽이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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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길 잃은 자들을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인내
주님의 비유에서는 크나큰 인내가 보입니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목자의 인내이지요.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 마리 좀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러고는 몹쓸 죄인을 인내심 있게 참아 주듯이 어깨에 메고 돌아오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인내심 많은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반가이 맞고 옷 입히고 먹이고, 참지 못해 화내는 맏아들에게 대신 변명까지 해 줍니다.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회개를 껴안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좋은 결과를 맞은 것은 아버지의 인내 덕분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하느님을 무심코 사랑하라는 말은 표상이나 매개물을 여의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행위이자, 순수한 직관과 합일의 행위이지, 분석하거나 이름을 붙이거나 분석을 통해 아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힘쓰는 행위가 아니라 잠기는 행위다. 첫째 오솔길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은 소용돌이 내지는 회오리다. 소용돌이의 신적인 깊이와 접촉하려면 가라앉아야만 한다. 우리는 유에서 무에 이르기까지 이 한 분 안으로 영원히 가라앉아야 한다. 하느님의 단일성이야말로 맑게 비치는 하느님의 깊은 속(inness)이다. 하느님은 우리 속으로 가라앉고, 우리는 하느님 속으로 가라앉는다. 앞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엑카르트는 “일어남”은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며 “가장 높은 것”은 “가장 내밀한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엑카르트는 “일어남”과 “가라앉음”을 동등시한다. “영은 온 힘을 다해 일어나서 거침없이 하느님 안으로 가라앉아야 한다.” 유를 버리고 무로 가아가는 것 - 참된 가라앉음 - 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언할 수 없는 합일로 끝난다.
나는 여러분의 “여러분 됨”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속으로 가라앉게 하고 흘러들게 하라고 충고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여러분 됨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 됨”이 될 것이고,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그분의 변함없는 존재와 그분의 이름 없는 무를 영원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으로 가라앉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가라앉음이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도 하느님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27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고통당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프란치스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히야친타는 그 얼마나 서러워하였는지!
“난 오빠를를 언제 만나러 가게 될까?"
하고 말하는 그녀의 둥근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곤 했다. 그리고 자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얼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정해 놓고,
“프란치스꼬 오빠를...."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오빠가 예수님과 성모님을 눈으로 뵈오면서 즐기는 천국,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리워 마지 않는 천국을 생각하였다.
그녀 역시 작은 고행띠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루치아에게 건네 주며 히야친타는 말했다.
“이것 좀 맡아 줘. 엄마가 보면 안 되니까. 좀 낫걸랑 다시 줘."
그 밧줄에는 세 개의 마다가 있었고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루치아는 소중히 그것을 간직했다가, 그 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프란치스코의 것과 함께 태워 버렸다.
올린삐아는 손 안에 쥔 진주처럼 아끼는 히야친타가 날로 쇠약해 가는 것에 슬픈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면 히야친타는,
“엄마, 그렇게 슬퍼 마셔요. 난 천국에 가잖아요. 천국에서 엄마 위해 많이 기도할께요” 하거나, 때때로
“엄마. 왜 나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셔요? 난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하고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히야친타가 오랫동안 몸을 전혀 꼼싹달싹도 하지 않고 양 손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을 보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조카 루치아에게 부탁을 했다.
“히야친타에게 좀 물어 봐라. 꼼짝도 하지 않고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에 저도 물어 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히야는 생긋생긋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요." 하고 루치아는 대답했으나 아주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 다시 한 번 물어 보았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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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는 속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엄마의 깊은 속내를 잘 몰랐고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형만 있고 나는 없다.」(김향이: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글)라는 책의 내용처럼 저 역시도 엄마가 형만을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야속한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속담대로,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 손가락 중에 유독 늘 상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으면 그 손가락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열 손가락 중에도 유독 예뻐 보이는 손가락도 있고, 언제 봐도 안쓰러워 보이는 손가락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똑같이 깨물어도 원래 상처가 나는 손가락은 더 아프게 마련일 것입니다. 예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싫고 힘든 단어가 바로 편애입니다. 이 속담이 말하고자 하는 뜻인 편애는 없다, 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저는 이 속담을 부정하고 싶습니다. 편애는 없다, 는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열 명의 자식 중에서 유독 몸이 약해 늘 상 병치레하는 자식이 어떤 자식이든 엄마는 똑같이 가슴 아프다, 는 의미를 더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이 죽고 난 뒤 엄마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엄마는 다른 자식들보다 작은형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제 생각이 짧았으며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는 표현은 엄마의 마음이었으며, 하느님의 마음 곧 자비심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에서 제외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혹 사람의 눈에는 양 백 마리중에서 겨우 양 한 마리를 잃고서 야단법석을 떨며 호들갑을 떤다고 하거나, 은전 한 닢이 뭐 대수인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느님 눈에는 참으로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양 한 마리도, 은전 한 닢도 너무도 소중하고 잃어서는 아니 되는 귀한 존재와 같은 영혼입니다. 그러기에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헤매시다 기어이 찾으시고 나서 기뻐하는 목자의 마음이나, 은전 한 닢을 잃고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고 샅샅이 뒤져서 기어이 찾아내어 기뻐하는 여인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향한 아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와 함께 있지만 언제가 우리도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처지나 입장이 될 수 있으며, 잃어버린 은전 한 닢과 같은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양 우리 안에 있지 못하고 양 우리 밖에서 헤매고 있다고 해도, 세상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찾아오실 것이며 기어이 찾고야 마실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고, 찾고서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다만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15, 6.9)하며 잔치를 베푼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아빠 하느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제한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단지 거룩하신 분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는 점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는 곧 慈는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요, 悲는 남의 슬픔을 함께하는 슬픔, 이라고 이해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 앞에서 하느님은 중립을 취하지 않고 조금은 편애를 보입니다. 그러기에 전 이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는 말의 뜻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느낍니다. “주님, 우리는 뒤늦게야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당신의 자비나 사랑도 그렇듯이 늦게야 알아차리고 사랑하나 봅니다. 이런 저희를 잘 아시기에 기다려 주셨고 참아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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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한 마리 찾고자 헤매시는 그분을 기억하면서 /
박윤식 [big-llight] 241106. 21:09 ㅣNo.177383
“양 백 마리를 가진 이가 그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그곳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간다. 그러다가 그 한 마리를 찾으면 기뻐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아흔아홉 의인 보다 ‘회개한 한 사람 죄인’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야말로 아흔아홉 양 떼를 광야에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려는 착한 목자시란다. 그분께서는 함께 있는 그 많은 무리보다 잃어버린 단 한 마리를 찾고자 그 어떤 것도 감수하신다나. 우리네 보통의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는 배려와 사랑을 저버린 완고한 우리 생각으로는 어쩜 지극히 당연하리라.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결코 그 한 사람 죄인마저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비하신 분이심을 보여 준다.
자비로운 이는 다른 이의 고통을 자기 일인 양 슬퍼할 게다. 그리하여 그 고통을 없애려한다. 라틴말로 ‘자비’는 슬픈 마음에서 나온단다. 따라서 잘못된 길로 빠져 엉뚱하게 가는 이를 찾아 나서시는 주님 모습에서, 우리는 자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곤 한다. 이는 그분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얼마나 간절히 찾는지를 깨우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난한 이, 죄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당신의 그 자비로운 마음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부르신다.
그러기에 회개는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는 거다.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우리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삶을 되돌리는 것일 게다. 이리하여 새롭게 변화된 그 모습에서 우리가 주님 자비를 느끼고 이웃이 그분 자비를 입은 것을 보며 참된 기쁨을 만끽해야 하리라. 그간에 저지른 죄의 용서를 받고자, 고해소로 발길을 옮겨 정녕 용서를 청하자. 주님 용서에서 그 크신 자비를 담뿍 느낄게다. 그 고백으로 무한한 주님 사랑을 느낀다면, 그 기쁨 배가 되리라.
이제 세상이 발전하면서 우리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진 것들도 하도 많아서 부족한 것이 아마도 없단다.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이, 꿈만 꾸면 곧 현실이 되는 그런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어쩜 정반대이다. 갈수록 삶은 피폐해지고 인간성도 말살되어 모든 관계가 더 메말라만 간다. 세상 건물들은 높아지고 화려해지지만, 우리가 의지할 구석은 점점 더 좁아진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세상처럼 보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고 있기에. 그래서 일상을 사는 우리는 가끔은 처음으로 돌아감을 느낀다. 부부는 신혼의 느낌을 되살려 보라는 거고 직장인은 첫 근무 때의 그 열정을 되찾아 보자. 믿는 이라면 세례 때의 그 순수함을 되찾는 것도 같은 맥이리라. 죄 지은 자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닐 게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다 필요하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기에 단 하나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께 이끌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되찾은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바라시니, 우리 역시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해야 한다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것을 찾았습니다.”라는 이 말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대변한다. 가을에 나뭇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따사한 봄이 되면 다시 생기를 찾는다. 우리도 회개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 보자. 그분께서 그 한 마리 양을 찾으시고자, 그 수고를 감수하시는 걸 늘 기억하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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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는 그리 좋은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둔 무책임한 목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하며, 단 한 마리의 양도 버리시거나 포기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백 마리를 돌볼 때 한 마리쯤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아주 작은 기회비용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버림과 포기라는 말이 없으며, 그분께 한 마리를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라, 단 한 마리도 포기하시지 않고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이 비유는 버림받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이야기가 아니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 가운데 또 다른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 양을 찾아 나서실 것입니다.
이는 아흔아홉 명의 구원을 배제한 채 특정한 한 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주님의 구원 의지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포기하고 배제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보다, 불편하고 고생스럽더라도 한 사람의 회개를 이끌고 그것에 기뻐하는 공동체를 바라십니다.
그런 공동체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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