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전개,나는 나라서,미래에게/최지은 시인
여름의 전개 / 최지은
한 여인이 유모차를 끌고 여름 속을 걸어간다
유모차 속의 아이는 여름을 손에 쥐고서
여인은 아이의 여름을 감싸며
눈을 맞춘다
바라보는 동안에도 아이는 자라고
아이와 아이 엄마는 함께 쥔 여름 안에서 더 닮아가
같은 여름을 기르고
나에게도 나를 기른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나를 기른 사람과 닮아서 나를 기른 사람에게 깃들어
나의 여름은 나를 기른 사람과도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기르고 있다
점점 더 닮아가는 방식으로
같이 죽어가는 것도 같고
같이 살아 있는 것도 같고
같은 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살아 있는 내가
죽어 있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 같은 여름
바라보기만 했는데
여름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잎이 흔들리고
숲은 젖어가고
아이와 아이 엄마는 사라져가는
바라보기만 했는데
저질러버린 일들이 있었다
텅 빈 자리
투명한 것을 지나치며
동그랗게 불러오는 배를 감싸며
잠시 한걸음 물러나 멈춘 채
다시
여름 속으로
걷고 있었다
- 월간 현대시 2017년 11월호, 신작특집
- 시집 내용으로 수정
나는 나라서 / 최지은
물가에서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는 여인은
오늘도 두 발만 적신 채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인을 기다리던 할머니 여인을 반겨 안아줍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물속으로 깊은 잠을 자러 갔다고 이야기해주네요
잘은 몰라도
물속은 깊고 넓어서
시간은 부질없는 것이라 말합니다
손목의 흉터가 닮은
두 사람
그녀들 앞으로 포개지는 마음들
할머니는 여인을
오른손은 왼손을
우리는 너희를
안아주는 마음들
나는 나라서 나 아닌 것들을 안아주면서
이럴 때
나는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아니라서 서로를 안아줄 수 있습니다
두 여인의 눈물이 함께 움직입니다
영영 끝나지 않을 물결 같고
물결이 바람을 완성하고
바람은 자꾸 물가로 우리를 데려가고
물은 한방울의 빈자리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 아이를 돌려주지 않나요
왜 우리 아들을 돌려주지 않았나요
아이가 불어 놓은 풍선은 작아지고 있는데
여인은 숨을 아끼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뜯어놓은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숲이 망가지는 줄 몰랐다고 합니다
여인은 오늘도 아이의 이름을 종이 위에 적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 아이가 바닷속에 있어요
이름을 덧대어 쓸수록
아이의 이름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워
종종 종이를 엎어버리기도 하지만
여인은 다시 이름을 덧대어 적으며 아이를 품어봅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 아이가 바닷속에 있어요
나는 나라서
그녀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집 앞에서 서성입니다
그녀들이 아껴 쉬는 숨소리
바람을 완성하고
계절은 순환하고
물속은 깊고 넓어서
시간은 소용없는 것이라지만
깊은 밤이면 저 방의 불이 온전히 꺼지기를
기다려보는 거지요
아무래도 밤하늘은 깊고 넓어서
시간은 소용없는 것이겠지만요
편편히 내린 눈이 쌓여
오늘은 건넛마을까지 한마을로 보입니다
나는 나라서
나의 오래된 그 일을 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네, 모두 옛일이겠지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깊고 넓은 것이 있어
눈 감으면 펼쳐지는 것
몰래 보았습니다
온 마을이 흰빛을 내고 있습니다
- 월간 현대시) 2017년 11월호, 신작특집
- 시집과 동일하게 수정.
미래에게 / 최지은
오늘은 너와 공원을 걷는다
날씨가 좋아 공원이 좋고 공원에게도 오늘의 날씨가 꼭 알맞고
오늘 너의 작은 발과 오늘의 구두처럼
지금의 너는 공원 속에 어울리고
너의 손이 나의 손 안에 꼭 알맞아
우리는 비슷하게 생긴 손톱을 갖고 있지
네 무릎에 작은 상처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매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넘어지는
미래
그건 설명이 필요하고 보충이 필요하고 오늘의 날씨와 기분과 정치와 프레임
캠페인과 이슈와 광장과 그리고 상실을 기다리는 일
저기 아이들의 비눗방울이 시선 끝에서 투명해질 때
너는 놀랐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파괴할 수 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망가뜨릴 수 있어
광장의 먼 구호는
이처럼
설명이 필요하고 보충이 필요하고……
오늘 공원의 해는 지려 한다
집으로 가자 미래야
창가 옆 난로에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고 흐르는 뉴스는 옆으로 치워두고
미래와 함께 도미노를 줄 세울 때
하나 둘 하나 둘
반복하는 숫자를 가르쳐줄게
도미노가 쓰러질 때
너의 눈동자는 움직이는 구나
무너지는 쪽으로
넘어지는 쪽으로
미래야
부르면
너는 언제나 움직이던
그쪽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최지은시집
봄밤이끝나가요,때마침시는짧고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