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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과 헤어진 류가 집에 들어왔다.
“만나고 오셨습니까?”
“피곤해. 쉴 테니 너도 쉬어.”
류가 계단을 올라가자 수호가 물었다.
“그럼 이제 그 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계단을 올라가던 류가 턱에 힘을 주었다.
“도망치겠지.”
수호가 고개를 들어 방에 들어가는 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정윤이 은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어떻게 하면.. 네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를 보호할 방법이나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따위.. 교육 받은 기억이 없어.”
“헌터를 찾아야 해요. 절 사랑해주고, 보호해 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며 1000일을 살면 저는 사람이
된대요. 단 한 명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 그 아이는 만 18세 생일 될 때까지는 일반인처럼 살 수 있지만
그 날 밤이 되면 저처럼 변해요.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구미호인...”
정윤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난 헌터고, 널 보호해 줄 수 있다. 물론 사랑하지. 하지만.. 너와 가정을 꾸린다면 아버지와 딸이야. 부부는 될 수 없어.”
“알아요..”
“내가 아는 녀석 중에 괜찮은 녀석이 있어. 내가 알아볼게.”
은아가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정윤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그녀의 눈이 붉어지며 눈물이 고였다. 정윤이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는.. 그는 안 돼. 그는..”
“알아요.”
“알긴 뭘 알아! 네 목이 있는 멍.. 그 자식이 만든 거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네 목을 조르려고 했어. 널 그 녀석이 섬기는 놈에게 데려가야 한단 말이다!”
은아가 손으로 목을 감싸며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가 유일하게 잘 한 건 나에게 너에 대해 알렸다는 거야. 하지만 그자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몰라.”
“알아요..”
“알긴 뭘 알아.”
“그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뭐?”
“제가 그 사람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고 그런 거예요. 나보고 도망치라고.. 영신이 사건이 있었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영신이를 살리려고 했는지 선생님은 모르세요. 낭떠러지에서 매달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저를 살린 사람도 그 사람이에요. 저에게 도망치라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사람이에요.”
“사람 아니야.”
“그래요. 사람 아니죠. 하지만 이젠 저도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렀다.
“그 사람한테.. 죽여 달라고 부탁했었어요.”
정윤이 놀란 숨을 멈추었다.
“은아야.”
“살고 싶지 않았어요. 헌터들을 피해 다니는 것도 힘들었고, 그들이 본래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힘들었어요. 절 사랑해주고 보호해 줄 헌터를 어떻게 찾아요? 그가 저를 배신하고 본부로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냐고요. 이미 제 마음은 그로 가득 차 있는데 헌터와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요? 어느 것도 불가능해요. 그럼.. 선생님이.. 죽여주실래요?”
“조은아!”
“저를 위해 평생을 숨죽이고 사신 할머니.. 엄마.. 두 분께 죄송해서 스스로 죽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겁쟁이라 무섭기도 하고..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죽긴 왜 죽어?”
“저요.. 도망 안 가요.”
“그럼 그 녀석이 널 데리고 그들의 본거지로 갈 거야.”
“그들이 절.. 어떻게 할까요?”
정윤이 고개를 저었다.
“말만 들었지 반인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 같은 놈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그냥 지어낸 이야기 인 줄 알아지.”
은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윤이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미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구미호인줄 모르고 사랑에 빠졌었지.”
은아가 놀란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요..?”
“어린 아이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것을 목격했어. 그녀에게서 아이를 살렸다.”
정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단검으로 심장을 찔렀어야 했는데 울면서 살려달라는데.. 차마 못 하겠더라. 아이를 안고 등을 돌렸는데..
뒤에서 날 찔렀다. 내 품에서 아이를 다시 데리고 갔어. 아이의 기를 빨아들이는 대신 아이의 목에
칼을 댔지. 아이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난 단검을 빼서 그녀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아이의 목을
손으로 막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살릴 수 없었다. 나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 몸이 회복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그림에 재주가 있는 편이어서 미술 선생으로 들어가 있었지. 책상 서랍에 시계를
넣어두고 혹시 숨어 있을지 모를 그놈들을 살폈지. 박진원을 비롯해 여러 명이 숨어 있었지.
그리고 전학을 온 한진우.. 그 녀석이 박진원이었어. 그래서 네가 그 녀석 집에 갔다고 들었을 때
본부에 도움을 요청했었어.”
은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저를 본부로 데려가지 않으시면 선생님이 곤란해지실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반인호라는 것을 알았다면 주저없이 데려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내 딸이다.”
은아가 입술을 살짝 물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딸래미를 아프게 할 아버지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걱정하지 마. 널 보호하고 사랑해 줄 헌터를 찾아 낼 거야.”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어떤 분을 데려 오셔도.. 사랑할 자신이 없어요. 열 살부터.. 그 한 사람 뿐이었거든요.”
“널 해친 자야. 네 마음을 찢고, 네 목에 상처를 줬어.”
“도망은 안 가요.”
“은아야.”
“다른 사람도 안 만나요.”
“그럼 어쩔 생각이야?”
“모르겠어요. 오늘은.. 좀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제 생활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래.. 일단 좀 쉬어. 문 잘 잠그고.”
정윤이 일어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현관으로 향했다.
“내일은..”
“일은 그만 뒀어요.”
“그래. 그럼 일단 쉬어. 연락 할게.”
“네. 조심해서 가세요.”
정윤이 나가고 그녀가 소파를 집고 힘겹게 일어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자물쇠들을 잠그고 그녀가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코코아를 타서 잔을 들고 창턱에 올라가 앉았다.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잡고 코코아를 마셨다. 고개를 들고 긴 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 건물 옥상에 서서 뒷짐을 진 채 류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자 정윤이
탄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것이 보이자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힘겹게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새벽에야 잠이 든 그녀는 잠깐 잠이 깼을 때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잤는지
그녀는 힘없이 일어났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꺼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몸을 돌려 싱크대 선반에 놓인 시리얼을 꺼내고 커다란 냉면용 그릇을
꺼냈다. 커다란 그릇에 시리얼을 넣고 우유를 부었다. 숟가락을 들고 창턱에 앉아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다.
멍하니 앉아 기계적으로 시리얼을 다 먹고 난 후 그녀는 한 숨을 내쉬었다. 창턱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을 돌려 내려와 싱크대로 걸어갔다. 물을 틀고 숟가락과 그릇을 닦아 건조대에 올려놓고 손의 물기를
옷에 대충 닦았다.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마친 그녀는 욕실에서 나와 다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목을 조르며 내려다보던 류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가 눈을 떴다. 침대에 앉아
떨리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녀가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자신을 안았다.
****
서고에 들어간 정윤이 정보를 검색하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그들이 알게 되면...’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책이 정리된 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용히 눈으로 책들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가 드디어 책을 찾았다. 그는 그 책과 그 옆의 책들을 같이 뽑았다.
그리고 CCTV의 사각지대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맨 위의 책을 젖히자 <구인지화>라는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 떨리는 손을 들어 책을 집어 들었다.
****
팀장님 방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렸다. 팀장이 시선을 들어 들어온 정장을 입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최정윤 요원이 서고를 찾아오셨습니다.”
팀장이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이 서고엔 무슨 일로 갔지?”
“그.. 책을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팀장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 책?”
“네.”
팀장이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상부에 제가 보고 할까요?”
“내가 하지. 자넨 가서 일 하도록.”
“네.”
여자가 나가자 팀장이 안경을 벗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
서고를 나오던 정윤이 팀장과 마주쳤다. 정윤이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쩐 일이냐?”
정윤이 피식 웃었다.
“보고 받고 오는 길이면서 뭘 물어?”
팀장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돌려서 안 묻는다. 그 책은 왜 봤어?”
“그 책은 보면 안 되는 금서인가? 보라고 서고에 떡하니 있더만~.”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생각하지 말고. 만난 거냐?”
정윤이 팀장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있나보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 투성이인 그 이야기를 내가 서고에 들어가서 봤다는 이유로 팀장이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날 보고 있는 걸 보면.”
“정윤야.”
“현장 복귀했잖아. 그래서 제대로 알아두려고 다시 읽은 것 뿐이야. 혹시 알아? 내가 그 반인호를 만나게 될 행운을 누리게 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개뻥 같지만 말이야.”
팀장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조금 저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정윤이 조금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팀장을 바라보았다.
“왜? 요원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조사해서 위에 보고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 책을 읽으면 조사를 당해야 하는 건가?”
“반인호를 만난 요원은 그 책을 찾게 되어 있어.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는 종적을 감추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반인호를 요원이 보호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까지 들키지 않은 거겠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팀장이 손을 들어 정윤의 어깨를 잡았다.
“호기심 많은 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어. 부탁인데 이 일엔 관심을 갖지 마라. 다친다.”
정윤이 어깨를 들썩였다.
“알았어. 난 머리 아픈 건 질색이니까. 그럼 나도 며칠 후에 종적을 감춰야 하나?”
팀장이 인상을 찡그리자 정윤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본부 밖으로 나온 정윤이 싸늘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
현관 벨소리에 잠이 깬 은아가 현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언니, 나야. 영헌이.”
은아가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뜨자 김은서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가 옷을 여미며 현관문을 열었다. 영헌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많이 아파? 병원에 안 가도 돼?”
“응. 좀 쉬면 될 것 같아. 어쩐 일이야?”
“언니 아프다니까 제대로 안 챙겨 먹을 것 같아서.. 도시락 좀 사 왔어.”
“고맙다.. 너밖에 없다.”
“하하하.. 그렇지 뭐. 천천히 먹고 쉬어.”
“응. 오늘도 힘 내.”
“응..”
영헌이 가고 은아는 식탁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급스런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젓가락을 들고 튀김을 들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음.. 맛있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고 생각보다 금세 도시락을 비웠다.
****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정윤이 벨을 눌렀다. 은서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가 문을 열자 정윤이 미소를 지었다.
“아침 먹었어?”
“조금 전에 같이 일했던 동생이 도시락 갖다 줘서 먹었어요.”
“그래? 그럼 조금 이따가 점심 먹으러 나가자. 내가 고기 사 줄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고깃집에 들어간 은아는 정윤이 구워 그녀의 접시에 내려놓으면 아기 새처럼 넙죽넙죽 입에 넣고 씹었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이제 제가 구울 테니까 선생님도 드세요.”
“먹고 있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아니 천천히 먹어.”
“네..”
정윤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은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저녁으로 먹을 것을 사서 은아를 집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향하던 정윤이 그의 집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을 느낀 정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4층이지만 옥상으로 올라간 정윤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부탁했으면 그만이지, 왜 자꾸 쫓아다니는 거냐?”
류가 그에게 말했다.
“기록을 남기지 않고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불편하군. 그래.. 어쩔 생각이지?”
“뭘 어째. 보호한다고 했잖아. 난 한입으로 두 말 안 해. 누구처럼.”
정윤이 몸을 돌려 류를 바라보자 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소리야?”
정윤이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이 거.. 응? 이거 진짜 고장인가? 왜 반응을 안 해?”
그가 시계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자 류가 인상을 찡그렸다.
“쓸모없는 기계를 아직도 갖고 다니나?”
정윤이 인상을 찡그리며 류를 바라보았다.
“쓸모없게 만든 건 너희들이잖아.”
“무슨 억지야.”
“너희들이 본부에서 수정구슬을 훔쳐 만든 액체를 민간인들 몸에 넣어서 반응한 거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린 그런 짓 안 해. 한다면 네 녀석들 짓이겠지. 예전에는 우리 종족을 알약의 재료로 삼더니 이젠 수정구슬이냐?”
“알약은.. 누가 했는지 몰라.”
“너희들 짓이야. 우리 종족을 납치하는 걸 내 측근이 직접 목격했다. 손목에서 반짝이는 헌터 시계를 차고 말이야.”
정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에게.. 여하튼 회복하고 나서 알아봤을 땐 그 일에 대해 이미 끝났다고 했어. 내 위치에서는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번 수정구슬은 우리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담하게도 본부에 사람을 들여보냈더군.”
“그렇다면 너희들의 시계가 반응을 보였겠지.”
“불행하게도 사람들 중에 너희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야. 문제는 어린 아이들도 그 주사를 맞고 있다는 거야. 그 약을 맞은 후에 너희들에게 기를 빨려 사망한 어린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어.”
“우린 그런 짓 안 해.”
“웃기지 마. 우리 민간인들을 너희들의 식사용으로 생각하는 게 너희들이잖아. 그 아이들도 우리에게 뭔가 증거를 남길까봐 없앤 거 아니야?”
“어불성설이야.”
“조사해 봐. 그럼 진실을 알게 되겠지.”
“너도 마찬가지야.”
“그러도록 하지.”
류가 턱에 힘을 주고 숨을 내쉬었다.
“은아는 어떻게 할 거냐고.”
“보호한다고 했잖아.”
“다른 곳으로 언제 갈 거야.”
정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안 간대.”
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유혹했잖아. 그래서 네가 목을 졸라도, 내가 아무리 네가 나쁜 놈이라고 말해도 안 들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그녀는 이제 내가 보호할 거야. 넌 그 망할 주사나 찾아서 없애라고.”
정윤이 그를 지나쳐서 계단을 내려가자 류가 고개를 돌려 어두운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
집 안에 들어간 정윤이 동운을 바라보았다.
“딱 맞춰서 오셨네요. 식사하세요.”
“그래.”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은 정윤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온 정윤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반주 하시게요?”
동운이 소주잔을 가져와 맞은편에 앉았다. 정윤이 식사를 하기 전에 동운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너는 좋아했던 여자가 있냐?”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궁금해서. 첫사랑이 누구야?”
정윤이 소주잔을 들어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어렸을 때 괴롭혔었던 여자 아이가 있어요. 도시에서 와서 조금 재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빠도 없고 도시에서 온 겁쟁이와는 놀아주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 만나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잘 컸더라고요.”
“그래? 다시 만난 적 있어?”
“본부에 들어오기 전에 잠깐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봤어요.”
동운이 그녀를 떠올리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자 정윤이 한 숨을 내쉬었다.
“너는 안 되겠다.”
“네?”
동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주를 마시는 정윤을 바라보았다.
“여자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고.”
동운이 피식 웃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를 이해해 줄 일반인은 없다고요. 피곤해지기 싫어요.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 여자는 안 사귑니다.”
“그렇게 예뻤냐?”
동운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글세요.. 그 친구 어머니가 엄청난 미인이셨었는데.. 그 친구는 예쁘다기 보다는 귀여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무서우면서도 무섭지 않은 척, 세지도 않으면서 센 척, 기죽지 않은 척..
왜 그런 녀석들 있잖아요. 티는 다 나는데 아닌 척 하는.. 그게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정윤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왼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네 할머니.. 어디에 사시니?”
동운이 정윤을 바라보았다.
****
집에 돌아온 류가 수호를 바라보았다.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최근에 미이라 형태로 발견 된 피해자들에 대한 보고서를 알아봐.”
수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군가 뒤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김박사가 지난 5년 동안 연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의 연구실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조사해.”
“류님.. 김박사님은 그 분이 지시한 일을 하는 분이십니다. 혹여 그 분에게 오해를 사실까 걱정이 됩니다.”
“조사만 해. 직접 그 분께 여쭈어 볼 것이다.”
“류님.”
수호가 그의 진지한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수호가 방을 나가자 그가 눈을 감고 턱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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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마친 은아는 창턱에 앉아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한 숨을 내쉬었다.
“도망치라고 하고, 보호할 헌터도 찾아주고.. 영웅은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잘해 줘요..? 나쁘다면서.. 그저 내 생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 뿐이라면서.. 그럼 그냥 다 가져가버리면 되잖아..”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
류가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수호가 태블릿 PC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부검한 결과를 위에 보고한 서류입니다.”
류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서류가 떠 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두 17세로 미성년자들이었습니다. 위조된 신분증으로 ***라는 클럽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음은 위조된 신분증에 들어간 사진입니다.”
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원래의 모습과 사진 속 모습이 너무 달라 있었다.
“특별한 사인은 없었고, 저희 종족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알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했어.”
“그럼 뭡니까?”
류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헌터들이 우리 종족을 죽이고 남은 수정 구슬을 본부에 보관하면서 헌터 시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데 그걸 우리를 추종하는 이가 들어와 훔쳐갔다는군.”
“마.. 말도 안 됩니다.”
“훔쳐낸 수정구슬로 주사를 만들어 인간들에게 주입했다고 했어.”
“알약에서 주사로 변한겁니까? 그리고 그걸 저희쪽에서 했단 말입니까?”
류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김박사쪽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기록을 남겼을 리 없습니다.”
류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덮자.”
“네?”
“그 분께서 지시하신 일이면 분명 큰 뜻이 있으셔서 일거야.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 또한 있으실 테니 기다리자.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내 도움이 필요하실 때 힘을 보태기만 하면 돼. 그게 내 역할이다.”
수호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류가 코트를 꺼내 입자 수호가 함께 나갈 준비를 했다.
“바람 쐬러 가는 거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류가 밖으로 나가자 수호가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
은아는 정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어딜 가는 거예요?”
“아침 먹었어?”
“네. 영헌이가 갖다 줘서 먹었어요.”
“매일 아침마다 정성이네.”
“그러게요. 그 정도로 잘해주지는 못했는데..”
“그럼 점심은 내가 책임질게.”
“오늘은 제가 살게요.”
“뭐 그래도 좋고.”
은아는 개구쟁이같은 표정의 정윤을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음식점이 아니라 옷가게였다.
“선생님..”
“어두운 색 옷을 입으니까 기운이 나겠어? 가자.”
은아는 그와 함께 옷을 사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떤 분 옷 보러 오셨어요?”
“우리 딸래미 예쁜 옷 사주려고요.”
“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점원을 따라 안쪽으로 간 은아가 옷을 바라보았다. 원피스를 입고 나온 은아는 치마를 내리며 난감한 표정으로 정윤을 바라보았다.
“예쁘긴 한데 짧은 건 좀 그렇다. 다른 거 입어 봐.”
“어머, 아버님. 이건 짧은 축에도 끼지 못하는데요?”
“죄송해요. 우리 딸래미 다리를 음흉하게 쳐다보는 녀석들을 가만히 못 둘 것 같아서요. 예쁘지만 노출은 적은 걸로 부탁해요.”
“네.”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직원이 그녀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아버님이 보수적이시네요.”
“네..”
은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래도 이렇게 따님 모시고 오셔서 옷 사주시는 분들은 흔하지 않으세요. 부녀사이가 좋으신가봐요.”
은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예쁜 정장스타일의 원피스를 입은 채로 그 옷에 어울리는 구두까지 정윤이 계산을 하자 은아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불안한데요?”
“그 동안 못 해준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숨을 내쉬며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 그리고 음식점에 도착하자 제일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먹고 싶은 거 먹어.”
“여긴 제가 계산해요.”
“그래.”
은아가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윤이 손을 들었다.
“여기.”
은아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동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정윤을 바라보았다. 정윤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둘이 아는 사이던데?”
은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선배.”
동운이 빈자리에 앉자 은아가 고개를 숙였다.
“인사해. 여긴 내 후배 한동운. 그리고 여긴 내 딸 조은아.”
동운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아가 메뉴판을 접었다.
“안녕? 반갑다.”
그녀는 소리없는 숨을 내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동운을 바라보았다.
“나 기억 안 나? 우리 할머니가 만든 떡도 갖다주고 그랬는데..”
은아는 동운이 방긋 웃자 골목을 누비던 개구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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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이 먼저 일어나고 은아와 동운은 식사를 했다.
“미안해요.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안 나왔을 거예요.”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편해요.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음.. 계속 그렇게 존댓말을 하면 불편하긴 해. 나이도 같은데 말 편하게 하지?”
은아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편해지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먼저 일어날게요.”
그녀가 일어나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동운이 말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셨더라.”
은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친구 분이 이사를 가셔서 할머니가 적적해 하시더라고.”
은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그 때.. 미안했다. 철이 없어서 너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은아는 알았다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눈물을 참느라 턱이 떨려오자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겨 가게를 나갔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뛰어가는 그녀를 동운이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상처가 컸나..”
택시에 오른 은아는 집근처 위치를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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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운이 경찰서에 들어가자 짜장면을 먹고 있던 정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벌써 와?”
“미운 털이 제대로 박혔나봐요. 잘 안 됐어요.”
정윤이 피식 웃었다.
“다시 보니 어때.. 예쁘지?”
“네.”
정윤이 동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방긋 웃자 동운이 인상을 조금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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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마친 은아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와
로션을 바르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할머니와 엄마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는
쿠션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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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영헌이 찾아와 은아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괜찮아?”
“응. 넌 매일 우리집으로 출근하더니 오늘은 여기로 퇴근한 거야?”
“헤~. 잠깐 들른거야. 잘 됐다. 내가 언니가 기분이 우울할 줄 알고 준비한 게 있거든.”
영헌이 가방에서 초콜릿이 들어 있는 상자를 꺼내 포장을 풀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 진짜 귀신이지?”
“그래.”
은아가 쿡쿡 웃으며 영헌과 함께 초콜릿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언니 찾으시지, 뭐. 언제 출근하느냐,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 된 거면 가게 이름을 알려 달라..”
“힘들겠다.”
“괜찮아. 다들 그 동안 언니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 왔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고,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까 가게 걱정은 안 해도 돼. 사모님들이야 뭐.. 곧 적응하시겠지.
언니가 다른 가게로 갈 것도 아니잖아.”
“그래. 고맙다.”
“많이 아픈거야?”
“아니야. 그냥.. 기운이 없어서 그래.”
영헌이 걱정스러운 듯 팔을 들어 은아의 팔을 쓰다듬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
영헌이 가고 나자 은아는 창턱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쉬면 뭐하겠어.. 다시 일을 해야겠다..”
핸드폰 벨이 울리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조금 실망한 듯한 숨을 내쉬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나 지금 집 앞인데.. 만나면 때릴거야?>
“그럴지도 몰라요.”
<음.. 그럼 문고리에 간식으로 사온 도넛이랑 커피를 걸어놓았으니까 먹어.>
은아가 피식 웃었다.
“오세요.”
<그래도.. 돼?>
“네.”
전화를 끊고 현관벨이 울리자 은아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문을 열자 정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안에 들어오자 은아가 그를 흘기듯 바라보았다.
“미안해. 그런데 그 녀석 괜찮아.”
“괜찮은 헌터니까 결혼해서 같이 살라고 등 떠미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야. 아직 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거든.”
은아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어요..?”
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괴롭혀서 싫어하는 거야?”
“싫고 좋고 할 만큼 친하지 않았어요. 그냥.. 마음에도 없는 헌터와 만날 이유가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자리 만들지 마세요.”
“만나 봐.”
“선생님.”
“그 녀석은.. 안 돼. 잊어.”
“잊을 수 있었다면 벌써 잊었을 거예요. 지난 5년 동안.. 하루도 잊은 적 없어요.”
“은아야..”
“죄송해요.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 애쓰실 필요 없어요.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무슨 소리야?”
“다시 일 할 생각이에요. 집에만 있었더니 더 힘들어서요.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다른 생각 안 들고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도 선생님 자리로 돌아가세요. 괜히 저 때문에 선생님까지 힘들어지실까봐.. 두려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보호할 거야.”
“숨어 지내는 건 저 혼자로도 충분해요. 선생님까지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 다니실 필요 없으세요.”
“너에 대해 알아버린 그 순간 내가 선택한 길이야. 어차피 난 부양해야 할 가족은 없는 걸. 그렇게 살자. 아빠와 딸로. 동운이가 싫다면 내가 천천히 알아볼게.”
은아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남자는 싫어요. 죄송해요.”
“그래. 알았어.”
“고맙습니다.”
정윤이 가고 난 후 은아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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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온 은아는 차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정윤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데려다 줄게, 타.”
“걸어서 10분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럼 같이 걸어갈까?”
은아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리자 정윤이 차문을 잠그고 그녀 옆으로 와서 섰다.
“춥다. 아침 먹었어?”
그녀의 옷깃을 올려주며 그가 물었다.
“가는 길에 브런치 가게에서 사 가려고요.”
“가자.”
정윤이 팔을 내밀자 은아가 피식 웃으며 그의 팔을 잡고 함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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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근한 그녀를 직원들이 반겨주었다. 하지만 그 동안 그녀를 기다렸던 예약 손님들을 보내고 나면
퇴근 할 때 즈음엔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퇴근하려고 나오면 정윤이 그녀를 기다렸다가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 데려다 주었다.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해?”
“아직 몰라요.”
“들키면 뭐라고 할 거야?”
“삼촌이라고 해야죠. 물론.. 영헌이는 안 믿겠지만. 참.. 그 분이요..”
“응? 동운이?”
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고 영헌이 소개시켜 주시면 안 돼요?”
“아마 안 될 거야.”
“왜요?”
“네가 첫사랑이라고 하던데?”
“웃겨..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은아가 인상을 찡그리자 정윤이 미소를 지었다.
“영헌이가 마음에 들어 했는데.. 안 되겠네요.”
“그 때도 너한테 마음이 있었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래도 지나친 미인은 의심부터 하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아.. 이런. 그게 아니라 그 녀석이 너처럼 수수하고 조용한 스타일이 좋은가봐.”
“이미 늦었거든요?”
“뭐 어때. 내 눈엔 최고로 예쁜 딸래미인데.”
은아가 고개를 숙이며 쿡쿡 웃었다.
****
다음날 아침에 동운이 일어나자 정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너 오늘은 집에서 쉬어. 어디 가지 말고 응?”
“잠깐 나갔다 올게요.”
정윤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
정윤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밖으로 나가자 동운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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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 정장을 입은 동운이 차에 올랐다. 한참을 운전하던 그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꽃집에 들어갔다. 하얀 장미꽃다발을 들고 다시 차에 올랐다.
은아의 개인실에 영헌이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언니~. 배 안 고파?”
은아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네가 내 엄마야? 왜 자꾸 챙겨?”
“다시 돌아온 언니가 너~무 좋아서 그렇지.”
“그럼 여기.”
은아가 돈봉투를 내밀자 영헌이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그럼 나 안 먹을거야.”
“알았어.”
“고맙다.”
영헌이 예쁜 미소를 짓자 은아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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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물에서 나온 동운의 손에는 꽃다발이 없었다. 그가 차에 오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윤과 함께 집으로 향하던 중 비가 쏟아지자 두 사람이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춥다. 얼른 들어가.”
“우산 드릴게요.”
“차가 저기에 있는 걸, 뭐. 그럼 문단속 잘 하고. 내일 아침에 보자.”
“네. 조심해서 가세요.”
정윤이 차에 타는 것을 바라보던 은아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에 오른 정윤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가 받았다.
“네~. 응? 동운이? 오늘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는데?”
<혼자 보냈다고? 아니.. 경찰서에 출근도장만 찍고 어딜 갔다면서. 동운이 이 녀석 오늘 무슨 사고 칠지 모르는데 좀 챙겨주지 뭐했어?>
현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윤이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미안. 바로 집으로 가 볼게.”
그가 전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
집에 도착한 정윤은 비어있는 집을 바라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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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턱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고 있던 은아가 정윤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아까 비 맞으셨는데 괜찮으세요?”
<그럼. 이 정도 비에 아플 저질체력은 아니라고. 그럼 문단속 잘하고.>
“네. 주무세요.”
<그래~.>
전화를 끊은 은아가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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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에 들어온 동운이 비에 홀딱 젖은 몸을 떨며 정윤의 집에 들어왔다.
“이 녀석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냐?”
거실에 들어섰던 동운이 비틀거리더니 이내 풀썩 쓰러졌다. 정윤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가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열이..”
정윤이 핸드폰을 꺼냈다.
“나야. 동운이가 아파. 열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응.. 집으로 와 주라.. 빨리.”
전화를 끊은 정윤이 동운을 들어 욕실로 끌고갔다.
****
정윤이 동운을 따뜻한 물로 샤워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혀서 침대에 눕히자 현주가 집에 도착했다.
“수액 맞고 푹 자면 괜찮을 거야.”
“폐렴이라던가.. 그러진 않겠지?”
“이제 걱정이 돼? 그렇게 걱정이 되면 오늘 같은 날은 좀 신경을 써 줬어야지.”
“미안하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아니야.”
“으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정윤이 그제야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말해 봐. 누구야? 선배가 가르쳤던 제자라며. 도대체 누군데?”
정윤이 고개를 들어 현주를 바라보았다.
“있어. 너는 모르는 학생.”
“그러니까 누구냐고.”
“말했잖아. 너는 모르는 학생이라고.”
정윤이 조금 정색을 하며 말하자 현주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책은 왜 봤어?”
정윤이 피식 웃었다.
“소문 한 번 빠르네. 보라고 둔 책 아니냐? 그래서 봤어. 궁금해서.”
“선배가 그냥 하는 일이 있어?”
“모든 일이 그냥 하는 일이지. 그러다 가끔 얻어 걸리는 거지. 나야 호기심이 원래 많잖아.”
“그러지 마. 사람 불안하게.”
“불안해 할 필요가 뭐 있냐? 어서 가라. 와 줘서 고마웠다.”
정윤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한 숨을 내쉬었다.
“혹시 더 힘들어 보이면 연락해.”
“응. 조심해서 가라.”
“응.”
현주가 가고 나자 정윤이 숨을 천천히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악몽을 꾸는 지 땀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동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