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가 연극을 했기 때문에 한 호흡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요즘은 그런 연기들이 많이 보이고, 배우들도
많이 연구하는 분위기다.
*당신이
보기에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가 있다면?
설경구와 최민식 같은 경우는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배울 점이 많은 배우들이다.
하지만 주연급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못하는 배우도 많다. 그들이 아마 연극 무대에 오른다면 1시간 30분의 공연 시간 중 10분도 못 버틸
거다.
*그건 연기 호흡의
문제인가?
그렇다. 호흡이다. 예를 들어 TV 탤런트들은 자기 장면만 분석한다. 남의 대사를 읽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연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영화는 조금 나은 편이다. 아무래도 작품 전체를 봐야 하니까.
*조금 괜찮다면 영화 속 연기는 어떻다는 건가?
정말 모르고 연기하는 배우가 많다. 상대 배우를 연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연기한다. 물론 설경구나 최민식은 상대방을 타고
넘는 연기를 한다. 그건 상대 배우를 연구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경지다. 상대 배우가 어떻게 나올 것이다에 대한 예측과 내가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만나야 한다. 상대 배우를 이겨야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상대 배우도 살리면서 자신도 부드럽게 타고 넘는 것, 그래서 두
배우 모두 명연기를 펼치는 명배우다.
*스타급 배우들은 아무래도 자신이 돋보이려고 하지 않겠나?
물론. 외국 배우를 예로 들자면 짐 캐리 같은
경우다. 물론 짐 캐리도 연기를 잘한다. 하지만 그가 연기할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명연기가 아니라 재주일 뿐이다. 한
작품을 그려낸다기보다 재주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느끼는 배우들의 문제점은 어떤 것인가?
그 준비 과정은 그들이 받는 개런티에 상응하는가? 이미 대사법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사람이 땅을 짚고 갈 때 안정감이 있지 않나.
그런 것처럼 대사해야 하는데, 이미 대사부터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안정감이 없다. 호흡이 배에서부터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대화할 때는
여기서 호흡을 끊어야지 하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절로 끊게 되는 거지. 하지만 아주 많은 배우들이 대본만 보면서 여기서 끊고, 여기서 올리고,
여기서 내려야지 정도만 생각한다. 당연히 대사가 입에 붙질 않는다. 설경구, 최민식은 그게 되는 배우들이다.
*한석규는 어떤가?
성우 출신이어서 딕션은
좋다. 보통 배우들보다 훨씬 명료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말을 흘린다. 들리긴 하되
명확하지 않다. 딕션과 호흡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베이스도 없이 스크린에 등장한다.
*딕션이 된다는 장점은 있지만 한석규의 연기는 어딘지 모르게 스테레오 타입화된
경향이 짙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변신도 없지 않나?
이미지 버릴까 봐. 공격적인 변신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스스로는 변신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텔 미 썸딩>에서건 <쉬리>에서건 똑같은
호흡이었다. 물론 많은 배우들이 그렇다. 하나의 연기술이긴 하지만, 다른 식의 대사법을 모른 채 굳어져버리는 것이다.
*변신에 소극적인 것은 배우로서의 사명감이 부족한 건 아닌가?
보통의 연기자들은 매니지먼트 안에서 '일 떨어질 생각은 없겠지' 하면서 안주한다. 하지만 배우들은 과감해야 한다. 다들
미쳤다고 해도 소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연기가 되지 않는 배우들이 허다하다? 그렇다면 배우의 기본은 무엇인가?
일부 남자 배우들도 그렇지만
여배우들이 더 문제다. <울랄라 시스터즈> 봐라. 그건 진짜 연기도 아니다. 현장에서 신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멋있게만 보이려
들거나 매니저 주문대로 연기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상품 가치를 만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해야 할 것과 안 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자세와
그것을 유지하는 자존심은 분명 필요하다. 가끔 '대중예술가'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대중들이 보기만 한다고 그게 모두 예술인가?
*연기가 안 되는 배우들에게 연극을
권한다고 했는데, 달라지는 건 뭔가?
연극을 하게 되면 작품 분석력, 작품 전체를 보는 눈이 분명히 는다. 신 바이 신으로
끊고, 자기 캐릭터만 연구하는 게 아닌, 적어도 3개월 이상 연습하고 200번 이상 대본을 읽게 되면 대사가 듣지 않아도 들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사의 의미가 뭔지 정확히 꿰뚫게 되고, 상대 배우가 어떻게 연기할 거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한마디로 인간 연구도 되고 하나의
캐릭터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시나리오 몇 번 읽고, 머리로만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연기 아이디어보다 엄청나게 깊이가 있는 것이다.
연극은 인간이 하는 예술이고,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배우의 예술이라고도 하지 않나.
*혹시 연기의 베이식을 다지는 연극 무대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듯
느껴지는 배우가 있나?
류승범. 타고났다고 느껴질 만큼 잘한다. 단, 지금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 전혀 다른 연기를 한번
봤으면 하는 생각은 있다. 그것마저 잘하면 진짜 배우겠지만, 아니면 그냥 재능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겠지.
*한국 영화에서 본 최고의 연기와 최악의 연기가 있다면?
최고의 연기는 <파이란>에서의 최민식. 술 취한 연기를 하는데 눈물이 날 정도였다. 연기자로서 봤을 때 저걸
얼마나 연구했을까 생각하니까 진짜 감동이 왔다. 단, 마지막 장면에 여주인공의 유골을 안고 담배 피우면서 우는 걸 롱 테이크로 잡은 건 좀
오버였다. 난 울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이미 그가 슬프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최악은 많은데…. 내가 출연했던 영화로 대신하는
게 낫겠다. <아 유 레디?>의 첫 장면. 쥐 떼가 쫓아와서 도망가는 장면인데, 상황이 훨씬 중요한 신이었다. 눈동자가 달라지고 놀란
표정과 공포가 뒤섞여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상황 대신 캐릭터만 앙상하게 달리고 있다. '나는 이런 배우다'라는. 실제로 쥐 떼가 쫓아오는 데서는
절대 그렇게 뛰지 않을 거다. 너무 어린 배우들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훈련되지 않은
배우를 쓰는 제작자나 연출의 마인드는 분명 잘못된 거라는 점이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마지막 신도 최악이었다. 이정진과 한채영이
춤을 추는데 그렇게 뻣뻣할 수가 없다. '우리 그냥 이렇게 춤추라고 시켰어요'라는 게 역력한 표정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춤이 아니다.
<네 발가락>에서도 캐릭터만 있고 상황이 없다. 네 주인공의 캐릭터는 모두 살아 있지만 어떤 상황이든 다 똑같다. '난
주인공이니까'라는 생각 때문에 잔뜩 힘만 들어가 있고. 그건 캐릭터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연극배우들의 유입으로 충무로는 살을
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연극배우의 이미지를 소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코미디와 액션 영화
같은 트렌드 속에서 소모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바보 같은 경우다. 한 가지만 잘하면 그것 외에는 보지 않는다. 스타 한 명을 주인공 삼고
나머지는 이미지 캐스팅으로 채우는 것은 분명 문제다.
*그렇다면 당신이 펼친 영화 연기에 대한 품평을 한다면?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인 부분이 비어 있고 캐릭터만 보일 때 부끄럽다. 연기자로서 내 연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집어내게 된
것은 몇 년이 안 됐다. 90년대 초에는 하나의 캐릭터만 그리면 스스로 잘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다가 <넘버 3> 이후 작품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하나의 인물과 삶을 보여줬을 때 훨씬 큰 연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꿈꾸는 것 역시 그런 큰 연기다. 내 생각에 연기는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구 선생은 생활이 단아하다. 그런 것들이 무대와 스크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활이 난잡하면
무대도 난잡하다. 난잡한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라 프로의식 없이 대충 한다. 그게 뭔가? 누군가는 프로가 뭐냐라는 질문에 '돈만큼 하는
거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프로는 최선을 다하는 거다. 배우라면 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관객은 그 영화를 보러 돈과 시간을
투자해 찾아온다. 그렇다면 배우는 최대한 감동이라는 부가가치를 안겨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사명감마저 없다면 그것을 왜 하나. 작가나 연출은
어떤 인물을 쓸 때 분명히 가치 부여를 하고 썼을 거다. 1초가 나오든 1분이 나오든 비중이 적은 단역이라고 해도 감동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퍼옴]GQ
Korea 200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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