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지진은 정계 개편이나 사정 정국의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이유는 조선 건국의 중심축인 유학자들이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이유를 음양 조화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음기와 양기가 엉켜버린 이유를 밝히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각 정치세력은 이를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고 했고, 이를 둘러싼 갈등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숙청이었던 기묘사화이다.
“초저녁에 발생한 지진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렛소리처럼 커서 사람과 말이 모두 피하였다. 놀라 기절한 사람들도 많았다. 담장과 성가퀴가 무너져 떨어졌고, 민가의 쇠붙이로 만든 그릇들이 부딪쳐 요란스런 소리를 냈으며,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집을 뛰쳐나올 지경이었다. 한성부 관원들이 집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깨워서 붕괴 위험을 알리고, 집 밖으로 나와서 잘 것을 권했다. 왕은 막대한 변괴(莫大之變)에 놀라 즉시 전교를 내려 대신들을 소집했다. 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다시 지진이 크게 일어 궁궐이 흔들렸다. 왕이 앉은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중종실록 권33, 중종 13년 5월)
1518년(중종 13년)의 대지진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건곤일척 대결로 비화한. 당시 사림파의 리더였던 조광조는 중종에게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음(陰)이 성하는 조짐이라며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공신들의 작위 삭탈 및 재산 귀속, 현량과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요구했다. 중종이 민심 수습을 위해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국은 사림파가 장악한다.
하지만 이것이 조광조의 발목을 잡았다. 조광조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지진은 또 일어났고, 우박과 수해까지 이어졌다. 이쯤 되면 중종으로서는 ‘누가 소인이지?’라는 의문을 가졌을 법하다. 또한 반정(反政)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입장에서는 반정공신들을 부정하는 조광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명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조광조 세력은 오히려 위기에 빠진다.
이 틈을 노린 훈구파는 1518년의 대지진은 조광조 세력이 하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며 역공을 취했고, 결국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기묘사화로 이어진다. 중종은 몇 년이 지나서도 1518년의 지진은 ‘기묘사림의 변란’(己卯士林之變)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말하며 조광조를 재차 비판할 정도로 부정적 인식을 거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하는데, 지진을 기회로 삼아 사회적 동의가 충분치 않았던 개혁을 밀어붙인 급진성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 지진을 정치적 정국 개편의 신호탄으로 활용했던 최초의 사례는 태종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 주요 외척세력인 자신의 처남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제거할 때 지진을 꺼내 들었다. 1408년(태종 8년) 서울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태종은 사간원에서 민씨 형제의 부덕함을 지적한 상소를 들어 이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고 이듬해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자결을 명령했다.
천인감응설에 민감했던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킨 뒤 아예 기상청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그는 의정부사(議政府事)ㆍ경연서운관사(經筵書雲觀事)ㆍ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라는 각종 직책을 맡았다. 여기서 서운관(書雲觀)이 바로 천문과 날씨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이는 정변 후 천재지변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포석으로 해석되는데, 실제로 계유정난 이듬해인 1454년(단종 2년)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수양대군은 몇 달 후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며 정변을 마무리 짓는다.
조선의 천인감응설은 단순히 미신적 행위라기보다는 정치권의 각성과 조속한 민심 수습을 요구하는 정치테제로써 작용했다. 지진이 발생하면 관료들은 해당 지역의 세금과 부역을 낮추고, 사치를 줄이며 재정을 절약하라고 제언했다. 천인감응설을 처음 내걸었던 중국의 유학자 동중서도 “국왕이 덕을 닦으면 전화위복을 이룰 수 있으며, 재앙이 덕을 이기지 못한다(災不勝德)”고 설명했다.
즉, 지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적절한 후속 조치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천재지변은 아니나 박근혜 정부 당시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는 사고 자체보다는 이후 정부의 수습 방식과 자세 때문에 더 논란이 됐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