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의 유래
우리나라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대원각 자리에 있는 길상사는 김영한 보살님이 법정스님에게 요청해서 세워진 사찰이다.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한 보살이 ‘무소유’를 읽고 법정 스님께 대원각의 모든 것을 시주하려고 하였지만 무소유를 강조하시며 실천하시는 법정 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번의 간곡한 요청으로 법정 스님은 길상사라는 절을 세워 마음의 도량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고 김영한 보살은 어떤 사람이기에 1997년 12월 14일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되는 7,000여 평의 넓은 땅을 선뜻 내어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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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서울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이라는 기생이 되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은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해 준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녀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았다. 잠시 머물면서 기생 복색을 다시 입고 함흥 권번으로 들어갔다.
1936년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가 이임하는 자리에서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을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백석은 기생 진향이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이 호는 당나라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온 것으로, 그 내용은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가 변경으로 국경을 지키러 간 남편과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이 노래처럼 보살님의 깊은 외로움이 백석 시인이 ‘자야’란 호를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두 사람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에서 대원각이라는 요정(料亭)의 여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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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 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 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 물병과 같았다.
‘자야’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분은 천재 시인 백석을 기다리며 산 사람이었다. 백석시인이 친필로 써서 자신의 방에 남겨둔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읽은 후 몸과 마음이 야릇한 감격에 오싹 자지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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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을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자
눈이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 보살이 주목을 받은 까닭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보통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기부 정신 외에도 그가 황토색(黃土色) 짙은 서정으로 1930년대 우리 시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김영한 보살은 1999년 11월 14일 백석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만 간직한 채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83살의 적지 않은 삶을 영위했던 자야의 하룻밤 심정은 어떠했을까? 첫사랑을 간직한 젊을 때의 천재 시인 백석을 그리워하며 떠났으리라.
*참고인용-자야여사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1995)
*참고인용-‘수능 시인’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조성관 주간조선차장대우
*참고인용-“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여사의 회고/이동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