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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이사야 1:1-20
이사야서는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본 이상 곧 예언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앗수르, 애굽,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들은 예배도 빠짐없이 잘 드렸고 헌금도 언제나 넘치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벨론에 의하여 망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제사는 있지만 순종이 없고 형식은 있었지만 중심이 없었습니다. 기도는 있었지만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무엇 때문에 멸망하는지도 모르는 유다를 바라보며 상한 심령으로 그 시대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순종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 거역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예배는 잘 드리고 예물도 잘 드리는데 왜 우리가 하는 일들이 풀리지 않고 고통을 받는지 그 원인을 잘 배우심으로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예배는 열심히 참석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2)
2절을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 이사야는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과 사랑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이 사랑하고 양육하여 주셨습니다. 현대어 성경에는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키우고 정성껏 돌보았던 자식들인데 --"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이 말씀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역사에 걸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부모는 자식을 어떻게 키웁니까? 부모는 굶고 헐벗을 지라도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자 합니다. 파출부를 해서라도 좋은 학원,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많은 민족 중에서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참지 못하고 원망하며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일용할 만나를 내리심으로 훈련하시고, 광야 40년 동안 변함없이 목자가 되셔서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거룩한 계명과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왕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만민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소망을 두시고 키우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도 주시고 강대한 다윗 왕국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5장 포도원의 비유에서는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하실 정도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돌보시고 길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를 기르신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3절을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는 별로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냄새나는 외양간에서 짚을 썬 여물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소는 주인을 알고 우직하게 밭갈고, 쟁기질하고, 써레질, 달구지 끌기 모든 온갖 궂은 일을 다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고기를 주인에게 주고 죽습니다. 개는 많은 분들이 길러 보시지만 주인이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만 주는 데도 주인이 오면 꼬리를 흔들며 앞발을 번쩍 번쩍 들며, 주인에 대한 사랑과 반가움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니며 충성합니다. 개가 주인한테 삐져서 밥을 안먹는다는 소릴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갖 사랑을 쏟아서 자신들을 키우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거룩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키워주신 하나님을 경멸하고 하나님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들은 짐승만도 못하였습니다.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은 자식에게 버림받은 부모와 같이 깊은 슬픔에 빠져 탄식하셨습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하였습니다. 4절을 보면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그들이 이렇게 배은망덕한 종자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그럽니까? 4절 하반절을 보면 여호와를 버렸고,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어린 자식은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따릅니다.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이렇게 따르다가 조금 살만해지고 편안해지자 마음이 부요해지고 교만하여 졌습니다. 자기들이 이렇게 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되었다는 속교만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려웠던 것도 어느 정도 해결되자 절실함과 간절함이 사라졌습니다. 금새 숨겨져 있던 세상 욕망들이 살아났습니다.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마음에 품고 감정과 정욕을 따라 사랑하였습니다. 또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능력있는 사람을 의지하였습니다. 유다는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도움이 안되는 것처럼 무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니 하나님, 현실이 어려워서 세상 좀 의지 했기로서니.. 하나님 좀 너무 예민하신 것 아닙니까?'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는 배반이요, 불순종이요, 영적인 간음입니다. 부부사이거나 약혼한 사이인데 배우자가 또 다른 남자나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 갈 부부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삶에서 하나님보다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영적으로 간음하며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예레미야 3장 8절은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내어쫓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애통해야 할 죄악이요, 우리를 멸망으로 치닫게 하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5절,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멀리 떠난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서 강대국을 통해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 잠시 회개하는 듯 하다가 그 때뿐 또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머리는 죄로 병들어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천지 만물을 조성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그 마음은 온갖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고, 우울증까지 겹쳐 심히 지치고 피곤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차례로 짓밟힘으로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버리자 상처가 곪아 피고름이 질질 흐르고 살이 썩어 가도 그것을 짜며 소독하고 싸매며 누구하나 기름을 발라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성하였던 왕국들은 이제 이방인에게 짓밟혀 황폐하여 졌습니다. 아름다운 성읍은 파괴되었고 불에 타 앙상한 잔해만 남았습니다. 그들이 땀흘려 추수한 소산, 젖과 고기를 주던 양과 염소는 다 약탈되었고, 젊은 남녀들은 모두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늙은이들, 어린이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8절을 보면 '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참외밭의 원두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온 국토가 이렇게 이방인들에 삼켜져서 쑥대밭이 되고 오직 예루살렘만 원두막과 같이 뎅그라니 남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의 등불, 희망의 등불을 남겨 두셨습니다.
셋째, 그들은 제물을 무수히 드리되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11) 그들이 이렇듯 많은 예물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많은 상처투성이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지만 형식적인 종교 행사에는 열심이었습니다. 매일 무수한 수염소와 송아지와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형식적인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과 안식일에 예배를 보기 위해 성전에 가득히 모였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거나 사귐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하나님 저 왔다 갑니다.' 하며 눈도장만 찍고 성전 마당만 밟고 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정한 절기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 성회를 열었습니다. 성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거룩하고 신령한 모임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범민족 대성회, 오순절 성령강림 대성회, 나팔절 세계 지도자 대성회, 초막절 초교파 대성회등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도하는 집회를 하나님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대회 기간중에 금식을 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충만하게 부어주시옵서. 충만하게 축복하시옵소서.' 15절에 보면 그들은 많은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많은 기도란 여러 가지로 부르짖는 긴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 마다 귀를 막으심으로 그들의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많은 성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의 대회와 성회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는 찬양과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4절에서 그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버린 떠난 제사와 성회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몸은 종교 행사를 하고 있고 마음과 관심은 눈앞의 현실의 이익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와 하나님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월절을 당해 종교행사를 내가 참석했는가 안했는가에 더 의미를 두었습니다. 안식일도 하나님 오늘 빠지지 않고 오늘도 저 왔다 갑니다 하며 눈도장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는데 더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수단을 많이 행하였는데 정작 은혜를 받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도도 자기가 주체가 되어 드리게 되고 자신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미움을 품고 기도하였습니다. 율법을 듣고도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말씀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나는 저사람보다 더 오래 기도하고 더 직분이 높아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피곤케 하는 것이요, 자기 의를 쌓는 것이요, 하나님께 아무 유익이 없는 것들입니다. 시편 51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야고보서 5장15은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오직 믿음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있는데 그들은 형식적인 기도만 드렸습니다.
넷째, 그들은 회개만 하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를 않았습니다.(16,17) 16,17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남을 가르치고, 섬기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씻는 과정, 곧 회개가 선행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죄악된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살다 보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회개를 통해 씻어내지 않으면 다시 더러워집니다. 이러한 심령상태로 찬양단을 하고 성가대를 하면 위선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씻음을 받은 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십니다. 즉 악을 중단하고 선을 행하라 하십니다. 음란물보기를 중단하고, 영양가없는 인터넷서핑하기를 중단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에 잘 참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회복시켜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서로 앉아 변론해 보자고 말씀하십니다. 변론이란 쌍방이 마주 않아서 옳고 그름을 차분하게 헤아려 보는 것을 말합니다. 18절을 보시면 주홍과 진홍은 가장 강렬한 색깔로서 탈색을 해도 흔적이 남는다고 합니다. 주홍과 진홍빛과 같은 죄는 지울 수 없는 죄를 말합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자학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심판의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의 주홍과도 같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진홍과도 같이 붉은 죄를 양털과 같이 희게 씻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흘러내리는 보혈은 그 어떤 표백제보다도 더 희게 우리의 죄악을 씻어 주십니다.
19, 20절을 보면 우리가 즐겨 순종으로 반응을 보이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로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절하고 돌아서면 조금 남은 것마저 칼에 삼키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형식화 되고 세상적이지는 않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한국교회는 이사야 시대처럼 부패하고 변질되어 있지 않습니까? 진실되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주님께 나아오심으로 주홍같은 죄를 양털같이 되고 땅의 아름다운 것으로 축복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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