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시조 각 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현대시조가 발명되고
발견된 1920년~30년대 작품이 발표되었던 매체를 추적해보면 됩
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동인지나 신문에 발표되었고,
작품은 다시 시집으로 묶였습니다 그러나 그땠자만 해도 한국(조
선)의 글쓰기 방식은 바로 ‘세로쓰기’였습니다.
세로쓰기는 종서(縱書) 혹은 우종서라 하는데, 종서의 가장 오
래된 기록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특리, 한자 문화권,
즐 아시에서는 전부 세로쓰기를 펴나가면서 오른손으로 붓을 잡고 쓰
면서 생긴 관행이란 가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자 문화권의
전통에 따라 삼국시대-고려-조선-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세로쓰기 관행을 유지해왔죠.
따라서 시조 역시 세로쓰기 관행에 따라 세로로 쓰였습니다.
판형이 큰 동인지나 시집의 경우 한 장은 1행으로 처리되었습니다.
2행 이상으로 보이면 초중종장을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신
문의 경우 작게 할당된 지면에 시조을 쓰다 보니, 각 장이 시작할
때는 들여쓰기(공백)하여 장의 새로운 시작임을 표시하였죠.
1927년 10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수록된 이병기의 글과 작품입
니다. 작은 지면에 작품을 넣다 보니, 부득이하게 장을 2행으로 나
눴습니다. 신문 한 팽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수는 많아야 14자, 14
자가 넘으니 어쩔 수 없이 2행으로 나눈 거죠.
1947년 가람시조집 초판본에 수록된 시조 작품입니다. 세로
쓰기로 각 장을 1행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세로쓰기니, 한 장을 2행
이상으로 나누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아라서 시조의 각 장이 1행이었던 이유는, 세로쓰기의 관습네
의한 것이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당
시에는 인쇄물이 귀했으므로, 당연히 페이지 절약은 기본이죠. 장
을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한글전용 정책에 의한 한글 세벌식 타
자기가 일반화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로쓰기’가 확산되었습니
다. 물론, 타자기와 상관이 별로 없는 출판업계에서는 1970년대까
지 세로쓰기가 유지되었죠. 그러나 1980년대 이르러서 신문을 제
외한 출판물은 가로쓰기가 대세가 되었고, 신문업계 역시 가로쓰
기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래서 60~70년대 전까지 나온 시집이나 소
설집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근대문학을 연구하는 연구
자들에게는 곤욕이 따로 없죠.
그렇게 가로쓰기가 일반화되면서 시조의 각 장은 드디어 분행
이 가능해졌습니다. 더욱 자유로운 시조를 쓰고 싶었던 시인들은
자신의 개성에 맞게, 자신의 작품에 맞는 행갈이와 연갈이를 시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초중종장을 3행으로 나열하면, 장과
장 사이의 여백도 없고, 의미론적이나 시각적으로 분절이 필요한
곳이 있기 때문에, 행갈이와 연갈이를 할 수밖에 없죠. 물론, 행과
연을 나눌 때는, 구를 경계로 나누거나 4마디 중 일정한 부분을 나
누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디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이영도, 「아지랑이」 전문 (1966)
춘삼월 봄날, 아지라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나비가 날아다
나는 것처럼 행과 연을 나눴습니다.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겁니다.
이 작품을 만약 3행으로 나열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이와 같은
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모든 시는 그시에 알맞은 행갈이와
연갈이가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시인은 행갈이와 연갈이
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나눈 행과 연은 없습니다.
현대시조 입문서, ‘오늘부터 쓰시조 김남규, 헤겔의 휴일
8. 시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102~106쪽 중에서
첫댓글 나비가 날듯
행과 연을 나눈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은 일요일, 가족과 함께
즐겁게 여유를 누리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건필은 필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