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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 30] “지구상 이런 나라 몇 있을까”…내가 국정교과서 마음 먹은 순간
통합진보당 사태의 충격은 내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힘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됐다.
이들이 거리낌없이 친북적 행태를 보이면서도 원내에 진입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근현대사 교육이 영향을 끼쳤다고 본 것이다.
자유나 다양성을 강조하며 설령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배치되는 주장이 나와도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방치하는 공간이 생기면 반드시 이를 악용하려는 세력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교육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과장하거나 증오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사실 이에 대한 고민은 이전부터 있었다.
2002년부터 시행된 7차 교육과정에서 중·고교 국사 과목 중 근현대사를 따로 빼내어
국정이 아닌 검인정(檢認定)으로 전환하고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보혁 논쟁이 벌어지면서다.
일부 교과서가 6·25 전쟁을 남침이 아닌 무력충돌로 기술하고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면서
정작 대한민국 건국 세력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기술했다는 반발이 거세게 쏟아졌다.
2011년부터는 한국사 전 과정이 검인증제로 전환됐고, 이는 논란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중국은 동북공정 하는데…교과서 좌편향 논란에 우려
2015년 10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해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으로 들어서자
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국정 교과서 반대 시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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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라보는 나는 착잡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역사 교과서를 놓고 좌우로 나뉘어 이렇게 오랜 기간 갈등하고 분열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물론 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이런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역사를 배우는데, 교사와 부모님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또 인터넷에는 또 다른 시각으로 정리가 되어 혼란을 주는 것은 나라의 미래에도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 뻔한데
이를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2000년대 초반은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며
우리 역사를 흡수하려는 야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일본도 역사 교과서에서 태평양전쟁 때 저지른 범죄를 축소하려는 극우적 목소리가 강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역사에 대한 관심과 올바른 교육이 필요한 때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사 과목을 고교 입시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꾸고 일부 공무원 임용시험에서도 제외하는가 하면,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역사 교과서가 이념적 편향성 논란이 벌어져 이념 논쟁의 장이 되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검정 교과서에 대해 우려했던 것은 대한민국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건국 과정에 대한
지나친 폄훼와 북한 정권에 대한 긍정적 묘사 때문이다.
김무성 의원은 2013년 9월 ‘근현대사 연구교실’이란 모임을 만들었는데 첫 모임 인사말에서
“(좌편향 교과서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못난 역사로 비하한다”며
“역사교실에서 역사를 바로잡는 방안을 모색해 좌파와의 역사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
당시의 고민을 보여준다.
김 의원은 나와 한 번도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고교생 69% “6·25는 북침”…심각성 느꼈다
2015년 10월 15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등 여당 의원들이 국회 본청 로덴더 홀 계단에서
'올바른 역사 교과서 만들기 결의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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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것도 그저 우연히 나온 현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대로 두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기존 교과서로 현대사를 배우면서
‘아, 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고 이건 못난 역사구나’라는 패배주의적 시각으로 생각하게 된다.
정작 외국에 나가 다른 나라 젊은이들을 만나보면 한국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나라인데도
자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가슴이 답답한 일이었다.
2013년 6월에는 6·25 전쟁 63주년을 앞두고 한 언론사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고교생 응답자 중 69%가
6·25 전쟁을 북침으로 알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의 희생이 왜곡되고 나라를 지탱하는 기본 가치인 애국심이
흔들리면서 벌어진 현상이라는 우려가 많이 제기됐다.
그래서 나는 2013년 6월 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교육 현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석 달 후인 9월 17일 국무회의에선
“학생들이 보게 될 역사 교과서에 역사적 사실관계가 잘못 기술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역사 교과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로 해야겠다는 확신은 없었다.
다양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학생들이 대한민국이 잘못 태어난 나라이고, 민족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식으로 배우는 것은 곤란하니
이런 내용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청와대에 들어간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교육부에 한국사 교과서의 편향성 문제 현황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집필진은 대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거나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연결된 특정 인맥으로 구성돼 있어 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주체사상 두고 달랑 “주체적 수립한 사회주의 사상”
한국사 검정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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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인정제로 전환하면서 ‘역사 교과서가 무려 7종이나 되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배울 수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검정 교과서 집필진의 80%가 편향된 역사관을 가진 특정 인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은 똑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돌려막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7종으로 구성된 하나의 좌편향 교과서인 셈이었다.
북한에 대해선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사진을 골라 쓰고, 주체사상을 설명하면서
‘주체적으로 수립한 사회주의 사상’이라고만 적고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다루지 않는 식이었다.
교육부에서 ‘이런 기술은 너무 편향적이니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명령해도 집필진은 이에 반발하며 소송으로 맞섰다.
참고로 2016년 1월 29일 대법원도 교육부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수정명령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남북 분단의 원인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식의 오해 소지가 있는 구성, 북한의 주체사상 등 선전 문구를 그대로 인용 수록한
부분에 대해 수정, 6·25 전쟁 발발 배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유도할 소지가 있는 자료의 교체 등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나 교육문화수석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등의 인사들과 만나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는데
비슷한 우려가 많이 나왔다.
검인정제로 전환한 뒤 지난 10여 년 동안 역사 교과서 집필진과 전교조, 출판사들이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역사 서술의 균형과 다양성이 오히려 파괴됐다는 것이었다.
2013년 9월 12일 민주당의 '역사교과서 친일독재 미화왜곡 대책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국회 정론관에서
교학사 한국사 역사 교과서 검정 취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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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일어난 ‘교학사 역사 교과서 파동’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고려하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2013년 8월 교학사에서 만든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는데, 학계에선 식민지근대화론을 긍정하고
이승만·박정희 정부에 대한 부정적 내용이 축소됐다며 연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던 학교들이 이런 분위기에 짓눌려 결정을 잇따라 철회하기 시작했고,
결국 채택률은 0%가 됐다. 이를 두고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2015년 10월 16일 한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역사학계 좌파가 총출동해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는) 학교에 테러를 가했다”고 했는데,
나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오류도 발견됐다.
하지만 그것은 수정 보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교조 입맛에 맞지 않는 교과서를 채택하자 자율적 선택권을 무시하고
해당 학교에 각종 압박과 협박으로 결정을 취소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검정제의 한계를 보여준 셈이었다.
나는 이렇게 자율적 선택이 무시되고 특정 성향의 역사관이 강요된다면 차라리 국정화가 낫겠다는 생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간혹 역사 교과서를 개선하는 방법이 국정화뿐이냐는 반박도 있었다.
하지만 검인정 체계에 맡겼더니 결국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 아닌가.
카르텔로 인해 시장의 장점인 다양성이라는 기능이 살아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 명확한 이상 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결심이 확고해지자 정부도 본격적인 실행 준비에 나섰다.
2015년 1월 8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역사 공부하면서 분쟁의 씨를 심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역사를 3가지, 5가지로 가르칠 수 없고 학생들을 채점하는 교실에서 역사는 한 가지로 권위 있게 가르치는 것이 국가의 책임”
이라고 정부 책임자로서는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016년 11월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 교과서 현장검증본과 관련해 공개 브리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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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2일 삼청동 소재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는
하반기부터 국정 교과서에 대한 준비 작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여당으로서는 숨이 가빴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는 거대한 산을 막 넘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를 힘겹게 끝내자마자 다시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하니 말이다.
김정훈 당시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국회 브리핑에서 이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도 그런 우려가 작용했던 것 같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듬해 4월 열리는 총선을 마친 뒤 추진하는 게 어떻겠냐는 건의가 나오기도 했다.
사실 청와대에 있는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이나 정부 측의 황우여·이준식 교육부 장관이야 어떻게든 대통령을 도우려 하지만,
선거를 치러야 하는 여당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개혁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힘들어도, 일단 해놓으면 나중에 ‘정권 맡아서 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국민들께 드릴 말씀이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손해가 아니다.
훗날 역사가 그 정당성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선 전에 곤란하다면 총선 후에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그때는 또 누가 선뜻 하려고 하겠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임기가 5년 단임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온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
나라에 필요한 정책인데도, 인기가 없을 것 같아서 피하려는 포퓰리즘적 유혹이야말로 나라를 정말로 어렵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내가 탄핵되면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지만,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아, 내가 그때 왜 망설였을까’ 하는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법을 개정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점이다.
교육부 장관의 고시를 통해 가능했다.
그러니 여당도 부담을 다소 덜 수 있었다.
당시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여당인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넘겼는데도 야당이 반대하면 발이 꽁꽁 묶였다.
법안을 바꾸는 일이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정 교과서 발표에 “독재 회귀” 거센 반발
박근혜 정부 국정감사 첫날인 2013년 10월 14일 열린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노트북에 '친일·독재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 검정취소'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붙였다(왼쪽 사진).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도 '좌편향·왜곡 교과서 검정 취소'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붙인 채 국감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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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2일 교육부가 행정예고를 통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야당에서는 ‘독재 시대로의 회귀’라며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정도는 예상했지만 국정 교과서 도입 시기를 2017년 3월로 잡은 점에 대해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에 맞춘 것이라는 주장에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나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저렇게 생각했을까’라고 느꼈을 정도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 것을 자극적으로 프레임을 만들어버리면 정작 본질이 사라진다.
이전 검정 교과서의 문제는 무엇이고, 국정 교과서에서 바꾸려는 것은 무엇인지가 덮이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이런 본질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을 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2017년 3월로 정한 것은 내 임기가 끝나기 전에 도입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 학기제는 3월에 시작하고, 나는 2018년 2월에 퇴임하기 때문에 이 때밖에 기회가 없었다.
만약 무리한 일정이라면 굳이 서두르지는 않았겠지만 교육부 보고에 따르면 2017년 3월까지 준비가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내 임기 이후로 미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이 발표되자 교사 1만 명이 참여하는 반대 집회가 열리는 등
전교조를 중심으로 한 교사들의 조직적 반발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청와대가 나서면 논란이 더 확산될 것 같아서 공식 대응을 자제했다.
하지만 야당이 논란에 적극 가세해 정치권이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려는 것을 보면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대로 두면 국론 분열로 더 격화될 것이 뻔한 만큼 직접 나서 논란을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국정 교과서 집필진 구성이 마무리되고 있었는데, 자칫 이들이 동요할 수도 있으니 힘을 실어줄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10월 13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올바른 역사 교육 통해서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자긍심 갖도록 하는 게 아이들과 나라의 중요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11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모두발언을 통해 “교과서 문제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고려말 학자였던 이암 선생이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말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국정 교과서 집필진, 협박에 경찰 신변보호 요청도
2015년 11월 3일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설치된 새정치민주연합의 '역사왜곡교과서반대' 농성장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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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교과서 집필진에 대한 좌파 단체와 전교조 등의 공격이 더욱 집요하고 거세졌다.
신상털기는 기본이고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할 만큼 협박이 가해졌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일부 집필진의 명단은 공개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 와중에 11월 4일 국정 교과서 집필진으로 초빙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사퇴 의사를 밝혔다.
기자들과의 저녁식사에서 벌어진 성희롱 발언 논란으로 “부담을 주기 싫다”며 자진 사퇴한 것이다.
최 교수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후배들이 ‘국정 교과서 집필에 합류하지 말라’고 입장문을 발표하는 등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던 분이었기에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남은 집필진은 최선을 다해 교과서를 만들었고 2016년 11월 28일에는 현장 검토본을 공개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교과서도 완벽할 수는 없었고 개선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어려운 가운데 노력한 결실을 맺은 것이니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기존 교과서를 보면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서술됐다.
그러니까 정통성이 마치 북한에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다룬 것이다.
새 국정 교과서는 이를 대한민국 수립, 북한 정권 수립으로 바꿨다.
6·25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검정 교과서들은 남북한 공동책임으로 몰고 간 경우가 많은데,
국정 교과서는 북한의 불법 남침 때문에 발발했다고 분명하게 서술했다.
그리고 일각에서 우려했던 친일 문제는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고,
위안부 문제는 이를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협조에 대해서도 넣었다.
또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무장 독립운동 위주로 서술한 검정 교과서와 달리 외교적인 노력과 여성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도 보완했다.
그다음 노력을 기울인 것은 독도 문제인데, 작은 소주제로 다룬 검정 교과서와 달리 중단원 소재로 확대해
서술을 확대하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했다.
그리고 검정 교과서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아주 짧게 넘어가거나 도발 주체도 불분명하게 넘어갔는데,
새 교과서는 북한의 군사 도발을 소주제로 잡아 천안함 피격 등이 북한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때는 이른바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 사태’로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을 때였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이 검토본을 온라인에 공개해 모든 국민들이 이를 검증할 수 있다고 알렸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나 또한 연일 각종 공세에 휘말린 가운데 한·일 지소미아 협정 체결을 한창 챙기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까지 제대로 챙길 수가 없었다.
국정 동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갔고 야당과 시민단체, 전교조 등은 국정 교과서에 ‘적폐 교과서’라는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지금도 이 국정 교과서의 내용 중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국정 교과서의 어떤 부분이 그들이 말하는 ‘적폐’인지 되묻고 싶다.
문 정부 출범 3일 만 교과서 폐기…눈엣가시였을 것
2015년 11월 4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국회 대표실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문 대표는 이 자리에서 "국정 교과서는 원천 무효"라며 저지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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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탄핵된 뒤 문재인 정부는 출범 3일 만에 국정 교과서 폐기를 지시했다.
이때는 소위 ‘적폐 청산’이라는 명목 아래 모든 것이 부정되던 시기였다지만,
그토록 초고속으로 폐기시킨 것은 민주당 측에 한국사 국정 교과서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2018년 3월 28일 이병기 비서실장과
김상률 교육문화수석 등이 위법·부당한 수단과 각종 편법을 동원해 국정 교과서를 강행했다고 발표한 뒤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이 수사는 문재인 정부 내내 진행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공격도 많이 받고, 적폐로 몰렸고, 결국 미완으로 끝나서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일이 됐다.
하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다.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또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임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옳은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당시 애써 만든 국정 교과서가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는 점은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