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시장과 국가는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다.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의 이행을 담보하며 적절한 규제를 제공하는 정부의 존재가 시장의 효과적인 작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이분법적인 접근론이 만연해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시각이다.
둘째, 세계화는 세계 경제가 단일 시장으로 통합된다는 것인데 이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부의 보완재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깊은 통합'이란 각국 간에 상품, 서비스, 자본의 흐름을 자유화할 뿐만 아니라 제도와 규제를 통일하고 정책까지도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될 것을 요구한다. 즉, 민주적 절차와 합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마땅한 사안들이 세계 시장의 요구에 의해 외부로부터 강제된다는 것이다.
셋째, 따라서 정치적 결정의 단위를 국민 국가로 전제하면 '깊은 통합' 혹은 '초세계화(hyperglobalization)'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세계화에 따른 '민주주의 위축(democratic deficit)'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황금 구속복'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문제다.
세계화에 의한 민주주의 위축 문제는 한국 국민에게는 뼈아프게 익숙한 문제다. 외환 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제 금융의 조건으로 우리 정부에 많은 요구를 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조건을 걸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채무 상환을 보장하기 위한 내용에 국한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IMF와 또 그 배후에서 입김을 불어넣은 미국 정부는 노동 시장 유연화, 외환 및 금융 시장 추가 개방, 한국은행법 개정 등 마땅히 국내 정치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사안들을 강요하였고 이는 한국 사회의 아픈 상처가 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중요한 사례다. "백번 양보하여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득이 되는 것이라고 하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적 득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다. 돈 몇 푼 더 벌자고 (누가 더 버는지 따져 봐야겠지만) 민주주의를 희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한미 FTA의 추진 과정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아무런 국민적 위임도 없이, 사회적 합의도 없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밀어붙인 것이 그렇고, 공청회의 파행으로부터 시작해 여론 수렴 노력을 방기하고 오히려 반대 의견의 표출을 탄압한 것이 그렇다." (☞관련 기사 : "미국과 FTA 맺어 선진국 된 나라 있나?")
세계화냐, 민주주의냐? 이 양자 간의 선택 앞에서 우리는 세계화보다는 민주주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로드릭과 나의 공통된 입장이다. 하지만 세계화를 그렇게 가볍게 버릴 수 있을까?
첫째, 세계화는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현상이 아닐까? 교통·통신 기술의 무한한 발달로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세계화는 기술 발전만의 산물은 아니고 자유화 정책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정보와 물자, 노동과 자본의 흐름을 과연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통제가 가능하다면 (분야별로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통제는 가능하다) 과연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세계화로 창출될 수 있는 잠재적 부를 포기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아마르티아 센의 말대로 "국가라는 정치적 경계를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제약으로 여길 뿐 아니라 윤리적·정치철학적으로도 중요한 경계로 여기는 것은 다분히 전제적이고 포악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개인이 태어난 나라와 상관없이 당대의 세계가 제공하는 모든 기회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세계화는 매우 진보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세계화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 가지 해결책은 국민 국가를 버리는 것이다. 세계 시장을 규제하는 '세계 정부'를 지구적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 해법을 도입하면 세계화와 민주주의 간의 딜레마(dilemma)는 세계화, 민주주의, 국민 국가 사이의 트릴레마(trilemma)로 확대된다. 즉, 이 셋 중 둘은 취할 수 있지만 셋을 모두 한꺼번에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국민 국가를 택하든, 민주주의와 국민 국가를 택하든, 아니면 세계화와 민주주의를 택하든, 셋 중 한 가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로드릭은 "세계 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라고 부른다.
이 트릴레마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센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를 한 가지만 꼽아보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민주주의의 확산"이라고 답한 바 있다. 그러면 세계화와 국민 국가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국민 국가를 포기하자고 한다. 지구적 민주주의를 발달시키자는 것이다. 고상한 말로 글로벌 거버넌스다.
로드릭은 여기에 반대한다.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 통합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문화적 정체성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유럽연합(EU)에서도 정치적 통합은 매우 진전이 더디고 불완전한 것이 현실인데 전 지구적 차원의 글로벌 거버넌스는 몽상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로드릭의 대안은 세계화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급자족 경제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민 국가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세계화를 관리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로드릭의 대안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깊은 세계화' 혹은 '초세계화'를 포기하고 '얕은 세계화'를 하자는 것이다. 사실 세계 시장의 발달, 비교 우위를 활용한 부의 창출 등이 반드시 완벽한 자유화와 규제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시장 통합이 민주주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면 된다. 이것이 '얕은 세계화'다.
과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의 제도적 기반이었던 브레턴우즈 체제가 한 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국제적 자본 이동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전제로 하고 무역 자유화에서도 다양한 예외를 인정한 불완전한 시장 통합 혹은 '얕은 세계화' 체제였지만, 이 시기에 국제 무역과 국제 투자는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세계 경제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전무후무한 번영을 달성했다.
1970년대 초반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이후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여 금융 주도의 세계화, '깊은 세계화'가 진행되었다. 이 '초세계화'는 한편으로는 개별 국가들, 특히 힘이 약한 나라들의 민주주의와 주권을 제약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불완전성 때문에 많은 갈등과 불안정을 초래했다. 통합된 시장에 비해 규제는 불비한 상황이 수많은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를 낳았고, 그 결정판이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였다. 이제 발걸음을 돌릴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로드릭은 새로운 버전의 브레턴우즈 체제를 제안한다.
물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세상은 너무나 달라져서 과거 회귀는 불가능하다. 단 이제라도 '초세계화'의 망상을 접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갈등과 불안정을 치유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들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로드릭은 세계화의 7가지 새로운 원리를 제시한다. 핵심적인 것은 "각 나라는 자신만의 사회적 합의, 규제, 제도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것과 "국제 경제 협정의 목적은 각국의 다양한 제도 간의 접촉면을 조절하는 교통 법규를 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두 가지다. 즉, 각국은 자신만의 정책 공간(policy space)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국제 경제 협정은 각국의 규제를 통일하려 들지 말고 상이한 규제가 공존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드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로드릭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하지만 글로벌 거버넌스 혹은 지구적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게 지극히 어렵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필요성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지구 온난화 문제를 비롯한 환경 문제, 빈곤 퇴치와 경제 개발을 위한 지구적 협력, 평화와 안전 보장을 위한 협조 체제 구축 등은 각국의 정책 공간 확보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글로벌 거버넌스는 21세기 인류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다. 사실 정책 공간의 확보라는 것도 보다 민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 세계 경제를 규율하는 IMF나 세계무역기구(WTO) 등 기존의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민주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대안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새판 짜기>에는 로드릭의 주장에 매우 익숙한 내게도 눈에 확 띄는 내용이 두 가지 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무역 자유화의 효과에 관한 것이다. 미국처럼 관세가 5퍼센트 미만인 경우 완전한 자유 무역으로 바뀌면 1달러의 순이득당 50달러의 재분배가 일어난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한미 FTA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수혜 집단이 51달러 이익을 볼 때 농민이나 약품 소비자 등 피해 집단은 50달러를 손해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수혜 계층이 51달러 이득 중 50달러를 피해 계층에게 보상해줄까? 자유 무역을 통한 순이득의 규모도 논란거리이지만 재분배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갈등의 문제는 50배나 크다는 것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국제 노동 흐름을 확대하여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발전을 돕자는 제안이다. 선진국의 정치 현실을 고려하면 이야말로 몽상일 수 있겠으나 로드릭은 비교적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번역의 질에 관해서 한 마디 해야겠다. 번역자나 출판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나라 출판 문화의 발전을 위해 고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생각나는 것 몇 가지만 예로 들겠다.
'변동성(volatility)'을 '휘발성'으로, '사중 손실(deadweight loss)'을 '무거운 손실'로, '내생적 성장(endogenous growth)'을 '내적 성장'으로, '중상주의(Mercantilism)'를 '상업주의'로, 은행의 고유 계정 '거래(trading)'를 '무역'으로 번역한 것은 경제학 용어를 몰라서 그랬다고 치자. 문맥상 자유지상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로 해석해야 할 'liberal'을 진보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도대체 뭔가. '진정한 환율'도 있다. 이건 '실질환율'이라고 한다.
게다가 통화 가치 상승과 환율 하락이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여 번역이 거꾸로 된 곳도 있다. 그냥 마음에 무척 안 드는 문장도 많다. "경제학자들은 매우 구속적인 국제 무역 유동 제도를 정당화하는 정치 현실에 계속해서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서를 아직 보지 못한 내게도 오역임이 분명한 곳이 너무나 많았고 이로 인해 읽는 즐거움이 반감되었다.
나와 같은 경제학자의 경우에는 "아, 여기 또 오역이군" 하면서 넘어갈 수 있지만, 전문적 지식이 없는 독자의 경우 몹시 헷갈릴 것이다. 앞으로 전문 서적은 반드시 해당 분야 전문가의 감수를 받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