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으로 3월에 이사를 왔습니다.
그리고 이사짐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시점인 5월에 사랑하는 막둥이 인영이를 입양을 했습니다. 태어난지 16일 된 신생아를 받아보기는 또 처음이었습니다. 홀트에 입양신청을 해 놓은지가 제법 지났음에도 연락이 없어서 소장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혈액형이 맞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혈액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니 소장님 왈 "아! 그러면 지금이라도 데려갈 수 있는 AB형의 아기가 있는데요!" 했습니다. 나는 그 아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아들이라 생각하며, 그러면 그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모든 가족이 인영이를 데리려 부산에 갔습니다.
소장님이 인영이를 데리고 왔는데 16일된 아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너무나 뚜렸하고 아기가 너무나 개월수에 비해서 우량했습니다. 저와 아이들, 그리고 집사람은 너무나 귀엽다고 다들 인영이를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동생들이 올때마다 찬영이와 태영이를 위해서 함께 가서 아기들을 데리고 옵니다. 찬영이와 태영이가 이것을 보고 '자신들도 이렇게 우리가족이 되었고, 엄마와 아빠의 아들이 되었구나!' 라고 교육시키고 싶어서 입니다.
엄마가 인영이를 데리고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찬영이에게 입양에 대해서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물었습니다.
'찬영아! 인영이를 엄마가 배아파 낳아서 아니면 데리고 와서?
'데리고 왔지!'
'그러면 찬영아 태영이는 엄마가 낳아서 아니면 데리고 와서?'
'당연히 데리고 왔지!'
'그러면 찬영아! 찬영이는 엄마가 낳아서 데리고 와서?'
'데리고 왔지!'
'그래 찬영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엄마 아빠 아들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찬영이 태영이 인영이를 엄마에게 선물로 주신 거야 알겠지!'
우리 찬영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그런데 있잖아.... 호영이 형아도 데리고 왔고.... 큰누나도 데리고 왔고.....찐영이도 데리고 왔고.... 다 데리고 왔어!' 라고 하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찬영이의 말에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이제는 입양이 무엇인지 알겠지 했던 우리의 생각이 성급했던 것 같았습니다. 나는 호영이와 주영이 진영이에게 말했습니다.
'야들아! 찬영이가 이해가 될 때까지 너희들도 모두 데리온 것으로 해라!'
이렇게 온 인영이는 우리가정에 또 하나의 행복이고 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온지 얼마되지 않아 모세기관지염과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우리집에서 어린나이에 입원한 것은 인영이가 1호입니다. 신생아라서 다인실에 입원이 되지 않고 1인실에 입원을 했습니다. 우리 막내가 엄마 아빠 더운데 고생한다고 호텔같은 시원한 1인실에 엄마 아빠를 모시고 벌써부터 효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인영이의 입원이 여름을 지나서 늦가을 11월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큰아이들은 방학동안 자기들끼리 먹고 자고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로 살았습니다. 찬영이 태영이 두 동생들을 돌보면서 엄마 아빠없는 청소년 가장들을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방학을 맞이해서 송도교회에서 연을 맺고 지금까지 교제하던 오집사님의 두 딸이 농촌체험 한다고 우리집에 왔는데 그 아이들까지 해서 합이 일곱인데 이 일곱명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먹고자고 하면서 방학을 보내었습니다. 이제는 인영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하면 아이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또 입원해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환자가 많아서 시간이 지체가 되면 전화가 와서 '엄마! 인영이 또 입원해야해!' 하면서 인영이가 입원을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신경을 바짝 쓰고 삽니다.
한번은 인영이와 태영이 둘이가 동시에 입원을 해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8월말에 보름간의 입원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입원을 하지 말아야 될텐데..... 하면서 우리가정의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퇴원을 한 인영이에게 한가지 버릇이 생겼습니다. 잠투정이 생겼습니다. 저녁 5시나 6시가 되면 밖에 나가자고 때를 쓰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모차에 태워서 쌀쌀한 날씨에 대비를 해서 이불로 인영이를 뻔데기처럼 똘똘말아사서 8시나 길면 9시가 넘도록 해서 잠을 재웠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부부는 이 시간에 인영이를 유모차에 태우고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부부만의 커피타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10월로 접어들면서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너무나 쌀쌀해서 이제는 저녁시간이 부담스러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아이가 갑자기 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심하게 울어서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인영이는 고추로 내려가는 곳에 막이 생기지 않아서 고환에 물이차서 붓곤하는데, 이곳으로 장이 들락날락하면서 혹시나 장이 꼬일수도 있다고 해서 우리부부는 늘 기저귀를 갈때마다 아이의 고추를 보면서 '오늘은 적게 부었네....오늘은 많이 부었네...' 하면서 관찰을 합니다. 혹시나 장이 꼬여서 아이가 이렇게 때를 쓰면서 우는 것이 아닌가 해서 갈때마다 초음파를 찍었습니다. 그때마다 초음파 결과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영이가 우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집사람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자고 해서 인영이가 울때에 그 상황을 휴대폰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교회에서 고등부때 부터 가르쳤던 용민이가 의대에 진학을 해서부산대 응급실에 레지던트로 근무를 하다가 지금은 보건의로 있는데 그 동영상을 용민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동영상을 본 용민이가 아이가 우는 것이 좀 다르다고 하면서 대학병원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나에게 권했다. 나는 일단 횟수나 강도를 보면서 결정을 하겠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호영이와 함께 사과밭에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10일 정도해야 되는 사과수확을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새벽5시에 일어나서 1시간 이상을 차로 가야했습니다. 기름값이 만만치 않아서 목요일 저녁에는 호영이와 함께 의논을 해서 금요일 저녁에는 장로님댁에서 자고 토요일 저녁에 집에오자 하고는 1박에 대한 준비물을 챙기고는 금요일 새벽 사과밭으로 갔습니다. 사과밭에서 일을 할 때에는 전화를 잘 받지 않는데 오전 9시 쯤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집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어제 저녁에 인영이가 내하고 잘 놀다가 또 울기를 시작했는데 다른 때보다 심하게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찬송을 불러주면서 팔베개를 해서 재웠는데 새벽에 일을 가기 위해서 눈을 떠니 어제 잔 그대로 내 품에 안겨서 자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이리 구러고 저리 구러면서 잠을 자는데 어제 밤에는 많이 힘들었는지 잔 그대로 내 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집사람 성격에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전화를 켜고 여보세요 하는데....
아내의 울음소리와 함께 '여보! 인영이가 이상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버스가 3번밖에 다니지 않는 곳이라 내가 없어면 섬과 같은 곳이라 집사람은 병원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빨리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가라하고는 장로님께 아이가 아파서 가봐야 되겠다 하고는 호영이를 사과밭에 남겨둔체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드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급한대로 용민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용민이가 해라는 대로 조치를 취하고는 집으로 갔습니다. 용민이 말을 아이가 의식을 완전히 잃었어면 앰블런스로 가야하지만 의식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않아도 된다고 해서 집사람에게 전화를 하고는 내가 급히 갈테니 병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해 놓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집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할 준비를 해 놓고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단장을 하는 동안 인영이를 안고 따뜻한 가을햇볕을 쪼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를 만나서 인영이가 진작 병원에 가서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룬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흘러 내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이럴때는 신학을 해서 돈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내야 하는 목사가 된 것이 후회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기술이라도 배워서 직장생활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인영이를 태우고 성소병원에 가서 소견서를 발급받아서 양산에 있는 부산대학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금요일 오후라 어떻게 될지 몰라서 용민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병원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집사람은 어린 인영이를 안고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후4시안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내려가 의사의 지시대로 MRI, 뇌척수검사, 피검사, 소변검사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척수를 뽑은 인영이가 몸을 뒤틀거나 머리를 4시간 동안 들어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두 사람이서 인영이의 손과 발 그리고 머리를 붙잡고는 새벽2시 까지 있다가 새벽3시가 다 된 시간에 병실을 받아서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은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살이 된 은지와의 만남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새벽3시에 은지의 병실로 인영이를 인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어제 저녁에 저녁밥으로 먹으려고 사 두었던 김밥을 새벽3시가 넘어서 병실에서 먹게되었습니다. 입원을 한다고 입구의 불을 간호사가 켜놓았는데 입원절차를 마친 간호사가 입구의 불을 켜 둔체로 나갔습니다. 옆 침대의 아이 엄마가 약간은 피곤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침대위의 불을 켜시고 이 불은 꺼겠습니다!' 했습니다. 이 엄마가 바로 은지 엄마였습니다.
인영이의 병명은 영아연축이라고 합니다. 뇌의 신호체계에 이상이 있어서 그 이상신호가 올 때마다 아이가 고통스러워서 우는 병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두면 이 이상신호가 올 때마다 주변의 뇌가 손상을 입어서 결국에는 뇌기능에 문제가 생겨서 뇌성마비 증세로 나타난다고 의사가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경기를 말하는데 나는 경기가 이렇게 무서운 병인줄 인영이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월요일에 시행된 뇌파검사결과 인영이에게 간질파가 나와서 아이가 이렇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방학 때에 우리집에 왔던 예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토요일 오후에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집사님 내외분이 우리들에게 고생이 많겠다고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딸 예진이가 한 말에 위로를 받았다면서 인영이의 입원과 병명을 듣고 집사님 내외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한 예진이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두 분이서 '사모님, 목사님 두 분이 더욱 힘들어지게 생겼네!' 하면서 걱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예진이가 하는 말이 '잘 됐네!'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집사님 되시는 엄마가 '예진아, 뭣 때문에 잘 됐다고 생각하는데!' 하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고 합니다.
오집사님이 집사람에게 '사모님, 아이들은 보는 관점이 어른들 하고는 다른 것 같네요! 예진이의 말에 정말 많은 위로가 됐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의 말을 듣고 한 예진이의 답은 '인영이를 보면 잘 됐네, 인영이가 만약 목사님 가정에 가지 않고 다른 가정에 가서 이 병 때문에 뇌성마미가 된다면 시설에 보내질 건데, 목사님 가정에 입양이 되었으니까 다행이잖아요!'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입양되어 갔다가도 양육중에 이런 질병이 생기면 파양이 되어 기관으로 보내지는 아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운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인영이가 그런 증세를 보인다고 해도 절대로 파양해서 기관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고 두분에게 설명을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든지.....
옆침대의 은지는 이런 경기로 입원을 해 있는데 이미 뇌성마비 증세가 와서 매우 중증으로 보였습니다. 일반병실인데도 마치 중환자실에 온 것처럼 보이는 주사기들을 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인영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일찍 발견하게 되었고 약물치료도 일찍 시작을 해서 경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약물을 투여한 시점부터 지금까지는 한 번도 경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약을 수년간 복용을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약을 장기간 투여하게 되면 간이 손상을 받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완치가 되어야 약을 끊어야만 인영이에게 유익합니다. 이 글을 읽어시는 분들은 인영이가 이 약을 빨리 끊고 완쾌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옆 침대의 은지 엄마는 집사람과 친해졌습니다. 음식물을 서로 주고 받고, 침대를 잠시 비울데는 서로의 아이를 돌보아 주고, 또한 아줌마들의 육아이야기를 비롯해서 그들만의 특권인 수다스러움을 통해서 친해진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아내와 은지 엄마가 결코 수다스럽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내는 은지엄마에 대해서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은지엄마는 마흔으로서 세 아이의 엄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침실에 누워있는 은지는 셋째입니다. 셋째이면서도 유일한 혈육입니다. 앞의 두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었습니다. 은지는 입으로 먹을수가 없어서 배에 구멍을 내고는 줄을 넣어서 주사로 음식물을 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도 일어나 걸어 본적이 없고 지금까지 누워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밖에 잠시 바람이라도 쉬면, 그렇다고 병원 밖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병실 밖 복도를 다니는 것이 다인데, 이런 외출만 해도 목에 가래가 채여서 석션을 해 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병실에 나가는 것 조차도 힘들어 합니다. 이런 은지가 부여받은 생명은 고작 10년이라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혈육이 이런 중증인 병을 가지고 고작 살아야 1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지엄마는 첫째 아이도 이런 병으로 1년을 고생하다가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기형증세가 있어서 사산을 시켜서 유도분만을 해서 아이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보내었다고 합니다. 아이 둘을 그렇게 보내었기에 더 이상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는데 손이 귀한 집에 시집을 와서 시댁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의사의 유전이 절대로 아니라고 하는 설명과 그리고 여러번의 기형검사를 하고서 은지를 낳았는데 또 앞의 두 아이와 똑같은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은지엄마의 삶을 들어니 측은한 마음이 찾아왔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어느 누가 들어도 이 가정에 대해서 은지에 대해서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까운 가정이었습니다. 인영이를 문병온 분들중에 권사님 또는 목사님들이 은지를 위해서 은지엄마를 위해서 은지엄마에게 기도를 해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받고는 은지와 은지엄마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인영이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안동 집에는 주영이와 진영이가 찬영이 태영이를 돌보면서 있고, 길안에는 호영이 혼자 사과일을 한다고 남아 있고, 나와 아내와 인영이는 이곳 양산대학병원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외딴 집에 두 어린 동생을 데리고 있는 두 딸이 가장 걱정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입원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토요일 집에 올라가서 아이들을 다 데리고 주일을 백자교회에서 보내고 호영이만 남겨두고는 언양 외가집에 아이들을 맡겨야 했습니다. 호영이는 차후에 내가 사과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 외가집에 합류를 시키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4시쯤에 응급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오는데 갑자기 차가 주차장의 오르막을 올라가지 못하고 시꺼먼 매연만을 뽑아대는 것입니다. 순간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의 상태로 보아서는 이 차를 타고 오늘 안동에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카센타 사장님께 차 상태를 여쭈어 보니 미션이 고장이 났다고 한다. 보험에 전화를 해서 전에 한 번 뵌적이 있던 집사님 카센타에 차를 맡겼다. 견인하는 기사분이 여기까지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무튼 아픈 인영이를 태우고 안동에서 양산까지 온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카센타 집사님은 엔진터보에 문제가 있어서 엔진을 내려야 하는데 오늘 중으로는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설명을 합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에 부딪혔습니다. 내 생애에 어찌해야 될 지 몰라서 당황스러웠고 난감한 몇 안되는 사건중에 하나였습니다. 누구에게 부탁해서 차를 좀 빌려야 하나? 너무나 난감했습니다. 내가 차를 빌리지 못해서 올라가지 못하면 아이들을 안동집에 몇일동안 둘 수가 없었고, 내가 올라가지 못하면 누구에게 부탁을 할 사람도 없었던 차라 더욱더 당황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인영이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권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이 권사님 가정은 요즘 교회를 출석을 하지 않고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기에 이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내 전화를 받은 안수집사님과 권사님은 자기 차를 쓰시라고 전화를 하시면서 자기가 차를 몰고 양산으로 갈테니 기다리라고 하셨다. 안수집사님과 권사님 내외분은 임시로 보험을 넣어서 차에 기름을 가득채워 와서는 하시는 말씀이 '왕복을 해도 충분하니 바로 가시면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지하철로 부산에 가면 된다고 하십니다. 나는 두 분을 집에 모셔다 드리고 부산에서 출발해 가겠다고 하니까.... 권사님께서 그러면 '목사님 집에서 저녁드시고 잠도 한 숨 주무시고 새벽에 출발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권사님댁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나니가 안수집사님께서 '그러지말고 권사님이 운전해 가셔서 아이들도 좀 챙기고 하세요?' 하셨습니다. 그러자 권사님께서 '그러면 되겠네!' 하시면서 본인이 북대구를 지나 동명휴게소까지 운전을 해 주셨다. 그 후에는 내가 집에까지 운전을 했다.
집에 새벽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을 했습니다. 주영이가 그때까지 아빠를 기다리면서 깨어 있었습니다. 우리집 맏딸답게 외가집에 갈 짐을 꼼꼼히 챙기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주일 아침에 아이들을 데우고 백자교회에 갔습니다. 백자교회는 옛날 새부산진교회처럼 예배시간 30분 전부터 목사님께서 준비찬송을 합니다.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회에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데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납니다.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시골교회라 예배당도 적은데 교인들에게 미안해서 눈물을 멈추고 싶은데..... 거의 오열에 가까운 눈물이 솟구칩니다. 찬영이는 내 눈물을 닦으면서 '아빠! 왜 울어...' 하면서 나를 흔들어 댑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흔들어 대는 찬영이를 꼭 껴안아 주는데 눈물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아이들을 지켜달라고.... 인영이가 건강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해 달라고.... 이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험한 일이라도 하면서 아빠의 도리를 다 하고 싶어니 저에게 힘을 달라고.....'
예배중에 찬송을 드려도 도저히 찬송을 부를수가 없습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찬송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까지 울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 성도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 주영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울음을 삼키고 있는 주영이를 함께 가신 권사님께서 달래어 줍니다.
권사님 안수집사님의 배려로 아이들을 외가집에 맡겨둘 수가 있었습니다. 두 분 안수집사님 권사님께서 내 고장난 차의 수리비도 계산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그분들의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호의를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나 해 줄 수 있는 호의가 아닙니다. 정말 아무나 베풀수 없는 호의였습니다. 평생 잊지 못하고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화요일 고장난 차 수리가 끝났습니다. 사과일을 끝마치기 위해서 안동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올라가는 날 옆 침대의 은지가 컨디션이 제일 좋아보였습니다. 올라가기전에 은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은지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눈물이 나와서 눈물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안동으로 올라와 사과밭의 일을 끝내고는 호영이를 외가집에 데려다 주고 나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가던 중에 치원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니 영종이 부부와 치원이가 문병을 와 있었습니다.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진영이를 학교에 계속 결석시킬 수가 없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안동으로 갔습니다. 안동에서 아이들과 함께 집사람없이 일주일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다 컷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몇 번의 입원생활을 통해서 아이들이 훈련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호영이 주영이 진영이가 세탁기 돌리고, 빨래 캐어서 정리해 넣고 요리하고, 방정리하고, 동생들 돌보고 ....기타등등 너무나 잘들 했습니다.
다행히 인영이는 두주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원하기 전날, 아줌마들의 힘이 또 발휘되었습니다. 퇴원하는 우리를 위해서 송별식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커피와 약간의 과자 나부랭이를 가지고 송별회를 했습니다. 나는 잠을 청하고 아줌마들은 송별회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수다회였습니다. 도저히 그 수다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퇴원하는 날도 은지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은지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서 몇마디의 글을 담아서 촌지를 손에 쥐어주고 왔습니다. 다음번 외래진료 오는 날 꼭 찾아뵐 것을 약속하고 안동으로 왔습니다. 그 뒤에 은지엄마로 부터 택배가 왔습니다. 인영이 내의와 함께 고맙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12월 1일 인영이 외래진료를 위해서 양산부산대학병원에 갔습니다. 은지엄마 줄 먹거리를 사 가지고 은지병실로 갔습니다. 인영이가 퇴원한 이후로 은지는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날도 그러했습니다. 몸에 열이 가라안지 않아서 벌거벗은 체로 몸의 열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호흡이 곤란해서 산소를 꼽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지 아빠가 은지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습니다. 은지의 손을 잡고 은지 부모님과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인영이가 퇴원한 이후로 계속 은지 생각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혼자 이런 생각도 자주 하곤 했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사도행전에 성전미문에 있는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로 일어나 걷게 된 것처럼..... 그런 기적이 일어났어면..... 금과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기도중에 외치면 그 은지가 난생 처음으로 두발을 딛고 일어서 엄마 아빠 품에 안기고 이 가정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정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하지만 내 기도는 은지 부모를 위로하고 은지 부모님에게 긍적적인 사고를 심어주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기쁨 가운데 사랑하는 은지를 위해서 엄마 아빠가 희생을 하고 인내하면 은지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평이한 기도만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눈물의 기도였다. 은지와 은지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함께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 은지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은지가 목사님 기도 받고 난 뒤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참 능력없는 목사의 기도다!!!
2011년 12월 4일 주일 새벽 2시에 '은지가 우리들 곁을 떠났어요!' 하는 문자가 휴대폰으로 왔습니다.
주일을 보내고 나는 월요일 화요일 양일간에 장로님 사과밭에 거름을 주는 일을 하러 갔습니다. 월요일에 장로님 집에서 잠을 자고 화요일까지 일을 하려고 했는데, 장로님 집 아래에 사시는 집사님 집에서 내일 호영이가 자기 밭에 거름 까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해서 장로님집에서 자지 못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호영이와 함께 백자 사과밭으로 갔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오더니 나중에는 눈으로 바꿔서 내렸습니다. 길안 사과밭에서 내리는 눈은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눈을 맞으며 또 눈을 감상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은지 엄마하고 아빠가 은지 사용하던 물건을 처음에는 택배로 보내려고 했는데, 마음도 추스리고 바람도 셀겸해서 우리집으로 온다고 일 마치는 대로 저녁을 먹지 말고 오라고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두분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마지막 혈육을 떠나보내고 그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서 제일 먼저 우리 가정을 찾아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이것도 저는 우연한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저녁을 먹고 9시가 넘어서 집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은지 부모님과 나눈 대화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은지엄마, 아빠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가 있기를 계속적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은지를 바라보면서...
은지엄마의 삶과 은지아빠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은지를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하고 병원에만 있게 하다가 데려갔는지!
은지네 가정에는 세상에서 한 번 당하기도 어려운 그 특별한 상황을 세번이나 당하게 하시는지!
세상에는 은지 보다도 더 불행한 삶을 살다가 간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은지와 은지가정이 경험한 것 이상의 처참하고 불행하고 슬픔상황을 맞이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답을 내리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단지, '하나님! 왜? 왜? 왜?' 라고 외칠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삶속에 일어나는 순간 순간의 불행함들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적용해서 이러하고 저러해서 그들에게 이런 불행이 왔다고 답을 내리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개인이 그러한 불행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정확하게 답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천지세상의 존재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함과 악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존재의 배후와 이유와 근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우연히 세상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존재하고 악이 판을 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내지는 타종교의 주장이나 어떤 신학자나 철학자 아니면 무신론자나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모든 자들의 설명이 있다는 것이 이들 존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어떤 부류의 설명이 정답일까?
나는 기독교인이자 목사이기에 이것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만이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부류의 설명은 몇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사하게 들리게 된다 할 지라도 바른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하나님만이 시작과 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만유의 만유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만 모든 설명의 답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역사에 설명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음을 인정합니다.
국가간의 역사와 민족간의 역사와 거대한 세계대전들, 좁게는 한 개인의 일상과 업적, 행위와 죽음......
요즘은 인터넷으로 세계의 사소한 뉴스들도 접하는데, 기가 막히는 일들.... 황당무개한 일들.... 도저히 이성으로 용납되지 않는 그야말로 세상에나!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황당한 사건들을 연일 접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정말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게 하시는가 하는 신정론적 사건들이 세상에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하기 시작하고 때로는 신앙인들 마저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고 회의적인 시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서 자신의 확고한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긴 여정으로 나아가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역사속에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 심지어 사소한 일들이나 사건까지....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회안에 있는 여러 집단과 개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때로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열광하게 하고, 분하게 하고, 시위하게 하고, 혀를 차는 있을 수 없는 불행과 참혹함들.....
왜! 왜! 왜! 라고 끊임없이 물어야만 하는 상황과 사건들......
나는 이러한 역사들 안에서 첫째로는 전능자되신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사랑과 지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의 기사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에 나타난 것 처럼 열어덟명이 죽었지만 지금 살아있는 그들보다 죄가 덜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비행기가 추락을 해서 130여명 전원이 죽었다고 합시다. 130여명이 왜 그 시간에 똑같은 유형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가를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런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는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경고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 중 한사람의 개인적 심판에 다른 사람이 희생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과 조종사의 비행기술에 제동을 건 하나님의 시위일 수도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과 사고에는 하나님의 공의 심판, 사랑, 지혜, 섭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이 모든 것에 대항하는 사탄의 모략과 궤계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역사에 일어난 모든 사건과 사고들을 하나님에게서만 찾아 볼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1차적 동인이시지만 거기에는 2차적동인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에 의도적인 악함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탄의 계획과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사건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망치게 한 그와 같은 사건이 지금도 우리가 보게되는 그 수 많은 사건과 사고속에 사탄의 의도된 계획과 궤계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욥의 사건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이 결국은 하늘 천상계에서 빚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3차 동인도 있습니다. 그 사건과 사고에 직접 연루되고 관계된 개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사적인 심판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이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영원위에서 볼 수 있는 영원관을 가질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그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불행해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심판받아서 죽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질병으로 여전히 고생하는 자들, 지금도 기아와 굶주림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큰 눈의 슬픈 검은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들이 신께 원망으로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지금 그 현재를 보고 결과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칸트와 같이 자신의 철학적 요구를 합당화 하기 위해서 신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영혼의 불멸설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시간이 지난 현재에 영광스러운 역사로 반전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현재의 그 불행과 슬픔과 참혹함이 미래를 똑같은 불행과 슬픔과 참혹함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악인의 마지막이 고통없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라고 한탄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현재는 보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미래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영원에서 결정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관을 가지고 현실을 보고 또한 어떤 평가도 내리지 말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단지 그 기다림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분의 인격을 믿으면서 기다리는 인내의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네번째로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끊임없는 사명의 재발견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만약 이땅에 불행이나 안타까움이나 참혹함이나 슬픔이 없이 마냥 행복한 것만 있다고 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면했기에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자가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을 그리고 만족감을 발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거룩함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일에서 사명을 발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치고,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슬픔으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죽은 이들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땅을 칠 때에 거기서 우리의 사명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들은 여러 사람에게 도전을 주고 여러 사람들을 시위하게 하는 원인자로서 죽음을 맞이 하기도 합니다. 그는 불행함과 억움함으로 고통스럽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사명안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로는 우리를 항상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역사의 많은 문제와 아픔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바램과는 거꾸로 그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과 제도와 과학과 조직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끝날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계속적으로 그 고통을 껴안고, 그 이해되지 않음을 껴안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하는 사람들과 이 시대에 계속적으로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현재를 다스려 가시고 통치하시는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시기를 바라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섯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모든 것을 알게 하시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와 뜻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시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항상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와 섭리에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데에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고 일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볼 때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 심지어 개인의 역사와 그리고 나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인간됨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고 믿고 따르게 합니다.
인간도 자기의 계획과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하물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는 그리고 모든 장소와 시대에 무소부재하시는 그 하나님이야 말로 더 자기의 계획과 뜻을 고집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세상에 선함과 행복으로만 가득 찼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과 질문들을 만났을 때에!
그것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인격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침묵(간과하심), 사랑, 공의, 심판, 자비, 긍휼, 연단하심, 오묘하신 섭리.....
이 중의 하나가 그 원인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단의 궤계를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사명이 혹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보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그 모든 답을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알지 못해도 낙심하지 말고 회의를 갖지 말고 하나님 앞에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어야 합니다.